*어떤 분이 스폰서 뒷내용도 보고싶다고 하셨는데 딱 저기까지만 생각하고 예전에 써둔 글이라서ㅠㅠ 대신에 반대로 여주가 스폰받는 글을 가져와 봤습니다...

똑같이 동혁 제노로 하려다가 둘다 실장님이나 대표님 소리듣기엔 저한테 이미지가 어려서..ㅎ 재현 태용으로 데려와 봤습니다. 

얼마되지 않았지만, 제 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즐감하세요:)







그럼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콘셉트 회의를 마치고 내가 긴장된 얼굴로 문을 닫고 나왔다. 콘셉트 회의라고 해봤자 신인인 나에게는 행동가짐을 어떻게해라 방향을 이렇게 잡자 하는 간단한 회의일 뿐이었다.






"여주야. 꼭 이렇게 해야 돼? 걸리면 나 죽어."

"걱정마. 걸려도 오빠얘기 안 할테니까."





나 잘되면 오빠 꼭 데리고 나갈테니까 징징대지 좀 마. 날 따라나온 매니저오빠가 우는 소리하는 걸 달래며 내가 휴대폰을 들었다. 이여줍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나 갔다올게 오빠. 나 찾으면 쉬러 집갔다고 해. 찾지 말라했다고. 회사건물에서 빠져 나온 내가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

"얘기는 저번에 다 했고. 오늘은 얼굴 보자고 부른 거야."





내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하는 정재현에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뭐. 그리곤 차를 마시는 척 무심한 눈길로 그의 방을 훑었다. 저번부터 느끼는거지만 우리 회사보다 훨씬 화려하고 세련됐다. 그만큼 돈이 많으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얼결에 정재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더 빵빵하게 도와줄 수 있겠지. 내 실질적인 스폰서였던 이태용은 신중하긴 한데 재는게 너무 많았다. 한창 일해야 할 때에 내가 왜 이렇게 쉬고 있냐고. 아무튼 그런 상황에 답답해 할 때쯤에 정재현 측에서 연락이 왔다. 스폰제의. 뜨지 못하는 내 상황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이 분야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기획사 CT의 실장인 정재현의 제의를 수락했다. 지원이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지, 뭐. 안그래도 이태용의 무조건적으로 친절하던 성격에 질려가던 차였다. 사람이 좋으면 뭐해. 능력이 있어야지.







그러나 나는 막상 스폰을 받고 난 후 후회했다. 처음엔 집이다 차다 과분한 것들을 잔뜩 퍼주기에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을 정재현 얼굴에다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재현의 친절한 얼굴은 그 날 잠깐이었다. 순전히 제 마음대로 나를 굴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여주씨!"

"비켜요."






나를 막는 직원들에게 씹어 내뱉듯이 말하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짜증나. 이것도 다 짜증난다. 정재현이 나한테 과하게 신경을 쓴다는 걸 아니까 눈치보는거다. 그런데 정재현은 왜...!






"내 스케줄 그쪽이 뺐어요?"






씩씩 거리며 묻자 의자에 앉은 채로 태연하게 서류를 넘긴 그가 말했다. 응. 너 그거 남자랑 화보찍는 거잖아. 그건 내가 싫어서. 이봐요! 그게 어떤 화본 줄 알고,..! 뜬다 싶은 여배우들은 다 거치고 간 섹시 콘셉트의 화보였다.  내가 언성을 높이자 탁 하고 서류를 덮은 정재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헐벗는 건 내 앞에서만 해. 그 말에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아까보다 다정해진 목소리로 나를 살살달래듯 입을 열었다. 





"영화, 저번에 하고 싶다며. 가서 오디션만 보면 돼."

"....영화요?"






그래.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마치 내겐 달콤한 사탕처럼 느껴졌다. 미치도록 하고 싶어 하던 영화였다. 내가 그렇게 아양을 떨고 짜증을 내고 울고불고 난리쳐도 이태용은 아직은 이르다는 이유로 꽂아주지 않았던. 나는 무엇이 더 득인지 아는 여자였다.










