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로지스 본사 회의실.

 

“어...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상반기 매출 구조를 보시면... 작년 동기 대비 하락했던 B2B의 비중이 서서히 회복 중이긴... 하지만...”

“뻔히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다음 안건.”

“아, 예, 예. ...다음은 신규 파트너 발굴 경쟁입찰 건에 대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승효의 눈썹이 들썩였다.

한유정이 참여하는 그 프로젝트 이야기인가.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한 대형 스크린 앞에 서서 자신 없는 태도로 설명을 이어가던 중년의 남성은 갑자기 집중하는 사장의 태도 때문에 손수건으로 연신 목덜미를 훔쳤다. 저 새파랗게 젊은 신임 사장의 눈치를 계속 살피는 바람에 머릿속에는 보고 내용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며칠 뒤 프레젠테이션 진행하는 거 아닙니까? 내 결정이 필요한 이슈가 생겼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저 현황을 말씀드리려-”

 

사장은 답을 듣지도 않고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한다. 망했다. 짧게나마 구승효 사장을 겪어본바, 저 집중하지 않는 반응은 보고 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

 

임원들 실력이 엉망이네. 승효에게는 또 하나의 실망이 더해졌다.

그러다 책상에서 느껴지는 약한 진동. 승효는 보고를 듣다 말고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승효야! 나 01학번 성욱이 ㅎㅎ 불철주야 수고가 많다. 다른게 아니라 화정로지스에 경력 특체나 고문직은 않뽑아? 내가 물류 쪽으로 인맥도 있고 겪어봐서 꾀 잘 알아 너한테 도움 될거야ㅎ 자리 나면-]

 

가뜩이나 보고도 마음에 안 드는데 달갑지 않은 신개념 맞춤법의 문자가 승효의 굳은 미간을 팍 자극했다.

 씹,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도 않고.

 승효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던지듯 엎어 내렸다. 그 소리에 20여 명의 임원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앞에서 발표하던 경영지원본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죄송합니다.”

“다음 보고 때는 제발 내가 꼭 알고 결정해야 할 것들만 간략하게 준비해서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승효가 회의를 끝내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사장 때문에 다른 임원들은 감히 먼저 나가지도 못하고 반쯤 의자에 걸친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자료를 살펴보는 척했다.

정작 승효는 업무가 아니라 다른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빨리 자리를 뜨지 않았을 뿐인데.

 

내가 너무 직선적으로 말했나. 사흘 내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도는 생각.

하지만 그 정도 피드백은 우리가 같이 과제 하고 조별 발표 준비하던 시절에도 얼마든지 하던 수준이다. 한유정이 더 잘 되길 바라서 진심을 담아 조언한 건데. ...몇몇 부분만 개선이 되면 우리 로지스와 파트너십 체결을 해도 좋고.

근데 승효의 조언을 듣자마자 그 큰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쏟아낼 듯 당황해하던 그 애 모습이 자꾸만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굳은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어색하게 주고받다가 도망치듯 차에서 내린 유정에게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다.

먼저 연락을 해보려 해도 승효에게는 마땅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째 이렇게 끌면서... 톡, 톡, 애꿎은 휴대폰의 검은 화면만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다음 일정을 쫓아다니고. 또 다음 회의에, 다음 결재.

 

나만 너무 그때의 ‘우리’에 머물러 있었나.

 

오랜 실적 부진으로 회장이 벼르고 있던 화정로지스는 하루아침에 사장부터 본부장급들까지 전부 물갈이되었고, 비서실장 구승효를 사장으로 앉혀놓았다. 갑작스럽게 사장으로 출근하자마자 예전 본부장이 잡아놓은 미팅부터 참석해야 했다. 그렇게 가장 처음 이 회의실에서 맞닥뜨린 사람이 한유정.

스무 살 그때 동그랗게 웃던 얼굴은 조금 갸름해지고 해사한 밝음은 사회적 격식을 갖추느라 많이 가려지긴 했지만, 그대로였다. 그 애는.

난 많이 변했는데.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감상이었다. 유정을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니까. 사무적으로 내민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하고,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액수의 돈이 달린 대화를 기업 대 기업으로 나누는 내내 그랬다.

