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먼의 아이




 바이가 그렇게 케이틀린의 후원을 받은 지 어느새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바이는 정말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사고 치지도 않고 정말 쥐 죽은 듯이. 적어도 꼴지는 한 적이 없었고, 그냥 묻어가는 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바이가 학교를 다닌 지 세 달 정도 지나고는 바이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바이는 나름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사하고 밥을 같이 먹는 정도의 친구들은 있었으며 공부를 하다 보니 성적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케이틀린의 존재를 까먹을 때 쯔음, 케이틀린의 호출이 있었다. 몇 달 간 연락조차 없었던 터라 바이는 괜히 안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갈까봐 걱정했었다. 간만에 본 케이틀린은 긴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중단발이었고 그새 키가 컸는지 이제는 한참이나 올려다 볼 지경이었다.

1년 사이 바이도 많이 컸지만, 케이틀린은 그 배로 큰 것 같았다. 

뭘 먹고 저렇게 큰 거지?

바이는 케이틀린을 한참이나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케이틀린과 눈을 마주치자 바이도 모르게 눈을 내리 깔았다. 케이틀린은 앉으라는 듯이 쇼파를 가리켰고, 바이가 앉자 케이틀린도 그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케이틀린과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바이는 시선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지 난처한 듯 테이블 위에 있는 홍차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공기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좋지 않은 신호라는 걸 바이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흠."

케이틀린은 찻잔을 입에 갖다대더니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바이는 괜스레 긴장이 되서 땀이 차는 손을 꽉 쥘 수 밖에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넌 하고 싶은 게 없니?"

"네?"

뜬금 없는 케이틀린의 말에 바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케이틀린을 쳐다보았다. 

"성적도 애매하고. 뭐 하고 싶은 게 없어 넌? 아무리 봐도 공부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고."

"어..."

케이틀린의 질문에 바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케이틀린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갑자기 바이의 성적을 들먹이며 장래 희망을 물어보리라고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는 자신의 성적에 꽤 만족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복싱...?"

바이는 마치 아무 단어라도 떠오르는 듯이 내뱉자, 케이틀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복싱?"

"어...네."

"왜?"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바이가 쭈뼛거리며 간신히 대답하자 케이틀린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기껏 대답했지만 케이틀린의 비웃음만 샀기 때문에 바이는 입이 샐죽거렸다. 

"바이, 강해지고 싶으면 복싱 같은 건 더더욱 하면 안되지."

케이틀린이 웃음기가 싹 빠진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참이나 바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바이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말하는 강하다는게 대체 뭔데?"

"글쎄요,나한테 누가 오든 달려들면 때려눕힐 수 있는 거?"

케이틀린은 바이의 대답에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긴 검지로 찻잔을 둥글게 그리듯 매만졌다.

"바이, 너의 강하다의 기준은 틀렸어."

"네...?"

"그래, 링 위에서 한 명, 한 명 쓰러트린다 하자. 그러면? 그게 강한거야? 너한테 두 명, 세 명, 아니 몇십명, 몇백명이 달려들어도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니?"

"어..."

케이틀린의 물음에 바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하다는 건 사람들을 거느리는 힘이야. 한 명, 두 명... 수 십명, 수 백명을 거느리는 것. 그게 힘이야. 네 한마디에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게 진짜 강한 것이지."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이의 물음에 케이틀린은 웃었다. 

"글쎄. 그건 네가 찾아야겠지?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에게 쓸모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바이는 케이틀린이 그 동안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직감했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종의 거래였던 셈이다. 하긴 어떤 미친 사람이 돈과 시간을 들여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케이틀린은 바이에게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는 일상을 케이틀린에게 부지하게 된 대신, 케이틀린에게 꽤나 쓸모가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해야 케이틀린에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까지 하다가 바이가 무심코 내뱉었다.

"어떻게 하면 케이틀린씨한테 제가 쓸모가 있을까요? 저는 케이틀린씨한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고싶은데..."

