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아현은 어제 아침부터 지쳐있어 하루 종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방사선 치료 후 저녁은 전혀 입에도 대지 않고 잠만 잤다. 지석이 사온 오렌지 주스 두 캔이 먹은 음식의 전부였다.



지석은 아현의 체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채혈이 끝나고 아침 식사만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현은 어제 하루를 푹 자서 그런지 조금 기 운을 차려 있었다. 채혈해주는 간호사가 오자 어제 바늘 채혈한 분은 주사를 아프게 놓았다며 종달새마냥 재잘 거렸다.



“어제는 완전 기절해서 얌전히 채혈 받더니 아팠어?” 

“응, 진짜 기운 있었으면 화냈을 거야.”

“진짜, 다음에 그 분오면 내가 혼내 줄까?” 

“으이구, 애 취급은.”



하지만 아현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여전히 실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고 있는데 음식 향이 풍겨왔다.



“어 밥시간인가 보다. 밥 먹자!” 

“별로 안 먹고 싶은데…….”



밝던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너 어제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그렇긴 한데…….”

“오늘은 스프가 나왔네.”

 


지석이 아현의 아침 식판을 들고 오고 밥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고소한 스프 냄새가 배를 자극했다. 아현보다 자신이 더 식사에 대한 욕구가 솟 구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지석 또한 아현과 마찬가지로 어제 식사 한 끼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 저녁때 편의점에서 사먹은 김밥 이 어제 먹은 것의 전부였다.



“자, 스프부터 한입 드실까요?”



지석이 숟가락에 스프를 반 정도 올려서 아현에게 가져다주었다. 다행히 아현은 헛구역질도 하지 않고 지석이 주는 음식을 잘 받아먹었다. 지석은 아까도 느낀 것이었지만, 오늘 따라 아현이 참으로 작은 새 같다고 생각 되었다.



“진짜 다행이다. 오늘 다 먹었어.” 

“나 예뻐?”

“점심도 이렇게 잘 먹으면 한번 생각해볼게. 잠깐만 기다려. 이거 내놓고 가글하자.”



아현은 휴지로 가볍게 입가를 훔쳐내고 있었다. 지석은 식판을 들고 밖 으로 나왔다. 여전히 배가 고픈 것은 여전했지만 아현이 잘 먹는 것을 보니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번 방사선 치료는 조용하게 지나가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늘에서 그가 정신을 차린 상이라도 주는 것이 아 닌가 생각했다.



식판을 내려놓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현이 통을 붙들고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그녀에게 뛰어 왔다.



“현아? 괜찮아?”



지석이 아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현의 얼굴이 울상이 되며 붉어졌다. 통 뿐만 아니라 아현의 손에도, 병원복의 윗도리에도 아침식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통을 움켜쥐고 있는 팔이 곧 부러질 것 같이 후들거렸다. 그동안 아현이 토하는 것을 전혀 못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옷의 앞섬까지 적실 정도는 처음 보아 지석도 어지간히 놀랐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당사자였다.



지석은 먼저 통을 밑에 내려놓고 아현의 무릎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아현은 너무도 가볍게 들렸다. 몸이 들어 올려 지자마자 아현은 입을 가리고 눈물을 터트려 버렸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지석은 아현을 변기 위에 앉혔다.



지석은 먼저 아현의 손을 당겨 이물질들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 차례로 얼굴을 씻어냈다.



잡고 있는 아현의 손목이 앙상했다. 아현이 울먹이며 제 손을 빼내기 위 해서 힘을 줬다. 전에는 그 조그만 손으로 지석의 등을 후려칠 때 절로 아파 죽겠다는 소리가 나왔었는데, 이제는 살짝 힘주고 있는 손에서 조차 제 손을 빼내지 못했다.



