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20181118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에 쫓길 때도, 뭔가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를 때도. 나이가 들어서야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면 어떻게만 된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나는 그래도 쓸데없는 걱정을 줄이는 대책없는 주문을 부적처럼 지니고 살아간다.




오르막

20181118


나는 언제나 위를 보고 걸었어. 한 걸음 걸을 때 허벅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고, 넘어질 것 같을 때 나무줄기를 마구 잡아댄 탓에 손바닥은 조금 까졌어. 그래도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 때문에 나는 걸었어.

그런데 이제 어쩌지?

분명 같이 걷는 사람들을 제치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걸었던 건데, 정상에서 왔던 길을 내려다보니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거야.




옆길

20181118


그러니까, 내가 원래 가려 했던 길은 그쪽 길이었던 거야. 그 길에는 이슬을 가득 그러안은 낮은 풀이 있고, 꽃망울이 작은 푸른 풀꽃이 있고, 방금 자다 깬 아기같은 흰 나비가 있거든. 너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그러니까 내 손목을 꽉 잡은 손을 좀 풀어줄래? 큰길은 재미없어. 나랑 산책하자, 달리기 말고.




함께한

20181122


 어제도, 지난주 목요일에도, 네 생일에도 나는 웃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날들의 내 표정을 찍어둔 사진이 있다면 9할은 웃는 낯일 것이다. 너와 이것저것 같이 하고픈 게 많았던 나와 생긋 웃으며 그걸 따라 주었던 너. 그랬던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었을까 곰곰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내 탓이었다. 내가 너보다 훨씬 큰 목소리를 냈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으니. 불꽃 튀는 부싯돌처럼 부딪히다 지쳐 무던한 결별을 맞았지만 만약 내가 매일 밤 기도한다면, 네가 그 기도를 듣기라도 한다면 목에 걸린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고. 모든 게 새로웠던 유년기 때의 세상보다 너와 함께 바라본 세상이 훨씬 아름다웠노라고.




나른한 오후

20181122


커다란 창은 미소같은 노란 햇살을 가득 내어오고 나는 그 속에서 헤엄을 치기로 했다. 바람 소리와 가장 비슷한 피아노 음악을 틀고, 가장 아끼는 책을 펴고는 가장 폭신한 이불 위에 엎드려서 다리를 흔들자. 창문을 살짝 열어두면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꿈에는 작은 나무와 산새와 다람쥐가 나올 지도 모른다.




나른한 오후

20181122


 너랑 있으면 나른해져. 점심도 맛있게 먹었겠다, 날은 따뜻하겠다, 너도 잠 오지, 그치? 와 봐. 내가 팔베개해 줄까?


 나는 이런 시간이 참 좋아. 불 안 켜도 밝은 시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아무거나 해도 되는 시간. 이런 시간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요정들이 잠에서 깨어나거든. 아냐, 나는 알 수 있어. 햇살에 비치는 먼지가 증거야.


 노래 불러줄까? 자장가. 미안, 요정나라 노래는 몰라. 대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장가 불러 줄게.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이타심

20181122


괜찮아, 난 그게 편해.


언제나 그의 몫을 나누던 이가 있었다.

나는 그러는 편이 편하다던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눠야만 했고, 나눌 수밖에 없었던

그의 그림자는 깊고 짙고 끈적였다.


나는 그만 그의 그림자에 발을 담그고

그를 뒤에서 꼭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자신의 쿠키를 양보하는

볼이 말랑한 꼬마 아이가 되어 버리고 싶었다.




이타심

20181122

나는 전혀 착하지 않아.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네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가 항상 그곳에 있었던 건

나에게 필요한 누군가가

너이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모르지.

너는 너무나도 착하거든.




나에게

181122


 일단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여태껏 수고 많았다고. 오늘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었지. 여태 좋든 싫든 끼고 살았던 책을 모두 내다 버리니 엄청 홀가분하더라. 내 방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비워진 거야.

 그리고, 덜 하고 싶었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말인데. 새로운 시작은 언제 할 계획인지 물어봐도 될까?




적어두다

20181205


 비가 내려 생긴 탁한 물웅덩이에도 하늘은 푸르게만 비쳤다,라고 적어두어야만 했다. 잘 깎아 빛을 내는 문장은 잠시 피어오른 향기처럼 어느새 어디론가 흩어지기 마련. 나는 언젠가 내가 이 문장이 꼭 필요해질 거라고 직감으로 느꼈다. 별 이유는 없지만, 직감으로.




태양

20181205


유 어 마이 선샤인, 마이 온리 선샤인.


비가 오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태양은 가까이 다가가기에 너무 뜨겁고 크고 두렵지만, 나는 긴긴 시간을 흘러와 내 작은 창에 스미는 그 따스한 손길을 사랑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편안하게 했다. 언젠가 너와 함께 이 창 앞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태양처럼 노란 레모네이드를 마시면 어떨까.


유 어 마이 선샤인. 마이 온리 선샤인.

장맛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퍼붓는다.




진심으로

20181206


늘 그 순간만은

온 마음을 다한 것 같은데

그 마음은 유효기간이 일 년뿐인지

새 봄마다 헌 마음은 사라지고

새 마음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을 혼자 그리고

혼자 위하고 가끔은 애도 끓는

한바탕 일인극을 펼치고 나면 남는 것은


손에 남아 바스락대는 사탕 껍질과

이만하면 됐지 싶게 달아진 입 안.