‘화정그룹의 개’로 살게 되면서 흑자와 성과에만 집착하는 인생에도 숨구멍이 필요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친구라는 존재 덕분에 싱겁게 웃을 일도 많았던, 구승효가 여유라는 걸 가질 수 있었던 스무 살 그때가 너와 함께 선물처럼 찾아온 것 같았는데.

같이 온 유정의 상사 눈치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다가 유정이 남기고 간 명함을 보고 저녁에 전화를 걸었을 땐, 남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서사가 또 하나 더해지는 기분마저 느꼈고.

 

그러니까 우리가 보지 않았던 10여 년의 세월을 단번에 뛰어넘어서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나 혼자서.

 

어쨌든 이틀 뒤면 경쟁입찰 프레젠테이션으로 다시 만날 것이고, 유정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추억 퍼즐 맞추기 따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비즈니스 관계에서 불필요한 연락을 먼저 해볼 명분은 더더욱 없다.

 

“......”

 

답을 찾지 못한 상념을 끝낸 승효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목에 두른 넥타이가 갑갑해 그저 사무실에서만이라도 느슨하게 풀고 있을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가,

 

“저기, 이거 두고 갔어.”

 

회사에서 들을 이유가 없는 누군가의 친근한 어투. 뒤에서 저를 톡톡 두드리는 손까지. 승효는 약간의 불쾌함을 안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고자료를 공손하게 내밀고 선 01학번 임선호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씨익 웃고 있다. 예전처럼 겉으로는 번지르한, 그 보기 좋게 꾸며낸 미소.

 

“오랜만이다 구승, 아, 사장님. 구승효 사장님.”

 

실례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무례했네요. 주위를 둘러보다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며 꾸벅 숙이는 행동까지. 기가 막히네. 상대를 도발시키면서 스스로는 돋보이려는 너무나 투명한 임선호의 의도가 같잖아 승효는 오랜만에 약한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어서.

그 바람 빠지는 소리마저 서글한 얼굴로 받아치며 빙글거리는 임선호도 보통은 아니지.

 

“안 그래도 사장님 발령 공지 보고 찾아봬야지 했는데, 바쁘시다고 하셔서 언제 인사드리나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기회가 있네요.”

“그랬습니까.”

“저희 본부 보고자료 꼭 챙겨가 주십쇼. 열심히 준비한 겁니다.”

 

챙길 가치도 없어서 그냥 두고 나온 건데. 하필 임선호가 그걸 다시 들이밀면서 저와 신임 사장과의 친분 과시용으로 이용해먹는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다시 작성해야 할 거 같은데.”

“아... 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죠? 원래 사장님은 경영학과 최고 브레인이셨잖아요.”

 

대화 내용을 알 턱이 없는 다른 임원들이 스쳐가며 사장과 독대 중인 임선호의 얼굴을 한 번씩 꾹 눌러볼수록 의기양양 펴지는 어깨도 꼴 보기 싫네.

역시 이 새끼는 예전부터 이중인격 같은 가식이 재수가 없었어.

 

“벌써 그게 몇 년 전인지. 우리 인적자원관리랑 또 무슨 수업을 같이 들었죠? 마케팅 원론?”

“......”

 

자연스럽게 승효의 바로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걷던 임선호가 기어코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타면서 말을 붙였다.

피곤하다. 둘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경영지원본부장의 미묘하게 확대되는 동공을 보는 게 임선호의 목적이었을까. 박성욱의 문자부터 시작해서 오늘따라 옛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안 좋은 방향으로.

 

“그리고 재무관리도 같은 교수님 아니었나요?”

“어, 맞아요! 강석호 교수님.”

“오픈북 시험 치다가 단체로 컨닝한 게 들켜서 재시험 치게 만들었던 원흉이 임선호 선배님네 무리였습니까? 오래돼서 기억이 확실치가 않네요.”

 

아. 실례. 회사에서는 임선호 과장이라고 격식 차려 부르겠습니다. 그게 서로 편한 거 같아서.