지석은 아현의 팔을 걷고 흘러내린 죽 모양의 형체들을 닦아 내렸다. 팔 뚝에도 뼈만 앙상했다. 지석의 손목보다 아현의 팔뚝이 더 가늘어 보이기 도 했다. 아현이 갑자기 지석의 손을 뿌리쳤다. 눈이 빨갰다.



“아……. 현이, 옷도 엉망이네. 잠깐만.”



지석은 아현을 다시 변기에 앉힌 채 밖으로 나왔다. 새 병원복을 받아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현은 뭘 그리 생각하는지 거울 속의 제 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러고 있는 아현을 보자 지석은 비쩍 마른 그녀의 몸에 마음이 아파졌다.



지석은 아현에게 가까이 가서 들고 있던 환자복을 건넸다. 자신의 모습 을 본 것이 분명한데 아현은 그저 계속 거울만 쳐다보고 있다. 아현은 보 기 싫은 눈을 하고 뚫어지게 제 모습을 보았다. 결국 지석의 얼굴도 굳어 져갔다.



지석이 화장실 문을 닫았다.



“아현아. 옷 갈아입자. 갈아입고 내가 편의점가서 통조림 음식 사 올 테니까. 그거라도 먹자.”



아현은 말없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먹어봤자, 또 토 할 텐데.”

“그럼 쥬스나 마실 것이라도 먹자.” 

“싫어.”



지석은 이 상황이 너무도 상투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들은 꼭 한번 씩 지금 이런 대화를 이어갔다. 지석은 항상 그런 장 면이 너무 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실제로도 사람들이 그렇게 흔하고 상투적이게 굴기에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흔하고 상투적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음 장면이 절로 눈에 그려졌다. 아현에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았 지만 지석은 어쩔 수 없이 그 대사를 하게 될 것이다.



“너 이럴 때 마다 얼마나 속상한줄 알아?”

“그러면, 나 떠나면 되잖아. 왜 멍청하게 계속 붙어있는데. 기증자도 안 나타나. 항암치료 하는 결과도 신통치 않아. 이렇게 되면 어차피 죽을 년 옆에서 뭐하는 거야.”

“그만해라, 우아현.”

“백지석, 너야말로 그만해. 너 이러는 거 지쳐.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너무도 상투적이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말들이 그대로 둘 사이에서 오 고 가고 있었다. 또 지석은 그 주인공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화가 나서 말을 잃었다. 어제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했다고 생각 했는데, 어떻게 저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없다면 금방이라도 모래성 마냥 무너질 모습 을 다 아는데 자신을 떼어내려고 제 마음에 상처를 내는 아현의 모습에 화가 났다.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 면서 스스로 아파하는 아현이 싫었다.



그는 아현이 어제와 같이 고약하게 굴어놓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보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석이 아팠다면 아현도 똑같이 그처럼 행동했 을 텐데, 이런 것이 미안해서 그를 떼어놓으려는 것을 보니 마음이 복잡 해졌다. 아현이 자신을 그만큼 가까운 사이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상황을 돌려 생각하면 자신도 아현이 자유로워지길 바 라는 마음에 지금의 아현처럼 행동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긴 침묵 끝에 지석이 대꾸했다. 


“내가 바보냐?”



아현은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현도 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너 내가 보고 있는 게 싫다고 했지? 등 돌리고 있을 테니까. 갈아입어.”

“싫어. 신경 꺼.”

 


지석은 계속해서 못된 말을 내 뱉는 그 입술이 미웠다. 좋은 말만 해도 모자라는 이 시간에 하지 말란 것은 다하고 있으니 속이 미어터진다. 억 지로 화를 참고 있으니 뒷목이 뻣뻣해 오면서 또 오른쪽 머리가 지끈해진 다. 인상을 쓰고 손으로 목을 꾹꾹 눌렀다. 아현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지석은 또 아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지 이제는 감 조차 오지 않았다.



“곧 죽을 사람 바라보지 말고 네 삶 살라고. 너 나 아니었으면 그 밴드 계속해서 정말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잖아.”



젠장.

