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ly Rae Jepsen - Everywhere You Look

자몽씨님 :)

호구 크러쉬

12




토익 시험이 당장 내일로 다가와서 여주는 정신이 없었다. 자의로 보는 첫 시험이기도 했고, 막막한 미래의 길이라도 조금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윤기는 카페를 준다고 했지만, 여주는 그냥 흘려들었다. 정말 스물여섯이 된 이후에 윤기랑 결혼하게 된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직업은 꼭 갖고 싶었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여진은 여주의 롤 모델이었다. 재벌임에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래서 여주는 토익을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될 거야. 여진언니처럼.



"저, 안녕하세요."



정규 등록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나온 여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어딘가 낯익어서 한참 얼굴을 바라보니 같은 수업을 듣는 남자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니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게 어쩐지 수상했다. 밖에서 윤기가 기다릴 텐데 빨리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답답했지만 역시나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저 계속 수업 같이 듣던 사람인데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남자의 물음에 여주가 눈을 크게 떴다. 헉. 있는데요. 바로 나오는 여주의 대답에 남자가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럼 이만, 여주가 꾸벅 인사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에코백이 뒤로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싶어 뒤를 도니 남자가 손을 뻗어 여주의 에코백을 애절하게 잡고 있었다.



"이상형이라 그런데 그냥 편하게 연락이라도,"




"오른손잡이?"



네...?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제 손을 으스러질 듯 잡는 윤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자에게 잡혀있던 여주의 에코백이 풀려났다. 말해, 주로 어느 손쓰는지. 친절하게 반대쪽만 아작내줄 테니까. 윤기의 말에 남자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여주를 쳐다봤다. 남자친구, 여주가 입 모양으로 말하니 남자가 사과하고는 꽁지가 빠져라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런 새끼들 많아?"



대뜸 건네는 첫마디가 이랬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윤기는 학원을 그만두라며 꿍얼댔다. 어차피 오늘 마지막 수업이야. 여주의 말에 그제야 윤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혹시 누가 저렇게 말 걸면 죽여버린다고 해. 웃는 얼굴이지만 나오는 말은 살벌했다. 남들이 보면, 특히 윤기의 비서가 보면 잔뜩 쫄았을테지만 여주는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다.



"나 감옥 가기 싫어."

"내가 죽인다는 거야. 넌 감옥 안 가."

"너 빨간 줄 그이는 것도 싫은데."

"…그럼 사람 시킬게."



윤기의 살벌한 말에 여주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차에 올라탔다. 어느덧 윤기의 차에는 여주가 꾸며놓은 흔적이 가득했다. 윤기가 절대 해놓을 것 같지 않은 귀여운 방향제에서부터,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콘솔박스에는 여주의 앞머리를 말아줄 헤어롤이 있었다. 타자마자 앞머리를 말은 여주가 계속해서 재잘댔다. 막 출발하려던 윤기는 드러난 여주의 동그란 이마에 시선을 뺏겼다.



"아. 갑자기 운전하는 법을 까먹었는데."

"응?"



그게 뭔 (개)소리야. 여주가 황당한 눈으로 윤기를 쳐다봤다. 윤기가 몸을 조수석 쪽으로 숙이고는 여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금방 떨어졌다. 아, 이제 다시 생각났다. 윤기가 씩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여주는 괜히 얼굴이 홧홧해져 얼마 말지도 않은 롤을 뺐다.








토익 시험을 제대로 망친 여주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학교를 빠져나왔다. 공부 그래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채아의 카톡도 우는 이모티콘이 가득한 걸 보니 동질감을 느꼈다. 채아 만나서 술이라도 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정문 앞에 세워진 익숙한 차를 발견했다.

자꾸 차가 바뀌니까 뭐가 뭔지 헷갈려. 윤기는 여주의 말 하나에 매일매일 똑같은 차를 끌고 나왔다. 슈퍼카 모으는 취미는 개나 줬다. 본가에 주차된 열아홉 대의 슈퍼카는 먼지만 쌓여갔고, 검은색의 포르쉐만 도로 위를 달릴 수 있었다. 어쨌든 익숙한 포르쉐에 여주가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다.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시험 잘 봤어?"

