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마주치지 않기를


아무도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모두가 웃는 세상을 만들겠어요. 그러려면 모두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해요. 토시노리는 스승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상징이 될 것이다. 원 포 올을 물려받고 스승이 죽은 후 토시노리는 하루하루 변해 가고 있었다. 상징이 되기 위해 살을 깎고 가면을 덮어썼다. 무한한 신뢰가 어깨 위에 쌓였다. 사람이 의심 많은 존재라는 것은 거짓말이구나. 사람은 이토록 단순하게 누군가를 믿어버리는구나. 그러나 그것이 토시노리가 원한 평화의 조건이었다. 토시노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랐다. 그의 존재 자체가 선의 상징이 되어 악을 압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한 사람, 다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토시노리는 자신의 스승이 죽었을 때를 기억했다. 선을 망가뜨리고 평화를 어지럽히는 게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올 포 원의 진득한 눈빛을. 빌런은 히어로를 조롱하고 증오한다. 시민들은 히어로를 믿고 따른다. 토시노리는 빌런과 맞서 싸웠으며 등 뒤로는 믿음을 짊어졌다. 그러면서도 저 먼 곳에 자리한 그의 이상을 쫒기를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했다. 자신을 적대하거나, 자신을 믿거나.

토도로키 엔지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언젠가부터 토시노리는 어디를 가나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두 가지가 모두 들어 있었다. 히어로를 향한 빌런의 악의와도, 상징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순수함과도 다른, 기묘한 적의와 신뢰.

토시노리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건 토도로키 엔지라는 소년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동경과는 달랐다.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에게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감정인 동경은 토도로키의 눈에서 철저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승부욕일까. 승부욕과 경쟁심은 성장의 좋은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토시노리는 그것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시노리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후계자를 찾아야 할 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토시노리는 토도로키 엔지라는 인간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좌절의 구덩이에서 분노에 매몰된 소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부여잡고 또다시 구덩이 밖을 기어오르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토시노리는 놀랐다. 자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의 목표는 달성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 포 올은 축적된 힘의 결정체다. 혼자만의 노력으로 넘어설 수 있을 리가 없다. 원 포 올의 비밀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차라리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이고 싶어하면 모를까 뛰어넘으려 하지는 않았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진심으로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토도로키의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때때로 터져나오는 그의 열등감이 약간은 우습고 불쌍하기도 했다. 적도 아니고, 동료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 토시노리는 그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한 개성, 완벽한 힘. 반대로 토도로키는 토시노리가 부러워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그를 의식하게 되자 토시노리는 불필요한 흥미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토시노리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저것은 선인가 악인가?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뿌리뽑기를 원하는 그에게는 꽤나 중요한 사항이었다. 어느 쪽이든 토도로키는 위험해 보였다. 위험한 히어로. 광기에 찬 히어로. 그런 게 이상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능은 했다. 당장 자신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 토시노리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꽤나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토도로키를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의문의 방향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제 토시노리는 단 하나의 가정에 도달했다. 만약 자신이 토도로키의 이상이라면?

토시노리는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이란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없기에 이상이다. 허나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그것의 반의 반만이라도 쟁취할 수 있다면 토시노리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신이 이상을 쫒듯 토도로키 엔지가 자신을 쫒는 것이라면, 토시노리는 토도로키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그 목표가 아무리 부질없는 것이든, 불가능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토시노리는 알고 있었으므로.

토도로키, 나는 너의 이상인가?

그것이 정말로 너의 전부인가?

토시노리는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USJ로 가는 버스는 조용했다. 차체의 소음과 빗소리, 학생들의 잡담이 뒤섞여 귓가를 웅웅 울려댔다. 장마철이었다. 비닐 코팅이 된 시트에 맨살이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토시노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에 앉은 엔지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신경질적인 얼굴로 빗방울이 사선으로 흘러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차가 멈췄다. 토시노리는 버스에서 내리고 엔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토도로키 군, 하고 부르자 계단에서 뛰어내리던 엔지가 날선 눈으로 토시노리를 보았다.


“난 물이 싫어.”


난데없는 고백에 엔지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렸을 때 물에 빠져서 공포증이 있거든. 수영은 젬병이야.”

“어쩌라고?”


엔지는 토시노리를 툭 치고는 우산을 폈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고 버스에서 건물 입구까지는 50미터도 안 되었다. 엔지야말로 물을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토시노리는 자신보다 두 뼘쯤 작은 그의 뒷모습을 쫒아갔다. 인기척을 느낀 엔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토시노리에게 쏘아붙였다.


