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심이 풀려서 너무 푹 자버렸네. 바보도 아니고.”

 

오랜만에 몸이 아플 때까지 푹 잠들어버린 하해가 오래 자서 아픈 몸을 두드리며 일어났다. 도환이 제게 했던 짓이 있는데 겨우 사과에 고백 하나 듣고 경계심 풀어지다니 다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으악!”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차가운 물을 틀어 몸을 적시자마자 숨이 턱 막히며 비명이 흘러나왔다. 뼛속까지 시린 기운에 생각 정리는 물 건너갔지만, 잡생각은 사라져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나니 할 게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와 어제 보던 드라마를 이어서 틀었다. 드라마 속,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도환을 보고 깨달았다. 도환의 눈빛은 이운이 저를 보던 눈과 닮았다. 그 때문인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도환을 볼 때마다 자꾸 이운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렇게 경계가 풀리는 거겠지.

이운은 이운이고, 도환은 도환이었다. 이렇게 둘을 겹쳐 보는 건 그 둘에게 몹쓸 짓이었다. 자신은 아직 이운을 잊지 못했고, 인어를 사랑하게 된 인간들의 끝은 다 좋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지만 그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인어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도환의 끝도 마찬가지일 테지. 한시라도 빨리 도환의 마음을 접게 만들어야 했다.

보던 드라마를 멈추고 도환의 서재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어떻게 해야 도환이 마음을 접을지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환이 저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인어일 때의 모습을 봐서 그런 거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외적으로 망가진 걸 보여주면 도환이 마음을 접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환이 이미 수분이 부족해서 바싹 마른 모습을 봤었던 게 생각났다. 그걸 보고도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면 외모로 떼어놓기에는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지랄할까? 아니지, 이미 꾸준히 지랄하고 있는데.”

 

펜을 놓고 다시 머리를 부여잡은 하해가 결국 아직 이운을 잊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도환이 포기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들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낙서를 끄적이던 종이를 대충 테이블 위에 팽개쳐두고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드라마의 완결까지 다 보고 나서도 도환은 들어오지 않았다. 도환을 기다리며 생각 없이 실시간 채널로 돌아가 몇 번 채널을 돌리자, 처음 보는 프로그램에 도환이 나왔다.

 

-도환 씨는 인어 양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어 양식이라니 제가 잘못 들은 건지 단어가 인식되지 않아 방금 TV에 나온 인간이 했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곱씹어 봐야 했다.

 

-양식화라니 상상도 못 했네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거절당할 줄은 몰랐군요. 설마 인어가 도환 씨와 비슷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건가요?

 

도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어서 빔 프로젝터가 켜지고 수조에 갇혀있는 인어 사진이 띄워졌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욱 자극적인 사진이 나열됐다. 묶여있는 인어의 사진이 띄워졌고, 그 옆엔 모자이크가 되어있었지만, 토막 난 인어도 있었다. 동족들이 수조에 갇혀있는 영상까지 보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좆같은 인간 새끼들.”

“그러게, 보지 말라니까.”

“보고 싶어서 본 거 아니야.”

“문자 안 봤어?”

“못 봤어.”

 

기껏 먹은 걸 다 쏟아내고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면서 나오는 도중 도환과 딱 마주쳤다. 창백한 하해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펴보며 다가오던 도환이 TV에서 들리는 김준태의 목소리에 상황을 파악하고 하해를 꽉 끌어안았다.

 

“나도 네 생각나서 기분 더러웠어.”

“이제 놔.”

 

도환을 밀쳐낼 힘도 없고, 안겨있는 도환의 품이 따뜻해서 그대로 가만히 안겨 있다가 이러면 안 된다며 정신을 차리고 도환 품에서 벗어나 소파에 앉았다.

 

“이건 뭐야?”

“아!”

 

식어가는 하해의 온기를 아쉬워하던 도환이 TV를 끄기 위해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다가 하해가 내팽개쳐뒀던 종이를 발견하고 한 장씩 읽기 시작했다. 종이를 뺏으려 손을 뻗던 하해가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라며 손을 거두고, 점점 굳어가는 도환의 표정을 살폈다.

 

“이게 뭐야.”

“거기에 적혀있는 그대로야. 네가 내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것 같아서 다시 얘기해주려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운인지 뭔지 그 사람? 죽은 거 아니야?”

“죽었지. 아직 못 잊었어. 솔직하게 말해서 운이를 잊을 자신이 없어.”

