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컷!”


 날카로운 목소리와 시선이 느껴지는 이 순간. 모든 촬영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순영 씨. 오늘따라 왜 그래? 지금 같은 장면만 몇 번째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순영의 말에 혹해버린 지훈이 최대한 빠르게 대사 숙지를 하고서 촬영장에 도착했다는 거다. 두 사람은 드라마 촬영장에 가는 내내 서로에게 연습을 시켰다. 주변 관계, 평소 말투, 습관 등 드라마를 촬영하듯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지훈이 신경 쓰이는 부분은 다른 것도 아닌 석민에게 대하는 태도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일단 가장 친하고 비밀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 그래서 지훈은 순영에게 석민과 관련된 것들을 더욱 세심하게 연습 시켰고, 결국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완벽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석민이 이것저것 캐묻는데도 불구하고, 순영이(정확하게는 순영이 되어버린 지훈의 몸으로) 시크하고 도도하게 석민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권순영, 너 오늘 정말 아프긴 아픈가 보구나? 오늘 아침부터 기억상실 드립이나 치고 있더니.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어?”

“아… 응. 누나 미안. 오늘따라 컨디션이 영 아니네.”


 그리고 순영 역시 지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오늘 아침에 봤던 사람은 생활 매니저고, 이 사람은 코디, 이 사람은 헤어디자이너, 또 누구, 누구……. 이게 설명인지 설교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장황했던 순영의 설명에 지훈은 기어코 귀를 막고야 말았지. 물론, 그 탓에 순영에게 엄청나게 혼나긴 했지만.


“똑바로 할 수 없어?”

“뭐가.”

“NG 내지 말라고. 그렇게 대본 숙지를 하랬더니… 천하의 이지훈이 이정도인가?”

“…야!”


 서로에 대한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서 그런가, 촬영과는 별개로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붙어있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뭐, 친목을 과시하는 척 드라마 주, 조연끼리 사이가 좋다고 소문 까짓 거 나면 됐지. 하지만, 그 내용이 중요한 거다. 갑자기 와서는 이것저것 건드리고 도발해버리는 순영에 지훈은 괜스레 짜증이 났다. 눈살이 팍 찌푸려지고 미간이 좁아진다. 표정이 좋아지지 않는걸 보자마자 순영은 기겁하며 미간을 꾹 눌러준다.


“뭔데?”

“피부 상한다. 주름 생긴다. 그래도 나름 연예인인데.”

“내가 네 피부까지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럼 나도 신경 안 쓸게. 아무것도 신경 안 쓰지 뭐. 그냥 이지훈 얼굴로 도로 한복판에 발가벗고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지, 뭐.”

“…미쳤어?”

“어차피 내 몸도 아니고, 다른 거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

“알았어, 알았다고. 진짜…….”


 솔직하게 옆에서 자꾸 도발하고 이상한 소리하는 순영이, 진짜 얄미워야하고 짜증나야 하는데… 귀여워 보인다면 진짜 미친 걸까. 단순한 팬심으로 승화시키기엔 너무나도 말이 안 되지만 진짜 그렇게 느껴지면 바보 같은 걸까.

 지훈은 스스로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이런 식으로 자꾸 콩깍지가 씌면 큰일이란 말이지. 애초에 순영에 대해서는 정말 팬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냥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같은 드라마에 연기를 하게 되어서 더욱 행복했다. 정말 그걸로 행복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몸이 바뀌고 가까워지고 나서 순영을 보니…… 정말 짜증스러운 행동도 귀여워 보이고 장난 끼 많아 얄밉지만 또 미워할 수가 없다.

 ……역시 콩깍지겠지. 지훈은 낮은 한숨과 함께 빠르게 순영에게서 벗어났다. 더 이상 그와 가까이 있으면서 그런 묘하고도 애매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지훈을 한참 바라보던 순영은 입가에 작은 호선을 그렸다. 뭐랄까, 정말 건들면 건들수록 반응이 재미있어서 놀리고 싶다고 해야 하나. 대화 하면 할수록 매력이 자꾸 나한테로 넘어오는 기분….


“이상하단 말이지.”


 작게 중얼거리는 순영. 그런 순영을 발견한 석민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잔뜩 그린 채 순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순영의 어깨를 툭툭 쳤고.


“형, 뭐해요?”

“아, 그냥… 이지훈이 귀엽잖아.”

“네?”

“아, 아니. 그냥. 하늘이 귀여워서.”


 ……응? 하늘이 귀엽다고? 대체 하늘의 어떤 부분이 귀여운 거지?

 순영은 그런 알 수 없는 말만을 남겨놓고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러 갔다. 아무 설명 없이 가버리는 탓에 혼자 남은 석민은 혼란스럽다는 듯 계속 하늘만 바라보았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고? 그러나 끝까지 이해되지 않던 석민은 하는 수 없이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계속 되는 촬영에 다들 지칠 법도 했다. 비축분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지훈은 빠르게 역할에 적응해야만 했다. 본인이 주연 배우인데, 대본 숙지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다른 배우들에게 피해가갈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혼자서 열심히 고군분투했다. 이미 순영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다 되었다. 다만, 대사의 양이 많아 빠른 시간 내로 외우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그런 시간을 주려는 건지, 모든 스텝들을 포함한 배우들이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 지훈은 대사를 외워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스텝들과 배우들에게는 작은 소문이 돌았다.


“기사 봤어요?”

“무슨 기사?”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조연 배우 중에 대마초 피운 사람이 있다는데…”

“…진짜로?!”


 촬영을 하는 동안 단독 입수했다는 모 언론사의 기사가 퍼졌고, 그 내용에는 현재 인기 있는 드라마에 현재 출연 중인 조연 배우가 있다고 적혀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진 지라 예상은 가는 것인지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향했다.