진심으로

181206


 너를 생각해서 연필을 들면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말이 작은 시내처럼 정다이 흐르고 너의 눈을 보고 말을 하면 꽁꽁 싸매 두었던 비밀은 눈 녹은 물처럼 흘러 너에게 가고 너의 손을 잡으면 나를 짓누르던 하늘은 당장이라도 먹구름이 개어 푸르게 빛나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작고 파란 열매처럼 어렸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우리 같이 영글어 가고 익어 가자.




풍요

20181206


안녕 아가, 잘 잤어?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배고파? 밥 줄까?

그래 그래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지금 꺼내고 있잖아.

자, 여기. 맛있게 먹어.


 너의 세상은 나의 세상보다 훨씬 작겠지? 기껏해야 내가 있는 집과 내가 없는 집, 나와 같이 나서는 산책로뿐일 거야. 비록 가진 것 없는 나지만 네 작은 세상만은 풍요롭게 가꿀 거야. 내가 약속할게. 네가 내게 할 수 있는 전부를 해주듯 나도 네게 할 수 있는 전부를 할게. 아가, 너는 존재 자체로 내게 과분한 축복이란 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오늘도 사랑해.




풍요

20181206


별일 없이 노래에 귀 기울이고

서툰 그림을 끄적이고


우표 붙여 그리운 이에게 편지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대고


목욕 후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렇게 나의 소박한 삶은

아기자기하게 풍요로워져 간다




두려워하지 말자

181206


 얼마 전에는 같이 가기로 한 일행이 못 가게 되어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고, 영화를 봤다. 친한 친구도 몇 있었고 고작 말 몇 마디 나눠 본 친구도 있었다. 나는 끼워 달라고 말했고, 끼어서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전이었다면 혼자서 쭈뼛거렸을 것이다. 사실은 별로 힘들 것도 없었는데, 성격이 변하긴 변했구나, 했다. 나이가 더 들면 새로운 일과 사람을 더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때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그냥 나대로 지내다 보면 그때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가사

181206


너는 노래를 했다

네가 제대로 노래하는 건 들어본 적 없지만

너라면 잘하리라 믿었다


너는 언젠가 노래를 쓴다 했다

나는 너를 위해 가사를 썼다

아니 아마 시였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힘든 일이 많았던 너에게

그때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글로나마

너에게 위로의 포옹을 전하고 싶었다


땀이 배인 손으로 펜을 꽉 쥐고

꾹꾹 눌러 써내려간 가사는 아직 나에게 있다


그때와 같이 나와 너는

그저 웃으며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너의 곡이 완성되었는지조차 모르지만




뿌리

20181206


 나는 학교는 하나의 민들레 밭이라는 비유를 사랑한다. 이를테면 한 반은 한 송이의 민들레고, 학년 별로 여남은 송이의 민들레가 있는 것이다.

 민들레는 꽃잎처럼 보이는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꽃이다. 아이들이 한 학급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좋으나 싫으나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꽃은 저 꽃과, 저 꽃은 그 꽃과 등을 맞대며 가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일 년을 살아낸다.

 그리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풋풋한 노랑은 내려놓고 모두가 흰 날개를 단다. 그렇게 견디던 바람을 기어코 타고 날아가기 위해. 작은 씨앗을 비집고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곧 큰 바람이 불 것이다. 아이들의 등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날개가 달려있다. 모두가 뿌리내릴 땅이 부디 너무 차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뿌리

20181206


나는 가끔 뿌리를 잃어버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작은 뿌리를 내릴 만한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을 때


나를 지지하는 모든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내 가지를 잡아 줄래?

바람에 흔들리는 내 잎을 보며

한 번만 웃어 줄래?




싫어하다

20181206


나는 왜 네가 싫을까

아니 좋았다가 싫었다가 할까


헤살거리는 네 모습이

애교스러운 네 말투가

일렁이며 다가올 때도 있고

왜 밀쳐내고 싶을 때도 있을까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너의 그 모습들은 진짜일까

나의 이 마음은 진심일까


우리는 어쩌면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아니면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한

181207


작고 깜깜한 방 안에서

돌아 누웠다 바로 누웠다 하며

말할까, 말까

실없이 고민도 해 보고

진지하게 상상도 해 봤어

꿈에 네가 나올라 치면

천장에 붙은 야광별들도 소곤거렸어


그렇게 며칠 밤을 보내고 나서

나는 솔직하지 않기로 한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그렇지?




악의

181207


 나쁜 뜻은 없었어,라고 말하는 건 이미 본인 행동이 나빴다는 걸 인정하는 거잖아. 꼭 그렇게 마지막까지 스스로에게 보호막을 치고 싶었니? 보호막 안에 숨어서 그래도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지 않았냐고 변멍하며 웅크리고 있을 거니? 내가 받은 상처는. 나에게 생길 흉터는. 네가 휘둘렀던 말들을 내가 적어 뒀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착해 빠졌었네. 그치.




가정

20181207


 우리 집은 넓지는 않지만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엔 모자람이 없다. 늘 다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럭저럭 화목한 편이다. 언제나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지만 집 안에선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는 벗어던질 수 있고 외로워질 때는 언제든지 안방에 가서 엄마 곁에 붙어 앉는다.