삽시간에 벌겋게 상기되는 임선호의 잘난 낯을 뒤로하고 승효는 먼저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유치하게 나오는 상대방을 똑같이 유치한 방법으로 꺾어주니 며칠 내내 지끈거렸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떡하지, 왜 하필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택시에서 발표 자료를 최종 점검하던 유정이 가방을 뒤져 찾아낸 약봉지를 뜯고 물과 함께 급하게 삼켰다. 안 먹고 버티려고 했는데 열이 오르면서 핑핑 도는 시야 때문에 결국 약을 먹었다. 삼킨 약이 여전히 목구멍에 걸린 느낌을 무시하면서 다시 서둘러 자료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한과장. 정말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그럼요. 약 먹어서 괜찮아요.”

“김대리가 대신 발표해도 될 텐데.”

“내 수명이랑 바꿔 키운 내 새끼니까 마무리도 제가 해야죠.”

 

하긴. 자기가 이것 때문에 좀 고생했어야지. 사람 좋은 김차장이 유정의 어깨를 도닥이며 끄덕였다.

 

“택시에서라도 눈 좀 붙여. 그래도 오늘 PT 끝내고 나면 홀가분하게 털겠다.”

“에이. 우리 제안이 채택되면 다시 달려야죠.”

“한유정 과장 되게 자신감 넘치네? 별로 기대 안 한다더니.”

“...그래도 끝까지 해보긴 해야, 콜록, 콜록.”

“으이구. 이제 말 그만하고 좀 쉬어.”

 

아. 이젠 기침까지 터졌어. ...안 그래도 화정로지스 사장을 정면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에 껄끄러운데 그 사장님이 지적한 부분들을 다시 죄다 뜯어고치려니,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줄이면서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 조절도 결국 프로의 영역이지. 누구 탓을 하겠어.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발표를 미루고 싶지는 않아. 깨져도 내가 깨지고 혹시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그 애 앞에는 내가 서고 싶어.

 

“그 새로 온 사장이 대학 동기라면서. 잘 봐주고 그런 거 없데?”

“하하... 뭐. 별로 안 친했어요.”

 

대충 둘러대면서 마음 한구석이 요란하게 찔렸다. 하지만 저 말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안 그러면 진짜 백번 천 번이라도 승효에게 전화해서 매달렸을 거다. 힌트 좀 더 줘. 이렇게 바꿔봤는데 좀 어때? 야. 자꾸 마음에 안 든다고 할 거면 네가 직접 고치던가.

근데 우리가 조별 과제 하던 시절도 아니고. 오랜만에 연락 좀 닿았다고 다짜고짜 예전처럼 매달리면 안 되는 거잖아.

 

“그것도 그래. 생각해 보면 대학 때 친구들은 좀 거리감이 있지. 이상한 사람도 많더라.”

 

꼭 그렇지만은 않던데. 남슬기나 김재우처럼 대학에서 만나서 평생 이어질 우정도 있더라고. 물론 이상한 사람도 있었지. 박성욱처럼. 웩. 와인바에서 맞은편에 앉아서 유정에게 자꾸 들이밀던 기름 번질거리는 얼굴이 떠올라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구승효도 있고.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그런 사이.

그래서 우린 뭐였을까. 그때의 나와 너는.

내가 너에게. 너는 나에게. 뭐였는데.

 

이제 진짜 말 안 시킬 테니 푹 쉬라는 김차장의 권유에도 유정은 보고자료 넘기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한번 시작된 잡생각을 끊어내기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의 구승효가 오버랩되면서 여전한 부분과 달라진 점을 곱씹는 짓을 멈출 방법은, 곧 있을 발표에 집중하는 것뿐이었으니까.

 

 

 

 

L유통의 발표가 끝났나 보다. 쏟아지는 박수 세례에 옆 대기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던 유정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반응이 좋은 걸 보니 잘 했나봐, L유통. ...내가 준비한 건 이미 구승효 사장에게 한번 거절당한 거나 다름없는데. 이걸로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그냥 그날 승효와 같은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는데. 모르는 게 약이라고. 이제 와서 이런 후회해 봤자 자신감만 갉아먹을 텐데.

