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우리가 멀어지게 된 대화의 시작은.


이제 혼자가 된 내가

예측하자면 네 눈 안에 형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을 때일 거야.



첫 직장에서 대표가 주지 않던

퇴직금을 받기 위해 너는

법적 절차를 밟아나가던 와중이었지.


사람에 대한 기억들이 역류해

분출하는 감각이 느껴진다는 말을

우리의 대화에서 자주 꺼낸 것 같아.


침묵으로 이뤄진 싸움을 해오던 너는

어느 날 만날 수 있냐는 전화를 했지.


나는 너의 위치를 물었고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어.


너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들은 건

너를 만난 지 2년도 되지 않은 때

네가 먼저 말을 꺼냈지.


"하나만 약속해줘. 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네 눈앞에 앉은 나를

같은 존재로 봐주기로."


"세는걸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너도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날은 왜인지 더 빠르게

도착하고 싶었다.


'너의 기억은 분명

누가 듣더라도 그럴지도 몰라.'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억이라니. 말이 안될 것만 같지.'


'처음에는...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대화하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선택한

역할은 들어주는 역을 맡았으니까.'


'너를 보면서 내가 겪은 혹은

누군가 겪었던 서로가 있기에 지탱하는 일들이

너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랬어.'


'학아. 너의 말대로

단 하나의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라는 건 정해져 있는 걸까?'


'아니야. 그걸 인정하면

나는 너를 도울 수 없겠지.'


'우린 서로가 반대여야 하니까.'


"학아!"


힘없이 한 손을 올리며

인사를 하는 너.


오는 동안 밀려든 생각에 차마

네가 꺼내게 될 대화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역할에

충실해지려고 했지.


하지만 너의 표정은...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전부터 했었어야 하는데."


"그동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건

이유가 늘 떠오르지 않았거든."


"사람이란 이름의 악몽이 나를

가두려는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너와 같은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는 착각."


너는 감사하다는 말을 

상대에게 꺼내는 걸 두려워했지.


자신이 죽는 환각을 보던 네가

감사를 표현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돌아오지 못할 작별 인사가 될 것 같다고.


그런 네가. 네가...

나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학아. 무슨..."


"우린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너는 나의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알고,

나는 네가 감정 표현에 서투른 이유를 알지."


"너를 처음 만나게 된 그 일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착각 속에 행복을 느꼈어."


"너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이끌고 

상담을 하면서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되찾은 건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더라."


"각인된 기억으로 인한 원망과 증오,

죽음으로 이뤄진 세상에서 저승사자처럼

머물던 내가 너를 만나면서 난 역을 맡은 거야."


"괴짜 철학가라는 역할을 가지고

네가 디딘 세상에 서게 된 거지."


"다만 서로가 떠날 때까지도

몇 가지 사실은 더 확실해지겠지."


"내가 환각 속에서 마주한 세상은

앞으로 그 누구도 보지 못할 거야."


"각자가 겪은 기억은 전부 다르지.

대신 겪을 수도 없고 말이야."


"제아무리 위로와 세상에 대한 

말들을 건네도 내가 본 기억과

세상에 대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아."


"미안해. 녹음.

나는 네가 선 세상에 있을 수 없어."

"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노력하지 말아줘."

"너도 네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나는 늘 그랬듯 반박해야 했다.


시선을 피하는 너의 얼굴을

억지로라도 돌려 눈을 보고 싶었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너의 눈을 봤을 땐

더 이상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다.


노트에서 보여주던 자신을 닮은

그림과 형체도 아니었다.


눈 안에는 오직 검은색과 흰색에

명암으로 이루어진 성운만이

끝없이 채워진 상태였다.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했었어."

"하지만 내가 원래 선 세상은

아무래도 다른 것 같아..."



나는 그때 학이의 손을 잡아주며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의 

감각들을 기억해달라고 했지만


이후 우리가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고 말았지.


퇴사한 지 8개월이 지난

11월에 문제가 해결된 후로는

조금은 나아졌지만.


나는 흑백의 명암으로만

채워진 성운에 대한 기억이

아직까지 선명해.


네가 본 세상이란 건

두 가지 색만 드러날 수 있던 걸까.



아무리 다채로운 색을 가졌던

존재이더라도 마주하게 되는 장소.


회색빛 모래만이 채워진

사장이 당신을 반길 거야.


심장에 품었던 어떤 소중한 것들도

여기선 모래로 사라지게 될 뿐.


당신은 갇힌 걸까.

아니면 원래 이곳에 있었던 걸까.


살을 에는 바람만이 부는 백사장.

누군가 내게 바다를 알려줬지만 이제

기억으로만 남았을 뿐.


어떤 흔적도 모래에 뭍어버리는

사막에 오늘도 나는 이곳에. 


By Self(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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