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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링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짧글입니다. 트위터 링크를 읽지 않으실 경우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포타에 올려도 된다고 허락해 주신 두 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판을 내리라 결심했다. 특별조 예산 문제다. 더는 슈안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것도―3억짜리 머리채인데!―, 훈련 시간을 쪼개 특별조 숙소를 쓸고 닦고 밥까지 차리는 로간을 보며 가슴이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끼는 것도 사양이다. 이번에는 르웰린이 아무리 꼽을 줘도, 알터가 아무리 울먹여도 어떻게든 예산을 쟁취해 내리라. 아니, 애초에 니네 조원이잖아!

농장에 틀어박혀 혼자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보고서도 썼다. 밀레시안 팔자에 보고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특별조 예산이 필요한 이유. 돈이 없어서. 특별조를 알반에서 돌봐줘야 하는 이유. 니네가 뽑았으니까. 얘네들이 돈이 없어서 알반을 탈퇴한 다음에 사방팔방에 소문 퍼트리고 다니면 책임질 거냐! 대충 그런 식으로 협박조를 듬뿍 곁들여 보고서를 쓴 뒤, 종이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아발론에 들어갔다.


“야, 야. 밀레시안 님이야.”

“눈 피해!”


아발론에 들어가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발론 안을 돌아다니던 일반 단원들이 내가 날개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벌레라도 본 것처럼 황급히 눈을 돌렸다. 뭐지?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누가 보면 내가 심심할 때마다 단원들을 두들겨 패고 다닌 줄 알겠다. 왜 피해. 도망가지 마.


“저기, 알터 어디 있어?”


대충 한 명을 붙들어 말을 걸자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때린다니까? 너 혹시 포워르냐?


“알터…….”

“다, 단장님은 방금 전까지 수련하시다가 단장실로 도, 돌아가셨습니다!”


눈을 꼭 감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게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다. 알터가 내가 너무 좋아서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긴 해도 내가 상사는 아닌데. 최근 아발론에서 뭐 헛짓거리라도 벌였나 생각해 봤지만, 진짜로 아무 짓도 안했다. 세계수 근처를 얼쩡거리는 토끼를 잔뜩 잡아서 털가죽을 좀 뜯긴 했지만, 그거야 못할 짓도 아니고 금지된 일도 아니지 않나. 가끔 다른 단원들도 토끼 사냥으로 활동비를 번다고 했으니 내가 좀 끼어든다고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다, 단장님께 볼일 있으십니까?”

“응. 나 알터 만나러 왔어.”


특별조 예산 증액이라는 중대한 사명이 걸려 있다. 내게 붙들린 단원이 눈을 더 꽉 감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지들끼리만 뭐라뭐라 수군대고 있었다. 뭔데, 나도 알려줘. 근데 골치아픈 일이면 됐고.


“미, 밀레시안 님. 알터 선배님, 아니, 단, 단장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

“나도 알아.”


갑자기 웬 알터 칭찬이래. 나한테 아부 떨어도 떨어지는 건 국물도 없다.


“지, 지금은 단장님이 새로 바뀌는 바람에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단장님도 많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그렇겠지…….”


톨비쉬가 그렇게 튀었으니까……. 물론 본인 입장에서야 그냥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지만, 알반 기사단 전체로 보면 튄 게 맞다. 인수인계 안하고 가는 놈은 최악이다. 톨비쉬 같은 사람이랑은 일하지 말아야지.


“그, 그러니까 부디 단장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분을 더 소중히 해주세요!”

“엥?”