“나는,”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하해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도환이 한숨을 쉬며 하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보육원 앞에 버려졌어.”

“뭐?”

“눈 때문에 버려졌어. 원장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지, 같이 지내던 애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이 내가 무섭다고 피하고, 괴롭혀도 원장 선생님만큼은 나를 감싸주셨으니까.”

“이런 말을 왜 하는 건데.”

“너 내가 왜 해산물을 싫어하는지 알아? 몇 번째 입양이었더라, 기억이 안 나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거야. 새아빠라던 사람이 나를 인어라고 믿고 있었어. 그래서 입양했던 거야. 처음에는 뭐, 나름 괜찮았어.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서였나? 본성을 드러내더라고.”

“뭘 어쨌는데?”

“방에 가두고 해산물만 먹였어. 그러다 보면 인어의 모습으로 변할 줄 알았나 봐. 파양될 때까지 방에 갇혀서 해산물만 먹었어. 나중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더라. 멍청한 새끼. 나는 인간인데. 그 뒤로 인어가 더 증오스럽더라.”

“그래서,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네가 구역질하는 이유 알아달라고?”

“그런 일을 다 겪고도 너를 좋아해. 그런데도 너를 좋아한다고.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포기해. 하, 지금 내가 너한테 하는 짓이랑 다를 게 없네. 나 진짜 개새끼 맞아. 그런데, 그래도 너를 못 풀어주겠어.”

 

하해의 가시 돋친 반응에도 덤덤하게 말하던 도환이 새아빠라던 사람과 자신의 행동이 겹친다는 걸 깨닫고는 괴로워하며 하해의 품에 무너졌다. 도환을 밀어내려던 하해는 괴로워하는 도환의 모습에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도환의 등을 토닥여줬다.

 

“언제부터?”

“뭐?”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아마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도환의 말에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하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운이랑 만난 것도 그물에 걸려서였어. 성격도 외모도 전혀 다른데 너를 보면 자꾸 운이 생각이 나. 그래서 자꾸 너한테 유해지나 봐. 너 인어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끝이 어떤지 알아?”

“어땠는데?”

“다들 끝이 안 좋아. 운이는 인어를 노리는 인간들한테 살해당했어. 나는 아직도 날 숨겨주고 나 대신 그 좆같은 새끼들한테 끌려가던 운이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찾으러 갈 테니까 도망가라던 운이는 돌아오지 못했어. 그렇게 될 거라는 거 운이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 새끼들이 운이를 고문했더라고. 그걸 숨기려고 바다에 던졌나 봐. 그러면 다른 인어들이 뜯어먹을 테니까. 내가 먼저 발견해서 육지로 끌어올렸을 때 운이 상태가 어땠는지 알아?”

“힘들면 그만 말해도 돼.”

“너덜거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태였어. 온몸은 시커멓게 피멍이 져서 퉁퉁 불어있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나를 보지도 못하더라.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지.”

“...”

“그런데도 운이는 다 잊으래. 복수할 생각도 하지 말고 전부 다 잊고 살아가라고. 그게 끝이었어. 그 말만 하고 죽어버렸거든. 그래서 운이가 좋아하던 장소에 묻어주고 떠났어. 당연히 복수는 포기했지, 괜히 복수한다고 설쳤다가 괜히 운이 죽음만 개죽음 만들면 안 되니까. 그 후로는 바다에서만 지내다가 운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올라온 건데 재수 없게 그날 그물에 걸린 거야. 어쨌든 알겠어? 운이만 그런 게 아니야 인어를 사랑하는 인간의 끝은 대부분 이렇다고.”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생생한지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쥔 하해의 손에 상처가 나 빨갛게 피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도환이 하해의 손을 펴주며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투명한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자, 도환의 손가락을 타고 진주가 툭, 떨어졌다.

 

“나는 다를 거야.”

“너는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아직 운이를 못 잊었다니까.”

“미안해. 기억하기 싫었을 텐데 다시 기억나게 해서. 그래도 나 너 포기 안 해. 네가 그 사람 못 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서서히 나를 좋아하게 만들 거니까. 조금이라도 날 좋아해 주면 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좋아할 일 없으니까 괜한 희망 품지 마.”

“나중에 보면 알겠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도환을 단호하게 밀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더욱 당당해진 도환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저 새끼가 초대하면 갈 거야?”

“무슨 소리야?”

“초대하면 간다고 하던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그런 데를 왜 가?”

