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의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안돼요?”

 

“왜 경위님이어야 합니까.”

 

여진이 겨우 뱉은 말이 산산이 부서졌다. ‘왜’냐는 그 말이 참 아팠다. 여진은 차오르는 기분을 꾹 눌러내며 시목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엉망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진은 허망한 기분에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가질 수가 없는 사람 같았다는 거. 처음부터 알았잖아. 한여진. 정신 차려.

 

 

늘 가던 포장마차에 앉으니 아주머니가 우동? 하고 물어왔다. 여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 한 병이 손쉽게 비워졌다. 두 병, 세 병...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받은 사람도 있었던 것 같고. 여진은 흐릿해진 시야로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댔다.

 

한참 뒤에 나타난 사람은 술에 취한 여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사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 봐요, 경위님. 예?”

 

 

건이었다. 반갑지만 바라지 않았던 얼굴.

 

 

“아...장형사?”

 

“네. 경위님 이렇게 만든 놈은 어디가고 경위님만 혼자 술 마시고 있답니까.”

 

“그 사람은....”

 

 

 

여진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테이블 위로 다시 쓰러졌다. 건은 답답해진 속을 탕탕 쳤다. 겨우 여진을 경찰서에 데려다 놓고 건은 다음 날 서부지검 앞으로 찾아갔다.

 

 

 

“잠깐 나랑 한잔 합시다.”

 

 

 

건이 이끄는 데로 시목은 늘 가던 포장마차에 앉았다.

건은 연거푸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키더니 시목을 노려보았다.

 

 

“정말...한 번도 경위님을 그렇게 생각 안 해봤어요?”

 

 

건이 제 일처럼 울분을 토했다. 시목은 듣고 있다가 그저 비워진 잔을 채워 소주를 들이켰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성인이 됐으면 자기 감정에 솔직해집시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시목은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여진...경위...”

 

 

입에서 한숨처럼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동료였고,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어 믿을 수 있던 사람.

그거 말고 다른 의미가 있었을까.

 

머리 한 켠이 아득하게 울렸다.

귀를 파고드는 이명 때문에 시목은 머리를 쥐고 뜯었다.

 

 

삐이-

 

 

거대한 파도가 시목을 덮쳤다.

여진의 뒷모습이 아른거리다가 자신을 원망하는 어머니로 변했다가 죽은 은수도 되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정리해야겠어. 시목은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며 문자를 남겼다.

 

경위님, 오늘 뵙죠.

 

 

여진은 하루 종일 심장이 하늘까지 올라갔다 땅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뭐라고 답할까. 혹시 마음이 바뀌었던 걸까. 장형사가 찾아갔다는 이야기에 왜 사생활에 관여했냐고 화를 냈었다. 걱정해서 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이건 여진 자신과 시목 둘 사이의 일이었다. 타인이 끼어들면 들수록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 행동이 과연 긍정적으로 작용했을지 부정적으로 작용했을지는 오늘 저녁에 결정 될 것이다.

 

 

 

 

딱- 딱-

 

 

여진이 손톱 깨무는 소리가 사무실에 작게 들렸다.

 

“오늘 황검사님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 거 아니야. 일 봐요.”

 

“참... 사람이 무심해도 정도껏이지.”

 

장건이 주억거리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초조한 얼굴로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던 여진은 6시를 가리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뛰어나가는 여진을 보며 다들 고개만 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곱슬거리는 머리. 뚝 떨어지는 둥근 뒷모습.

시목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발끝을 바닥에 두어 번 퉁퉁거렸다.

 

 

 

“검사님?”

 

“아, 네. 오셨습니까. 가시죠.”

 

“네에.”

 

 

 

너무 어색해서 죽을 것 같다. 라고 여진은 생각했다. 늘 가던 국밥집에서 가서 시목은 익숙하게 두 그릇을 시켜 말없이 먹더니 여진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진은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으로 밥을 삼키고 일어섰다.

 

 

 

“저...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에요? 검사님?”

 

“맞습니다.”

 

“근데 왜 안 해요?”

 

“밥은 편하게 먹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이제부터 저 불편하게 하시려고요?”

 

 

 

여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시목은 그 무감한 눈동자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옮길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여진은 제 손바닥에 손톱으로 자국을 내며 걸었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받아가지고 오는 동안 여진의 손톱자국은 깊어지기만 했다.

 

 

“여기서도 커피는 편히 마시자고 그럴건가?”

 

 

여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시목의 입술이 약간 달싹이다가 열렸다.

 

 

“어젯밤에 장형사님을 만났습니다.”

 

“...알아요. 미안해요.”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한 번도 없었냐고요.”

 

“뭐가요?”

 

“경위님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요.”

 

“...결론 내리고 오신 거죠.”

 

“네.”

 

“...”

 

“없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요.”

 

“이명이 찾아왔습니다. 경위님에 대해서 더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게 제 결론입니다.”

 

“그래요? 그럼 너무 질질 끌었네요. 뭐 하러 밥은 사주고... 가세요. 난 더 있다 갈 테니까.”

 

“감사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고마워요. 뭐가 그렇게..”

 

“같이 밥 드셔주신 거요. 감사함은 저도 압니다. 다만...”

 

 

오늘 말고 그 전을 이야기한다는 걸 여진은 알았다.

고마움,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그냥 고마움뿐이었나보다.

 

 

“됐어요. 더 말하지 마요. 사람 비참해지니까.”

 

 

시목이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진의 입에선 자꾸 못했던 말이 새어나갔다.

 

 

“검사님 진짜 겁쟁이인거 알아요. 시작도 안 해보고 이명이... 계속 찾아올지 아니면 사라질지 어떻게 알아..”

 

“그걸 감당할 자신, 현재로썬 없습니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요, 내 잘못이네.”

 

 

시목이 가게를 나가려 했다. 지금 나가면 더는 못 만나겠지? 이 사람.

자꾸만 미련이 흘러 넘치려 했다.

 

 

“미래에도 가능성, 없는 건가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어렵습니다.”

 

“모르겠다. 나도. 나 누구 기다리고 이런 타입 아닌데. 검사님이면 한번 기다려볼까 하고 생각 하는 거 내가 지금 미친 거죠.”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더 붙잡을 말이 없었다. 시목은 잠깐 문 손잡이를 잡고 서있더니 이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여진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얼음이 다 녹아 테이블에 물기가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

 

 

직원이 조심스레 영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말에 여진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숨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줄지어 따라왔다.

 

 

 

 

“아, 춥다.”

 

 

겨울은 겨울이네.

 

여진은 허공에 양 팔을 벌려 안았다.

이 비어버린 차가운 공기만큼 누군가가 필요한 밤이었다.

 

 

 

주책이다. 주책. 한여진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건지 괜한 눈물이 고여 여진의 짧은 머리 끝에 맺혔다 사라졌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나봐.

뉴스에서 오늘은 어제보다 따뜻할 거라더니, 더 춥잖아.

 

 

손바닥을 연신 부비며 걷는 여진의 손에 아직도 아까 낸 손톱자욱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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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이벤트로 시목여진/겨울 키워드로 쓴 글입니다.

소재를 제공해주신 융융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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