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클리셰 08

 08. 다짐



 

결국 체했다. 배고프다더니 왜 이렇게 깨작대냐는 정 대리님의 말에 살짝 웃어 보이다 이경식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피식 웃는 게, 아까 전정국 팀장의 얘기를 꼭 나 들으라고 한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밥을 무리해서 먹었다.

 

체기가 가시질 않아 소화제를 먹었다.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에 ‘부산 전정국’ 등을 검색하는 등의 쓸데없는 일은 업무 대신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별 소득이 없었다. 가족관계도 출신지도 철저히 나와 있질 않은 전정국 팀장의 신상은 기사를 뒤져보고 아무리 구글링을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신상을 알게 된다고 우리 관계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어떤 사람일까.

 

사실 이미 머릿속으론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오늘 처음 본 정희수 대표와 전정국 팀장의 결혼식 장면이 재생됐으니 말 다 한 거지.

 

아무것도 나오질 않을 걸 알면서도 다시 네이버에 ‘전정국’ 세 글자를 쳤다. 연관 검색어에 나오는 거라곤 그가 전에 기획했던 제과 회사의 아이템과 우리 회사 이름이 다였다. 무의식적으로 CN푸드빌을 클릭했다. 전화령 회장의 이름과 우리 회사의 주가 그래프가 나온다.

 

어, 전화령. 전화령…. 전씨가 흔하던가. 아주 희미하게 전화령 회장과 전정국 팀장이 어떤 관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그렇게 따지면 박지민인 나는 모든 박씨와 다 친척이게? 말도 안 돼.

 

‘이제야 조각이 맞춰지네.’

‘하 씨, 어쩐지, 지만 고고하고 깨끗하다고 했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유앤디 대표 정희수. 그 애비가 제한 기획 정지철. 또 그 애비가 제한 그룹 회장 정지만.’

‘어? 아니, 뭐 그냥…. 남자는 대기업 팀장에 여자는 신생 회사 대표라….’

‘야, 전 팀장 고향이 어디냐?’

‘하, 부산이면 딱인데.’

 

이경식 차장이 아까 혼자 떠들어대며 써 내려가던 소설이 귓가에 재생된다. 왜, 부산이면 뭐. 정희수 대표랑 뭐가 있는데. 왜 괜한 헛소리를 하고 난리야? 혼자 핸드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다 테이블 위에 탁-소리 나게 내려두곤 엎어졌다.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

 

 

전정국 팀장이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급히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절로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다시 빠른 걸음으로 가방만 챙기곤 팀원들에게 인사한다. 내게도 다른 팀원들에게 건넨 똑같은 묵례를 하곤 뒷모습을 보였다. 회사에선 너무 티 내면 안 되지. 그렇지. 저게 당연한 건데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박짐 오늘 행운포차 ㄱ? 평일이라고 뺄 거냐?] 18:11

 

타이밍 좋게 김태형에게 문자가 왔다. 안 그래도 어디 털어둘 곳 없나 싶던 찰나였는데 잘 됐단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고.] 18:13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집 바로 앞의 낡은 상가에 도착했다. 대학 때부터 꾸준히 다니던 행운 포차. 김태형을 보는 것도 근 몇 달만이라 꽤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잘 다니던 제약 회사를 때려치우고 의전을 준비한다고 고시원에 틀어박힌 탓에 아주 가끔 동네에 왔을 때 같이 피씨방을 간 걸 빼면 제대로 술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박짐. 여기.”

“미래의 의사님을 기다리게 했네.”

 

꽤 괜찮은 곳의 연구원으로 취업해 잘 다니는가 싶더니 별안간 의학 전문 대학원을 가겠다고 선언한 김태형이다. 정신의학과에 가고 싶다나. 본인 정신도 온전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 참 희한한 녀석이다.

 

“내가 이제 미래의 정신의학도로서 딱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구만.”

“그건 정신의학이 아니라 무당 아니냐?”

“어. 그건 그래. 신내림이나 받을까.”

“미친놈.”


자리에 앉자마자 가벼운 욕설과 함께 소주잔에 쪼르르 술이 채워진다. 이모가 오돌뼈와 기계우동을 가져다줬다.