"아니... 근데 나 여기서 시험 보는 거 어떻게 알았어? 말 안 해준 것 같은데."

"말했는데."



이상하다, 진짜 말 안 했는데. 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학교 이름은 말 안 했고, 다니던 고등학교의 바로 옆 중학교라고만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럼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네.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생글 웃었다.

나 사실은 채아랑 술 마시러 갈까 생각했었는데. 여주의 말에 윤기가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왜... 왜 내가 술 먹는 것도 못 하게 해. 여주가 서러움에 투덜대니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럼? 왜 가면 안 되는데? 여주가 물으니 윤기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번에 꼬들꼬들한 라볶이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내가?"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내가 말한 거 맞아? 아, 근데 진짜 좋아하긴 하는데."

"김밥천국."

"김밥천국."



엇. 동시에 같은 말을 뱉는 윤기에 놀라 여주가 놀랐다. 진짜 내가 말한 거 맞나 보네, 언제지? 여주가 기억을 되짚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지 않았다.



"예전에. 고기 먹으러 갔을 때."

"지난주에?"

"아니. 나 고딩일 때."

"…아. 나 술 마신 날?"



그러네. 그때도 술 마셨네. 윤기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내렸다. 그럼 우리 김밥천국 가는 거냐는 물음에 윤기가 고개를 저었다. 김밥천국 다 없어졌던데. 윤기의 말에 여주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 나 그럼 이제 그 꼬들 라볶이 못 먹어? 영원히? 윤기야,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

"왜 못 먹어. 내가 누구야."

"설마 김밥천국을 인수한 건 아니지?"



여주의 말에 윤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어차피 분식 쪽 사업 있어서 딱히. 가벼운 농담에도 오는 답은 재벌다웠다. 잠시 혼미해진 여주가 그럼? 그럼 나 어떻게 '김밥천국 꼬들 라볶이'를 먹을 수 있어? 여주가 재촉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 진짜 쓰레기 그런 거 아니다."

"...?"

"진짜 흑심 품고 그래서 하는 게 아니고, 너 그거 먹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어디길래 그래."




우리 집. 윤기의 말에 여주가 입을 떡 벌렸다.








윤기야, 설마 여주 돈으로만 꼬신 건 아니지?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박여사의 한마디에 윤기는 혼란스러워졌다. 바로 몇 주 전만 해도 명품관 데려갔는데…. 아니라는 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자 수화기 너머로 한숨부터 쏟아졌다. 그럼 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윤기가 답을 갈구했다.

여주가 좋아하는 게 뭐냐는 물음에 수많은 답이 쏟아져 나왔다. 끊기지 않는 말에 박여사는 인상을 썼다. 음식 같은 건? 그 물음에 또다시 여러 메뉴가 윤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잠자코 듣던 모친이 던진 해결책은 직접 요리를 해주라는 거였다. 박여사, 나 요리 못하는 거 알잖아. 윤기의 말에도 그녀는 단호했다. 맛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너의 정성이지.

다음 주면 본가로 다시 들어가야 했으니 직접 요리를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최대한 쉬우면서도 여주가 좋아할 만한 맛있는 거. 비서와 함께 머리를 맞대 나온 음식은 라볶이였다. 마침 지점도 사라졌다니 기회나 다름없었다. 여주가 토익 공부에 시간을 보내는 내내 윤기는 라볶이만 연습했다. 처음에 끔찍했던 라볶이를 맛본 것도, 결국엔 맛있어진 완성품을 먹는 것 모두 비서의 몫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여주가 눈을 빛냈다. 지난번엔 집 앞에서만 만났었는데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보니 더 컸다. 물론 윤기의 연화동 본가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돈이 많아서 그런가, 혼자 사는데도 집이 꽤 컸다. 과장을 좀 보태서 거실에 여주네 집이 전부 들어갈 정도로.




"우왕. 부엌 엄청 크다. 요리 자주 해?"



여주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색안경을 끼고 맛없다고 할까 봐 말을 아꼈다. 그냥…, 라볶이는 할 줄 알아.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양심에도 덜 찔렸다. 여주가 집 구경을 한다며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이 윤기는 준비한 재료들을 늘어뜨렸다. 연습한 대로만 하자. 먹자마자 음식을 뱉었던 비서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냈다.