“내가 싫어진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그 인간이랑 가까이 지내지 마.”

“김준태 그 새끼한테 시달렸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니까 걱정하지 마. 절대로 그 새끼랑 가까워질 일 없어.”

“그럼 다행이네.”

 

경험상 이럴 땐 말을 돌리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하해가 도환에게서 떨어지며 묻자 도환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말에 왠지 안심이 된 하해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자, 도환도 따라 웃었다.

 

“김준태보다는 네 얘기를 듣고 싶은데. 오늘 뭐 했어? 밥은?”

“드라마 보다가 먹었어.”

“아까 토하고 나온 거 아니야? 나 밥 안 먹었으니까 같이 먹어.”

“네가 이 시간에 뭘 먹겠다고?”

“왜, 뭐가 잘못됐어?”

“원래 이 시간에는 음식에 입도 안 대잖아.”

“글쎄, 그랬나? TV 보면서 먹을 거지?”

“그랬나? 가 아니라 그랬었거든?”

“앉아있어. 가져다줄게.”

“또 뭐 탈 거 아니지?”

 

평소에는 관리다 뭐다 해서 8시 이후에는 물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밥을 먹겠다니 어딘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고백하고 사과했다지만 아무래도 도환을 덥석 믿을 수는 없어 부엌으로 향하는 도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앉아있으라는 말에도 따라오는 하해를 보며 도환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자업자득이지. 결국 하해와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서 얼마 남지 않은 밀폐용기와 샐러드팩을 꺼냈다.

 

“아.”

“왜?”

 

도환이 보는 앞에서 밀폐용기 안에 들어있는 해산물들을 물로 한번 싹 헹구자 도환의 표정이 괴롭게 바뀌었다. 속 썩어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거실로 가 도환이 꺼버린 TV를 다시 틀었다. 다행히 자동으로 다른 채널이 틀어져 구역질이 나는 화면을 다시 보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갖고 싶어?”

“무슨, 야!”

“필요하긴 하지. 너 운동 부족이잖아.”

 

채널을 조금 돌리자 홈쇼핑 채널에서 신기한 운동기구를 소개하고 있었다. 샐러드팩을 가져온 도환이 제가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트램펄린 위에서 손잡이를 잡고 뛰는 사람들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하해와 TV 화면을 번갈아 보다가 리모컨 뺏어 운동기구를 주문하고는 다시 리모컨을 건네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옆에 앉는 도환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하해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열심히 채널을 돌렸지만, 시간이 늦어서인지 볼 게 없어 결국 도환이 가입해놓은 월정액 서비스로 들어갔다.

 

“볼 게 없어?”

“보고 싶었던 영화 볼 거야.”

“어떤 건데? 아, 이거.”

 

부상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는 수영선수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 영화였다. 사실 도환이 나왔던 거라 같이 보기 망설여졌지만 딱히 볼 것도 없었고 꼭 보고 싶었던 영화라 어쩔 수 없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에 말없이 영화를 틀었다. 도환은 자신이 나온 영화라는 걸 알고 금방 흥미를 거뒀지만, 기분은 좋은 듯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었다.

 

“어때?”

“뭐가?”

“연기 어떠냐고.”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저게 얼마나 극찬받은 연기인데.”

“평소의 너랑 너무 달라.”

“그러니까 연기지. 나 화장실.”

 

여러 번 모니터링하느라 질려버린 영화였지만 옆에서 하해의 반응을 보는 건 즐거웠다. 마침 부상 후에 처음으로 수영을 하다가 예전과 다른 몸 상태를 느끼며 오열하는 장면이 나와 하해를 몰래 살펴봤다. 참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훌쩍이는 하해의 모습에 도환이 괜히 말을 걸었다.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는 하해를 꽉 껴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욕을 먹을 게 분명해 옆에 놓여있는 쿠션을 하해 대신 끌어안았다. 티슈를 건네줄까 고민했지만, 자존심에 하고 있는애한테 눈치 없이 티슈를 건네면 짜증을 낼 것 같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며 자리를 비웠다.

 

“개자식 연기 더럽게 잘하네.”

 

도환이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우자 하해가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코도 풀고는 바지 주머니에 축축하게 젖은 티슈를 숨겨버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도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잠시 후 도환이 돌아와 하해의 옆에 앉았다. 하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화에 집중했지만, 도환은 하해의 바지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티슈의 존재감에 웃음을 참느라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1차 BL 작가 | 성인 📧 jaeyoonp0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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