사방에서 단원들이 허리를 숙이며 부탁드립니다!라고 소리쳤다. 졸지에 알터를 부양하게 된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왜 알터를 부양해. 알터 내 아들이야? 알터 내 강아지야? 내가 강아지라고 귀여워하긴 해도 진짜 강아지는 아닌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무형의 압박감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소중히 하겠다고 엄지까지 들어올렸다. 단원들이 박수를 쳤다.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아발론을 지나가는 모든 단원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단장실 위치를 모른다는 점이다. 늘 알터가 나를 만나러 왔지, 내가 직접 알터를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 단장실 위치는 모르겠고 아발론을 몇 바퀴째 빙글빙글 도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발론을 한 다섯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저만치서 연보라색 머리칼이 보였다. 살면서 저런 특이한 머리카락 색은 르웰린밖에 못 봤다. 서류 뭉치를 꼭 끼고 펄쩍펄쩍 뛰어 달려갔다.


“르웰린!”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듯 살짝 아래를 보며 걷던 청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사방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마주치지는 않으면서 은근슬쩍 내 걸음을 주시하던 일반 단원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왜 저러냐니까. 르웰린은 평범해서 다행이다.


“잘 만났다. 나 알터한테 가야 하는데 단장실이 어딘지 몰라.”

“무슨 일이실까요?”

“어, 할 얘기가 있어서. 중요한 거야.”


예산 얘기를 꺼냈다가는 알터에게 가기도 전에 르웰린 선에서 커트당할 것 같아서 일부러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내 옆구리에 낀 서류 뭉치를 힐끔 쳐다본 그가 생긋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꼭 ‘예산 증액은 꿈 깨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안내해 드릴게요.”

“괜찮아? 나가던 길 아니야?”

“밀레시안 님이 영원히 아발론을 헤메다가 지박령이 되시는 것보다는 낫죠.”


예산 증액은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꼽먹었다. 르웰린에게 꼽먹는 건 그냥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장실을 못 찾겠는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아무튼 르웰린을 쫓아 걷는데, 자꾸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한숨을 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자기들끼리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자기들 쪽을 돌아보면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내가 이 상황을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속닥거리는 목소리 속에서 아주 작은 문장이 귀에 잡혔다. 르웰린 선배님 어떡해. 안 됐다.

나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불쌍한 일인가? 나랑 같이 걷는 게? 나와 아발론을 단둘이 걸어가는 게? 이래봬도 에린의 영웅이자 단장이 숭배하는 인물인데 이런 대접을 받다니 어이가 없어 르웰린에게 한 마디 했다.


“르웰린.”

“네.”

“나 혹시 못생겼어?”


충격적이다. 내 머리채만 3억에 입은 옷은 2억 5천만 골드인데. 슈안에게는 3백만 골드에 옷은 좌판에서 중고로 파는 거 싸게 샀다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쳤지만, 사실 머리와 옷만 합해서 5억 골드가 넘었다. 슈안이 알게 되면 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특별조 자금을 마련하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잘라 파는 건 돈이 안 된다. 뜯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르웰린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우화하는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미청년은 천사를 본떠 만든 조각상처럼 성스럽고, 미술관에 전시된 도자기 인형처럼 우아했으며, 막 새로 바른 석고처럼 매끄러웠다. 꽃도 고개를 숙이고 달도 모습을 숨길 만큼 아름다운 남자다. 돈보다 우월한 유전자다.

그래. 물론 르웰린 옆에 서면 90% 이상의 인간은 다 걸어다니는 오징어처럼 보이겠지만, 나도 돈을 문자 그대로 쳐바른 외모인데 르웰린이 불쌍해 보일 정도인가? 그 정도는 아니지? 물론 르웰린보다 예쁘진 않겠지만, 오징어는 아니지? 금붕어 정도는 되는 거 맞지?


“솔직하게 말해줘.”

“밀레시안 님은 개성있게 생기셨죠.”


못생겼단 뜻이다.


“그런 거 말고……. 예쁘냐니까. 아니면 많이 못생겼어? 르웰린이랑 단둘이 다니면 오징어 같아?”

“저랑 밀레시안 님이 같이 걸어다니면 밀레시안 님이 눈에 띄겠죠.”


못생겼단 뜻이다.