*

그의 말대로 오디션만 보고 오디션장에서 나왔다. 여주씨, 앞으로 잘해봅시다. 내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떠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새까만 벤의 문을 열어주었다. 타려던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멈추어섰다. 매니저 오빠는요. 원래 일하던 사람아니면 불편하다고 했잖아요.






"적응되고 난 뒤에 차차 불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적응? 하.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내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려는 게 아니라 지 사람들로 채워서 감시하려는 거겠지. 짜증난다는 얼굴로 올라타 묻을 쾅 닫은 내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주야-' 하는 순진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빨리 데려와야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바닥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이태용이나 정재현처럼 나랑 어떻게 해보려고 잘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내 걱정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데려올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찰나, 의자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징징 울렸다.






[이태용]






이태용한테 소식이라도 물어볼까.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전화를 들었다.






-여주야....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음색이 그가 취했다는 걸 증명했다. 흘깃,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살핀 내가 제정신일 때 다시 연락해요. 하고 끊으려는데 물기어린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더 잘해줄 걸, 하고 후회된다.






그의 말에 정재현과 달리 끝도 없이 나를 배려해주던 이태용이 생각났다. 스폰이면서 단 한번도 내 몸에 손댄 적 없던 사람이었다. 더 들으면 흔들릴 것 같았다. 하실 얘기 없으시면 끊을,






-웃기지. 그렇게 퍼줬는데 내가 뭘 못 해줬다고.






전화기너머로 씁쓸하게 웃어보이는 그에 이마를 짚은 내가 한숨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세요?










*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실장님께 연락하시면 됩니다."






여느때와 같은 인삿말을 한 남자가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사라졌다. 웃겨. 회사통해서 연락하라는 것도 아니고. 정재현은 우스울 정도로 내게 자주 연락했다. 스폰과 연예인사이가 아니라 애인사이라도 되는 마냥. 내 사생활 하나하나를 내 입을 통해 보고 받고 싶어했다. 그래봤자. 나한텐 갑이고 눈치봐야 할 상대일 뿐이었다. 베란다로 멀어지는 남자를 지켜보던 내가 서둘러 검은 모자를 눌러 쓰고 집을 나섰다.






"젠장, 이걸 이렇게 운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휴가갈 때나 사람들 몰래 타고 나가려던 차였다. 꺼낸 적이 없어서 다행이지. 정재현이 사준 고급 세단이란 것만 빼면 몰래 나가기에 아주 적합한 차였다. 내가 몸을 웅크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짜...사람 찝찝하게 목소린 그래서. 한숨을 쉬며 이태용이 문자로 찍어보내준 청담동 한 bar로 향했다.










확실히 대표는 대표야. 이런 데서 술이나 먹고. 몰래 나오느라 허름한 내 차림을 수상하다는 듯이 훑던 남자가 이태용이라는 이름을 석자를 대자마자 옆으로 비켜주었다. 나는 언제 돈벌어서 이런 데 와보나. 허탈한 한숨과 함께 그를 찾으려 두리번 거리는데 바에서 혼자 엎어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태용... 평소 단정한 모습과 다르게 흐트러진 작태에 내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대표님."


"..."






내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그가 나를 잠시 응시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씨. 진짜. 대표님! 안 되겠다 싶어 직원을 불렀다. 차에 좀 실어주세요. 이태용을 부축해 차에다 실은 직원이 인사를 하곤 사라지고. 운전석에 올라탄 내가 짜증난단 표정으로 이태용을 바라보았다. 술먹고 주정 부릴 땐 언제고 세상 모른단 얼굴로 편안히 자고 있었다. 집을 알아서 다행이지. 저녁먹자는 핑계로 가끔씩 집으로 부르던 이태용이었다. 내가 네비에 그의 주소를 더듬더듬 찍고는 엑셀을 밟았다.










"드럽게, 무겁네!"