“공포증 같은 거 있어서 히어로 하겠냐?”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오늘은 혼자 물에 뛰어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토시노리는 순식간에 엔지를 앞질러 걸어가 버렸다. 재수없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USJ에 머무는 내내 엔지는 훈련의 불공평함에 대해 투덜거렸다. 수해 지역 전체를 혼자 사용하게 해달라고 토시노리가 미리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혼자 물에 뛰어들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포증도 극복 못해서 히어로를 하겠느냐고 토시노리를 비웃기는 했지만 엔지도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의 개성은 화염이었다. 물과는 극악의 상성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수해 지역에서의 훈련이 더욱 필요했다. 물에 빠지거나 비를 맞아 무개성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망할 야기 자식이 그 기회마저 빼앗아가버렸다.

엔지는 버스에서 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토시노리가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애는 본디 자신에게 눈길도 안 줬다. 어떠한 것도 토시노리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토시노리를 제외한 인간을 거들떠도 안 보듯, 토시노리는 그의 영웅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엔지가 토시노리에 대해 유일하게 이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 점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토시노리의 시야 밖에 있다는 것은 곧 그를 앞지르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므로.

훈련 종료를 알리는 방송이 건물 전체에 울렸다. 각 코스에 있던 학생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야기가 없는데. 웬일이지?”


출석을 부르던 반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항상 첫 번째로 훈련을 끝내던 토시노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 야기 토시노리에게 문제가 생겼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곧 오겠지.” 반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놈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 재수없는 자식. 평소처럼 그렇게 툴툴대며 넘어가려던 엔지의 머릿속에 토시노리의 말이 떠올랐다. 난 물 공포증이 있어. 그래서 오늘은 물에 혼자 들어갈 거야.


“미친 놈이!”


머리가 띵했다. 엔지는 혼자서 수해 지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토도로키, 왜 그래? 그냥 선생님께 맡겨!” 말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자식이 물에 빠졌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엔지는 인공 호수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몸에 두르고 있던 불을 거두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토시노리는 어두운 호수 한가운데의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그의 몸은 가라앉지도, 수면 위로 뜨지도 않고 정지해 있었다. 긴 팔다리는 어색한 각도로 꺾인 채 물살의 흐름대로 흔들렸고,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탁한 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엔지는 서둘러 그에게로 헤엄쳐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그를 구할 수 있다…….

그가 토시노리의 다리를 잡으려는 순간 토시노리가 눈을 떴다. 안도할 새도 없이 두 소년의 주변을 둘러싸고 소용돌이가 일었다. 수해 지역의 인공 호수는 장애물의 일종으로써 불규칙적인 시간에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토시노리의 몸이 뒤집히자 엔지는 그를 놓치고 말았다. 물살에 휩쓸려 몸이 한쪽으로 치우쳤다. 엔지는 거대한 풀장의 모서리로 밀려나며 벽에 이마를 부딪혔다. 왼쪽 머리가 터엉 하고 울렸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물 속에 피어올랐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쪽으로 헤엄쳐 오는 토시노리를 보았다. 토시노리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엔지의 팔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엔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입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양손을 겹치고 가슴을 압박했다. 손바닥 밑에서 뼈가 부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개의치 않고 과정을 반복했다. 엔지가 물을 토하며 깨어났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다가 토시노리를 발견하고는 대뜸 화를 냈다. “너, 허억, 죽으려고 작정했냐?”


“아니.”


토시노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엔지는 호숫가에 드러누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토시노리는 멀쩡해 보였다. 그가 오히려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깨달은 엔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했어?”


토시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자신을 싫어하던 토도로키였다. 거짓말까지 했으니 한 무더기의 욕설이 날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엔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뭘 무서워할 리가 있나.”


그는 고개를 돌려서 입에 고인 물을 뱉어내며 빈정거렸다. “씨발.” 엔지는 부러진 뼈의 통증에 몸을 뒤틀었다. 그의 말에 토시노리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엔지에게 물었다.


“왜 날 구하려고 했어?”

“그걸 말이라고 해?”


어쨌든 그 또한 히어로 지망생이었다.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 개성이나 전투 센스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구한다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다. 엔지는 파괴력만 높은 개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에이에서 토시노리 다음으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히어로의 기본적인 자세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너한테는 좋은 거잖아?”


그러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이 아이에게는 어딘가 모순된 구석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토시노리는 자꾸만 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달라. 난 널 뛰어넘고 싶은 거지 기회를 엿봐 네 빈 자리를 낚아채려는 게 아냐. 그런 비겁한 짓은 안 해.”