 

“대기업 양반 오랜만에 오셨네.”

“이모 그냥 예전처럼 해요.”

“그래 똥강아지야.”

 

‘행운 이모’라 불리는 사장님이 내 볼을 주욱 잡아 늘린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김태형과 당당히 주민등록증을 들고 난생처음으로 왔던 술집이었다. 남들은 모두 클럽이나 헌팅 포차를 가겠다고 성화였는데 나랑 김태형은 여길 지날 때마다 ‘성인 되자마자 저기서 우동에 소주 마시자.’라고 다짐했기에 행운 포차가 우리에겐 나름 추억인 장소다.

 

우동 면이 호로록 입으로 들어갔다. 짠-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치고 입에 털어 넣었다.

 

“김탱.”

“엉. 아 국물 존니 뜨겁.”

“나 만나는 사람 생김.”

“올.”

 

김태형이 오도독 소리를 내며 오돌뼈를 씹는다. 뭐야 반응이 왜이리 싱거워.

 

“반응이 그게 뭐야.”

“뭐가. 남자? 여자?”

“미친놈이!”

“발끈하는 거 보니 남자네.”

 

어쩌면 정신의학이 아닌 정말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윤성 선배를 좋아했단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김태형이었다.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하기는커녕 ‘똥꼬에 고추 들어오면 존나 아프대.’라며 나를 놀려대는 게 먼저인 자식이었다. 물론, ‘내가 넣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냐?’라며 받아친 나도 만만치 않았고. 그 뒤론 내가 누구와 썸을 탈 때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먼저 묻는 진짜 친구 새끼.

 

“김탱. 만약에 이 사람이 알고 보니 큰 비밀이 있는 사람이었어. 그럼 어떡해?”

“큰 비밀이 뭔데.”

“몰라, 그냥 가정이야.”

“전과자 같은 거야?”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전화해봐.”

“어?”

“전화해봐. 내가 미래의 정신의학도로서 목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다.”

 

솔직히 김태형의 말은 좋은 구실이고 그냥 전화가 하고 싶었다. 친구도 있으니 용기도 나고. 지금쯤이면 제한 기획에 있을까? 여덟 시가 넘었는데 집이지 않을까? 아냐 집이면 나한테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솔직히 연인인데 아무 때나 전화할 수 있는 거 아냐?

 

“야 빨리 해 보라고.”

“네가 뭔데.”

“니 오른쪽 불알.”

“공부만 하더니 미친 거 같아.”

 

킬킬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홈 화면으로 넘어가려는데 까만 창에서 멈춰있다. 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충전기 있냐? 분명 아까 13퍼센트 있었는데, 꺼졌어. 이래서 아이폰은 2년이 사용기간이라니까!”

“내 거로 해봐. 번호 뭔데.”

“번호는 모르지. 어떻게 외워.”

“까비….”

 

차라리 잘 된 건가. 괜히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을 애초에 차단한 거니까. 에이 모르겠다. 단무지를 아삭 씹으며 소주를 삼켰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직딩인 나와 달리 고시원에서 오랜만에 탈출해 속세를 맛본 김태형은 주량을 훨씬 넘기면서 술을 마셨다. 나야 술을 워낙 잘 마시니 괜찮은데 자꾸 꼬인 발음으로 지가 공부하는 것들을 달달 외우는 게 영 듣기 싫다.

 

다섯 개의 빈 소주병이 테이블 위에 주르륵 놓였다. 나는 여전히 멀쩡하고 망할 김태형은 눈이 반쯤 풀린 채 불어 터진 우동 면발을 오물오물 씹는다.

 

“김탱. 열 시 넘었어. 나 내일 출근 해야 해.”

“나 짐나…집…가. 아주…마 콩나무울…잘래….”

“우리 집 가서 자고 내일 엄마가 끓인 콩나물국 먹는다고?”

“역스…넌 개떡…찰떠어쿠….”

“역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알았으니까 일어나.”