바이의 덤덤한 표정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순진한 목소리에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케이틀린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케이틀린은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 뒤로 케이틀린은 바이를 자주 호출했다. 용건이 있다거나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은 아니었다. 찾아가면 '그냥 심심해서' 라고 하던지 정말 쓸모 없는 일들로 바이를 불러댔다. 어쩔 때는 신발끈이 풀려 있다고 1시간 거리의 바이를 부른 적도 있었다. 바이는 케이틀린의 신발끈을 묶어주면서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에 그냥 본인이 묶는 것이 더 편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곧 이런 행동들은 바이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정말 쓸모없는 일들, 하찮은 잔 심부름을 시켰다. 마치 새 신발을 자신의 발에 길들이는 것처럼 바이를 자주 '사용'했다. 본인이 하면 더 빨리 해결 될 일들을 굳이 바이를 불러 시켜대서 바이는 번거롭다 생각은 했지만 절대 케이틀린한테 티를 내지 않고 케이틀린을 따라다니며 케이틀린이 하라는 대로 했다. 케이틀린은 바이 말고도 바이와 같은 처지인 아이들을 후원했다는 걸 케이틀린을 따라다니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가난하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지만,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었다.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공부면 공부...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아이들이었다.

애매한 성적에, 특별난 재능 없이 케이틀린의 후원을 받는 사람은 바이가 유일했다. 자신보다 뛰어나고 뭔가 하나씩 재능이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바이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함께 몰려왔다. 공부도 해보고 음악이나 미술도 도전을 해봤지만 바이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었다. 그냥 학교 성적이 조금 올랐을 뿐이었다. 이럴수록 바이는 자신이 그들보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바이가 곰곰히 생각하다 불현듯 떠올랐다.

'충성심'

맞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케이틀린의 말을 복종하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케이틀린의 사람이 된다면 케이틀린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것이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부르면 잠을 자다가 뛰쳐나가기도 했으며, 비가 오건 태풍이 오건 케이틀린이 시키는 건 모든 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이는 후원받는 아이들과 다르게 케이틀린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거기서 오는 뿌듯함과 비록 케이틀린의 잔심부름이 다였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조금 특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바이가 조금 특별해졌다고 느끼는 건 바이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케이틀린은 이제 사적인 일정에도 바이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이는 케이틀린의 수행원들과 함께 케이틀린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바이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지만 케이틀린은 바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그렇게 밖에 느낄 수 없는 게 케이틀린은 수행원도 함께 같이 다녔는데 그 수행원은 케이틀린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행원에게 케이틀린은 지시하고 명령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어린 바이의 눈에는 그게 정말 멋있기도 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을 자유자재로 명령하는 케이틀린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케이틀린이 말하는 '강함'이라는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강함이란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느리는 것...그리고 바이는 케이틀린의 그 수 십, 수 백명 중의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바이는 케이틀린의 사람들 중 가장 '충성도'가 높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바이는 케이틀린의 일정을 따라다녔다. 물론 바이는 아직 학생이었으므로 학교가 끝난 뒤에나 가능했다. 케이틀린은 바이가 학교를 빠지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도 학교는 착실히 나가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바이가 학교를 빠지고 케이틀린을 따라다닌다고 해봐야 케이틀린도 대학생이라서 학교를 가야했다. 케이틀린은 자신이 학교를 갈 때는 수행원이 따라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바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조차 케이틀린을 따라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케이틀린이 학교가 끝나야 케이틀린의 일정을 따라다닐 수 있었다. 케이틀린은 보통 학교가 끝나면 여가생활을 즐기거나 저녁에는 파티를 갔다. 파티라고는 하지만 정·재계에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 즐겼기 때문에 사교 모임에 가까웠다. 케이틀린은 그 무엇보다 사교 모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평온하고 강해보이던 케이틀린도 사교 모임 가기 전에는 정말 한껏 예민해졌다.

케이틀린이 예민해지면 수행원 중 그 누구도 케이틀린의 성격을 받아내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받아냈던 사람이 바이였다. 그리고 바이만이 유일하게 케이틀린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예민하게 굴때면 머릿속을 아예 비워버렸다.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가끔 험한 말을 하거나 성질을 부리면 웃긴 생각을 하며 버텼다. 