그러다가 어영부영 회의실로 들어가, 앞에 서서 가장 상석의 구승효를 보자마자 차라리 후회가 낫다는 심정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M백화점 식품사업팀 MD 한유정입니다.”

 

단숨에 인사를 뱉어내니 장내의 집중력이 유정에게로 쏠렸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네.

 

고개를 숙이고 서류만 훑어보는 단정하게 넘겨 빗은 구승효의 포마드 머리가 무심했다. 이유 모를 서러움이 울컥 올라오려 하는 걸 억지로 누르는 게 더 힘들다. 열인지 부끄러움인지 명치 아래에서부터 묵직하게 번지는 열감 때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까 먹은 감기약도 소용없나 봐.

 

“시작하시죠.”

“...네.”

 

무관심을 무관심으로 대응하며 유정은 다른 청중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다행히 프레젠테이션은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갔다.

발표는 짧게, 최대한 임팩트를 주고 오히려 질문을 최대한 많이 유도해서 화정로지스 임원들이 내 프로젝트에 대해 몇 번 곱씹을 시간을 주자. 이게 유정 나름의 전략이었고 그게 통했는지 짤막한 발표 후에는 화정로지스 임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상 질문을 수도 없이 쥐어 짜내고 답변을 준비했으니 그것도 꽤 술술 풀렸다. 뒤에 서서 부지런히 질문을 받아 적던 김차장이 답변하는 유정과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척 치켜세워준다. 분위기 괜찮은데.

 

“우려하시는 규제기관의 승인에 대해서는-”

 

아... 

막힘없이 대답하던 유정의 말이 갑자기 멎었다. 순간 휘청이는 다리가 어찔했다.

왜 이러지.

유정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답변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

어지러워.

쓰러지지 않으려 강연대를 붙잡고 버틴 손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렸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청중들의 모습이 흑백으로 번져 보였다. 삐이- 약하게 귓가를 맴도는 이명까지.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려는 다리를 애써 곧게 펴냈더니 몸이 후들거렸다.

 

“답변이 준비가 안 됐습니까? 그럼 다른 질문을 할까요?”

 

사회자도 다른 사람들도 그저 유정이 대답을 못 해서 그런 줄 알고 대충 넘어가려는 분위기. 그게 아닌데...! 초조하게 시선을 돌리다 가장 멀리 앉은 승효와 눈이 마주쳤다. 팔짱을 끼며 비스듬히 떨어지는 고개로 유정을 바라본다. 별로 도움은 안 되네.

콜록, 콜록! 긴장해서 그런지 목이 메어와 기침까지 터졌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을 못 잇겠어! 어서 다음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데...

이미 한 번 틀어진 청중들의 집중력은 M백화점에 대해 남은 기대치마저 조각조각 흩어냈다. 그저 길어지는 시간을 지루해하며 다음 팀 제안 내용이나 들어보고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보다 못한 김차장이 대신 대답해 보려 앞으로 다급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어수선하던 분위기에서 툭 던져진 날 선 목소리.

 

“예, 회장님.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예.”


승효가 조금은 요란한 몸짓으로 벌떡 일어섰다. 귀에 붙인 휴대폰을 감싸 쥐고 다급하게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어... 지금 사장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신, 관계로. 조금 멈췄다가 구승효 사장님이 다시 오시면 M백화점 프레젠테이션을 재개하겠습니다.”

 

당황한 사회자가 승효의 수행비서와 눈짓 손짓 주고받다가 어쩔 수 없이 중단을 선언했다. 당연하지. 최종 결정을 내릴 사장이 없으니까.

오히려 다행이야. 덕분에 김차장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유정에게는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생겼다.

 

“한과장, 자기 열이 많이 난다. 그냥 앉아 있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커버 쳐볼게.”

“...죄송해요 차장님.”

“이게 무슨 죄송할 일이야? 그런 생각 마. 어휴. 신사업 하나 따내 보려다 사람 잡겠어.”

 

유정은 식은땀이 비죽 솟은 이마를 손등으로 콕콕 찍으며 쓸어내렸다. 흐름이 깨져버린 이 발표를 살려낼 수 있을까. 불안한 심정으로 입술만 짓이기던 유정은 곧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푹 뱉었다. 따끔거리는 목에서 기침도 자꾸 터지려 해서 꾹 눌러내고 있는데,

 

“미안합니다. 본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남은 일정은 다 취소합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M백화점부터 다시 하죠.”