"아, 씨ㅂ."



여주가 없어서 욕이 절로 나왔다. 분명 연습을 수십 번 했는데 여주에게 직접 먹일 생각을 하니 실수투성이였다. 꼬들꼬들하게 하려면 시간, 시간이 중요한데…. 타이머를 맞추기 위해 핸드폰을 찾던 윤기가 도마를 건드려 위에 올라가 있던 칼이 미끄러졌다. 잡으려던 건 좋은데 급해서 잘못 잡았다는 게 문제지. 많이는 아니지만 쏟아지는 피에 윤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윤, 머야!!!"



마침 주방에 딱 들어왔던 여주에게 걸려버렸다. 윤기가 애써 아닌 척 손을 뒤로 숨겼지만 이미 여주는 시뻘건 무언가를 본 이후였다. 여주가 성큼 거리며 다가오는데 윤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표정이 화나 보여서였다.



"구급상자 어딨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윤기가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여주가 윤기의 손을 당겼다. 퐁퐁 솟아 나오는 피를 본 여주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잡아 제 입에 쑤셔 넣었다.




"……여주야, 지금 뭐 하는."



윤기가 다급히 손을 뺐지만 여주가 인상을 쓰며 다시 손을 낚아챘다. 울 아빠가 피 나면 침이 직빵이랬어. 여주가 입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며 상처 부위를 살폈다. 다행이다, 피 멈췄다. 여주가 해맑게 웃었다.

하, 진짜. 사람 마음도 모르고.








사고가 나는 바람에 라볶이의 면은 꼬들꼬들은 커녕 퉁퉁 불었다. 그런데도 여주는 맛있다고 그릇을 싹싹 비웠다. 맛있어? 윤기가 물으니 여주가 입가에 고추장을 묻힌 채 끄덕였다. 윤기는 여주가 응급 처치랍시고 휴지로 둘둘 말아버린 손가락을 뻗어 고추장을 닦아주었다. 더러워진 휴지를 보고 여주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겠다고 했다.



"아냐. 이제 피도 다 멈췄고."

"역시 침이 최고지?"

"그래. 최고다."



당연하지, 울 아빠 말은 틀린 게 없어. 근데 윤기야, 칫솔 없어? 여주가 배를 통통 두드리며 물었다. 새 칫솔을 꺼내주니 화장실로 총총거리며 들어가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고 윤기가 웃음기를 숨기지 않았다. 오늘의 목표는 이뤘다. 라볶이. 꼬들꼬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주가 잘 먹어줬으니까 된 거지, 뭐.



"영화 보까!"



배도 부르고 입안도 개운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여주가 활짝 웃었다. 보고 싶은 거 골라. 윤기가 리모컨을 넘겼다. 흠... 진지하게 영화를 고르던 여주가 로코를 하나 골랐다. 이거 재밌대. 여주의 말에 윤기가 그러라며 바로 결제를 했다. 그제야 금액을 본 여주가 볼을 긁적였다. 무슨 VOD 하나가 저리 비싸.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여주가 무릎을 세워 턱을 그 사이에 대고는 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윤기는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댔다. 저기 남자 주인공 진짜 잘생겼다. 영화 중반쯤 지났을 때 여주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쟤 인성 파탄이야."

"응? 어떻게 알아."

"몇 번 봤어."



여주가 입을 떡 벌렸다. 민윤기는 진짜, 그사세구나. 그들이 사는 세상. 윤기는 여주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게 귀여우면서 웃겼다. 난 살면서 연예인 한 번도 못 봤어, 또 누구누구 봤어? 여주의 관심은 어느덧 영화가 아닌 윤기의 이야기에 쏠렸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연예인 이름이 쏟아지니 여주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럼 걔도 봤어? 얘는? 여주가 아는 연예인 이름을 다 쏟아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사인이라도 받아달라며 졸랐다.