급격히 침울해져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5억 5천 골드가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져 날아간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은 좋겠다. 태어나 보니까 얼굴이 100억 골드짜리라서…….

근데 알터는 왜 잘 부탁한거지. 알터는 내가 못생겨도 사랑해 주니까? 르웰린 같은 귀공자는 모두가 선망해야 할 아이돌이니까 오징어 외계인이 침범하면 안 되는 존재라서? 알터가 무섭지 않은 단장이긴 한가 보다. 오징어 외계인이 데려가도 괜찮은 존재라니……. 데려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르웰린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니 금방 단장실에 도착했다. 녹음이 우거진 아발론 사이에 세워진 석조 건물은 아무리 신성력으로 뒤덮여 있어도 묘하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건물 앞까지 나를 안내해 준 르웰린이 4개의 조 문양이 새겨진 문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단장님은 저 안에 계실 겁니다.”

“응. 고마워. 근데 르웰린, 나 진짜 그렇게 못생겼어?”


르웰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생겼단 뜻이다.

 


*  * *



비밀 기사단 수장의 집무실답지 않게 단장실은 볕이 잘 들었다. 알터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책상 앞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팔라라의 빛이 갈색 머리카락을 밝게 비추고, 한결 날카로워진 얼굴 선은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느끼게 만들었다. 남의 애는 빨리 큰다. 강아지처럼 귀엽던 소년이 이제 청년이 되었음을 실감하며, 책상으로 다가가 나무 책상 위를 가볍게 통통 두드렸다.


“알터. 나 왔어.”

“미, 미, 밀레시안 님?”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본 알터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또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법석을 떨었다. 원래 나를 보면 이런 반응이라 놀랍지 않았다. 르웰린의 차분한 반응과 비교하며 괜히 답이 뻔한 질문을 던졌다.


“알터, 나 못생겼어?”

“네?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못생겼어, 예뻐?”

“■■■■ 님은…… 예쁘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하는, 그런, 그런 잣대로 잴 수 있는 분이 아니세요……!”


못생겼단 소리 같은데…….

알터가 하는 말이니 좋게 들어야지. 고개를 끄덕이자 알터가 함빡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보고서를 내밀었다. 알터가 아무리 귀엽고 깜찍하게 웃어도 예산은 받아내야겠다. 너희가 키우는 예비 조원이잖아. 밥 못 먹고 굶고 살아서 근손실 오면 책임질 거야?


“이거 읽어주라.”

“아, 네. 네! 혹시 편지인가요?”

“아니, 보고서.”


편지를 뭉텅이로 쓰는 사람도 있나? 하긴 알터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손가락보다 두꺼운 수첩에 적는 애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보고서를 보는둥 마는둥 하며 내 얼굴만 흘끔거리는 동안 책상을 훑었다. 조금 전까지 알터가 읽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초보 임산부를 위한 태교 100선?”


이런 건 왜 읽지? 알반 기사단은 기사단 내에서 주로 결혼한다니까 단장이 챙겨주는 건가? 그래도 태교까지 챙겨주는 건 좀 이상한데. 심지어 밑줄까지 치면서 꼼꼼하게 읽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분에는 별표까지 그려져 있었다.


“알터 혹시 애 있어?”


그냥 물어본 건데 반응이 이상했다. 토마토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내가 비록 티르 코네일에 도착하자마자 눈치를 아델리아 천에 갖다버린 밀레시안이지만 이 정도로 분위기가 요상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딱히 나한테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괜한 배신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심지어 속도위반 임신까지 했다니. 날 위해 톨비쉬한테 덤비기까지 했으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는 되어 있어도 예비 신부는 못 보여주겠다니, 무시무시한 순정이었다. 내가 설마 괴롭히기라도 할까봐. 울컥하는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알터를 향해 최대한 뻔뻔한 투로 물었다.


“결혼식 청첩장은 줄 거지?”