내가 자꾸만 흘러 내리는 그를 다잡으며 낑낑 거렸다. 이태용이 사람이 없는 동네에 살아서 다행이지. 사람 바글바글 한 데서 살았으면 바로 기사날 감이었다. 회사대표가 잔뜩 절어가지고, 여자연예인한테 업혀가면 무슨 오해를 하겠어? 하긴. 이태용과 내 관계를 보면 오해가 아닌게 맞긴 한데. 잡생각과 함께 이태용의 집 문앞에 도달한 내가 그를 깨웠다. 대표님! 대표님! 완전히 골아떨어진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미쳐. 이태용 생일이 언제더라? 이태용은 꼬박꼬박 내 생일마다 난리부르스를 치며 이것저것 챙겨주질 못해 안달이었던 것 같은데...생각해보니 나는 딱히 그의 생일을 챙겼던 적이 없었다. 아 진짜 사람 죄책감들게. 여기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한참을 틀렸다는 기계소리와 함께 도어락을 누르던 내가 포기하고는 다시 그를 들춰업었다.









"허억, 헉-"






거친 숨과 함께 내가 이태용을 침대 위로 던졌다. 죽겠다. 내가 이렇게 생지랄을 하며 개고생을 하는데도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이태용을 바라보았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괜히 얄미워져 코를 살짝 꼬집자 이태용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내쪽으로 돌아누웠다. 이렇게 보면 이태용이나 정재현이나 연예인했어도 될 외몬데. 솔직히 나를 푸쉬하는 것보다 자기들이 데뷔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 위에 걸터 앉은 나는 또 다른 문제와 직면했다. 우리 집엔 침대가 하나였다. 정재현이 두개 사준다고 할 때 알았다 할 걸. 왜 두개에요? 하는 물음에 능글거리며 나 피곤할 때마다 자고 가게 라고 하길래 단칼에 거절했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게 될 줄이야. 침대에서 내가 내려가기엔 몸이 너무 고단했다. 그렇다고 이태용을 내팽겨치기엔 양심이 찔렸다. 이 인간한테 받아 먹은 게 한 두 개여야지. 아, 몰라. 알게 뭐야. 이태용의 감긴 눈을 바라보던 내가 그대로 그의 옆으로 엎어졌다. 내가 먼저 일어나면 되겠지, 뭐.









"뭐 먹지..."






다음날 다행히 먼저 일어난 내가 머리를 묶으며 부엌으로 나왔다. 해장해야 될 텐데. 콩나물이 있던가? 앞치마를 둘러 매며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꺼내는데 띠띠띠- 하고 도어락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올 사람없을 텐데. 혹시 매니저 오빠인가? 의아한 얼굴로 재료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다가서는데,






"아침하는 중?"






정재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떡하지?






"아, 실장님. 여긴 무슨 일로,"


"내가 네 얼굴보는데 굳이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해?"






일단 나가서 아침이라도 먹자해야 하나. 급하게 앞치마를 푸르며 당황한 얼굴로 문쪽을 쳐다보는데,






"아침하게? 내가 해도 되는데."






문이 열리며 이태용이 나왔다. 나를 보며 웃던 정재현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화를 참는 듯 소매를 풀은 그가 입을 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제야 정재현을 발견한 건지 무표정한 얼굴로 쓱 하고 쳐다본 이태용이 아랑곳않고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어제 힘들었을 텐데, 좀 더 자지. 오해소지가 다분한 그의 말에 정재현의 눈매가 더 싸늘하게 굳어졌다. 





"둘이 잤어?"





야차같은 얼굴을 한 정재현을 앞에 두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다정한 얼굴을 한 이태용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치마 줘. 이태용의 말에 열이 받은 건지 턱을 움찔거린 정재현이 이태용의 팔을 낚아챘다.






"이봐,"

"우리 여주사탕발림으로 꼬셔간 게 당신이였습니까?"

"뭐?"






아까의 다정한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난생 처음보는 싸늘한 얼굴을 한 이태용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참. 그런 이태용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정재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여주가 당신한테 받은거 다 배상해줄테니까 좀 나가지."






그 말에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정재현이 코웃음쳤다.






