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말하진 않았지만 얘기하지 않은 부분을 채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리르먼은 의기소침한 필리엔을 물끄러미 보았다. 상황에 조금 엇나간 감상이지만, 이런 모습은 리르먼으로서도 별로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은 기대가 선행할 때에나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이다. 리르먼이 보아온 필리엔은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동안 실망이나 상실감은 필리엔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걸 성장이라고 해야 할지.

리르먼이 제 옆자리를 톡톡 쳤다.

"필리엔, 이리 와봐."

리르먼의 말씨는 충분히 부드러웠으므로 필리엔은 아무런 의심 없이 형이 부르는 대로 쪼르르 리르먼의 옆으로 갔다. 형이 이렇게 자기 침대에 앉으라든가 했던 게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리르먼은 부름을 받아 온 필리엔이 옆에 앉자마자 바로 손을 뻗어 필리엔의 볼을 꼬집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필리엔이 당황했다.

"얘이에?"

"왜 이러긴. 형 노릇 좀 하려고 그러지."

동생이 허튼 길로 빠질 때 어떻게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게 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리르먼은 난처한 팔자 눈썹을 한 필리엔의 볼을 잡아당겨서 웃긴 얼굴을 잠시 감상하다가 놓아주었다.

"이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하는 게 낫겠다."

필리엔이 쭈욱 늘어났던 뺨이 얼얼한지 손으로 감싸 쥐며 여전히 혼란에 휩싸인 멍청한 얼굴로 리르먼을 보았다.

"넌 아마 어쭙잖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결국 가문 안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어. 내가 그레이스 씨에게 한 말 너도 조금은 들었겠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 더 흐려졌다. 역시 들었구나. 필리엔은 자면서도 검을 다룰 수 있었으니 근처에서 두 사람이 속닥대는 걸 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필리엔은 듣지 못한 척하고 리르먼도 필리엔이 모르는 것처럼 대하는 일종의 연기를 했다. 침묵은 얼마나 많은 것을 지켜주던가. 그러나 리르먼은 필리엔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무시한 채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내 말 들어. 그냥 그레이스 씨를 따라가. 그리고 그레이스 씨가 하자는 대로 해. 필리엔 그레이스가 된다든가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게 훨씬 나은 길이다. 너도 겪었으니 알잖아. 어떻게 금칠을 해도 전쟁은 결국 전쟁이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다음번에 관에 들어갈 게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형, 나는……."

"네가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다는 소리야."

리르먼이 짙고 푸른 눈으로 필리엔을 보았다. 필리엔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당혹감과 충격, 슬픔 그리고 옅은 배신감 혹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리르먼은 그저 담담히 바라보았다. 필리엔은 길은 지나다 갑자기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약간의 혼란 속에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는 필리엔 이카트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

리르먼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필리엔은 그 낮아진 높이만큼 자신도 끌려 내려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벗어날 수 없이 아래로 아래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추락하는 감정에는 무심하게도 리르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나 대신 전쟁터에 간 네 부고를 듣는 거야 말로 나에게 악몽이 될 거라는 게 중요하지."

필리엔이 급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을 거야. 형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칼로 베어도 베이지 않고 화살도 박히지 않아. 정말이야. 형이 내 부고를 전해 듣는다는가 하는 일은 절대로……."

"세상에 절대로 같은 건 없어, 필리엔!"

필리엔은 입을 꾹 다물었고 리르먼도 더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잠시 말하지 않았다. 소리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만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자신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리르먼은 느리게 숨을 쉬며 짧은 시간에 격앙된 감정을 깊게 눌렀다. 하지만 감정의 요동은 중간중간 목소리의 떨림으로 드러났다.