“겨, 겨, 결, 결혼식이요?”

“나 안 부를 거야?”


이건 진짜 배신이다. 우리 같이 사도도 해치우고 수사도 하고 톨비쉬랑 맞서 싸우기도 하고 별짓 다 했잖아. 설마 외계인이라고 결혼식 초대도 안 해주는 거야? 안 해주면 쳐들어갈 거다. 서큐버스 퀸 옷 입고 뒤에 키홀 날개 달고 갈 거다. 펫으로 하데스 소환해서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버진 로드 앞에 착지해야지. 밀레시안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주 잊어버렸지만, 이번에는 안 잊어버리리라 굳게 다짐했다.

알터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조만간 터질 벨테인 폭탄 같았다. 결혼, 결혼. 짧은 단어를 몇 번이고 읊조리던 청년이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웰시 코기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약해졌다. 결혼식 초대는커녕 문전박대하겠다고 해도 용서할 것 같다. 안 돼, 마음 약해지면 끝이야!


“결, 결혼해 주실 건가요?”

“알터 결혼식인데 내가 당연히 가야지!”

“정말이시죠? 정말로, 정말로 약속하시는 거죠? ■■■■ 님?”

“그렇다니까!”


근데 결혼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냥 결혼식 초대해달라는 건데. 알터가 내 앞에서 말실수를 하며 허둥거리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일부러 모른 척해주었다. 국수 맛있으면 좋겠다.


“조장님, 아니, 톨비쉬 님보다…… 저를 더 좋아해주시는 거군요…….”


톨비쉬 얘기가 왜 나오지? 톨비쉬도 결혼하나? 신의 아들이 결혼해도 되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결혼한다면 축하할 일이다. 알터 결혼식이랑 겹치면 알터한테 갈 거지만. 나는 아직 단장의 검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


“응. 톨비쉬보다 알터가 더 좋아.”


사실을 말하는 거라 딱히 거리낄 것도 없다. 알터가 정오의 팔라라보다 더 환하게 웃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마구 꼼지락거렸다.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데 왜 내가 결혼식에 안 올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 별로 안 바쁜데. 하는 일이라곤 티아가한테 드롭킥하는 거나 농장에 누워서 구름 구경하는 것밖에 없다. 결혼식 준비를 도와달라고 해도 다 할 수 있을 만큼 한가했다. 말솜씨는 없지만 주례 서달라고 하면 주례도 서줄 수 있었다.


“나중에 아기 태어나면 보여줘.”

“물, 물론이죠! 잘, 잘 키울게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 키울게요. 그러니까 ■■■■ 님도…… 예뻐해 주시면 좋겠어요.”


알터 닮은 아기면 귀엽겠지. 아기 강아지 같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알터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근데 알터 아기도 나를 좋아할까? 그 전에 알터 아내가 나를 좋아할까? 남편이 맨날 다른 여자 이야기만 하면 기분 나쁠 것 같은데, 결혼식에 갈 때는 남자로 환생하고 갈까.

내가 아기를 예뻐해 주겠다고 약속한 게 그렇게나 기쁜지 알터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헤벌쭉 웃었다. 때는 이때다. 알터가 읽다 만 보고서를 맨 뒤페이지까지 넘겨서 날인을 재촉했다. 날치기라도 허가는 허가다. 일단 알터가 도장을 찍기만 하면 르웰린이나 아벨린이 항의해도 나도 할 말이 생긴다.

알터가 도장을 찍었다. 자기가 무슨 서류에 도장을 찍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슈안한테 보여주면 좋아하겠지? 조장으로서 한 건 했다는 마음에 서류를 보물처럼 품에 안았다. 얼른 보여주고 칭찬 받아야지. 슈안에게 듣는 게 하소연 아니면 돈 가져오라는 바가지 긁기밖에 없어서 칭찬이 간절했다. 알터에게 결혼식 때 꼭 이야기해달라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고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단장실을 나오다 일반 단원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마주칠 뻔했다. 펄럭이는 날개를 발견한 단원이 악 소리를 지르며 빛보다 빠르게 눈을 돌렸다.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5억 5천만 골드짜리 얼굴이 오징어라니. 르웰린이 알반 기사단 단원의 미의 기준을 망가뜨려놨다.