"배상? 나한테 배상해 줄 수 있는 건 이여주 하나야. 아직 자보지도 못했는데. 이게 웬 개소리야."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입술만 깨물었다. 당신같이 배려없이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 여주 데리고 있을 자격없어. 차분한 이태용의 말에 정재현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자격? 이여주가 제 발로 나한테 온 거야. 그의 말에 차분했던 이태용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배려가 많아서 이여주가 나한테 스폰받게 뒀나보지? 이태용을 조롱하듯 마지막 말을 던진 정재현이 내게 눈길 한 번 주지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실장님-!"






이번 영화가 엎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뛰어나갔다. 아직 크랭크인도 못했는데! 정재현의 푸쉬로 들어간 자리다. 정재현이 갈아 치우려면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었다. 우리 집 한가운데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이태용을 흘끗 바라보고는 집을 나왔다. 화가난 듯 굳어진 정재현의 뒷모습에 입술을 잘근 깨문 내가 허겁지겁 그에게 뛰어가 팔을 붙잡았다. 실장님! 오해에요. 대표님이랑은...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제 그냥 술에 취하셨는데 데리고 올 사람이 저 밖에 없어서,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아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정면만 바로보는 그에 애가 탔다. 아무 말이 없길래 초조해하며 그의 옆좌석으로 올라탔다. 옆자리에서 전전긍긍하는 내가 안 보이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핸들만 움직이는 정재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30분을 갔을까, 나중가선 아무 생각이 없어진 상태로 그를 따라 엘레베이터에 올라타고, 그를 따라 실장실로 발을 들였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재현의 얄궂은 입술이 열렸다. 당장 이태용 회사 나와. 권위적인 그의 말에 내 입에서 부정의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안돼요. 




"뭐?"





안된다는 대답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인지 정재현의 얼굴이 빠르게 구겨졌다. 정재현말에 고분고분하기 싫어서 반사적으로 내뱉긴 했지만 내겐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저 계약기간 10년이에요. 거기다 곧이곧대로 싸인했어? 어이없다는 그의 물음에 내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번 수익 대표님이 한번도 떼 간 적 없어요. 대우도 좋고 복지도, 






"이여주. 사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그 회사에서 나와. 노예계약으로든 뭐든 소송걸어서 빼줄테니까."






더 이상 말하기 피곤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단정짓는 그에 내가 빠르게 대답했다.






"싫어요."

"뭐?"

"실장님이 저 언제 팽개칠지 누가 알아요."






그래. 10년 계약은 둘째치고 내 실질적인 이유는 이거였다. 제 보험줄이에요. 허. 코웃음치는 정재현에 내가 달달달 떨리는 다리와 다르게 고개를 더욱 빳빳히 들었다. 제나도 실장님 스폰 받다가 끊겨서 저러고 있는 거잖아요. 반짝 스타였다가 지금은 간신히 티비에 얼굴을 들이미는 제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재현이 내 말에 우습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이여주. 나는 제나가 옷 다 벗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박한 적 없어. 근데 넌 아니야. 너도 그거 아니까, 네 몸값 올리고 있는 거 아니였어?"






그의 말에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정재현이 달아오르다 못해 내 발끝 하나까지 씹어먹고싶단 눈으로 항상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답지 않게 내가 허락할 때까지 참고 있다는 것도.






"잔말 말고 일주일 안으로 정리해."






더 이상 듣기싫다는 듯이 그가 내게 등을 돌렸다. 단호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 내가 실장실의 문을 닫았다. 














내가 쭈뼛거리며 오랜만에 들어가보는 대표실에 발을 들였다. 거기엔 이태용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앉아있었다.






"대표님..."






내가 괜한 죄책감에 미적거리며 들어서자 이태용이 다정하게 웃어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차 마실래? 앞뒤 설명없이 괜찮다는 그의 말이 묘하게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맞은 편에 앉자 차를 내쪽으로 밀어주었다. 내가 평소에 잘 마시던 차였다. 기분이 묘했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태용이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많이 놀랐겠다."






정재현과 상반되는 그의 말에 울컥했다. 솔직히 내가 정재현테 그렇게까지 숙여야 되나? 나는 뜨기 위해서 정재현에게 간 거지 그의 입맛대로 굴려지려고 간 게 아니였다. 대답 없이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손가락으로 가만히 찻잔을 쓸던 이태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나를 다독이듯이.