"전쟁터에서 절대로 안전하거나 절대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심지어 이 안전한 이안드 안에서도 횡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 아무리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정말로 그렇게 믿어선 안 돼. 절대로 패하지 않거나 절대로 죽지 않는 전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리르먼이 경험한 전쟁은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웃으며 대화한 사람이 시신이 되는 걸 보거나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 적의 기발하고 잔인한 전략, 허를 찌르는 전술, 예상을 웃도는 전력, 기만과 머리싸움에 이어지는 피와 살이 모래를 적시는 전투……. 그 어디에도 무엇도 절대적인 건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고 리르먼의 다리도 멀쩡했어야 했다. 만약 세상에 계획이 있거나 기적이 존재한다면,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없었어야지!

"세상에 '절대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 네가 대체 왜 서부로 가야 한다는 거야? 이번만 마무리하고 나면 전부 나에게 맡기고 바로 동부로 가. 그게 너에게 나은 길이니까."

리르먼이 잘라 말했다. 일부러 더 차갑게 보이도록 단호하게 말했지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리르먼은 할 수 없었지만 그레이스 씨라면 필리엔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이카트 가문의 일에서 필리엔을 도피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황실에 빚진 건 이카트지 필리엔 개인이 아니다. 책무를 지는 건 한 사람으로 족했다.

"하지만 형, 나는……."

필리엔은 간절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목소리를 잃는 저주에 걸린 동화 속 인물처럼 입술을 작게 벙긋거렸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하지만 많은 걸 삼킨 뒤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리르먼에 손을 뻗자 필리엔이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엔 볼을 꼬집으려는 게 아니었다. 리르먼은 토닥토닥 필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필리엔 이카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네가 내 동생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야."

필리엔이 흠칫 놀란 얼굴이 되어 리르먼을 보았다. 리르먼에게 리르먼 나름의 두려움이 있듯이 필리엔에겐 저 나름의 공포가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 난 이상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게 없을 수가 있나. 사람이든 아니면 그저 미물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게 생기면 그걸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한데. 

"동생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형이 모르겠니."

리르먼은 제 동생이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옛날에야 리르먼도 어려 헤아리지 못했고 지금도 온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낯선 곳에 홀로 뚝 떨어진 어린이가 정말로 세상 달관한 듯 무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리르먼이 보아온 필리엔은 외로움에 익숙해진 어린애에 불과했다. 

괜스레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필리엔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한 번 안아봐도 돼?"

리르먼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필리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넌 언제 어른이 될 셈이냐?"

필리엔은 대답 없이 형의 어깨에 기대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났다. 그때처럼 지금도 강하고 든든한 형의 어깨가 느껴졌다. 리르먼은 필리엔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만약 리르먼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나 살아가지 못했을 거라는 걸 필리엔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껍데기만 닮은 무언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드는 생각은, 자신에겐 한참 커 보였던 그때의 리르먼은 지금 필리엔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다는 점이다. 갑자기 밖에서 들어온 남의 아이, 불편해진 집안 분위기, 불온한 술렁임이 당시의 리르먼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미안해, 형."

"뭐가 미안한지는 알고 미안하다는 거냐?"

필리엔은 말하지 않았다. 리르먼이 필리엔의 등을 조금 강하게 두드렸다. 팡팡 소리가 났다.

"그래. 다 울었으면 그만 일어나주겠니. 아무리 귀여운 동생이어도 다 큰 남자가 내 침대에 있는 건 불쾌하거든."

"형이 앉으라고 해놓고……. 그리고 안 울었어."

당연하게도 리르먼은 필리엔의 말을 무시하고 미소 띤 얼굴로 가차 없이 자기 방에서 동생을 쫓아내었다. 




필리엔 그레이스라니. 

필리엔은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쫓아내보려 했으나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떠나주지 않았다. 릴리 이카트 같은 것만 쌍으로 떠올라서 더욱 번뇌하게 될 뿐이다. 이대로 릴리와 함께 동부로 가서 죽을 때까지 함께 행복하게 지낸다든가 하는 현실성 없는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필리엔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마지막은 홀로 맞이하리란 예감을 품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시절부터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검을 배우기 전부터, 아예 이카트 저택에 오기 전부터 쭉 그런 결말이 오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 하나 없이 기억의 시작부터 혼자였기 때문이리라 어렴풋이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필리엔은 노년을 맞이하여 주위를 다 정리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평화롭게 잠들듯이 죽는 삶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쇠붙이와 살육의 현장에서 그 무엇도 준비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인생일 터였다.

