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느 주말

 

 

 

커피 향이 좋다. 딱히 원두를 바꾼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향이 깊숙이 스민 듯 짙게 느껴졌다. 서정은 뒤를 돌아 아직 닫혀있는 방문을 지긋하게 봤다. 오늘도 늦잠이네. 서정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가 표정을 바로 했다. 실없이 자꾸 웃음이 나는데, 그런 자신을 깨달을 때면 아직은 몹시 어색했다.

 

식탁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아 턱을 괴고 포트 안으로 똑똑 떨어지는 커피를 봤다. 마지막 방울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커피는 지금부터 식기 시작할 터였다. 따뜻할 때 마셔주면 좋겠는데. 평소에는 이쯤 일어나기에 그에 맞춰서 내렸던 커피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기상이 늦다. 그렇다고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결국 서정은 조금 있다가 커피를 한 번 더 내리면 되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다.

 

벌컥- 방문 열리는 소리와 ‘언니!’하고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서혜가 기지개를 켜는 동시에 하품하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정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더니 느릿하게 서정쪽으로 다가왔다. 걸으면서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 하나로 묶었다. 하필 거실 창으로 들이치는 빛 때문에 오렌지색 금빛이 날리듯 서혜의 뒤로 흩어졌다.

 

예쁘다……

 

생각했는데, 서혜가 갑자기 잠이 깨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예뻐요?”

“어, 어……?”

“방금 예쁘다고 했잖아요.”

 

입 밖으로 냈나? 소리는 안 냈던 거 같은데. 차마 말은 못 하고 입만 뻥긋댔다. 아니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놀라버렸고, 맞는다고 하기엔 부끄러웠다. 서혜는 그런 서정에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뒤에서 와락 안았다.

 

“언니도 예뻐요. 머리 아직 안 묶었네.”

 

쪽-

귓등에 입술이 살짝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요즘 들어 서정은 자주 머리를 풀고 있는 편이었다. 그럴 때면 서혜가 서정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데, 그 순간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만다.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머리카락은 평소처럼 귀 뒤로 넘어가지 않고 대신 풀어진 머리카락 위로 뺨이 털썩 내려왔다. 부빗. 서혜는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처럼 뺨을 비볐다. 서정은 손을 올려 서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가항력이랄까. 목소리가 절로 노곤해졌다.

 

“좀 더 자지.”

“그러려고 했는데 옆에 언니가 없잖아요.”

“다시 들어갈까? 좀 더 잘래?”

 

서혜의 의도된 칭얼거림에 서정은 진심으로 응답했다. 그러자 서혜가 서정의 어깨에 입을 막고 웃는다.

 

“커피 향이 너무 좋아서 잠이 다 달아났어요. 이거 방금 막 내린 거 맞죠?”

 

서혜가 등에서 멀어지더니, 찬장에 놓여있던 머그 두 개를 집어왔다. 같은 무늬에 색깔만 다른 머그였다. 하나는 인디안 핑크, 또 하나는 연한 민트. 나란히 두면 물결무늬가 서로 이어졌다. 핑크가 서혜, 민트가 서정의 것이었다. 그리고 서혜는 꼭 그 무늬를나란히 맞춘 후에 커피를 따랐다.

 

“하아, 향 좋다. 오늘따라 더 좋은 거 같아요.”

 

신기하게도 서혜는 서정과 같은 감상을 내놓았다. 빈말일 수도 있고, 그냥 하는 인사치레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 쪽에 따뜻함이 확 번졌다.

 

서혜가 서정의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 마셨다. 서정도 커피를 살짝 머금었다. 음, 하는 목 울림이 절로 나왔다. 오렌지향의 신맛이 덜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고, 카카오 향취는 깊고 우직했다. 서정은 홀린 듯 다시 커피를 머금었다. 그때 서혜가 말했다.

 

“아, 행복하다.”

 

서혜는 그렇게 말하며 서정을 보고 히죽 웃는다. 그러더니 서정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어 왔다. 서정도 서혜의 머리에 살그머니 기댔다.