 

회의실로 돌아온 승효.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싸늘하게 던지더니 재킷만 챙겨 곧장 도로 나가버렸다.

 

어... 예, 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빠진 모두를 대신해 사회자가 수습에 나섰지만 이 사상 초유의 일방 취소 사태는 묵직한 파장으로 번졌다.

아마 다들 쌍욕만 안 했을 뿐이지, 어이없기는 모두가 한 마음일걸? 승효의 행동 때문에 대체 몇 개의 회사들이 다시 번거롭게 움직여야 할까? 기업 대 기업으로 비즈니스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허, 뭐? 이런 매너 없는 경우가 어딨어!”

“......”

“사회생활 20년 가까이했어도 경쟁입찰 PT 중간에 파투 내고 자리 뜨는 대표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우리가 만만해? 지들이 갑이야? 파트너면서. 초임 사장이라더니 수준 하고는. 소문대로 지 멋대로네. 김차장이 옆에서 유정의 몫까지 끌어다가 분통을 터트리는 동안, 유정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이게 저에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 계산해 내기 바빴다.

총 네 기업이 제안서를 냈고, 오늘 두 팀밖에 발표를 못 했지. 다음에 우리와 또 다른 곳이 다시 발표를 한다고... 최종 결정은 그때 내린다는 거잖아. 크게 불리한 조건은 아닌데?

무엇보다도, 나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생겼다는 거네. 오늘의 망한 발표를 만회할 기회가.

그렇게 생각하니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도 몸도 다시 달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구승효를 걱정해 줄 여유도 생겼고. ...뭐 얼마나 다급한 일이길래. 괜찮을까, 쟤는.

 




 

“유정아! K대 한유정 맞지?”

 

회사로 다시 복귀하기 위해 1층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데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격하게 아는체한다. 읍! 하마터면 육성으로 당황한 티를 내지를 뻔했다.

...오늘 정말 안 될 날인가 봐. 임선호 선배까지 만나네.

하나도 반갑지 않은 잘생긴 쓰레기가 유정과 김차장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진짜 이게 얼마 만이야.”

 

저쪽에서 이미 예전 일은 다 잊은 듯 철판 깔고 싹싹하게 응대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나만 속 좁은 사람 되잖아. 유정도 한껏 밝은 표정을 꾸며내야 했다.

 

“너 M백화점 다닌다며? 성욱이한테 얘기 들었어. 신규 파트너 입찰에 신청했어?”

“네, 오늘 PT 하러 왔어요.”

“대박, 아. 진짜? 너무 아쉽다! 그거 우리 본부에서 주관하는 거잖아.”

 

너가 담당인 걸 미리 알았으면 힌트라도 줄 수 있었는데. 대놓고 흘려대는 그 말에 옆에 선 김차장이 눈을 번뜩이며 끼어든다.

 

“한과장 친구예요? 아는 사이?”

“아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대학 선배입니다. 화정로지스 계약심사팀 임선호입니다.”

“어머, 한과장 로지스에 인맥이 장난 아니다. 로지스랑 우리랑 잘 될 인연인가 봐!”

 

그렇게 말하면서 유정의 팔을 끌어 슬쩍 임선호를 향해 더 가까이 밀어댄다. 아니 차장님,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참... 생각하시는 그런 정보 주고받을 사이가 아닌데요. 이 인간하고는.

 

“유정아. 회사 바로 복귀해야 돼?”

“그래 그래. 두 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얘기 좀 더 하다가 와. 한과장, 나는 먼저 갈 테니까 한과장은 얘기 나누고 그냥 곧장 집으로 가!”

“차장님 그냥 같이-”

“나 이런 것도 못 봐주는 꼰대 만들지 말고.”

 

눈짓으로 뭐 사소한거 하나라도 건져오라는 신호까지 보낸 김차장은 서둘러 둘만 남겨두고 떠났다.