영화가 끝나고 여주가 윤기를 돌아봤다. 이거 시즌 투도 있다는데 그거까지 보면 안 돼..? 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봐. 오백 편 봐도 돼. 윤기가 픽 웃으며 리모컨을 가져갔다. 앗싸. 여주가 신나 하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결제를 마친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에서 이불을 갖고 나왔다. 얼굴만 빼고 둘둘 말아주니 폭신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배시시 웃었다. 윤기야, 너도 안으로 들어와. 여주가 이불을 들추며 말했다.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여주가 이불을 폭 날려 윤기의 몸을 반쯤 덮었다.



"빨래를 저렇게 해?"



영화를 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나와 윤기가 말을 꺼냈다. 주인공 둘이 옥상에서 한 바구니 안에 들어가 이불을 밟으며 빨래를 하는 장면이었다. 사극에서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는 건 봤어도 저건 또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세탁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여주를 돌아보던 윤기가 말을 멈췄다.

자는 호여주의 얼굴을 처음 봤다. 그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꾸벅꾸벅 졸다가 이불 뭉치에 얼굴을 기대 푹 잠들었는데 꿈을 꾸는 건지 가끔 입도 꽁알거렸다.

어쩌다 이런 앨 만났지. 윤기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간 연애도 대충, 인생도 대충 살았던 건 모두 여주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여주를 만난 이후로 인생이 반으로 뚝 잘린 듯 극명하게 갈렸다. 장난으로 시작한 관계가 이렇게 진지하게 번질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랑해."



깊게 잠들었을 텐데도 사랑 고백은 꿈에서 들은 건지, 여주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제이보 - 멍멍잉





나 언제 잠들었지. 여주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자는 사이에 이불 채로 옮겨준 건지 소파가 아닌 침대에서 눈을 떴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길래 방을 나가니 윤기와 낯선 목소리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주가 잠이 덜 깬 눈으로 일단 인사했다. 내 비서야. 너 배고플까 봐 고기 좀 사 오라고 했어. 윤기의 말에 테라스를 보니 멀리서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기가 쌓여있었다.



"저걸 우리 둘이 어떻게 먹어. 아, 비서님도 같이 드셔?"

"앗. 그래도 될까요?"





"되겠냐."



아뇨, 안 될 것 같아요. 비서가 벌떡 일어섰다. 여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요, 같이 먹으면 안 돼? 여주가 윤기에게 나름의 애절함을 담아 물었다.



"절대 안 돼."



데이트 방해할 거면 목숨 걸고 하든가. 비서는 윤기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여주가 붙잡고 자시고 할 거 없이 급히 짐을 챙겼다. 아쉬운데, 여주의 말에 비서가 빙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예전부터 여주씨 엄청나게 좋아하셨어요."

"..."

"절대 차버리시면 안 돼요, 아셨죠."



진짜 미쳤냐? 윤기가 비서를 향해 으르렁댔다.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저 정말 가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비서는 윤기의 슬리퍼라도 날아올까 겁이 나 황급히 튀었다. 아쉬워하기도 잠시,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본 여주가 눈을 빛내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오늘 완전 옛날 생각 많이 난다. 라볶이도 그렇고 고기도 그렇고."

"그러게."

"그땐 교복이었는데…."

"지금도 입어줄 수 있어요, 누나."



이씨, 진짜! 여주가 성질을 내니 윤기가 또 한바탕 웃었다. 근데 있잖아, 윤기야. 딱 한 개가 빠졌어. 사뭇 진지한 여주의 말에 윤기가 귀를 기울였다. 뭔데? 쌈무도 있고, 김치도 있고…. 빠진 거 없는데. 윤기가 당장 비서를 다시 부를 생각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소곤소곤) 술."

"..."

"아아, 먹자."

"…술 없는데."



그럼 저건 뭐야. 여주가 거실 진열장에 가득한 양주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진짜 독해서 너 먹자마자 뻗어. 윤기의 말에 여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오늘 시험도 망쳐서 채아랑 술 먹으려고 했는데 납치해 온건 너면서…. 꿍얼대는 여주의 말에 윤기가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뭐야! 술 있으면서 거짓말했어!"

"너 취할까 봐 그랬다."

"취하면 안 돼? 그럼 술을 왜 마셔."