 

나도.

서정이 들릴듯 말듯 속삭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주말 아침이었다.

 

 

*

 

 

늦은 아침, 식사 준비는 서혜가 했다. 토스트에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아보카도를 자른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처럼 두 사람은 연신 웃으며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뒷정리도 마친 서정은 자연스레 소파로 갔고, 서혜가 따라왔다. 서정이 소파에 앉자 마치 제 자리인 양 서혜가 옆에 앉았고, 서정의 몸을 옆으로 돌린다. 서혜가 하는대로 몸을 돌려 앉자, 서혜는 서정의 머리를 한데 모아 손가락으로 빗질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빼며 조금 웃었다. 생각해 보니 이 순간을 은근히 기다렸던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머리를 묶는 일이었는데, 그 버릇이 요 며칠만에 바뀐 건 오롯이 서혜 탓이었다.

 

“근데 언니 지금 뭐 봐요?”

“커트러리.”

“커트러리요?”

“응. 너도 같이 쓰려면 새로 있어야 할 거 같아.”

 

머리가 바짝 당겨 위로 묶였다. 긴 꼬리 같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리는 것도 서혜의 버릇이었다. 그렇게 머리 묶기가 끝나자 서혜는 고개를 앞으로 빼고 서정이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근데 왜 그릇으로 넘어갔어요?”

“이거 안 예뻐?”

“예뻐요. 근데 집에 그릇 많던데.”

“……그냥.”

 

많긴 하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서혜가 오기 전에 혼자 쓰던 거니까. 너무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커트러리 바꾸면서 식기까지 싹 바꾸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서혜는 이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머리를 뒤로 젖혔다. 거꾸로 된 서혜가 기다렸다는 듯 이마에 쪽- 뽀뽀했다. 그 부분이 간질간질했다.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긁었더니 서혜가 그 손을 잡아온다. 그러더니 이번엔 콧잔등에 입술을 가볍게 내렸다가 멀어졌다.

 

“그릇 괜히 바꾸지 말아요.”

“이거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거 볼까?”

“아니, 많은데 굳이 살 필요 없는 거 같아서요.”

“……그냥 내가 바꾸고 싶은 건데.”

 

서정이 조금 딱딱하게 말하자 서혜가 네, 네. 하고 웃는다. 어딘가 미심쩍은 웃음이라, 서정의 손가락이 괜히 분주해졌다. 또 다른 화면을 터치하자 아까보다 좀 더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졌고 금테가 화려한 디자인이 보였다.

 

“이건 어때?”

 

서정이 내밀자 서혜가 미간을 좁히고, 턱을 손끝으로 톡톡 치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별로네요.”

“응.”

 

서정은 다시 핸드폰에 고개를 묻고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 그런 서정의 손을 잡은 건 그렇게 세 개쯤 더 봤을 때였다. 서혜가 불쑥 물었다.

 

“언니, 오늘 특별한 일정 있어요?”

“없는데.”

“그럼 나 오늘은 집에 가야겠어요.”

 

폰 화면을 분주하게 오가던 서정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집?”

“응. 집이요.”

 

아…… 그랬지. 서혜의 집.

 

서정은 조금 당황했다. 엄밀히 두 사람은 지금 동거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일주일에 두 어 번 들르던 집에 서혜가 매일 드나들기 시작한 게 저번 주부터였다. 퇴근을 같이하고, 저녁을 함께 먹고, 그러다가 서혜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몇 캔 사자고 했다. 손에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면 자연스레 발길은 서정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막 넘은 참이었다.

 

처음 며칠은 서혜가 오늘은 집으로 가려나, 생각했던 것 같고 다음 주말도 그렇게 보내고 나자 그냥 이대로 같이 살자고 할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열흘쯤 되자 어느새 서혜가 들어와서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특별히 그러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니 서혜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왜 이렇게 갑작스럽고 섭섭하게 느껴지는지.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죠. 나 우리 집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겠어요.”