 언젠가 내가 독립을 하게 되면 우리 집은 나의 집이 될 것이고 4인 가구는 3인 가구와 1인 가구로 쪼개지겠지. 그리고 가정을 오롯이 혼자 꾸릴 나는 외로움도 한기도 혼자 끌어안아야겠지. 텔레비전을 볼 때 같이 웃을 사람도 없고, 밖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거릴 사람도 없겠지.

 막상 살면 그런대로 잘 살아가겠지만, 혼자만의 자유와 느긋함과 거침없음에 매료될지도 모르지만, 아직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아득히 먼 내일을 그려 보기만 한다.




부품

20181207


 나는 잠이 와서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좋다. 모든 게 부드럽게 흐려지고 웃음은 후해지고 내가 가진 모든 문제는 작아진다. 사실 나는 남보다 부품이 한두 개 적게 태어난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보다 한참 낙관적이고, 한참 느긋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나사 몇 개 없어도 별 문제없지 싶다. 만약 꼭 필요해지는 순간이 있으면 사다가 조이면 되니까.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소박한 결함을 자랑처럼 가지고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처럼.




비슷함

20181210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도 자세히 보면

서로 조금씩 다른 거 알아?


얼마 전 너와 전화하면서 난 알았지

물건 하나를 살 때

몇 시간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널 보고

우리는 모양은 비슷해도

무늬가 다르다는 걸 말이야


그래 그래도 우리가 조금 다른

그 무엇이 어쩌면

우리 사이를 이어놓는지도 몰라




작은 행복

20181210


 내가 좌우명이나 삶의 목표를 고민해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나는 '작은 행복을 찾아나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무더운 날,

매미 소리 들으며 나무 그늘 즐기기

추운 날,

호호 불며 뜨거운 붕어빵 먹기

맑은 날,

파란 하늘을 목 빼고 한참 쳐다보기

비 오는 날,

빗소리 리듬 따라 폴짝폴짝 걸어가기


 아직 아이 티를 못 벗은 내 두 눈으로 바라보는, 낙천의 축복을 받은 작은 내 세상.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내 소소하게 행복한 삶.




20181210


 나는 눈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겨울의 일상일지 모르지만 내가 사는 곳은 겨울에도 다른 곳에 비해 따뜻해서 눈이 하나의 선물 같다.

 다른 곳에 눈이 올 때는 내가 사는 곳엔 어림없이 비가 왔다. 성분도 똑같을 텐데 좀 얼어서 내리면 어디가 덧나나 실없이 원망도 했고, 진눈깨비라도 내릴라 치면 창문 앞에 바짝 다가서서 구경하기에 바빴다.

 올해 1월 10일, 학교에서 방학 보충 수업을 들을 때 잠깐이나마 눈이 펑펑 내렸다. 좋지 않은 휴대폰 카메라 화질로도 굵은 눈송이가 찍혔다.

 나는 처음 휴대폰을 가졌을 때만큼이나 기쁜 마음으로 뛰어다니고, 두 팔을 벌리고, 손이 얼어 터져라 눈을 만지고, 우산 따위는 생각지도 못한 채 기꺼이 눈을 맞았다. 비가 올 때랑은 비교도 되지 않는 환희가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선생님도, 친한 친구들도, 서로 데면데면한 아이들도 그날만큼은 밖에 서서 눈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눈이 계속 내렸다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수 있었겠지. 바라던 선물을 받은 사람들처럼, 바라고 있을 선물을 주는 사람들처럼.

 오늘 아침, 날이 너무 차서 손이 어는 것 같았다. 이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는 못해도 눈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늘은 이번 겨울에도 선심 쓰듯 눈 한 번 정도는 내려 줘도 되지 않을까.




말장난

20191204


 씻고 나오니 잠은 달아나고, 새벽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나른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풋내 나는 하루의 시작에는 어김없이 묵은 생각이 빨갛게 익어간다. 말장난을 하기 좋은 시간인 것이다.

 가슴이 뛰는 것은 저녁에 커피를 한 잔 해서 그런 것이지만, 너를 생각할 때 가슴이 뛰어 그런지 가슴이 뛰면 네가 생각난다. 어쩔 수 없다. 너에게 하고 싶었지만 못내 삼켜 가시처럼 걸린 말을 뽑아 주르륵 펼쳐본다. 어쩌면 그런 말을 네게 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 멋쩍고 우습다.

 뽑아둔 말들의 순서를 앞뒤로 바꾸고 머리와 꼬리를 잘라보기도 하고 화자와 청자도 멋대로 정했다. 멋없는 연애소설 한 편이 모두 잠든 시간에 또 태어나고 말았다. 나는 몇 편의 새벽 말장난을 짓게 될까. 연필을 쥔 손이 욱신거린다. 눈이 시큰하다.

 역시 그냥 잠이나 잘 걸 그랬다.




평면

20190124


 너는 너무 복잡한 것은 싫다고 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원치 않는 감각 때문에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하다고 했다. 너는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클래식이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시집을 읽거나 간결한 모노크롬의 수묵화를 그리곤 했다.

 예술은 어디 교과서 안에나 갇혀 있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네 덕분에 바이올린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말수도 별로 없는 너와 있으면 편안하고 나른해지는데, 바이올린 연주도 그런 분위기의 곡 위주로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하늘이 적당한 회색이던 날, 나는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너를 찾아갔다. 나는 처음으로 네 앞에서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너 같은 곡을 연주했다. 너는 젖은 낙엽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너는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듯 그렇게 떠났다. 내 삶에서 가장 입체적인 사람을 보내는 것은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먹을 개고 붓을 잡았다.