 

술을 마셔 축 늘어진 김태형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나보다 키 큰 애를 부축하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김태형이 술에 취해 우리 집에서 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기에 엄마에게 따로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누나도 집에 있는 날인데 누나는 김태형을 귀여워하고 좋아했기에 더더욱 오케이였고.

 

행운 포차가 집 앞 상가라 다행이지 이 자식을 질질 끌다시피 부축하는 건 못 할 짓이다. 비척거리며 걷는 김태형의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박으며 겨우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와씨 더워, 힘들어.

 

“야 김탱. 여기서부턴 스스로 걸어서 들어가.”

“누나 있으시냐.”

“…너 술 취한 척 개구라지.”

“누나 계시냐고.”

“의사 말고 배우 해.”

“하~ 나 입에서 냄새남?”

 

쉬지 않고 연애를 해 온 녀석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누나를 좋아한 녀석이기도 했다. 당장의 연인들은 우리 누나를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한 연습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고, 누나는 연예인 같은 존재라 감히 자기가 사귈 수 없는 인물이라는 헛소리를 하곤 했다. 우리 누나는…. 빨리 돈 모아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려는 흔한 서른둘의 여자인데.


김태형이 얼굴에 대고 하~하~ 입김을 불어 대기에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드러운 자식아! 계속해서 달라붙는 김태형을 떨어뜨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아챈다. 깜짝이야.

 

“박지민씨.”

“히익!”

 

헐. 내가 술에 취했나? 헛것이 보이나?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어깨에 올려진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팀장님?”

“누굽니까.”

“박짐. 나 입 냄새나냐고…하~녕하세요.”

 

김태형이 나에게 입김을 불다 말고 전정국 팀장에게 인사한다. 어두워서 확실하진 않지만 전정국 팀장의 눈빛에서 어떠한.. 섬광을 봤다.

 

“얘는 태형이라고 동네 친구예요! 아니 근데 팀장님 어떻게 여기..”

“전화도 꺼놓고 술 마신 겁니까?”

“베터리가 나갔어요. 저 팀장님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꺼진 걸 나중에 알아서. 그치? 김탱? 맞지? 너도 아까 봤잖아.”

 

다급하게 김태형의 어깨를 쳤다. ‘야 대답해. 같이 있었잖아.’ 내 말에 묵묵부답인 김태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대답이나 해 빨리.

 

“전화? 무슨 전화?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소리야. 내가 아까 충전기 있냐고 분명히 물어봤잖아.”

 

생각이 짧았다. 김태형은 이제 내 앞에 있는 전정국 팀장이 사귄 지 얼마 안 된 나의 애인이란 걸 알았을 테고 나를, 아니 우리를 골리려 들 거다. 아이씨, 잘못 걸렸네.

 

“어우, 내가 술을 많이 마셨나. 너랑 한 대화가 전혀 기억 안 난다. 아, 그건 기억나! 너 애인 번호도 모른다며?”

“이 미친...”

 

저 자식이 머릿속에 무슨 그림을 그리는진 몰라도 전정국 팀장의 연애 스타일도 파악하기 전인데 이건 선 넘는 장난이 아닌가 싶었다.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얘가 취했나 봐요, 저 진짜로 전화 드리려고…”

“집에 잘 들어왔으면 됐어요.”

 

전정국 팀장의 눈은 여전히 김태형을 향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람. 일단 김태형을 집으로 보내고 팀장님하고 제대로 인사를 하고….

 

“김태형 너 집에 가.”

“우리 같이 자기로 했잖아.”

“김탱 너 미친새끼니…?”

 

능글거리며 같이 잔다는 말을 굳이 강조하는 김태형에게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작정하고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김태형 덕에 전정국 팀장의 표정은 점점 더 굳는다. 내가 김태형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도 저도 하지 못하자 전정국 팀장이 내게 한발 다가온다.

 

“박지민씨 저 지금 운전 못 합니다. 술 마셨거든요.”

“네? 운전해서 오신 거 아니에요?”

“…박지민씨 기다리다가 집 앞에서 술 한잔했습니다.”

“아, 잠시만요, 대리 번호를 모르는데…”

“지갑 잃어버려서 대리비도 못 줍니다.”