또 예전처럼 스무 살 꼰대 짓을 하려는 게 귀여워서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팔을 이용해 현란하게 소주를 딴 여주가 신난 표정을 지었다. 술 진짜 오랜만에 마신다, 윤기 너도 마실래? 여주가 소주 병을 내밀었다.



"됐어. 너 다 마셔."

"…우리 사귀고 처음으로 같이 마시는 건데."

"한 잔만 줘."



앗싸. 여주가 히죽거리며 빈 잔을 채웠다.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던 고기는 꽤 빠른 속도로 없어지고 있었다. 여주는 정신없이 고기와 술을 흡입했다. 집에 이런 테라스가 있는 것도 신기하고, 이런 데서 고기를 구워 먹으니 캠핑 온 것처럼 낭만 가득이었다. 캠핑 같다는 여주의 말에 윤기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나중에 가자. 캠핑."

"와! 어디루?"

"강원도에 별장 있어."

"정말 스케일이 남다르구나."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 너무 큰 스케일에 놀라기는 했지만 여주는 이제 윤기의 재력에 부담을 갖지 않았다. 윤기가 적정선을 지키며 돈을 쓴 노력 덕분이었다.



"그만 마셔. 얼굴 빨간데."

"…나 주량 쎄다."

"그래. 쎈거 알겠으니까 그만 마셔. 집 안 가?"



안 갈래…. 여주의 웅얼거림에 윤기가 집게를 뒤적이던 행동을 멈췄다. 집에 왜 안 가. 윤기가 침착하게 물었다. 너랑 있을 거야……. 붉게 물든 뺨을 하고 그런 말을 하니까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윤기가 애써 여주에게서 눈을 뗐다.



"부모님 걱정하신다. 벌써 늦었어. 이거만 먹고 가."

"우럼빠 (울엄빠) 는 나 새벽에 들어와도 별 신경 안 써."

"내가 신경 쓰여."



윤기의 단호한 말에 여주가 칫,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귀여워도 안 돼. 윤기의 말에 여주가 입술을 더더욱 내밀었다.



"나랑 있으면 걱정도 안 되냐. 내가 뭘 어쩔 줄 알고."

"그거야, 너는 나 예뻐해 주니까."

"미치겠다. 그건 또 아네."



나는 파 친다…. 여주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대파를 들어 내려치며 중얼댔다. 진짜 취했다. 일단 좀 자, 그럼. 윤기가 여주를 가볍게 안아 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몸을 기댄 여주가 풀린 눈을 하고 윤기를 쳐다봤다. 두 팔을 뻗더니 윤기의 양 볼을 잡고 조물딱댔다. 그때 취했을 때도 이랬는데, 이게 술버릇인가. 윤기가 얌전히 양볼을 잡힌 채 생각했다.

그리고 찐하게 입술을 맞대는 바람에 두 눈이 커졌다. 여주는 본인이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헤헤 웃기만 했다. 너 이러면 나 설레 죽어. 윤기의 힘없는 말에도 여주는 방실 웃었다. 당기는 여주의 힘에 의해 소파 옆자리에 자리했지만 차마 옆으로 고개를 돌릴 자신은 없었다.

얜 어떻게 나한테 이러지. 윤기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설레고 좋아서 애가 탔다. 더한 것도 수없이 상상했지만 그건 머릿속에서만 끝을 내야 했다. 가뜩이나 과거 문제로 차일 뻔 (윤기 입장) 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여주를 건드렸다간 진짜 차일 지도 몰랐다. 사랑 없이 즐기기만 했던 과거의 민윤기가 보면 놀라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너무 좋단 말야, 민윤기이…."



여주가 다시 윤기의 양 볼을 잡고 입술을 맞댔다. 길어진 입맞춤에 윤기는 저절로 입술이 벌어지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뒤로 뺐다. 씨잉. 여주가 인상을 쓰며 윤기를 올려다봤다.



"나랑은 왜 뽀뽀밖에 안 해줘…."




"너 술 깨고 이래라."



술 깼는데. 여주가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됐거든요. 윤기가 여주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손이 커서 여주의 얼굴 대부분이 가려졌다. 넌 내 맘 몰라! 여주가 토라진 채 눈을 감았다. 누가 할 소릴. 윤기가 피식 웃었다. 아껴주고 싶었다. 이렇게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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