목숨

20190124


일단 태어났으니까 살아가는 거지.

한동안은 야, 너 왜 사냐?

하는 친구들의 가벼운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안 태어났으면 안 살았겠지.


그래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

이라는 말은 싫어한다.

나는 생장의 의미로 혹은 생존의 의미로만은

살아가고 싶지 않다.


목숨이 삶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밭의 흙처럼, 그저 토대인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가지만

길이상으로 자라지 않아도

줄기와 뿌리가 단단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나의 든든한 흙이 가벼이 여겨질 때도 나는

내 중심이 단단해지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가만히 버티고 있는다.




줄이다

20190130


 요거트나 탄산 음료 같이 으레 달다고 생각되는 식품들이 당을 줄여 재출시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흐름이다. 더불어서 사람들도 당을 줄여 재사고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너무 연애를 사랑하고 그 달달함에 고파 있는 것 같다. 가을만 되면 외롭다는 이를 나는 많이 보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를 하지 못한(않았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학적인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많이 들었다. 연예인의 열애설이 뉴스에 떠들썩하게 오르고, 대면으로 익명으로 또 방송으로 연애 상담을 한다.

 물론 사랑은 좋은 감정이다.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를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온전히 그러안을 수 있는 선물 같은 능력이다. 그렇지만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볼 것도 없지 않나. 이성과 친하다고 둘 사이에 친구 이상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할 필요는 더더욱 없지 않나.

 당을 조금만 줄여서, 플레인 요거트처럼 서로를 조금 더 담백하게 대했으면 좋겠다. 무던하게, 깔끔하게.




비가 오면

20190201


 비가 오면 내가 그린 그림을 정원에 내놓을게. 이젤도 액자도 없이 물감 묻힌 종이 오롯이 그것만. 내가 그림을 그릴 때면 너는 옆에서 기웃거렸지. 너는 나의 뮤즈였고 내 최초의 관람객이었고 나만을 위한 작은 전시장이었는데.

 팔레트를 집어던지고 종이를 북북 찢어버리는 밤이 널 만나고 줄었어. 네 안의 나와 악수를 한 날도 비가 세차게 왔었지. 나는 덕분에 끔찍하게 싫어하던 비마저도 사랑하게 된 거야. 참, 네 생각이 네 마음이 내리는 비에 섞여 오지 않을까 해서 우산을 쓰지 않고 거리로 나온 적도 있었어.

 나 많이 변했지? 주변 사람도 그러더라. 부드러워졌대. 더 많이 웃는 것 같고 살도 좀 찐 것 같다더라. 너랑 함께 갔던 식당의 주인분이 나를 알아보시더라고. 단골이 될 것 같아. 너는 나한테 이렇게 많은 걸 해 줬는데 나는 이제 너한테 그림을 보여주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네 생각이 네 마음이 비랑 함께 내려서 내 그림의 물감과 섞여 흐르면 나는 정말 기쁠 것 같아. 비가 그치고 종이가 마르면서 네가 내 그림의 느낌을 조금 가지고 올라간다면 더 기쁠 것 같아. 우글우글하게 마른 종잇장을 그럼 나는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겠지.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 비 오는 창가를 그리고 있긴 한데, 꿈속에서 만난 네가 흐릿하게 옆에서 기웃거리네.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는 모르겠다. 비 오는 날, 너에게 보여 줄게.




한 권

20190203


 나는 한 권 책이야. 두께와 글자 수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 막 이야기 초반 5분의 1쯤 다다랐다는 느낌은 와. 지금 너와 이야기하는 것도 적히고 있어.

 줄거리 말이지? 썩 드라마틱하진 않아. 그래도 최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서술하려고 애쓰는 편이야. 예를 들자면, 7살 때는 길에 가다 강아지풀이 있으면 꼭 쪼그려 앉아서 만지고 일어났거든. 그 이야기도 저 앞에 적혀 있을 거야.

 어떻게, 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될 생각이 있어? 네가 나를 펼친 순간 슈퍼마켓 직원분 만큼의 비중은 생겼지만 나는 네가 내 이야기의 주요 인물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아. 어쩌면 네가 내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지.

 좋아. 방금 새 챕터가 생겼다. 소제목을 정하게 해 줄게. 뭐가 좋아? 그거 괜찮네.

<잊을 수 없는 그날> 어느 흐린 날, 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네가 안개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피노키오

20190402


사람들은 모두 내 코가

한 뼘 길이인 줄 알지


그럴 테다 머리 검은 짐승과

오늘도 부대끼기 위해

설탕물을 뒤집어 쓰고 하루를 나서니


전엔 코가 세 뼘까지 길어졌었지

쉽사리 생의 마지막을 그리지 않았었지


끈적이는 겉껍질을 녹이고 나서

희미한 가로등불처럼 뻣뻣하게

내게 함부로 생을 주신

파란머리 요정님을 증오하면


내 코는 줄어들어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감기

20190403


뜨거운 내 숨이 인중에 닿는 게 느껴져

나는 계절에 맞지 않는 이불에 둘둘 말려

힘겹고 만족스럽게 숨을 쉬었어


깔깔한 목으로 콜록거리고는

괜히 머리를 굴려 이야깃거리를 골랐지

네게 전화를 걸어 의도치 않았다는 양

나를 걱정하는 네 목소리를 사랑해서




연필

20190415


 불현듯 둔한 흉통이 느껴졌다. 소리가 되지 못한 케케묵은 말들이 상하기 직전인 탓이다.