 제법 목가적인 분위기가 있는 동부의 목조 저택에서 비료의 배합이나 파종 시기를 논하고 매일 릴리와 한 침대에서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서로에 의지해 함께 나이 들며 햇살처럼 깨끗한 아이들을 키운다면……. 그런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필리엔은 엄청나게 앞서나간 상상을 자각하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형이 얘기할 때는 정작 별생각도 없이 넘겼는데 왜 지금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그건 아마도 필리엔이 지금 릴리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시선을 듬뿍 받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그래, 맞다. 침대에 둘이 누워있다. 형이 본다면 거보라고 하겠지만, 리르먼이 한 농담과는 달리 두 사람은 옷도 전부 입은 채 어디까지나 그냥 누워만 있었다. 심지어 손도 붙잡지 않은 채였다.

릴리가 약속대로 저녁에 필리엔의 방을 찾아왔고 잠깐이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편하게 쉬게 된 것 뿐이다. 다른 의도 없이 정말로 그게 끝이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기류가 심상치 않은 것 정도는 봐주어야 했다. 술도 조금 마신 상태지만, 릴리가 권해서 어쩔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이 된 것에 조금 복잡한 심정을 느끼며 필리엔은 자신과 나란히 침대에 누운 릴리를 바라보았다. 동부인다운 건강한 빛깔의 피부와 녹아내리는 촛농 위로 피워올린 불빛으로 반은 금빛으로 나머지 반쯤은 달빛에 무채색으로 물든 금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하지만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밤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이는 맑은 하늘빛 눈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옅어지는 게 당연하건만 필리엔은 떨어진 동안 오히려 마음이 깊어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필리엔은 사막의 밤하늘에서 릴리를 보았다. 하늘이 어두우면 별이 밝아지는 법이라 릴리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게 필리엔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눈앞에 있는 본인은 아마 모를 테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괜히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모래 위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풀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누군가의 웃음을 떠올릴 때면 그래도 조금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도 같았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바람일지라도 릴리가 자신을 기억하리라는 게 이상하게 위안이 되어서 필리엔은 그때서야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다. 

필리엔은 한참을 닦아낸 뒤에도 마른 핏가루가 떨어지는 채로 병영을 밝히는 횃불과 매캐한 냄새로도 가리지 않는 무섭도록 청명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릴리 그레이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쐐기처럼 깊게 박혀 아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꿈처럼 아득한 순간들 속에서도 영혼에 새겨진 상흔처럼 한 사람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안드로 귀환한 날 릴리의 모습을 보고 처음엔 헛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람이 너무 커서 망상이 심해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릴리가 그곳에 있었다니, 믿어지는가? 릴리가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왔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았다.

필리엔은 릴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의 릴리는 마치 밤에 뜬 태양 같았다. 필리엔은 릴리의 시선이 자신을 이대로 녹여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흠뻑 젖어서 정말로 녹아 사라지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봐요?"

릴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필리엔에게 물었다. 릴리는 지금 필리엔의 방에서 필리엔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쉽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지만 릴리가 생각하기엔 어디까지나 '아직은'이다.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나게 되어있는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닿은 어깨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달콤한 숨결이 금방이라도 뒤섞일 것만 같았다. 은은한 불빛 아래 릴리를 바라보는 필리엔의 얼굴은 유난히 따스해 보였다.

"당신이 웃을 때……"

필리엔이 손을 들어 릴리의 입가를 만졌다. 굳은살로 단단한 피부가 릴리의 볼을 콕 찔렀다.

"깊게 웃으면 보조개가 생겨요. 봐요, 지금도 이렇게 생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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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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