“제가 빌려드릴…”

“신세 좀 집시다.”

“네?”

“오늘 박지민씨 집에서 신세 좀 질게요.”

 

 

 

*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아빠와 엄마가 벙찐 눈으로 우릴 쳐다본다. 나와, 김태형과…전정국 팀장을.

 

머리를 질끈 묶고 방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누나는 김태형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다 전정국 팀장을 보고는 놀라며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에 두 번이나 온 전정국 팀장이지만 누나는 매번 없었다.

 

“욘석들 하숙비 받아야겠네!”

“엄마 미안.”

“죄송합니다, 어머니.”

 

전정국 팀장이 허리를 숙여 엄마 아빠에게 인사했다. 불쑥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게 결코 편치않을 성격인 걸 안다. 전정국 팀장이 안 하던 짓까지 해가며 우리 집에서 굳이 자고 가겠단 이유는…

 

“이모! 내일 아침은 콩나물국 콜?”

 

집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엄마에게 매달리며 콩나물국을 해달라고 조르는 김태형 때문이겠지.

 


넷이 살기에도 벅찬 아파트에 전정국 팀장과 김태형까지 있으니 집이 북적인다. 아빠가 안방 장롱에서 깔고 잘 이부자리를 꺼내 거실에 던졌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자야 하지.

 


“나 침대 띱.”

 

김태형은 거실에 깔린 이불을 본 척도 안 하고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야 김탱. 네가 왜 침대야. 그건 아니지.”

 

내가 김태형의 뒷덜미를 잡고 다시 거실로 데려왔다. 내일 아침은 과일 주스 대신 정말 콩나물국을 줄 모양인지 엄마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뒤적인다. 불쑥 술에 취한 친구들이 찾아오면 성가실 만도 한데 콧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니 복작복작한 집이 좋으신 모양이다.

 

이불을 두고 나와 김태형 전정국 팀장이 거실 바닥에 둘러앉았다. 아빠는 소파 위에서 우릴 없는 사람 취급하며 티비를 보기 바쁘다. 그 와중에 왜 자꾸 전정국 팀장과 김태형이 서로 째려보는지 의문이다. 전정국 팀장은 그렇다 쳐도 대체 김태형은 전정국 팀장을 왜 째려보는 거야?

 

“침대는 내가 띱! 박짐. 네가 나랑 같이 자면 되고, 이분이 거실에서 이불 깔고 주무시면 되겠네.”

 

김태형이 전정국 팀장을 가리키며 ‘이분’은 거실에서 주무시면 된다고 한다. 표정이 꽤 의기양양한 게 자기가 집주인이라도 된 모양이다. 이 자식 텃세 부리네.

 

“저희는 내일 함께 출근하기 때문에 저희 둘이 한방을 쓰고 그쪽이 거실에서 주무시는 게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실 것도 아니잖아요.”

 

이에 질세라 전정국 팀장도 김태형을 가리키며 ‘그쪽’이라고 칭한다. 날 선 둘의 대화가 오간 후 정적이다. 아니 대체 둘이 왜 그러는 건데. 통성명도 안 한 사이에 대체 왜….

 

“됐고 내가 침대 띱이요.”

“띱 같은 소리 마시고 거실에서 주무시죠. 띱이 뭡니까 애도 아니고.”

“그쪽보단 애 거든요?”

 

아마 내가 아까 팀장님이라고 불러서 전정국 팀장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엄마와 아빠는 전정국 팀장이 내 직장 상사라는 걸 모르기에 혹시나 김태형이 허튼 말을 내뱉어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봐 얼른 팔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전정국 팀장이 덩그러니 거실에 앉아 나를 황당하단 눈으로 봤지만, 김태형의 입을 단속하는 게 먼저였다.

 

“야 김탱. 너 왜 그래?”

“재밌잖아. 저 사람 잘생겨서 마음에 안 들어.”

“야, 아씨. 우리 부모님은 저 사람이 내 직장 상사인 거 모르니까 말조심해.”

“모르신다고?”

“어. 회사 후밴 줄 아셔.”