 나는 오래되어 누레진 노트를 찾는 데만 해도 한참이나 걸렸다. 책상 밑에는 때마침 위에 씹은 자국이 있는 2B 연필이 구르고 있었다. 이가 근지러워지는 것을 참고 나는 노트에 상해가는 것들을 토해냈다.

 지었다 지워버린 시, 부르다 만 노래, 그리다가 번져버린 그림. 그곳의 나와 너희와 타인과 공동체의 행복과 나만의 시련과 결국 허상이라고 밝혀진 이상들. 눈물 대신 흑연이 남긴 검은 자국은 종이 위에서 범위를 넓혀 가고 눈앞이 겨우 또렷해질 쯤에는 연필심이 다 닳아 그를 감싸는 나무만 서걱서걱 종잇장에 긁혔다.

 이상하게 연필을 잡은 탓에 손날이 검게 물들었다. 아마 나의 안 보이는 가장 깊숙한 곳에서도 검은 멍이 들었을 것이다. 흉통은 줄었다. 멍은 늘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 연필처럼 머리랑 속은 시커멀 것이다. 나는 마침내, 하릴없이 옛 기억이나 끄집어내며 눈을 감는다.




멀리

20190429


 오늘은 비가 참 기분좋게 와

우산을 차작차작 두드릴 만큼

그리고 바람도 안 불어

나는 이럴 때면 무척 차분해져서

옷을 무채색으로 입곤 하지 예를 들면


먹색 자켓

흰 티셔츠

검은 바지에

회색 우산

저 멀리서 보면

얼굴만 보이겠네


그렇구나 그러면 오늘 내

유일한 유채색은 얼굴이구나

그렇다면 얼굴 채도를 높여야겠어

내가 아껴뒀던 노래를 꺼내서 들어야겠어




20190429


 나에게는 노래 몇 곡이 있지 악보도 없고 녹음 파일도 없는 아무도 모르는 몇 소절이

 자려고 불을 끄고서는 아무 멜로디나 흥얼거리던 중학생이 그 작은 방에 있었던 거야. 그러다 한 가닥 얻어 걸리면

 그 음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어울리는 가사를 고심하고 지난 밤의 멜로디를 되살려오고 그렇게 암실에서 현상된 노래가 몇 곡 있었지 지금은 빛바랬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그 노래들이 다시 꿈틀대 그래 사실 잊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건 덤 같은 거야 내 낙천성과 표현에의 욕구에 달려 오는 작은 사탕 같은 거지

 나는 그 사탕을 입 안에서 녹이면서 가끔 일회용의 노래를 해 소리내길 멈추면 기억에서 사라질 기록할 마음조차 없는

 내가 스크랩한 멜로디 조각에 그날 기분을 짜깁은 거라 한 번 부르기엔 딱이거든 미용실에서 안경점에서 덤으로 집어온 오렌지 맛 사탕 처럼




세상은

20190501


 너의 세상은 언제나 향기로웠지

 너에게 한 걸음 다가서면 그러니까 네 세상이 바깥으로 낸 문의 손잡이를 돌려 열면

 나는 그곳에서 네 향기가 내게 배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나는 그 생경한 감각을 좀체 뿌리치지 못해서 오늘도 내일도 기어코 그 문을 열고 마는거야

  넌 나를 번거로워할까 아니면 나를 반길까 네 의중은 향기 속에 슬쩍 묻은 채 나는 네게 물었지


"네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향긋하니."


 너는 그 향과 닮은 웃음을 흘리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어 나는 그 어깻짓에 언젠가 들었던 우스개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지


Q. 향수 한 방울로 방 전체에 향기가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향수를 본인의 인중에 뿌리면 됩니다.


 네 작은 세상이 이렇게나 상냥한데도 너는 아마 이걸 네 인중 냄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나는 마음 속으로만 고개를 주억거렸지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모르겠어 내가


"네 인중 냄새를 좋아해."


 라고 말하면 너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말지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걸까 실상이 어떻다 한들 이 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 내 칙칙한 세상에도 이 향을 옮겨가고 싶은 걸

 여느때보다 서늘한 네 세상의 문손잡이를 잡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사람의 인중 냄새에 빠져버린 내 처지에 대해서.




여름밤

20190519


 여름밤은 비와 섞여서 어둡게 내려앉았다. 내 박동이 빗방울이 유리창을 치는 소리와 보폭을 맞추어 공명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두는 이 시점. 야간 자율 학습을 위해 남은 사람은 너와 나 둘뿐이었다. 책을 읽는 나와 문제를 푸는 너. 다가갈 수 없는 팽팽한 거리를 잡아당기는 것은 백색 소음 뿐이었다. 빗소리, 시계 초침 소리, 흑연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내 안에서 깊게 울리는 규칙적인 소리.

 책 속에서는 명탐정이 괴도를 쫓았다 나는 그저 침을 삼켰다. 꿀꺽 소리도 이 정적을 멈추진 못했다. 어쨌든 비는 계속 내렸다.