 그 배우는 조연을 많이 하는 고참 배우로, 지훈과 같이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 많은 선배였다. 지훈은 대사를 외우느라 관심이 없었지만 순영은 그러한 소문에 관심을 가지고 똑같이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지훈의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본 것이 된 거다.


“…….”

“…….”


 그리고 마주쳐버린 시선. 순영은 답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시선을 그대로 피해버렸고, 본인도 모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그건가?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것을 피하려하는 일종의 방어 기제?


 순영은 방금 본인이 왜 시선을 피했는지 몰라 마음이 복잡했다. 아, 이럴 땐 역시 이지훈한테 장난치러 가야지. 그 생각에 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지훈에게 다가갔다.


“이지, 아니 권순영.”

“뭐야… 나 대사 외워야 돼. 저리 가.”

“아니, 그냥 옆에 좀 있을게.”

“뭐래…….”


 그 짧은 시간 사이 석민은 메이크업을 수정 하러 갔기에 순영 옆에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지금의 이 시간 저리 가라며 손짓하는 지훈에도 순영은 고집스럽게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아무리 밀어내도 반응이 없는 탓에 지훈은 포기하고 다시 대사 외우는 데에 몰입했다.


“같이 맞춰줄까?”

“어?”

“원래 내 대사잖아. 내가 잘 알아. 알려줄 테니까 맞춰 보자.”

“어……?”


그러나 그 몰입도 순영의 말에 뚝 끊기고 말았다. 지금은 이렇게 몸이 바뀌고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탓에 편하게 대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훈에게는 순영이 선배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연기 선배가 직접 연기를 알려준다니… 이건 어떻게 보면 기회? 엄청난 대박 로또 당첨?


“그… 특별히 받아볼게.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하니까.”

“어련하시겠어.”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말은 결코 곱게 나가지 않는다. 순영 쪽은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배우한테 말 예쁘게 안 나가는 건 좀 흠이네. 자존심만 세서, 괜히. 지훈은 혼자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순영의 가르침에 집중했다.


 알려준다는 말에 곧바로 몰두하는 지훈에 순영은 새삼스러운 마음이 든다.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꽤 마음에 드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아주 당분간은 이대로 서로 같ㅌ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 같다.


 ……이 녀석만 뺀다면.


“지훈 형, 여기서 뭐 해?

“어?”

“연습 내가 도와줄게. 가자.”

“잠깐, 잠깐.”


 수정 메이크업이 끝났는지 석민은 지훈과 순영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곤 순영의 팔을 붙잡고 나서려는데, 지훈은 너무 당황스럽다. 평소 다정다감하던 석민이 날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선배님, 연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제가 도와줄테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어, 어? 아…”


 처음 보는 석민의 차가운 표정. 순영의 몸을 하고 있는 지훈이라 어쩔 수 없이 보는 석민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럽다. 석민이는 그런 표정, 나한테 지은 적 없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었잖아, 석민아. 그러나 지훈은 내뱉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채로 석민의 보호를 받는 순영을 바라보았다.


“정말 신경 쓰여서 그런데요.”

“…….”

“지훈 형 안 도와주셔도 돼요. 제가 도와주면 되니까요.”

“…….”

“굉장히, 신경 쓰여서요.”


 그러고서 석민은 순영을 데리고 가버렸다. 순영이 슬쩍 지훈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아까 그렇게 메이크업을 다시 받았는데 울려나. 순영은 지금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그저 지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석민이라는 녀석은 뭐 이리 이지훈한테 집착이 심해? 기분 나빠.


 ……그냥, 기분 나빠. 기분이… 나쁘다고.



“이상해요, 지훈 형. 갑자기 왜 이렇게 권순영 주변에 있는 거예요?”

“……”

“신경 쓰여요. 물론, 형이 권순영 좋아하고, 팬인 거 아는데… 그냥 저는 좀 그래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잖아요, 형도.”


 어이, 이석민. 너 21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난 22살인데 어디서 권순영, 권순영 거리고 난리야. ……라는 건 역시나 속마음.


 지금은 촬영을 모두 끝낸 뒤 석민의 차 안. 석민이 늘 지훈을 데려다 준 것 인지 익숙하게 석민은 지훈을, 아니 정확하게 순영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도착했음에도 순영에 대한 경고를 하느라 내리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아, 언제쯤이면 집에 가서 쉴 수 있냐고. 순영은 석민을 잔뜩 째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지훈의 몸.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지훈이 이석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던 이유가 있었구만. 이래서인가?


“아무튼, 알겠죠? 집에 가서 좀 쉬어요. 오늘 많이 피곤했잖아요.”

“아, 응.”


 드디어 집에 들어가게 해주나 싶어 순영은 짜증나는 마음을 한가득 싣고서 직접 안전벨트를 푸려는데……


 쪽.


“잘 자요, 형. 좋은 꿈꾸고.”

“어? 어, 어… 그…래.”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풀렸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순영이 내리자마자 석민은 차를 끌고 가버렸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소리의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내 첫 키스.”


 그렇다. 석민은 순영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는 척 하며 순영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고, 거두절미하고 그대로 당해버린 순영은 절망을 맛보았다.


“젠장…… 내 첫 키스. 이석민 이 개새끼야……. 개새끼야!!”


 그 날 지훈이네 집은 엄청난 절규로 가득 찼다고 한다.


* *

석민이가 나왔습니다...! 석민이의 활약은 지금 부터 시작...!

모랄까 부드러운 듯 강렬한 이미지의 서브 남주가 필요 했는데 그게 석민이었던 거 같아요!

순영이와 석민이의 대결 구도.. 과연 지훈과 순영은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ㅎㅎ

항상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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