미치겠네. 컨디션 생각하면 당장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진짜 임선호 선배한테 얻어 낼 정보라도 있을까봐 그것도 못 하겠고. 먹고 살기 힘드네 진짜.

 

 

 

 

결국 그 희미한 희망 하나만 바라고 열이 끓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임선호와 1층 카페에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회사는 다닐만해? 백화점 어때. 여기보단 재밌겠지.”

“그냥저냥 그래요. 팀마다 분위기가 워낙 달라서.”

“식품이 제일 빡세다며.”

“워낙 신경 써야 할게 많으니까요. 고객도 협력사도 예민하고 깐깐해서요.”


뜨끈한 유자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드문드문 이야기를 이어갔다. 흔하디흔한 대한민국 30대 직장인의 일반적인 이야기 주제들로. 주식, 여행, 드라마, 유튜브, 아 모르겠고 어쨌든 지네 회사가 어떤 형태의 신규 사업을 원하는지, 제일 가려운 부분이 어딘지 그런 도움 될 이야기만 쏙 빼고.


“넌 계속 백화점 다닐 거야? 연봉 올리려면 이직 한 번 할 때 안 됐나.”

“아직은 생각 없어요. 쭉 있다 보니 다닐만해서 그런가 봐요.”

“난 여기 이제 질렸어. 괜히 화정 장학생 해가지고 다른데 취업도 못 해보고 화정로지스에만 10년을 있었네.”

“선배님이 대단하신 거죠. 화정 장학금 그거 아무나 받는 거 아니었잖아요.”

“난 슬슬 여기 좀 벗어나서 몸값 띄울 준비하려고.”


어쩌라고. 저렇게 설치는 사람 치고 진짜 퇴사하는 사람 못 봤다. 하하, 영혼 없이 웃어주는 것도 이제 정말 골이 흔들려서 못 해 주겠어.


“화정 장학생 중에서는 너희 동기 구승효가 대박 났지. 알지? 우리 사장으로 왔어.”

“네… 안 그래도 오늘 승효 앞에서 발표했어요.”

“걘 참 신기해. 대학 때도 사실 잘난 거 하나 없던 애가, 맨날 뚱하니 입 꾹 닫고 분위기나 어둡게 만들고. 강의 때도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뭐 하나 좋게 넘어가는 게 없고 교수한테 따박따박. 지금 생각하면 찐따가 출세했네.”

“......”

“아, 내가 너무 네 동기 험담을 했나? 좀 봐주라. 원래 직장인들은 사장 욕하는게 낙이잖아.”


빈정거리는 잘 생긴 얼굴 한구석에 어떻게든 구승효를 제 아래로 깎아내리고 싶은 일그러진 본심이 훤히 보인다. 임선호에 대해 얕게 남은 인간적인 호감마저 신물처럼 확 뱉어내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을 좋아했을까.

유정은 남은 유자차를 마저 비워내고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정말 건질 거 하나 없는 이 자리를 떠야겠어.

뒤이어 일어선 임선호가 갑자기 제 명함을 내민다. 그럼 이쪽도 줘야지. 유정은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백을 뒤져야 했다.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의 진동. 선명하게 뜨는 화면 속 '구승효' 이름 석자. 꽤 오래간 혼자 진동하던 휴대폰은, 유정이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네주고 급하게 폰을 집어 드는 타이밍에 멎었다.


“중요한 일 아냐? 신규 프로젝트 때문에 전화했나?”

“네? 아… 글쎄요.”


언제 또 그걸 봤데. 유정은 휴대폰을 꾹 쥐고 임선호와 나란히 정문 쪽으로 걸었다. 그러게, 왜 전화했을까 승효는. 하지만 임선호가 옆에 없었더라도 반갑게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어.


“하긴. 구승효가 친구라고 유도리 있게 뭘 해주겠냐. 뭐… 지 애인 챙기느라 바쁘겠지.”

“......네?”

“몰랐어? 같은 업계 사람일걸? L유통에 누구 딸이랬나.”


아, 이건 그냥 카더라니까 아는 티 절대 내지 말고. 우리 회사 안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거라. 급하게 덧붙이는 임선호의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L유통… 아까 그… 아아. 만나는 사람이 있구나. 구승효.