"나 너랑 10년 계약한 거 너 뼈빠지게 일하라고 그런 거 아니야. 네가 1년 안에 성공하든 5년 안에 성공하든 기다리겠다는 의미였어. 설사 10년 안에 성공 못 하더라도 너 안정적으로 붙잡아주겠다는 의미였고. ...여주야, 너는 내 옆에서 너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돼."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올려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해야 될지 모르겠다. 솔직히 한낱 신인배우에 불과한 나한테 이렇게 까지 마음쓰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등을 뒤로 기대며 머리칼을 쓸어올린 그가 입을 열었다. 





"더 솔직하게 말 해 볼까? 너 내 옆에 두려고 10년 계약한거야. 더 오래 계약할 수 있었으면 난 그렇게 했어."






영화. 그 단어와 함께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 이태용의 표정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것도 처음부터 그렇게 큰 자리 맡는 것보다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너한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근데...생각이 바뀌었어. 여주 네가 하고 싶다면 정재현 대신 투자해줄 수도 있어. 온화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를 보며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계약기간도 아직 많이 남았고, 게다가 그렇게 신중하게 굴던 이태용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구는데...굳이, 정재현한테 투자받을 필요가 있을까? 문득 든 생각에 고민하는데 이태용 입에서 결정적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항상 네 결정을 지지해 여주야."






그의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조여왔다. 정재현이 지금 이 상황에서 나한테, 필요한 패일까...? 대답은 '아니' 였다. 정재현이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것도 한몫했다. 그래 영화도 할 수 있고. 매니저 오빠도 여기 있는데






"...저 대표님 옆에 남을래요."

"그래, 여주야." 






이태용이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로 고맙다는 듯이 두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이태용이 그렇게 행동력이 빠른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내가 정재현에게 넘어갔을 때 왜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투자자 이름에서 정재현이 내려가고 이태용이 올라갔다. 나 역시 정재현에게






-우리 그만봐요, 실장님.






하는 당돌한 문자를 남긴 채 번호를 바꿨다. 최대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정재현이 내게 쥐어주었던 화려한 집과 차, 수많은 물건들은 이태용이 더 화려한 것들로 대체해주었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주야, 오늘 촬영 열심히 해!"






매니저 오빠였다. 오빠가 순박한 얼굴로 날 응원했다. 내가 남아서 케어해줘야 되는데...미안해하는 얼굴에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오빠 대신 대표님 계시니까. 내가 없는 동안 오빠는 다른 배우를 맡고 있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이태용이 다시 내 쪽으로 붙여준댔으니까. 여전히 미안해하는 오빠에게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준 뒤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서 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이태용이 보였다.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감독님과 이태용 앞에 도착했다.






"여주씨 왔어?"

"그동안 잘지내셨어요?"

"그럼, 덕분에 잘지냈지. 다 왔으니 촬영들어가 보자고!"





그 말에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메이크업을 받으며 바깥에 있는 이태용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해. 입모양으로 말하는 이태용에 살풋 웃어보였다. 


촬영현장은 정신이 없었다. 내 욕심으로 인한 자리라는 걸 알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해보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열정이 가득한 이 현장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고된 촬영이 끝나고 핫팩을 건네주는 스텝들에게 고맙다고 웃어보이며 이태용을 찾는데, 저 멀리 전화를 받으며 일어서는 이태용이 보였다. 표정이 안 좋길래 무슨 일 있나? 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어디갔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그에 내가 두리번거렸다. 저기로 갔나? 텅빈 길에서 코너를 돌려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이런 구닥다리 장난을 쳐. 어이가 없어 미소를 머금은 채 뒤를 돌자 내 손목을 붙든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실장님..."


"여주야, 이 자리 구해다준 건 난데 왜 득은 딴 놈이 보고 있지?"






얼어붙은 내 표정에 그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듯 호선을 그렸다. 입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나를 쉽게 놔주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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