절대로 그녀에게 화내고 싶지 않은데, 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겨우 내려간다.



지석이 아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 아현은 그 큰 눈을 치켜뜨고 지석을 노려보았다. 평소에는 강아지 같이 예쁘던 아현의 눈이 오늘은 미웠다.



“좋은 말 할 때, 얼른 갈아입자. 한마디만 더해봐 너.” 


“싫어.”



결국 지석의 인내심도 바스러졌다. 지석은 아현이 못된 말을 하는 것보 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이 상황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석이 떠 나갈 것이라 생각하는 아현이기에 먼저 그 말을 뱉고 있는 셈이다.



병은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개인이 지니고 있던 온 갖 정상적인 사고와 심성 또한 병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뭐하는 거야?”

“가만있어!”



지석은 아현에게 다가가 단추를 풀어 재끼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수록 아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지석의 손아귀에 힘든 더욱 세게 들어갔다.



아현이 지석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그 고사리 같은 손은 일말의 아픔조차 주지 않았다.



“손맵기로 유명한 우아현 다 죽었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단추를 풀어 헤치는 지석의 손에 아현의 토사물이 묻기 시작했다. 아현의 얼굴이 창피함과 분노로 새 빨게 졌지만 지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손에 묻은 건더기들이 더럽지도 않았다. 그저 아현의 앙상히 마른 허리가 안쓰러웠다. 지석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상의를 벗기자 앙상하게 골은 아현의 상체가 보였다. 병 치료를 시작하 고 아현의 맨 몸을 보는 것을 처음이었다.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은 부끄 럽다면서 늘 지민의 손을 빌리곤 했었는데, 이렇게 마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현이 몸을 둥그렇게 웅크렸다. 지석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두터운 아랫입술이 윗니에 눌려 봉긋하게 튀어 올랐다.



지석은 연이어 환자복 바지의 줄을 풀었다. 줄을 풀자마자 바지가 맥없 이 흘러내렸다. 33 반?, 44 반?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연예인들 보다 아현이 훨씬 더 마른 것 같다.



“미안해…….”



눈물은 참고 있자니 목소리가 금세 잠겨버렸다. 지석은 또 아현이 자신의 울먹임을 눈치 채고 속상해 질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말을 하지 말 껄 그랬다고 생각했다.



면역력이 0에 가까운 상태인 아현이 감기라고 걸릴까 두려워 빨리 병원 복을 입혔다. 윗도리가 엉덩이까지 늘어지는 모양이 마치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던 아현, 아니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초등학생의 아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함께하던 추억이 떠올라 단추를 잠그던 지석의 손이 허공 을 가른다.



공기가 차가운지 아현이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과거로부터 돌아왔다. 마저 단추를 채우고 바지까지 입히는데 잘못 만지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이 온몸의 뼈가 앙상했다. 약의 후유증으로 얼굴은 부어서 이토록 마른 것이라 인식하지 못하였다.



“휴…….”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어색했다. 옷이 다시 입혀지자 지석의 가슴팍을 쳐대던 아현의 손도 멈추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벅 차서였다.



그는 순식간에 지쳐버린 것 같았다. 전에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목욕 시켜줄 때와 같았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강아지를 씻기던 것 뿐 이었는 데 정작 지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정신적으로 피곤해진 것이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아현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그는 그대로 아현의 허벅지 위에 고개를 뉘었다. 자신의 볼에 그녀의 피부 밑의 딱딱한 뼈가 닿는 것 같았다. 지석의 감정이 가라앉은 것을 알았는지 아현 또한 얌전 해졌다.



“아현아. 미운소리 하지 마. 난 너 아픈 것 상관없어. 아직 너 그대로 잖아. 근데 말이야, 난, 네가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네 스 스로 상처를 입히는 것. 그건 너무 싫어. 차라리 내가 밉다고 말해. 너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 말고.”

“…….”