“다, 다, 단장님과 면담하고 나오시는 겁니까?”

“응. 알터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오징어 외계인이 단장이랑 면담 좀 할 수도 있지. 입을 비죽이다 결혼식 생각이 났다. 일반 단원들은 알고 있으려나? 나한테 먼저 알려준 건가? 괜히 우월감이 들어 콧대를 세웠다.


“알터 결혼식하는 거 알아?”

“예, 예?”

“나도 간다.”


간다고 하니까 울면서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너희 단장은 오징어 외계인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란다. 크게 웃어주고 싶은 걸 꾹 참고 거드름을 피우는데, 여전히 눈을 피한 단원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그럼 톨비쉬 조장님은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톨비쉬가 왜? 톨비쉬가 알터 아버지야? 알터가 결혼하면 톨비쉬는 뭐, 그냥 부하가 결혼한 상사 되는 거지……. 인수인계도 안 하고 성소로 튀었으니까 축의금 많이 내라고 해야겠다.

그보다 톨비쉬는 공식적으로 임무 중 실종 처리된 게 아니었나? 알반 엘베드의 조장이 사실 주신의 첫 번째 검이고 아튼 시미니의 뜻을 대리하는 수호자라고 기사단에 대대적으로 공표할 수는 없으니, 조악한 변명이긴 하지만 임무 중 실종된 것으로 처리한다고 들었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 갑자기 그리 됐다는 말에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알반 기사단의 일이 원체 힘들고 앞날을 모르다 보니 그렇게 위험한 일이었냐며 납득하는 분위기라고는 했다.

이상하네. 톨비쉬 정체는 각 조 조장들이랑 알터, 르웰린이랑 멀린 정도만 아는 일급 기밀이라고 들었는데. 단장실에 드나들 정도의 단원이면 평단원은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사실을 알 것 같진 않은데……. 아는 입이 많으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소문이 새는 법이다. 아니면 혹시 아직 실종 사실을 모르나? 아니면 설마 그런 대단한 사람이 실종됐다는 걸 믿을 수 없다던가?


“톨비쉬는 그, 실종됐잖아.”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뭐지, 톨비쉬가 주신의 첫 번째 검이란 거 알고 있나? 평단원으로 보였는데 사실 간부? 내가 아무리 ‘그 밀레시안’이라지만 나한테 함부로 말하는 거 보니 조심성이 부족한 듯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큰일이다 싶어서 심각한 어조를 흉내 내서 말했다.


“어, 그런 거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다, 다, 당연하죠!”


펄쩍 뛴 단원이 어물어물거리더니, 두 눈을 꼭 감고 물었다.


“그럼 역시 톨비쉬 조장님은, 밀레시안 님의…….”


톨비쉬는 나의…… 뒷배?


“그렇지, 뭐.”

“그럼 단장님은요!?”


알터 얘기를 하면 톨비쉬는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고 톨비쉬 얘기를 했더니 알터는 어떻게 되냐니.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서 그냥 나도 아무 말이나 했다.


“알터는 단장.”

“아, 아니. 그러니까 둘 다, 두 분 다 밀레시안 님의…….”

“나는 알터가 더 좋아.”


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아무 말이나 한 건데, 단원이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든 눈을 감고 있으려고 애쓰고 있어서 더 바보 같아 보이는 표정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았다.

안 보이겠지만, 작별의 의미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고 단장실 앞을 떠났다. 슈안한테 특별조 조장다운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신시엘라크 가문으로부터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장을 받게 된다.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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