오랜만에

20190528


성운을 헤치듯

후덥지근한 공기를 뚫고

다른 별 사람들처럼 조우해놓고선

늘 거기에 있던 버스 정류장 표지처럼

우리는 그렇게 걸었지


자주 보던 카페의

낯선 디저트를 끼고 앉아

편안함의 잔 속에서

대화가 농도와 당도를 달리할 때

시곗바늘은 아마 살짝 녹았던가


큰 창 너머 보이는 빛이

노릇해질 쯤에서야 우리는

거의 다 녹은 시곗바늘을 본 거야




자유

20191112


내가 늘 도망치고 싶다고 말했던 건

대개 자유롭고 싶다는 거였어

날개 없이 산책하는 너처럼

두 눈에 빛을 담은 너처럼


이제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넌 나에게 무어라 대답할래?




혓바늘

20191121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 사라지겠지 그래야 하지 그게 순리지 원래 내게 없었지만 내게 끼어든 것들은 다 그랬지 하늘에 달 밀려나듯 그렇게 갔지.

 작은 티끌 그렇게 가장 여린 부분에 박혀 빠지지 않네 빼지 않네 따끔, 따끔 일부러 눌렀지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상처 같지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고 했지 너는 그럼 내게 얼마나 부드러우냐.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 사라지겠지.

 그게 순리지.

하늘에 달 밀려나듯.




달팽이

20191121


저기

있잖아요

저두 숨고, 싶어요.

뭐가 그리 두렵냐구

하는데 두려운 게 아녀요

두려워야만 숨나요 버겁지요

세상이 나에게 너무 커 버린

거지요 나두 바람이 있다면요

그건 큰 꿈이 아니에요 그냥

작은 틈새에 꼭 끼고 싶

어요 저만 들 수

있는 아주



머리와

어깨 허리 등

무릎 종아리 장딴지

팔꿈치 손목 손가락

다 동그랗게 동글게

말아가지구선

조용히

아주

조   누

용     워

히       서



오래오래 땅에 이슬 내리기를 기다릴 것이어요




걸음

20191216


전진은 도덕 후퇴는 인간성

산책은 행복 도망은 부도덕


나의 걸음은 느리게 꾸준히 작은 자욱도 없이 몸을 앞으로 밀어내네.


전진은 도덕 도망은 부도덕


"뛰지 말자 늦더라도 걷자 꽁무니 빼는 일 없이 쭈욱."


도망은, 부도덕.


나의 가장 깊은 구멍 안전 펜스도 없이 그저 쑥 빠지기 좋게 있을 뿐이지 끊임없는 말로

매번 변하는 언어로 타이르네 어르네 나를


전진은 도덕

후퇴는 인간성

산책은 행복…….




화관

20191227


 가장 곱고 좋은 것만 골라 주겠다는 너의 말이 썩 믿기지 않았다. 네가 답지 않게 손수 엮어 만든 화관을 내 머리에 씌워주기 전까지는. 네 앙상하고 파리한 손으로. 밝은색 화려한 꽃잎이 서로 얽혀 내 곱슬머리에 얼마나 사뿐히 둥지 틀었는지 네 검은 눈동자는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 네 눈동자를 진열장 삼아 나의 가장 곱고 좋은 부분만을 전시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달아나지 않는 나비가 된대도 좋았다.




아무것도

20200110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죠

꼬박 하룻밤 걸릴 소식도

몸이 무거워 옵니다

낯설고도 편안한 것들


설익은 글자를 나열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꿔 놓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영글지는 않을 것들


함부로 베어 물지 마세요

단단한 씨의 독성은

곧 흐려질 별도 알지 못합니다

나의 눈을 들여다봐요

아뇨 그러지 마요


아무러한 것들이 아무것이 되는 것

영영 생각해도 영영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

실은 답이 0일 지도 모른다는 지껄임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입니다




조리

20200111


 절단과 가열, 첨가와 배열에 의한 화학적 물리적 상태 변화. 그러나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조리하는 것은 퍽이나 지난한 일이다. 너와 나의 감정과 상호 인식, 함께 보낸 시간처럼 더 유쾌한 재료가 있는데.

 찌는 것은 너의 방식이다. 찜기에 물을 올리고 가스불을 켜고. 천천히, 따뜻하게, 잔잔하게, 담백하게. 나는 이 상냥한 방식이 조금 낯설다. 항상 튀기는 식의 사랑을 해 왔기 때문이다. 기름 온도가 오르길 기다리기만 하면 그 뒤의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뜨거운 것이 팍 튀어 오른다. 태우지 않기 위한 스릴. 경쾌한 파열음.

 살짝 벌어진 입새로 허연 김이 새어 나온다. 너의 방식대로 적당히 뭉그러지는 모서리. 나는 너의 모서리에 나의 모서리를 대었다. 적당한 수긍이었다.




해질녁

200113


기차가 지나지 않는 선로를 따라 걷는다. 선로를 따라 걷다 걷다 보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정표를 외면하고 생각만 한다. 공기가 꽤 차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풍광이 붉은빛을 걸쳤길래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하늘이 온통 붉다. 기차는 없지만 남은 선로 위에서 해는 지지만 남은 붉은빛을 본다. 내가 걸은 길 위에는 발자국이 없을 텐데. 뒤를 돌아보려다 그만둔다. 손바닥에 주홍이 고인다.