“그럴 리가. 겨우 며칠 안 갔다고.”

“언니, 내 집에 안 간 지 열흘이 넘었거든요. 곧 2주라고요.”

“벌써 그렇게 됐나?”

 

서정은 짐짓 모르는 척했다.

 

“너무 행복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구나.”

 

서혜가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서정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 말 그대로였으니까. 날짜를 새면서도 넘어가는 날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서혜의 당연한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서혜 입장에선 아무래도 타인의 집에서 지내느라 눈치를 봤을 수도 있겠다 싶다. 최대한 편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그거야 어디까지나 이 집의 원래 주인인 서정의 입장이었을 테지. 서정은 서혜를 보며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이려고 했다. 그런데도 차마 바로 보내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일, 가지? 주말은 보내고.”

“내일보다는 오늘이 좋을 거 같아요. 그래야 내일은 좀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죠.”

 

그렇군.

서정은 금방 납득했다.

 

“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고마워요. 언니.”

 

감사를 표하며 해맑게 웃는 서혜의 얼굴을 얼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납득은 머리로 했는데, 가슴은 그렇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잡고 싶어질 게 뻔했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휑하게 비는 것처럼 시렸다.

 

어쩌면 오늘 아침이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조금씩 행복을 덧입히는 기분이었다. 서혜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지금까지 쌓은 행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서정은 이성이 사라진 것처럼 움직이는 마음이 새삼 우스웠다.

그런 게 사랑이라는 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성이 달아나고 남은 감정이란 헐벗은 욕망 같은 거였다. 욕망이란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고, 탐하고 싶은 마음이니까. 그 마음이 때론 상대를 상처입히는 칼이 되기도 하는 거니까.

 

 

*

 

 

서정의 차가 서혜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차 시동이 꺼진 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정이야 서운함을 뱉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중이니 그렇다 치고, 서혜는 왜 아무 말도 없을까.

 

서정이 한숨을 삼키며 서혜를 돌아보자 서혜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려 서정을 봤다. 의외로 조용한 눈가에 웃음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 눈꼬리가 퍽 짓궂어 보였다. 놀리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집에 가니까 그렇게 좋아?”

 

서정의 입에서 결국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서혜는 심지어 풋, 하고 소리 내어 웃고는 서정의 목을 와락 끌어안는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그것보단 언니 표정이 귀여워서요.”

“귀여워?”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귀엽다니. 나 지금 되게 어색한 표정일 텐데. 웃지도, 울지도 못해서 어중간하게 굳힌 근육이 어떤 모양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근데도 서혜는 연신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혹시 눈치챘나? 보내기 싫어 죽겠다는 마음 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처음부터 눈치는 워낙 빤했다. 서정의 행동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거기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서혜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왕 알고 있는 거면……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서정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잔 안 줘?”

 

결국 말하고 말았다.

서혜 집에 처음 오는 건 아니었다. 사귄 이후 이 집도 제법 드나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크기가 몇 배 되는 서정의 집이 편하다 보니 그쪽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뿐이었다.

 

“당연히 주죠. 올라가요.”

 

서혜는 기다렸다는 듯 상큼하게 말하며 보조석 문을 열고 나갔다. 서정은 어딘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으로 따라 내렸다. 잘 모르겠지만, 서혜가 평소와 조금 다른 거 같았다.

 

 

*

 

 

서혜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창을 활짝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제법 찬 공기가 안쪽으로 훅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공기가 과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활기를 더했다.

 

“언니, 식탁에 좀 앉아있을래요?”

“응.”

 

뭘 하려고 그러나. 그냥 차만 한 잔 얻어먹고 가면 되는데. 그러는 동안 서혜의 얼굴이나 좀 더 봤으면 했다. 그런데 방으로 쏙 들어간 서혜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기다리다가, 서정은 거실로 갔다. 소파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여도 보고, 거기에 있는 쿠션에 코를 묻어 냄새도 맡아봤다. 익숙한 향. 자신의 집에 떠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향이 거기에 묻어있었다.

