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사하고 좋아하는 형님 리퀘....... "급성 난치병에 걸린 본즈와 삽질하는 커크" 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나왔나 모를 지경입니다. 본즈가 안 나오지만 어쨌거나 본즈X커크X프라임스팍 구도로 갑니다. 씬은 없고 짧은 대화가 있어요. 분량 짧습니다.


제임스는 끓는 물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등 뒤에 앉아 있는 남자는 아무 말도 없다. 들어와서 인사를 하기 무섭게, 제임스는 차부터 끓이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선뜻 어린 친구의 말을 들어 주었다. 끝이 뭉툭한 손이 희고 우아한 티포트의 손잡이에 닿았다. 얇은 손수건을 대고 쥐어서 뜨끈한 열이 천을 통해 스물스물 넘어왔다. 제임스는 작은 찻잔에 차를 가득 채웠다. 연한 갈색을 머금은, 주홍색에 가까운 수색이 얼마 전에 마신 꼬냑 같았다. 티포트와 잔을 트레이에 옮겨 담자 푸른색으로 그려진 장미꽃들이 모여 작은 정원처럼 보였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좋아하는 건, 역시 아주 친한 친구사이여서 취향인걸까. 제임스는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앉았다. 남자는 미래의 자신과 아주 친한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과거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며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거기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젊은 남자는 철천지원수가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정말 절친한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절친한 친구는 제임스보다 똑똑했다. 아는 게 많았고 쉽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 친구가 말했으니 시간 여행이나 평행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으로서는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게다가 제임스는 이미 늙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딱 한 번, 젊은 친구, 이 시대의 그와 싸우게 된 날이었다. 제임스는 순진하게도 둘이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된다는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나중에 둘이 따로 연락하고, 인사를 나누게 된 걸 안 다음에는 조금 투덜거렸다. 젊은 친구는 그런 장난을 칠 융통성이 딱히 없었다. 늙은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오랜 친구, 즉 제임스와 지내면서 배운 부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늙은 친구가 더 좋아졌다. 어쩌면 미래에서 온 만큼 제임스의 호감을 사는 법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처음 방문한 공간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도 친구이기에 통하는 무언가일까, 제임스는 생각했다.

“스팍,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나요?” 제임스가 찻잔을 건네며 눈을 깜박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자네의 방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짐.”

미래의 제임스에게 오래된 친구이자, 현재의 제임스에게는 새로운 친구인 스팍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는 오랜 시간 쌓인 지혜로 제임스에게 어떤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의 제임스와는 다른 제임스였지만, 일단 제임스이기에 갖는 공통점이 있었다. 게다가 분명 어느 시점까지는 그들의 역사가 상당히 흡사했다. 그런 과거를 기반으로 추측하기란 스팍에게 아주 쉬운 문제였다. 이 시간대에 그들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나? 스팍은 그것부터 고민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다. 어쩌면 그가 제임스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많은 미래가 틀어졌는지도 몰랐다. 스팍은 찻잔을 쥐고 깊이 향을 들이마셨다.

“부탁할 게 있어요. 그쪽에서는 이런 사건이 없던 것 같지만…….”

“부탁? 말해보게, 내 어린 친구.” 스팍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유달리 유순한 제임스의 태도는 그다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의료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죠?”

“자네의 절친한 닥터와 자네의 건강에 대해 종종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기본 소양은 쌓았지.”

“그럼 난치병이나 희귀병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제임스는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스팍은 이제 전체적인 그림이 보였다. 그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내가 가진 자료가 있겠지.”

그리고 대답하지 않으려던 머리와는 달리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아주 예전부터 제임스가 그에게 그래왔듯이, 그는 또 한번 비논리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맑고 청명한 토파즈를 닮은 눈동자가 오늘은 유독 어두웠기 때문이다. 스팍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임스는 자신의 잔을 쥔 채로 모든 신경을 스팍에게 쏟고 있었다. 눈빛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까지 전부. 스팍은 제임스의 집중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눈을 깜박였다.

“짐, 나는 더 이상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네.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몰라.”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그래,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게 생겼겠지.”

“맞아요, 스팍.”

“하지만, 짐. 그건…….”

“저는 그가 필요해요.”

제임스의 손이 스팍의 손등을 덮었다. 손가락이 스치기 직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의 말이 오가는 동안 스팍은 모든 걸 깨달았다. 제임스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하나 더 있다. 레너드 맥코이라는 의사인데, 젊은 스팍과 함께 셋이 안정적인 삼각형을 이루었다. 병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게 갔겠지. 제임스의 문제라면 맥코이가 부탁하러 왔겠지. 심지어 맥코이는 의학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놓친 적 없는 남자였다. 특기 분야도 심지어 병리학이었다. 허나 제임스가 멀쩡하게 여기에 왔으니 본인의 병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답은 뻔했다. 스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팍.”

“그게 자네의 길이라면 어쩔 수 없어.”

어느새 뿌리치려던 제임스의 손이 더욱 강하게 그의 손가락 틈새를 파고 얽혀들었다. 스팍은 자신의 심장을 둘러싼 제임스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스팍의 종족은 손가락을 통해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고로 그들의 신체 접촉 중에서 손에 대한 접촉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졌다. 제임스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 스팍은 주먹을 쥐었다. 아니, 쥐려고 했다. 이번에도 제임스의 손이 빠르게 손끝을 맞댔다. 

“스팍, 이미 당신이 나타난 날부터 모든 게 바뀐 거예요.”

“짐…….”

감정이 차츰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임스의 절박함이 스팍의 피부에 스며 급속도로 퍼졌다. 형언하기 힘든 슬픔이 피가 되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까마득한 우주에 빠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시야가 아주 느리고 먹먹하게 명멸했다. 새하얗고 새까맣게 들어차기를 반복하는 세상은 혼란과 슬픔이 넘쳤다. 단 하나 욕심낼 수 있는 게 있다면, 제임스에게 허락된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레너드 맥코이였다. 가족도 없는 어린 애에게 집이 되어 주고 사랑을 준 제임스의 우주. 스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이 화려한 절망 속의 풍경은 투명하게 일그러졌다. 눈알이 녹아내리는 세계. 눈알에 대놓고 물이 쏟아지는, 눈물로 넘치는 세계가 제임스의 것이었다.

“날 봐요. 스팍, 날 위해 논리를 세워 줘요.”

“짐, 나는…….” 제발. 제임스의 간절한 마음이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스팍은 감정의 홍수를 견디는 것보다 제임스의 고통이라는 사실이 가장 슬펐다. 제임스는 그에게 영혼을 주고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게 해 준 친구였다. 그래서 언젠가 제임스에게만 솔직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겼을 때, 스팍은 그 문제에서 눈을 돌렸다. 모든 걸 덮어두었다. 그렇게 여태까지 잊고 있었다. 언제나 제임스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애써 묻어두었던 마음의 형태가 불쑥 튀어나와 심장을 한 번 더 세차게 갈랐다. 알았네. 스팍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우주는 제임스가 태양이자 모성이었다. 덮어둔 채로 살아도, 제임스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며 논리였다.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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