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은 한준휘와 강솔A가 사이좋게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지호에게로 눈을 돌렸다. 서지호도 역시나 한준휘와 강솔A를 보고 있었다. 아마 곧 한준휘와 강솔A가 나누는 대화가 순조롭지 못하게 맥이 끊기는 발언을 한 뒤, 솔B를 대화에 끌어들일 것이었다.




“강솔 너도 그렇지 않아?”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간 지 벌써 몇 주째였다. 처음엔 서지호가 바라는 대로 상황에 말려 들어가 주었지만, 이제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스터디원 대부분이 저런 서지호의 이상 반응을 눈치채고 있었다. 결국 솔이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짝사랑에 나 이용하지 좀 말지?”




서지호의 당황한 표정을 눈에 담고 아지트에서 나온 솔이 자판기로 걸어갔다.





서지호가 언제부터 저랬더라. 원래 서지호의 대화 스타일이 찬물을 끼얹는 편이긴 했으니, 처음의 몇 번은 솔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지만 한준휘와 솔A의 대화가 보기 싫었으면 혼자 나가도 될 일을, 꼭 솔을 데리고 나간 게 몇 번이 되자 솔뿐만 아니라 스터디원들도 슬슬 지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토론하기도 했다.


솔은 평소처럼 커피를 뽑으려다 탄산음료로 눈을 돌렸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았지만, 이 답답한 기분에 탄산음료라도 끼얹고 싶었다. 콜라 한 캔을 뽑고 돌아서는데, 지호가 어느샌가 따라 나와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지호가 솔을 불러세웠다.




“무슨 소리야? 내 짝사랑?”



지호의 시선이 솔의 손에 들려있는 콜라에 머물렀다.




“너 탄산 안 마시잖아.”

“원하는 게 뭐야?”




솔은 보란 듯 콜라의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역시나 탄산은 너무 강했고, 목을 따갑게 만들었다. 이 느낌이 청량하다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솔에게는 너무 강하게 느껴져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너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네가 나의 뭘 도와주는데? 그냥 솔직히 말해.”




서지호가 강솔A를 좋아한다. 최근 서지호의 행동을 보고 솔이 내린 결론이었다. 준휘와 솔A의 친근한 대화를 끊어먹고, 그들이 함께 있는 꼴을 보지 못해서인지 솔에게 재판 핑계를 대며 아지트를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의 이유는 서지호가 강솔A를 좋아해서 일 거라고, 솔은 마음속으로 단정 지었다. 아마 솔뿐만 아니라 스터디 사람들도 그것과 비슷한 이유를 추론했으리라.


솔A는 충분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 잘난 한준휘도 강솔A를 좋아했으며, 강솔 자신 또한 이미 자신의 룸메를 꽤 좋아하고 있었다. 서지호가 좋아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일은, 마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도 같음을 알기에. 솔은 지호의 감정을 깨닫는 순간 밀려들어 온 낯선 감정을 정의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연민으로 정의했다. 묘하게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을 연민이라 부르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서지호의 답지 않은 절절한 짝사랑을 지켜보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너 준휘 형 좋아하니까.”




들려오는 지호의 대답에 솔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마침표 찍은 일을 지호가 들먹이고 있었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지호의 바람일지도 몰랐다. 솔이 준휘를 좋아해서, 준휘와 솔A의 사이가 틀어지면 지호에게 기회가 생기니까.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솔이 지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냥 솔직히 내 룸메 좋아한다고 말해. 도와줄 테니까. 어쭙잖게 변명하지 말고.”

“뭐?”

“한준휘씨 넘어서기가 쉽진 않겠지만…”

“아니, 잠깐만.”




지호가 솔의 말을 끊었다. 요즈음 서지호가 가장 잘하는 짓이었다. 다만 솔의 말을 막은 적은 없어서, 솔이 짜증 가득한 눈빛으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솔A누나를 좋아한다고?”