예를 들어 케이틀린에게 이상한 모양의 콧수염이 있다고 생각하니 케이틀린이 하는 모진 말들은 그냥 우스갯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는 자신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케이틀린이 노발대발하며 바이를 때린 적도 있어서 바이의 표정 연기는 점점 나날이 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케이틀린이 모임에 다녀오고 난 뒤에 굉장히 화가 난 상태로 바이를 새벽부터 찾았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라 바이는 케이틀린의 전화를 받자마자 케이틀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케이틀린이 보이기도 전에 케이틀린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는 케이틀린의 표정을 보자마자 자신이 계속 케이틀린에게 시달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으나 찰나에 드러나는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케이틀린은 바이를 보자마자 째려보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너 나 따라와."

표정이 너무 험악해서 어디 끌려가 맞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바이는 일단 케이틀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개같은 년이, 그깟 골프 좀 친다고 나를 무시해?"

케이틀린은 악에 받친 듯이 아랫 입술을 꽉 깨물며 씩씩거렸다. 

아. 맞다.

바이는 며칠 전부터 골프 모임이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원래 골프 모임이 있던 날 바이를 데려가려고 했으나 바이가 학교에서 늦게 끝나는 날이라 데려가지 못하고 혼자 다녀온 모양이었다. 바이가 같이 안 갔으니 그 골프 모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누군가가 케이틀린의 심기를 상당히 건드린 것은 분명했다.

바이는 케이틀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과는 별개로, 케이틀린이 망신을 당하는 모습은 조금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아내느라 애를 썼다. 케이틀린의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으니 바이는 눈치를 살피며 씩씩거리는 케이틀린을 보며 어떤 일을 당했을까 상상을 했다. 

케이틀린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팔짱을 꼰 채 차 안에서 아랫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골프장 필드에 도착했을 때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케이틀린은 필드에 오자마자 홀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프로 골프 선수였던 사람이 케이틀린의 자세를 봐주고 있었고 바이는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이는 망원경 같이 생긴 무언가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둘러보고 있었다. 멀리 볼수록 화면 구석에 거리가 찍히는 게 신기해서 이곳 저곳 둘러보다가 케이틀린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야, 내가 너 놀라고 부른 줄 알아?"

"아, 네!"

물론 바이가 할 일은 없지만, 그냥 골프하는 자신을 봐달라는 것 같아 케이틀린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었다. 

"어, 케이틀린씨 조금 더 엉덩이를 조금 더 빼시고....허리를 좀 펴세요."

강사가 케이틀린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케이틀린이 골프채로 휘두르자 바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오는 걸 참느라 애썼다. 심지어 바이가 보기에는 그렇게 어려운 자세도 아니었는데 케이틀린은 계속 기괴한 몸짓에 가까운 자세를 잡았다.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속으로 바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강사의 자세를 자세히 쳐다보며 생각을 했다. 

케이틀린이 시도를 할 때마다 바이는 입안 볼을 꽉 씹어야했다. 케이틀린이 왜 골프 모임에서 화가 나서 돌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케이틀린의 자세를 보면 웃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마치 상체와 하체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기괴한 몸짓에 골프채를 휘두를 때 휘청해서 골프채 머리 부분이 콕 하고 박혀버렸다. 얼마나 많이 땅에 박히듯 휘둘렀는지 케이틀린이 있는 근처에는 하도 땅이 파여있어서 강아지나 두더지가 땅을 파버린 것 같았다.

강사가 분명 하라는대로 하는 것 같은데 케이틀린은 뭔가 자신만의 재해석을 하는지 강사가 하는 자세와 전혀 달랐다. 바이는 웃음을 참느라 하늘을 보며 슬픈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케이틀린이 기어코 골프채를 휘두르다가 골프채의 머리부분이 콩나물 대가리가 똑 떼어지듯 떨어져 버렸다. 

강사도 어쩔 줄 몰라하며 케이틀린에게 어색하게 웃었고 바이는 처음으로 당황해 하는 케이틀린의 표정을 처음 봤다. 

그 모습에 기어코 웃음을 못 참아버린 바이는 그 자리에서 그만 웃고 말았다. 가뜩이나 제 몸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고 짜증이 잔뜩 나있었던 데다가 전에 골프 모임에서 비웃음을 사더니, 이젠 하다못해 바이에게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화가 났는지 부러진 골프채를 내동댕이치며 바이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자신을 골프채로 때리겠거니 생각하며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케이틀린은 바이에게 골프채를 내밀며 거의 죽일 듯한 표정으로 바이를 쳐다보았다.

"네가 해봐."