그을음

200115


깜깜한 작은 방 안에서 운동화 속 돌처럼 한참이나 옹송그리고 있었다. 바닥이 차다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둥글게 굳어버린 몸을 천천히 늘렸다. 아직 환한 빛은 볼 마음이 나지 않아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촛불을 켰다. 까맣게 그을려 짧아진 심지. 불이 길게 흔들리면서 공기 중으로 그을음이 났다. 연기도 불도 그림자도 일렁였다. 모든 것이 완전히 불안정했다.




오후

20200121


헐렁하고 편한 옷을 챙겨 입었다. 흰 운동화를 신은 발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 젖은 머리가 말라 간다. 나의 실루엣을 사랑해. 걸음걸이를 사랑해. 이 오후가 나에게 친절하다. 나도 이 오후를 친절하게 대하겠다.




과실

20200125


무릇 무엇이란 어떻게 되는 법이지 따위의 말이 싫었던 무렵이었다. 달리기는 좋아하는데 주위를 살피는 게 늦는 그가 무릎이며 정강이며에 포도알을 알알이 달고 다니던 계절이기도 했다. 여자애 다리가 이게 뭐니, 핀잔을 들으면 여자애 다리가 별 건가요, 대꾸하려고 반바지 입기를 고집했다. 그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마 복숭아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빛나는 여름에 둥글고 단단한 결실을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창가의 노래


무지개를 쫓지 말라던 이는

눈 덮인 낙원엘 갔어

언젠가 네가 말해줬던 것처럼

그곳엔 도화가 폈을까


어느 깊은 밤에 나는

작은 파랑새를 봤어

날지 못하는 그 날개엔

별빛이 내려와 있었어


아 아아아 아아 아

아이야 너는 어딜 가니

아 아아아 아아 아

오늘 달빛이 푸르구나




다정

20200229


나는 당신이 내키는 대로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하지만 그건 당신을 틀에 가두는 일. 당신은 비정형으로 뻗어가며 몸을 불리고 웃고 사랑하는 사람임을 가장 잘 알기에 내뱉는 당신에 대한 가장 큰 악담. 장마 대신 물뿌리개가 되어 줄래? 저 높은 나무는 제쳐두고 당신 아래 작고 약한 나를 봐줘, 응? 뿌리가 썩어버려도 좋아. 당신이 내키는 대로만 다정했으면 좋겠어. 나만을 귀히 여겼으면.




귀가

20200302


 며칠 동안 고여 있다가 쭈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해방이라 부르지 않기에는 내가 너무 헤픈 사람이었다. 가야만 하는 곳에 가는 것이 어찌 이렇게 기껍던지 몇 겹의 천 너머로 스며오는 바람이 신선하다. 벌써 날씨가 이렇게 되었구나에서 이렇게를 깊이 짐작하지 않는다. 몇 걸음 안 걸어 들러야 할 곳 몇 군데를 이리저리 이으며. 반환점을 돌면서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매일 보던 길을. 큰 숨 들이쉬면 오늘 기억으로 며칠을 근근이 먹고 살까 봐 예사소리의 호흡을 이어가며. 걸음을 뗀다 예사소리로 뗀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편안한 걸음에는 바깥것들을 잔뜩 묻히고서.




식사

200310


모든 것이 너무 더뎌져서 멈춘 것만 같은 이른 봄이었다. 갈라지는 목 부은 눈 어찔한 마음으로 비틀대다가도 이내 잠잠해지는 순간들을 맞았다. 우리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클래식을 틀어 놓고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컵라면 진미채 밥 조미김 따위를 단출하게 놓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밥을 한 술 뜰 때쯤 스티브 바라캇의 플라잉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흰 것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하늘의 심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나의 세상

20200310


세상의 나를 외치려던 당신이

나의 세상으로 정의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순서만 자칫 바뀌어도

한껏 달아지는 말

퐁당 오 쇼콜라 같은

맛본 적도 없는 디저트처럼

달아지는 숨 달아오는 뺨 그럼요


당신의 세상도 나라고 했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내어준

각자의 세상 속에서

두 가지 원, 사실은 비정형이지만,

그 겹쳐진 부분 속에서

시간선을 맞대고 살아가는 거예요


단 숨을 서로 나누는 거예요

단숨에는 말고. 천천히. 우리 속도에 맞게.




안방

20200404


 가슬가슬 보풀이 핀, 내가 유치원을 다닐 때도 있었던 솜이불. 무지하게 크고 무거운 이불을 엄마랑 나눠 덮는다. 나 혼자서 덮고 싶은데, 나는 몸이 작으니 같이 덮어야 한단다. 나는 천장을 쳐다봤다. 바깥의 흐린 빛이 들어왔다. 천장에 난 자국의 가장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차에서 내려 할머니한테 인사하러 뛰어갈 때만 해도 펑펑 내려 쌓이던 눈이 점심 먹을 때에는 뚝 그쳤다. 작은아빠랑 사촌 오빠랑은 눈싸움을 했고 사촌 언니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손이 빨갛게 얼도록 놀고 들어와서 낮잠을 잤다. 할머니가 깨워서 저녁을 먹기 전까지 계속. 그래서 잠이 안 온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세배를 해야 하는데.

 얼굴이 동그랗고 항상 웃는 작은엄마한테도. 키도 크고 목소리 큰 작은아빠한테도. 아빠랑 작은아빠한테만 잔소리를 하고 엄마랑 나한테는 뭐라 안 하는 할머니한테도.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할아버지한테도.