전혀 몰랐어.






무슨 정신으로 큰길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다. 택시를 잡으려 손을 휘젓다가 이내 힘이 빠져 그마저도 포기했다. 근데 꼭 매 순간마다 정신을 차려야 하나? 그냥 좀 놓으면 어때. 의식적으로 머릿속을 비우려는 생각으로 꽉 찬 유정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어. 몸도 아프고. 성과와 보람 따위는 없는 직장 생활에. 기 빨리는 만남. 그리고-


“헉!”

“왜 전화 안 받아.”


손끝에 억지로 걸린 핸드백과 노트북 가방을 단번에 낚아채어 드는 승효. 어느새 유정의 코앞에 선 세단 뒷좌석으로 거칠게 가방들을 집어넣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어…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더니 예민하게 빚어진 승효의 눈썹이 까딱, 다시 조수석을 가리킨다.  


“뭐, 뭐 하세요?”

“타. 빨리.”


뒤에 차 오잖아. 안 탈 거야? 그 말과 동시에 벌써 두어 번 울리는 뒷차들의 경적소리. 유정은 흠칫 놀라며 얼떨결에 조수석으로 몸을 넣었다.


“......”

“집으로 바로 갈 거지? 몸 안 좋아 보이던데.”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돌리는 승효의 날선 동작들이 어딘지 싸늘했다.  


“아까… 본사 가신 거 아니에요?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없어. 그런 거. 근데 너 왜 존댓말 해.”


그렇게 묘하게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앞만 보고 정색하는데 그럼 거리감이 안 느껴지겠니. 이번엔 또 왜,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유정은 굳게 잠긴 승효의 옆모습을 보다 아까처럼 울컥 올라오는 이유 모를 서러움을 삼키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다시 승효의 차가운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바싹 말라 오는 입술을 살짝 축여봐도 긴장한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네가 뾰족하게 구는 이유라도 알면 좋을 텐데. 오히려 지금 마음껏 바락바락 성질부리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은 나거든?


“미안한데, 저기 지하철역 앞에서 세워줄래요?”

“그냥 타고 가.”

“불편해서. 내리고 싶은데요.”

“왜. 나랑 같은 차는 불편하고, 임선호와 대화하는 자리는 유쾌한가 봐?”

“...뭐?”

“컨디션이 그 꼴이면서 임선호랑은 오랫동안 잘도 버텼네.”

“......”


할 말이 없었다.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도 웃기잖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아니, 왜 이렇게 꼬인 건지도 모르겠어. 나 아픈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승효와 말 섞기를 거부했더니 내리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숨 막히는 침묵만 그득한 차 안. 유정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비꼬느라 격양되었던 승효의 호흡도 점점 제자리를 찾았다. 


“음악 들을래?”

“......”

“약은. 먹었어? 아님 그냥 지금 병원으로 갈까.”

“승효야.”

“어.”

“내가 못마땅한 이유를 그냥 알려주면 안 돼?”

“...왜 그렇게 생각해.”


응? 한유정. 내가 너를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아?

한결 누그러진 톤으로 유정을 보다 핏 웃는 그 애는 그것대로 또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엉망인 속이 뒤집히려 했다. 그때 차 안에서 날 보며 엉망이라고 또박또박 짚어주던 네가 떠올라. 나름 많고 많은 추억 속 모습의 우리 중에서, 하필 왜 그게 다른 것들보다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떠오를까.

나는 너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차는 어느새 유정의 집 앞 골목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태워줘서 고마워.” 스치듯 말하며 가볍게 한숨을 쉰 유정은 뒤에 놓인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짧은 팔로 열심히도 버둥거렸더니 옆에서 긴 팔이 쑥 다가와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다가 쓸데없이 볼에 스칠 뻔한 승효의 콧날 때문에 짜증이 났다.


“유정아.”

“......”

“전화해도 돼?”


이번에 긴장으로 말라가는 입술을 축인 쪽은 승효였다.


“아니.”


애인 있잖아 너.


탁, 조수석 문 닫히는 소리가 단호했다. 

유정이 대문을 열고 현관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차가 다시 출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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