“난, 어디에도 안가. 내가 어딜 가? 나 초등학교 5학년, 17년 전 그 때 부터 오로지 너만 좋아했는데.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니. 현아…….”

“흡…….”

“내 앞에서 토하고 이러는 게 창피해서 그래? 난 말이야, 네가 토해서 온 옷을 더럽혀 놓아도, 그 것보다 가늘어진 네 손목에 눈물이나. 이제는 한 손으로 잡힐 것 같은 네 팔뚝을 보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내가 미워. 멜로 영화에서처럼 그저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네가 약에, 치료에 죽을 것 같이 몸을 떠는 걸 보면 심장이 바닥까지 가라앉아.” 

“지석아…….”

“내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네가 아픈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걸 알아. 그래도 네가 알아 줬으면 좋겠어. 난 절대 네 곁에서 떠나지 않 는다는 걸.”

“백지석…….”



아현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지석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볼 살이 없어 광대가 유난히 두드러져있다.



“우리 현이, 너무 야위었다. 전에도 말랐는데, 이제는 진짜 해골이 되 어 버렸어. 현아. 그러니까 우리 같이 조금만 더 힘내자. 응?”



아현이 말없이 지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오랜만에 위로 받은 기분이 들어 그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늘 어깨를 빌려주고, 버팀목이 되는 것이 가끔은 숨에 벅찰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아현의 손길 한 번에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느꼈다.


너는 내게 공기고, 생명이고, 살아온 삶이다.



결국 눈가가 그렁그렁 해졌다. 이럴 때 일수록 울면 안 된다고 늘 다짐 해 왔는데, 결국 지석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픈 것은 아현이고 울고 싶은 것은 그녀라고 생각했기에 늘 눈물을 마음에 쌓았다. 그 눈물이 고 름이 되어 마음을 썩혀갈 때도 지석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환자복에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드니 아현이 다시 착한 눈동자로 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아프지 않고 그 옛날처럼 행복한 두 사람만이 있다면 그 곳이 설령 지옥이라도 그녀를 지키며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그 곳이 병원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이 아닌 곳 이라면 아현이 아프지 않을 것이니까.



아현이 갑자기 지석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 정말 너로구나, 아프지도 않고 마냥 해맑던 너구나. 



“지석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나만 힘든 줄 알았어.”



지석은 눈물 때문에 눈앞이 흐렸지만, 울고 있는 아현의 모습이 눈에 선 했다. 결국 자신의 울음이 아현을 울리고 말았다. 그 것이 속상해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병원 화장실, 한명은 변기 위에 앉고 한명은 타일에 무릎 꿇고 있는 이 상황은 장소도 사람도 너무도 처량했다.



“그동안 우리 둘이 너무 서로만을 바라보며 행복해서 그럴까. 그래서 하늘이 이렇게 시련을 주는 걸 거야.”



아현이 지석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 손길에 눈 밑이 간질간질해져 지석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그를 바라보던 아현도 미소 지었다.



“힘들지? 이제 들어가서 쉬자.”



아침부터 또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한바탕 난리를 치러낸 아현을 안아 올렸다. 어린 아이를 드는 것 마냥 가뿐하게 들리는 아현의 몸에 마음이 쓰 라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현이 귀여웠다. 하 루하루만 이정도만 되도 병원 생활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파하는 아현의 모습이 지금 그 얼굴과 겹쳐 흘렀다.



혹시나 아현이 또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챌까 두려워 억지로 눈을 휘어 웃었다. 웃을 때마다 좋아하던 지석의 휘어진 눈. 항상 아현은 지석이 웃을 때 마다 그 작은 손으로 지석의 눈을 따라 쓸었다.



“현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 귀엽다.” 

“치이. 언제는 내가 안 귀여웠나?”

“어쭈, 이게 요즘 귀엽다 예쁘다 해줬더니 진짜인 줄 아네?” 

“헐? 백지석. 이 나쁜 놈이? 내려놔! 내려놔!”