바이는 순식간에 난처한 표정으로 케이틀린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너도 쳐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케이틀린이 이를 갈며 바이에게 골프채를 억지로 건넸고, 바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지만 케이틀린의 표정은 완고했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팔짱을 끼고 단호한 표정으로 바이를 쳐다보았다. 바이는 난생 처음 골프채를 쥐고 어쩔 줄 몰라하며 쭈뼛 거리다가 보다 못한 강사가 바이에게 자세를 알려주었다. 이미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쳐다보는 케이틀린 때문에 바이는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였다. 

잘하려면 완전 잘하던가 못하려면 아예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중간하면 더 욕먹을 것 같아서 바이는 고민에 빠졌다. 뜸 들이는 바이의 모습에 케이틀린이 닥달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이는 강사가 하라는 대로, 자세를 잡고 될 대로 되라 하며 골프채를 크게 휘둘렀다. 

훅.

골프채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 뒤에 골프채 헤드 부분과 골프공이 부딪혀 경쾌한 소리가 났다.

강사는 바이의 스윙에 놀란 듯이 공을 쳐다봤고 케이틀린도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다. 케이틀린은 바이가 아까 가지고 놀던 망원경 같은 것으로 공을 쳐다보는 듯했다. 공은 쭉쭉 뻗어 하늘을 가로지를 듯이 멀리 나갔다.

"나이스 샷."

강사가 입을 벌리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강사가 흥분한 듯이 케이틀린에게 물었다.

"우와, 저 정도면 200야드 넘게 나오겠는데요."

"213야드."

케이틀린이 망원경 같은 걸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골프 해봤어요?"

강사가 바이를 향해 묻자 바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처음이라고?"

강사가 놀란 듯이 되묻자 바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강사를 쳐다보았다. 강사가 너무 정색을 해서 바이가 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 눈을 굴릴 때 쯔음, 강사가 숨을 들이키더니 케이틀린에게 말했다.

"드라이브 첫 타에 비거리가 이 정도면... 이야...그리고 아직 성인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강사는 아직도 놀라웠는지 바이에게 여러가지 모양이 다른 골프채를 주면서 쳐보라고 시켰다. 바이가 곧잘 따라하자 강사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케이틀린에게 말했다.

"이 친구 골프에 재능이 있네요."

케이틀린은 이 말을 듣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바이에게 다가갔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다가 오는 순간 후회를 했다. 그냥 못친다고 하고 케이틀린의 자존심을 세워줬어야 했는데... 케이틀린의 자존심을 건들다니...

케이틀린은 바이의 어깨를 짚었다.


"이제 네가 할 일을 찾았네. 너, 골프 해라."


바이의 예상과 다른 케이틀린의 말에 바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바이는 그 뒤로 케이틀린을 따라다니는 대신,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바이는 케이틀린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어졌다. 일단 뭔지 모르고 잘한다고 하니까 하긴 하는데 재밌지도 않았다. 케이틀린이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하면 할수록 압박감이 점점 커져 갔다. 비용도 지금껏 바이가 썼던 금액과는 차원이 달랐고 바이가 잘하면 잘 할 수록 비용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바이는 자신이 돈 먹는 하마라고 생각할 정도로 금액이 무시무시했다. 바이는 부담스러웠으나 만나기만 하면 케이틀린은 골프 이야기만 했으므로 바이는 케이틀린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이가 골프를 배운 지 몇 개월이 되었을 때 쯔음, 주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골프 대회가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보통 후원해주는 스포츠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서 옷에 덕지덕지 후원 브랜드를 붙이는데, 바이는 자신의 등판과 가슴에 딱 하나의 이름표만 붙여졌다.

키라먼 

처음으로 키라먼의 이름을 달고 바이는 경기에 임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선수들도 많은 노력과 돈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는 생명을 갈아 넣었다. 자신의 가슴팍과 등판에 있는 키라먼이라는 이름으로, 키라먼의 아이답게 최고가 되어야 했다. 다른 선수들은 키라먼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존재 하지 않을테니까. 

바이는 키라먼의 이름 덕분인지 최고의 성적으로 우승을 했다. 그리고 지역 신문 스포츠란에는 새로운 유망주인 바이의 소개가 한 켠 실리기도 했다. 주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대회를 필두로, 국내 대회, 세계 대회까지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바이가 좋은 성적을 거둔 그 날, 케이틀린에게 문자가 왔었다.