 여자들 한데 모여 자는 안방에서 나만 안 잔다. 할머니가 코를 고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천장에 난 갈색의 넓은 자국을 빤히 바라봤다. 둥글고 넓었다. 낡은 이불 같았다. 넓지 않은 방에 사람 다섯이 같이 누워서 잔다. 나는 아직 안 잔다. 눈을 깜박였다. 깜박였다.




걸음2

20200404


전진은 도덕 후퇴는 인간성

산책은 행복 도망은 부도덕

이 구절을 등에 거뜬히 둘러메고

오늘도 땅을 착실히 밟았다 떼기를 반복한다


산책은 행복이라고 했지. 너는 어떤 길로 산책하니? 형태가 꽉 잡혀 버려서 흐트러질 여지조차 없는 것들이 때로는 두렵지 않니? 굳었다가 풀어졌다가 가끔은 흐르는 게 사는 거잖아. 그게 전진이잖아. 고집부리느라 방향도 바꾸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면 금세 벽에 부딪히고 말 거야. 우리의 삶은 물이 아니라서 엎질러져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걸. 아니면 조금 정도는 엎질러도 괜찮잖아. 그렇지 않아?


나는 듯 걸어 비정형의 세상으로


상변화를 탓하지 않는 세상으로. 모두의 속도와 양상이 가치중립적 현상이 되는 세상으로. 선의 지침과 악의 반례를 매일 꼭꼭 씹어 삼킨 나머지 심장에 철칙을 당연스레 새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그래서 어떤 비정형도 괜찮은 세상으로…….


전진은 도덕. 산책은 행복.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걸을 것이다. 나는 듯이.




20200407


 큰 창 너머의 무언가가 깨웠다는 듯 창을 한 번 보고서는 눈을 비볐다. 눈꺼풀 뒤에 숨은 졸음을 끔벅끔벅 내쫓으며 휘청휘청. 나갈 채비를 한다. 손빗으로 머리를 슥슥 정리하고, 주머니에는 오카리나 하나 달랑 넣고 싸리비 하나 손에 덜렁 들고 아래로 마을로 내려간다. 동이 트기 전은 항상 요상스런 시간이다. 산 사람들은 잠들고 죽은 사람이나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람 정도야 깨어 있는 시간이다. 미는 생각한다. 나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 언제나 가까이 있는 사라암.

 싸악싸악 길가를 쓸어내리고 지나가는 것은 정돈이라기보다 청소였다. 안녕하세요. 한 번씩 마주치는 동네의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미를 부지런하고 바른 청년으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영혼들을 밀어 치우는 거란 건, 말 안 듣는 영혼을 힘껏 치기도 한다는 건 밝혀질 일 없는 비밀이다. 너어, 죽은 몸에 더 맞고 가야 속이 시원하겠니. 죽음과 멀리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말은 싸악싸악 소리에 묻힌다. 

 하늘이 어스름히 밝아오면 어둠 속으로 침잠했던 수평선 다시 떠오를 생각에 비질을 재우치고. 다시 위로 오두막으로 올라간다. 그의 무른 귀신 하나 아직 자고 있을 나무 오두막으로. 주머니에 넣은 오카리나를 매만지며 싸리비 질질 끌며. 달이 깰까. 이름 없는 모든 것들을 위한 느린 곡을 하나 울고 나면 미는 다시 잠에 빠져들 것이었다. 다시 든 단잠은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이른 아침의 실루엣 하나가 희미한 빛을 받으며 돌아온다. 맑게 울다 잠들 실루엣이다.




집착

20200419


 그래 다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하는 거야. 이렇게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거야.

 처음에 덩굴손을 슬쩍 내밀었을 때 네가 손대지 말았어야지 마주 잡아주지 말았어야지. 그러지 못했다면 적어도 예견이라도 했어야지.

 알아? 난 너의 그런 점을 '사랑'하는 거야. 너는 날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는 단단하고 내가 파고들 수 있을 정도로는 무르지. 아, 나의 억센 줄기가 널 죄고 단단한 가시는 네게 박히네.

 네 붉고 달콤한 진액은 사랑을 맹세하잖아. 어서 그 입을 열어서 내게 들려줘. 언제까지고 널 그러안을 네 애인에게. 사랑한다고 해. 어서.




조각글 

20200419


진득한 감정 너절한 정신은 어느 글 쓰는 사람에게나 오랜 짐짝일 것이다. 속단한다. 수문이 닫힌 저수지에서는 잔잔한 물결만이 인다. 정신이 너무 너절해 버리고 말면 문장은 줄줄 잇달지 못한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건 그 밑바닥에 득시글거리는 것을 퍼 올리는 것. 앞니로 토막 내어 뱉는 언어의 질감이 유쾌하지 않다는 사실은 한낱 음미할 거리로 전락해 버린다. 그 전락에 함께 으스러지며 기꺼이 입꼬리를 뒤트는 괴짜를 오래도록 사랑하고 미워했다.

 뭉개진 덩어리에서 익히지도 간하지도 않은 것들의 냄새가 난다. 접시에 내어 덮개로 덮고, 친밀하게 빛나는 금속재의 곡선을 기다리자. 이런 것 따위 푹푹 떠 입에 집어넣어 버리면 그만. 그만. 그만 입꼬리를 뒤틀고 말 테지.


물 하(河), 때 시(時). 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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