 

서정은 쿠션을 꼭 껴안았다가 놓아주고, 이번엔 티비가 놓인 선반으로 갔다. 선반 옆에 액자가 있는데, 거기에 지금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서혜가 있었다. 대학 친구들과 함께 찍은 듯 보이는데, 바다였다. 바다 앞에서 다 함께 폴짝 뛰고 있는 사진. 단연 서혜가 가장 높이 뛰었고, 가장 예쁘게 웃고 있었다. 손으로 서혜의 얼굴을 한번 쓸었다가 놓았다. 누가 보면 처음인 줄 알겠지만, 벌써 열 번도 더 봤던 액자였다. 그런데도 볼 때마다 사진 속의 서혜가 사랑스러웠다. 다음에 우리도 카메라를 가져가서 이렇게 찍자고 해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나이대나 가능하지, 서른 중반에 저렇게 뛸 수 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자각하자 문득 한심해졌다.

 

소파에 가서 털썩 앉아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기하학무늬가 깔끔하게 그려진 액자 하나가 걸려있는 벽면, 단출하고 적당한 사이즈의 TV, 작은 블루투스 오디오, 그 옆에 낮은 책장이 있는데 여러 분야의 잡지가 꽂혀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서혜다운 집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중심이 딱 잡혀 있는 집. 자신의 집과는 다른 색이 있는 서혜의 집.

 

그때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서혜가 나왔다. 근데 몸만 나온 게 아니라 한쪽 손에 커다란 트렁크를 쥔 채다. 다른 쪽 어깨엔 배낭 같은 가방이 걸쳐져 있다.

 

“서혜야?”

 

서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렀더니 서혜는 아무 말 없이 책장으로 가 잡지 몇 권을 챙겼다. 그리고는 그것도 가방에 넣는다. 어디 먼 데에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어디 가? 쉰다며.”

 

서정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물었더니, 서혜가 그제야 돌아봤다. 서혜의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눈 밑의 애교살이 볼록해졌다가 가라앉았다. 터지는 웃음을 참는 얼굴. 대체 이게 무슨…… 그러나 곧 목소리를 큼큼 정리하더니 가볍게 말했다.

 

“짐 가지러 왔던 거예요.”

“짐?”

“안 가져가면, 언니가 거기서 내 살림을 아예 다 새로 사줄 생각인 거 같아서.”

“어…… 어?”

 

바보처럼 맹한 소리를 내자 서혜가 트렁크를 놓고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더니 이마에 이마를 콩 박고는 코끝으로 웃었다. 곧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처음에 칫솔이나 세면도구는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근데 다음날은 파자마와 속옷이 생겼고, 그 다음 날은 슬리퍼가 왔죠. 또 그다음 날은 화장품이 생기더라고요? 아, 그날 옷도 몇 벌 왔었다. 신기하게 내 취향 그대로, 꼭 내 옷장에서 꺼내 온 것처럼 주문했더라고요. 그것 뿐인가. 내가 테이블 탁자에서 일하니까 좌식 의자도 샀지. 그리고 오늘은 커트러리에 식기까지 사겠다고 했잖아요. 그 정도면 살림이지.”

 

서혜가 손가락을 하나씩 곱을 때마다 서정은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서혜가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길 바라서 그랬던 건데.

 

“부담이었어?”

 

서정이 조용히 말하자 서혜가 입술을 서정의 입술에 꾹 눌렀다가 떼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언니. 나랑 살고 싶죠.”

“……”

“열흘 넘게 언제 말하나 봤더니, 살림은 차리면서 말은 안 하고.”

“아니, 살림이 아니라.”

“나는 언니랑 살고 싶은데. 언니는 아닌가 봐요.”

“아, 아냐. 그게 아니고.”

 

서정이 다급하게 말하자 서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응. 아닌 거 알아요. 언니, 내가 집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눈꼬리가 쳐져서 올라가질 않았는걸.”