[잘했어 앞으로도 기대할게]


바이는 케이틀린의 문자에 감격을 받았다. 케이틀린의 격려까지 받는다는 것이 어찌나 벅차오르는지 바이도 자신이 예상한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바이는 자신이 이대로만 간다면, 케이틀린의 사람들 중 가장 반추되는 사람일 것이다. 바이는 그 생각만으로 벅차올라서 케이틀린의 문자를 캡쳐해서 고이 저장을 했다. 그리고 훈련이 힘들때마다 그 문자를 보며 마음을 다시 잡았다. 




 그러던 어느날, 훈련 뒤에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운 바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바이는 피곤해서 누가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아서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보려는 순간 상기된 케이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난데... 지금 올 수 있나?"

내일 새벽에도 훈련이 있어서 지금 쉬지 않으면 상당히 안 좋은 컨디션으로 훈련을 받을게 뻔했지만, 케이틀린이 부른다면 선택권이 없었다.

"그럼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되나요?"

바이는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케이틀린이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보통 케이틀린이 혼자 사는 아파트에 바이를 부른 적이 없었다. 아파트는 케이틀린의 학교와 가까운 곳이었고, 바이도 그 아파트를 가본 적이 없어서 그곳으로 바이를 부른다는게 의아했다. 대체 어떤 일이길래 자신의 프라이빗한 곳으로 오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대회 준비 때문일까...?

바이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바로 열렸는데, 가운 차림에 손에는 위스키 잔을 들고 한껏 취한듯한 케이틀린이 바이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어, 빨리 왔네."

케이틀린이 바이를 안으로 들여보내며 쇼파에 털썩 앉았다. 바이도 옆으로 앉으려다가 쭈볏거리며 서서 앉은 케이틀린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케이틀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술을 깨려는듯 입맛을 다셨다.

"뭐해, 앉아."

케이틀린이 맞은 편 쇼파를 가리키며 말하자 바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케이틀린의 눈치를 보며 앉았다. 바이가 앉자마자 케이틀린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더니 테이블에 있는 위스키를 가리키며 바이에게 말했다.

"너도 한 잔 할래?"

바이는 케이틀린이 너무 취해서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까먹은 게 아닐까 생각을 했다. 

"저는... 아직 미성년자인데요."

"지랄."

바이가 거절하자 케이틀린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욕을 했다. 

"먹기 싫음 먹지마."

케이틀린이 다 비운 자신의 위스키 잔에 다시 위스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바이는 케이틀린이 자신에게 술주정이나 하려고 부른 건가 싶어서 당황했다. 내일 새벽 훈련이 있다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케이틀린이 더 취하기 전에 말하는 게 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저...내일 새벽 훈련인데요..."

"근데?"

"어..."

"가고 싶다고?"

"내일 늦으면 곤란하잖아요."

바이가 최대한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으나 케이틀린은 기가 찬 듯이 웃었다.

"빠져. 빠지면 되지. 주제 넘네. 누구 덕에 네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까먹었나봐?"

바이는 속으로 케이틀린은 운동을 본업으로 삼지 않으니 저런 말을 쉽게도 한다 생각을 했다. 이 하루의 루틴이 깨져버리면 그 루틴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더 힘들게 운동을 해야하는지 케이틀린은 알 리가 없었다. 

주는 돈 받으면서 쉽게 운동한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정말 맞는 말이었으므로 바이는 앉아서 눈 만 굴리며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바이가 아무 말없이 앉아있자 케이틀린은 따른 위스키를 한번에 쭈욱 들이키더니 다시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취했는지 말은 느릿하게 이상했지만 발음은 또박또박해서 케이틀린답다 생각했다. 

"아무것도 못하는 너를, 내가 왜 거둬들였다고 생각하지?"

바이도 그게 궁금했다. 그러게요. 대체 왜? 

"물론...다른 이유도 있지만"

케이틀린이 말을 하며 바이의 옆으로 털썩 앉았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서 바이도 취할 지경이었다. 뜨끈한 공기와 함께 들어오는 케이틀린의 냄새와 위스키 냄새.

"네 얼굴도 마음에 들었거든."


백합조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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