아현이 지석의 품에 안겨서 바둥바둥 거렸다.



“진짜 망태기에 씌워서 요걸 그냥 데리고 도망쳐 버릴까?” 



우리가 행복하던 그 때로.



또다시 과거에 빠져드려는 그 때 아현이 몸부림을 멈추더니 지석의 눈두덩이 위에 입 맞추었다. 지석은 그 순간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니,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정말로, 정말로 20대 초반 젊은 시절 자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그녀를 가뿐이 들어 올려 침대로 눕혀줄 때면 이렇게 입 맞춰 주던 아현이 떠오른 지금 지석은 그 어느 때보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백아현, 너 지금 나 유혹 하냐? 아오.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잔망스러운 게. 진짜 또 그래봐라 너.”

“왜?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아현의 팔이 야릇하게 지석의 목 뒤를 감는다. 지석의 뒷목에 닭살이 오 돌오돌 올라왔다. 갑자기 아현이 반대편 눈 두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지석은 피가 얼굴 앞 쪽으로 쏠리면서 점점 인내심이 끊겨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도 모르겠다. 도발한건 너야.”



지석은 아현의 입술 위를 도장 찍듯이 꾹 눌렀다. 최대한 끓어오르는 자신의 피를 억누르고 있었다. 아현의 거칠어진 입술이 느껴졌다.



자신의 입술이 다 덮어버릴 것 같은 조그만 아현의 입술.



그저 아현의 입술을 누르던 지석은 천천히 고개를 떼었다. 춉하는 소리 가 화장실 안에서 울리며 꽤나 야하게 들렸다.



“흐으.”

 


아현이 살며시 몸을 떨었다. 지석은 그런 아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석은 다시 입술을 옮겨 아현의 윗입술을 살짝 빨아 들였다. 마치 먼저 도발한 아현에게 복수라도 해주려는 듯, 거칠어진 그녀의 윗입술을 혀로 쓸어내렸다. 지석의 목에 두르고 있는 아현의 팔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 껴졌다. 항상 첫 키스같이 어린아이처럼 구는 아현의 모습에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다시 입술을 옮겨 아현의 밑 입술을 살며시 빨아들였다. 아현의 조그마 한 입술이 지석의 두툼한 입술 사이에 갇혀서 지석의 입안으로 따라 들어 왔다. 아현이 지석의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면서 지석은 더 깊숙하게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시 아현의 입술을 침범하려는 순간 지석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 젠장.”



그의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덕택에 놓고 있던 이성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급하게 지석은 입술을 떼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거칠었다.



아현의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지석을 계속해서 쳐다보자 다시 한 번 등 골이 서늘해졌다. 쀼루퉁하게 쳐다보는 아현의 귀여운 행동에 다시 한 번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아현이 지석의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놓았 다. 목 줄기에 닿는 아현의 차가운 팔뚝에 점점 마음이 안달복달해졌다. 지석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픈 사람을 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기가 찼다. 지석은 눈동자가 안쪽으로 들어갈 만큼 세게 눈을 감 았다 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아리면서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왜 그래?”



지석이 아현의 머리를 콩하고 박았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현은 제 이마를 쓰다듬으며 가짜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지석의 눈과 입술이 얇아졌다. 화내는 것 같았지만 입 꼬리 끝이 미묘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하, 진짜 너 한번만 더 나 유혹하면 다음에는 입을 묶어놔 버릴 거야. 이 백여우.”

“그럼 앞으로도 평생? 영원토록?” 

“아 진짜! 너 빨리 가서 잠이나 자!” 

“지금 아침인데?”



아현이 킬킬거렸다. 그는 그녀가 얄밉긴 했지만 마치 아프기 전 아웅다 웅하던 그 시간에 돌아간 기분에 행복해졌다.



그는 곧바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현을 안은 채 문고리 앞에 서니 아현이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오늘 하루 그녀를 안고 화장일 안팎을 오갔지만 그 감정은 완연히 다른 셈이었다.