 

하아- 긴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어깨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서정은 서혜의 어깨를 퍽- 쳤다.

 

“한서혜. 나 놀린 거지.”

 

이 연하는 적당히란 걸 모른다. 자신이 서혜와 관련된 일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슴이 된다는 걸 알면서.

 

“미안해요. 언니가 시무룩한 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웁.”

 

서정은 그대로 서혜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고,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붙였다. 준비된 것처럼 타액이 넘어오는데, 그게 참 달큰하다. 한참 빨다가 서혜의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얄미운데, 예뻤다. 목에서 웃음 섞인 신음이 올라왔다. 마냥 좋은가 보다.

 

서정은 그 입술을 열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서혜는 길을 열어주듯 혀를 아래로 내리고 서정을 받았다. 하지만 고분고분한 것도 그때뿐, 서정이 다 들어가자마자 서혜는 혀를 거칠게 얽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또, 서혜가 붙잡았다.

망설일 때마다,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서혜는 서정을 단단히 붙잡고는 당겨준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고.

그 마음을 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술부터 물고 보는 사람인데도, 서혜는 소중하다는 듯 품고 다정하게 안았다.

 

간신히 떨어져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정이 웃었다.

 

“우리 이사 갈까?”

“이사? 갑자기 왜요?”

“더 큰 집으로. 그래서 여기처럼 꾸며주게. 서혜 방.”

 

진지하게 말했는데, 서혜가 서정의 입술에 잘게 키스를 날린다.

쪽 쪽 쪽 쪽

 

그렇게 밀어댈수록 몸이 점점 뒤로 넘어가더니, 결국 상체가 소파 위로 완전히 털썩 떨어지고 말았다. 그 상태로, 서혜는 서정의 위에 올라탔다. 아래에서 보는 서혜는 언제나 아찔할 정도로 야살스러웠다. 입술이 말랐다. 서정이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쓸었다. 그 순간, 서혜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가 떨어졌다. 꿈틀. 서혜 만면에 흐르던 웃음기가 가시더니, 얼굴이 점점이 다가왔다.

 

코가 부딪힌다고 생각한 순간, 서혜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다시 한번 서정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까와 달리 부드럽고 말캉했다. 속살거리듯 오가는 입술이 끈적하게 붙었다가 떨어지길 몇 번이나 했다. 혀를 깊게 얽지 않았더니 타액보다 숨이 더 자주 안으로 들이쳤다. 서혜가 내쉬는 숨을 삼킬 때마다 심장이 벅차게 뛰었다.

 

“하아- 싫어요. 언니 향이 듬뿍 밴 그 집이라서 좋은걸요.”

“……오래도록 그랬는데, 며칠 전부터 서혜 향이 나더라. 여기 이 쿠션에서 나는 향이랑 같은 향이 나.”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한테 같은 향이 날까요.”

“글쎄…… 그랬으면 좋겠어?”

 

서정이 묻자 서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뇨. 언니는 언니라서 좋은걸요. 향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나도, 서혜라서 좋아.”

 

서정도 이번엔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서혜야. 우리집으로 갈까.”

“언니 집 아니고 우리집인 거예요?”

“응. 우리집.”

“좋아요. 가서 짐 정리하고 내일은 좀 쉬어요. 우리.”

 

마지막 우리라고 말할 때 서혜의 음성에 묘하게 강세가 들어갔다. 그러니까 생각났다. 아까 일요일은 쉬었다가 출근하겠다던 말.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던 거다.

 

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다 단속하기 어려웠다. 서정은 서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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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 사람의 포근한 일상과 뒹굴뒹굴이 보고싶다고 하셨던 분들 리퀘에 맞춰 적은 거랍니다 :) 

다른 리퀘는 다음 외전에서 뵐게요! 


그리고 본편은 오늘부터 유료화가 될 예정이에요. 

따로 이북으로 낼 계획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 


(외전은 계속 무료 공개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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