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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체육관, 허름하다면 허름한 이 건물에선 혈향이 안개처럼 풀풀 피어올랐다. 곳곳에서 살점이 피어오르고, 비명소리가 공간을 낭자했다. 뜨겁고 꿉꿉한 피 냄새와는 다르게, 체육관의 중앙에는 싸늘한 기류가 연신 흘렀다. 두 조직의 정점에 오른 두 남자가 서로를 조용히 노려봤다.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덤비지 못했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사이에 낄 수 없었다. 심지어 A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비서조차도, 차라리 싸움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뒤로하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봤다. 그 지루한(주변 상황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나) A는 입을 열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굳이 싸움을 크게 벌이려는 B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싸움은 이쯤 하지. 네가 원하는 것도 챙겼잖아."

"하하.."


본래 옅은 색의 B의 눈이 머리색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포식자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금 Raurel의 작은 주인께서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돌려하고 있는데, ...이걸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A의 눈썹이 휙 들렸다. 이 남자의 비아냥거림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알고 있어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었다. 드물게 나타나는 A의 표정 변화에 B의 입꼬리를 끌어모았다. 저 표정,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표정변화를 저 홀로 알아챌 때의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 A가 입을 열려 하자 B는 그의 말을 빠르게 잘랐다.


"무의미한..."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어. 어쩌면 가장 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뭘 이야기하는 거지? 서류와 장부가 모두 너희 손으로 들어갔다. 허튼 소리 말고 돌아가도록."


Raurel도 Raurel대로 이득을 봤으므로, 딱히 진 거래는 아니다. 하지만 A는 어딘가 진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B, 이 남자와 부딪칠 때마다, 이자가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Raurel의 작은 주인을 아직도 못 가졌는데, 내가 어떻게 원하는 걸 챙겼다고 하겠나. 응?"

"단단히 미쳤군."


둘의 주변에서는 살점이 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A와 B는 서로가 유일하게 의식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눈치싸움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느낀(평소보다 훨씬 늦은 판단이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A는 B의 말을 무시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주변으로 옅은 바람과 함께 금색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 파동에 닿은 자들은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 중에는 정서적 환희를 담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B의 아래에 있던 자들은 Raurel의 소가주의 전투력을 고대했었고, 혹은 Raurel의 새끼 조직원들의 감동을 기반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B는 눈꼬리를 가늘게 치뜨고는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A는 잡힌 손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다 손목을 털어 가볍게 손길을 뿌리쳤다. B는 능력을 사용해 생긴 허점을 놓치지 않고 그의 몸을 결박했다. A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부르는데, 가만히 있는 꼴 하고는."

"집어쳐라."


그는 곧장 그의 뺨에 손을 얹고 눈 아래를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미미한 손톱자국이 세겨져 뺨에 발간 줄이 생겼다. 그의 목소리는 소유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이 일은 비밀로 하지. 하지만 알아둬야 할 거야. 이번은 내가 널 건드리지 않았음을."


숨을 잔뜩 섞은 그의 목소리는 모두를 발아래에 둔 사람처럼 어딘가 권태롭고, 나른한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일생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A는 그에게 압도되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얼굴을 빼어냈다.


"저런, 무리하지 않아도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B는 망설임 없이 A에게서 등을 돌렸다. A에게 말하던 것처럼 소유욕이 가득하나 일정 수순 봐준다는 느낌의 목소리가 아닌, 냉정하고 망설임 없는 군주의 목소리였다.


"이 이상의 전투는 중지한다. 모두 퇴각하도록.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죽고 싶은 것으로 간주하지."


그의 말과 동시에 그의 부하들의 몸이 천천히 들렸다. 마치 마리오네트에 걸린 실처럼, 무언가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음이 A에게까지 느껴졌다. 자유의지도 없는 이들에게, 협박이라니. 그는 작게 질색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읽었는지 B가 그에게만 보이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곧장 B의 세력은 모조리 체육관에서 사라졌다. B는 발걸음을 옮기며 A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곧 보겠군. 그날을 고대하지."

".... 헛소리."



A는 금보다 귀하다는 목재를 섬세하게 조각한 의자에 왕처럼 앉아있는 B를 보며 질색했다.


[전투 인원 중, 일부가 행방불명됐습니다. B의 세력과 싸운 날 이후로 추정됩니다. 현재 보고된 인원은 비서 2명, 비전투 인력 5명, 조직원 3명, ...그리고 간부급까지 형태는 다양합니다. 아마, 그날...


설명은 거기까지만 하도록.


존명.


그들이 꺼낸 해결책은 무엇이지.


....소가주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은 계속 뽑으면...


3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주께 연락해.


...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의 대화가 생각난 A는 제 자리인 것처럼 보이는(그의 것처럼 고풍스럽지만 보석이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이런 사치의 끝은 누가 생각한 것인지.)곳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완벽한 그의 패배였다. 이번에는 느낌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빼돌리는 것도, 제 능력을(본인의 조직원에게 더욱 강하게 걸었음에도) 완전히 상쇄했음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을 원하나."

"내 성에서 하는 저녁 식사. 디저트까지."

"여기서 내가 네게 나이프를 던진다면..."

"실험해보고 싶다면, 실험해봐. 한 명씩 죽여서 보여줄 테니."

"...."


A는 생명을 다루는 입장에서, 그것을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점에 질릴 대로 질렸다.


"이걸 전부 먹으면 되는 건가."

"맞아. 남김없이 먹어야 해."


말을 끝으로 B는 천천히 식기를 들었다. 고기를 써는 소리 빼고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식사예절이었다. 그가 높은 위치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음에도, 자신보다 유려하게 식기를 쥐는 모습이 낯설었다. 사람이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많은 생각들을 집어삼킨 채, A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아스파라거스를 두른 스테이크, 채소를 썰어 넣은 소스 2종, 와인보다 비싸다는 정통식 머스터드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착실히 교육받은 것다웠다. 그의 몸놀림은 아주 자연스럽고 고급스럽러웠다. 고기를 썰고 입에 넣는 광경에 B가 감탄하는 투로 말했다.


"역시, 꽤 탐난단 말이야."

"식사 중에 너무 많을 많이 하는 건, 예절에 어긋날 텐데."

"내 성에서는 내 법을 따라야 하거든. 여기선 조용히 식기에 얼굴만 처박는게 예절이 아니라서."


A는 혀끝을 차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착실히 스테이크를 소스에 찍고 입안에 밀어 넣었다. 너무 많은 양도 적은 양도 아닌 양을 입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등을 하며 그를 인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저 남자를 인식하는 순간, 그의 말도 안 되는 궤변들에 휩쓸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거의 다 먹어가는데."

"...말을 돌리겠다는 거군.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볼까."


B가 종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말했던 걸 내오도록 해. A는 기껏 해봤자 자신을, Raurel을 모욕하는 의미의 디저트르 내올 것이라 생각하며 하녀가 내미는 디저트의 철제로 된 반구형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사람의 사진이 서류첩에 쌓여 있었다.


"이건...."

"어때?"


자신의 실책이었다. Raurel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한 부분이(정신이건, 팔이건, 다리이건, 신장 한쪽이 없어지건) 망가진 것이다.


"더 망가지기를 원치 않으면.."

"않으면?"

"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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