아현을 조심히 침대 위에 올리고 나니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사람의 감정이 아픈 것을 막아줄 만큼 잠시나마 마약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을 알았다면 전부터 아현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 는 일에 애쓸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걱정해 주는 것이 아닌 정신적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이었다. 지석은 긴 병원 생 활에서 참으로 빨리 깨달았다고 자신을 자책했다.



“지석아, 나 책 읽을래.”

“오늘은 안 어지러워? 매일 글씨가 지렁이처럼 꿈틀 꿈틀 한다며.” 

“아니, 그래서 네가 읽어달라고.”

“내가?”

“응, 글씨가 꿈틀거리니 네 목소리로 들을래.” 

“그 정도 부탁정도야. 그전에 손 소독 부터하고.”



그가 손 소독제를 들고 오자 아현이 두 손을 쭉 내밀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매를 맞으려고 내민 것 같았다.



“오늘처럼 만 예쁘면 때찌 안 하지.”



투명한 젤 같은 소독제가 아현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 느낌이 차가운 듯 아현이 으흐흐 하며 몸을 떨었다. 그녀가 열심히 손을 비비자 소독약 이 번지면서 알코올 향을 퍼트렸다.



이제야 지석이 미소 지으면서 아현이 근 일주일간 읽던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어린 왕자.



몇 번 씩이나 읽고도 가장 좋아 하는 소설이었다. 발병 전 글 쓰는 직업인 아현은 무섭도록 다독했었지만, 아프고 난 이후로는 빈혈 증상으로 그 것도 오래 즐기지 못했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꾸역꾸역 읽던 것이었다.



아현이 읽다 접어 둔 페이지를 폈다.



“자, 읽는다. 어제, 101쪽 까지 읽었지? 큼큼. 난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난 벌써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 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시간 을 정하지 않고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부터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 는지 통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야. 의식이 뭐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 다. 어떤 날이 다른 날들과,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게 의식이야. 가령. 나를 쫓는 사냥꾼들에게도 의식이 있어. 그들은 목요 일이면 마을 처녀들과 춤을 추지. 그래서 나에게 목요일은 신나는 날이 야! 나는 포도밭까지 산보를 갈 수 있어. 하지만 만약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고 해봐. 모든 날이 다를 바 없이 다 같은 날일 테니 난 하루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할 거야. 이리하여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 다. 그러다가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오자 여우가 말했다. 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네 탓이야. 어린왕자가 말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찰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말을 멈춘 것처럼 머릿속도 하얗게 변했다.



그에게 있어 기다림이란 여우의 행복과도 같은 것이 아닌 마지막을 바라 보는 사람의 고통 같았던 것이다. 매일 새벽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잠들 어 있는 아현을 보면서 이 아이가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매일 아침 피검사 내용을 기다리며 백혈구, 적혈구 숫자 하나에 그날 하 루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기도 했다.



만남과 기약을 기다리는 여우와 달리 지석은 언제 찾아올 줄 모르는 고 통스러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주어 진 고통보다 컸다.



“지석아?”



머릿속 미래와 현재의 사이에 떠돌고 있는 지석의 시간 속에서 아현이 들어왔다. 얼마나 생각에 열중했던 것인지 책을 들고 있었던 것도 잊어버 렸다.



문득 시계를 보니 아침시간이 한참 지나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인식하고 보니 그 또한 허기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아직도 아현의 아침 식사가 오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책에 빠져있느라 아현을 굶기고 있었다는 것에 저 스스로도 놀랐다.



고작 책 한 장을 읽었을 뿐인데 갑자기 벌떡 일어선 그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휘둥그레졌다.



“왜……?”

“책 그만 읽고 밥 먹어야지. 뭐지, 오늘 왜 식사 아직도 안 가져다주시지?”

“뭐?”

“벌써 식사 시간 한참 지났다. 오늘 이상하네.” 