꽤 진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수를 써서 널 내 밑으로 끌어내리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엔지는 통증을 참느라 인상을 쓰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라도 한 것마냥.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제길, 뭐라는 거야?”


크윽. 큰소리를 내려던 엔지가 신음했다. 토시노리는 그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두 어깨를 잡아눌렀다. 코가 닿을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자 엔지가 역겹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토시노리의 손바닥은 본래 체온이 높은 엔지의 몸보다도 뜨거웠다. 손을 떼면 커다랗게 데인 자국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토시노리는 낮고 빠른 목소리로 엔지에게 속삭였다.


“목숨은 중요해. 토도로키 군. 세상에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어.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평화야. 그래서 난 히어로로서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너는 좀 다른 이유로 히어로를 하는 것 같네. 솔직히 말해 봐. 너는 내 목숨이 소중한 게 아니었지? 그래서 넌 안 될 거야. 네가 구한 목숨들은 결국 네게 이용당했을 뿐이야. 그래, 빌런보다야 낫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진정한 히어로 또한 될 수 없어.”


엔지는 사상범처럼 불타오르는 토시노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웃어야 해. 웃는 사람이 가장 강하니까. 토시노리가 그렇게 말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순간 토시노리의 얼굴은 부상자를 앞에 두고도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너 따위는 안심시켜줄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넌 그런 자식이야. 이제 알겠어. 네가 나한테 품은 감정은 딱 그 정도야.”


처음 보는 토시노리의 모습에 엔지는 놀랐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엔지는 갑자기 날카롭게 웃기 시작했다. 토시노리의 미소와는 다른, 섬뜩한 비웃음이 습기를 먹어 끈끈한 대기에 흘러넘쳤다.


“그래서 실망했냐?”


엔지가 숨을 헐떡였다. 토시노리가 주춤했다.


“넌 내가 우습고 불쌍하지?”


엔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걷혔다. 토시노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신에, 난생 처음으로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맞아. 넌 우습고 불쌍해. 그런데 내가 너에게 왜 실망해야 하지?

“대체 뭘 기대했어.” 엔지가 중얼거렸다. 토시노리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축축한 손가락이 엔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살을 뚫어버릴 것 같은 토시노리의 악력을 느끼며 엔지는 자신이 상황의 주도권을 손에 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더 바라냐고.” 그는 토시노리가 열세에 몰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자신의 무엇이 토시노리를 압박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본능적으로 아픈 부분을 찾아 물어뜯었다.


“설마 널 구해줄 다른 영웅이라도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 말이 토시노리의 가슴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가장 강한 사람은 오직 스스로에 의해서만 구해질 수 있다. 남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제한다. 그것이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최고의 히어로가 걸어야 할 길이었으며 모두의 상징이 되기를 꿈꾼 건 토시노리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함부로 사람 동정하지 마. 거슬려.”

“연민하는 마음이 없으면 히어로는 못해.”


토시노리가 이를 갈았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엔지가 부상을 입지만 않았더라도 당장 그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후려갈겼을 것이었다.


“닥쳐.”


엔지는 토시노리를 밀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난 피를 문질러 닦았다. 그의 왼쪽 얼굴은 물과 섞여 흘러내린 선홍색 액체로 번들거렸다. 엔지는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마 못 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제길.” 엔지가 중얼거렸다. 토시노리는 화를 가라앉혔다. 오늘도 그는 누군가를 구했다. 쓰러진 소년을 말없이 안아들었다. 토시노리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엔지의 이마에 툭툭 맺혔다. 부상자의 팔이 밑으로 축 늘어져 흔들거렸다.

토시노리는 자신을 상징으로서 바라봐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중에는 분명히,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봐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이의 기대를 짊어지지도 않고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될 누군가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토시노리는 마침내 그런 사람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악의 받친 충동이었다. 전혀 히어로답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야 했다.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토시노리는 고개를 들어 앞만 보았다. 엔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옷 위로 스치는 젖은 살갗의 불쾌한 감각만은 피할 수 없었다. 여름이라는 계절. 심장을 뛰게 만들기 위해서 부러뜨린 뼈의 아픔. 온 몸에 달라붙는 습기의 끈적함. 너라는 존재의 불쾌함.


“개자식.”


들리지도 않는 욕설은 더운 숨결이 되어 토시노리의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강>



진우/샤릭 twitter @zzodaryuji https://spinspin.net/zzodary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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