“아님 한준휘씨를 좋아하거나.”

“아니야.”




솔의 가설을 부정하는 지호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나 솔A누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준휘형도 안좋아해. 네가 준휘형 좋아하는데, 둘이 사이좋은 모습 보면 속상할까 봐 그런 거야.”




거짓일 리 없는 그 눈빛에 솔의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한준휘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던 과거의 몇몇 장면들엔 꼭, 솔에게 붙었던 지호의 시선이 있었다.




“...마시기 힘들면 나 줘.”




지호가 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솔은 그제야 아직도 제 손에 콜라 캔이 들려있음을 깨달았다. 솔이 순순히 한 모금 마셨던 콜라 캔을 지호에게 넘겨주었다. 따가운 탄산을 다시 들이키고 싶지 않았다. 지호는 스스럼없이 솔이 마시던 콜라를 입으로 가져갔다. 방금 내가 입을 대고 마셨던가? 입술에 닿았던 캔의 감촉이 진짜인지 착각인지 헷갈리는데, 지호는 개의치 않는 듯 입을 대고 마시고 있었다.



서지호가 원래 누군가를 배려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앞의 서지호는 분명 강솔이 10년도 더 전부터 봐왔던 그 서지호였지만,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서지호를 바라보고 있는 솔의 마음에 피어오르고 있는 이 감정도, 연민이라는 이름표가 오답인 것만 같았다. 





“나 한준휘씨 안 좋아해.”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그 문장이 유치하게 느껴져 주워 담고 싶었지만, 이미 서지호와 눈이 마주친 이후였다. 지호는 어느새 콜라를 다 마시곤 빈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있었다. 솔이 그 말을 들은 지호의 반응을 살폈다.






솔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하고 있는 솔을 깨닫는 순간, 지호는 그동안 자신이 솔에게서 느껴왔던 감정이 결국 연민이 아닌, 그보다 더 농밀한 감정임을 인정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수 년 만에 로스쿨에서 강솔B로 재회했지만, 지호에게 강솔은 강솔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한결같이 똑똑했고, 오만했고, 냉정했으며, 누군가의 사정을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강솔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지호에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솔의 인생에, 솔의 옆자리에 연인이란 이름의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지호가 아는 솔은 옆자리를 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준휘와 솔A를 바라보는 솔의 시선을 목격할 때마다 지호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불편함이 기인하는 감정은, 솔에 대한 연민이라고 추측했다. 한준휘는 명백히 솔A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 명백한 애정이 아플 법도 한데, 솔은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곤 했다. 중학교 동창인 데다가 같은 스터디원이고, 솔이 지호의 재판을 도와주고 있으니, 감정적인 연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솔이 무표정 속에 숨긴 감정을 지호는 알 수 없었으니, 나름의 방식으로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호의 행동이 연민이란 감정에서 기인했다기엔 과한 행동이었다는 건, 지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솔의 시선이 준휘에게 머물 때마다 느껴지는 내면의 깊은 불안함을 연민이라 명명하는 건, 솔의 시선을 자신한테로 돌리는 행동의 정당성을 위한 억지 변호였다. 지호는 또 다른 가능성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학교 동창과 룸메이트가 스터디원으로 엮인 삼각, 아니 사각관계를 만들어 낼 순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해온 마음을, 결국 솔이 직접 돌려세웠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그건 사각도 삼각도 아닌 형상을 띄고있었다.





“...나도 솔A누나 안 좋아해.”




나는 널 좋아해. 따라 나오려는 그 문장을 지호가 겨우 삼키곤 뒤돌아서 아지트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솔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강솔 1등, 서지호 2등. 그들의 첫만남부터 변하지 않는 순서였으며, 로스쿨까지도 서지호는 강솔의 뒤에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솔의 감정이 천천히 지호를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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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급마무리 같아서 좀 맘에 안들지만 최선을 다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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