“아침……? 밥……?”



아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방금 전 아침 식사 후 그 난리를 쳤는 데 아직 식사도 안한 것 마냥 말하는 지석의 말투가 이상해서였다. 지석은 오히려 아현이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또 식사를 거 부하는 앙탈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지석이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가 아침에 먹은 것을 모두 다 게 워낸 탓에 그러는가 싶어서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 진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잠깐만 기다려. 식판 가지고 올게. 왜 오늘은 안 가져다주시지?” 



이미 복도에는 식판을 나눠주는 것을 넘어서 식사가 끝난 식판을 수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일을 완전히 지워버린 지석은 그 빈 식판 사이에서 아현의 밥을 찾으러 일어났다.



아침식사도 못한 아현이 배고파 할 것을 생각하니 지체할 수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현실은 방금 전 식사를 모두 게워내고 음식의 냄새조차 맡기 싫어하는 아현이다.



결국 밖으로 나가려는 지석을 막아선 것은 아현의 급한 부름이었다. 뒤를 돈 지석이 약간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또 식사 투정을 부 리려 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이상하게 굴고 있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밥 안 먹겠다는 얘기하면 화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래, 빨리 가져올게. 이러다 네 밥 다 치워버리겠다.” 

“나 방금 아침 먹었잖아. 속 미식 거려서 또는 못 먹겠어.”



지석은 방금 전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행동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상한 행동을 평소와 같은 범주에서 해석하려는 아현은 그가 식사 하나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런 것이 평소에도 그는 아현의 젓가락 질 하나에도 당근과 채찍을 쓰고는 했기 때문이다.



지석은 아현의 말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입구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의 발처럼 아현의 말과 자신의 기억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고 있었지만, 기억의 한 구석에서 어렴풋하 게 장면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하얗게 질려있는 아현의 얼굴, 거무죽죽 한 뼈 밖에 남지 않았던 아현의 몸, 눈물 가득 새빨개진 아현의 눈동자, 그리고 따뜻하게 부딪친 아현의 입술.



지석은 자신이 정신을 어디다 빠트렸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현이 아침부터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꽤 놀란 듯 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웃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 다.



“나 잠이 덜 깼나보다. 책 읽고 있어……. 화장실 갔다가 올게.” 

“응. 알았어.”



아현은 지석의 행동에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아까 자신이 부린 추태가 부끄러웠는지 책을 수직으로 들어 얼굴을 가렸다.



책을 건네고 지석은 다시 화장실로 돌아왔다.



화장실 세면대 위에 아현이 벗어 놓은 옷이 그대로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야 방금 전 있던 난리가 떠오른다.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 있던 일일 텐데, 영화에서 본 내용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생긴 일이 아닌 남의 일을 보고, 기억에서 희미해진 일을 떠올린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방금 일을 떨쳐냈다.



화장실 구석에 걸려있는 일회용 비닐을 꺼내 옷을 집어넣고 물을 틀자 세면대에 떨어진 음식물 건더기 들이 쓸려 내려갔다. 대충 물을 내리고 다시 소독제를 손에 덜어 문질렀다. 그 도자기 느낌의 세면대를 벅벅 문 지르는데 눈앞에 아현의 모습이 지나간다.



나 몰래 토하고 아픈 몸을 쥐어 잡던 너. 밤마다 열에 몸이 쑤셔서 끙끙 앓던 너. 살짝 부딪쳐도 쉽사리 멍이 드는 너. 이제는 전처럼 날 때려도 아프지 않는 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 몰래 아파하던 아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거울 속 지석의 눈동자 속에는 지난날들이 필름처럼 흘러간다. 이런 오늘, 엉망이 되어버린 아현의 마음에 속이 아려왔다.



지석은 다시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소독제가 물을 따라 흘러 내렸다. 아현이 병을 앓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지석은 물을 세게 틀어놓고 펑펑 울었다.



이때만 해도 이 눈물이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일 것이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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