“저 사람 몇 살인데?”

“스물일곱.”

“그러니까 스물일곱에 네 직장 상산데, 또 네 애인이고…. 그런데! 부모님은 그냥 직장 후밴 줄 아시고?”

“어. 어쩌다 그렇게 됐어. 너 괜히 팀장이니 뭐니 그런 소리 지껄이지 말고 거실에서 쳐 자.”

“진작 말하지. 알겠다. 친구야.”

 

김태형이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휴, 한고비 넘겼다. 이제 전정국 팀장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기만 하면…하면….

 

“어이~ 지민이 회사 후배 동생!”

 

…그럼 그렇지. 곱게 넘어갈 김태형이 아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며 외치는 김태형의 부름에 전정국 팀장의 표정이 볼만하게 굳는다.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 안 하나? 아버지, 이 어린 친구가 제 말에 대답을 안 하네요, 허허.”

 

김태형이 소파에 앉아 배를 긁고 있던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김태형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채널을 돌린다.

 

“내가 친히 거실에서 잘 테니 동생은 방에 들어가 보게. 자네 이름이 뭐라고?”

“….”

“어허어허! 대답이 없네? 혹시, 나이는 어리지만 지민이의 직장 상사라도 되는 건…”

“전정국입니다.”

 

김태형은 미친 게 분명하다. 되도 않는 말투를 써가며 신나서 전정국 팀장을 놀려대는 게 딱 김태형스러워 웃기긴 하지만 얼굴이 잔뜩 굳은 전정국 팀장의 눈초리는 무섭다.

 

“정국이~ 그래. 정국이. 밤늦게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 안 되는 것이야. 오늘은 이 형님이 침대를 양보하마.”

“….”

“어허 이 친구. 대답을 할 줄 모르는구나. ‘네 형님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

 

결국 내가 이죽거리며 웃는 김태형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악 소리를 내곤 오버하며 거실에 깔린 이불 위로 넘어지는 김태형과 시끄럽다며 다 쫓아낸다는 엄마의 엄포에 상황이 일단락됐다.

 

김태형은 내일 몰아서 씻겠다며 양치도 하지 않고 거실에 뻗었고 나는 안방 화장실에서 전정국 팀장은 거실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지난번 우리 집에서 잤을 때 입었던 아빠의 파자마와 나의 큰 티셔츠를 똑같이 걸쳐 입은 전정국 팀장이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온다.

 

“팀장님 침대가 안 커서…제가 바닥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만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건넨 말이었다. 그가 무슨 반응이라도 해주겠지 싶어서. 아까 아파트 앞에서 그렇게 본 이후로 아직 둘이 제대로 이야기를 못 했다.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러세요. 그럼.”

 

짧게 대답한 그가 침대에 눕는다. 헐. 뭐야. 뭐야. 당황한 내가 베개만 끌어안고 서성이자 그가 팔목으로 눈을 가리고 눕는다. 불 끄라는 건가. 나 지금 뭐 잘못했나? 김태형 혼자 그런 거지 내가 뭘. 괜한 오기에 그를 쏘아보다 방 불을 껐다.

 

“이불이 없으니 거실에서 태형이랑 자야겠어요. 팀장님은 방에서 혼자 주무시면 되겠…”

“박지민씨.”

“네?”

“날 화나게 하려는 거면 성공했고, 화내는 걸 보고 싶으면 문 열고 나가요.”

“팀장님 화내는 거 보기 싫으면요.”

“내 옆에 누워요.”

 

조금 잠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못이기는 척 ‘참나’ 소리를 내며 그의 옆에 누웠다. 침대가 좁아 살이 닿는 게 자연스럽다. 할 말이 아주 많았다. 정희수 대표와는 무슨 얘기를 더 했는지, 오늘 얼마나 바빴는지, 아마 묻지 못하겠지만 낮에 얼핏 들은 이경식 차창의 얘기, 뭐 그런 것들.

 

“집 앞엔 왜 왔어요, 나 못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게요.”

“진짜 술 마신 거예요? 나 기다리면서?”

“아뇨, 술 안 마셨고, 지갑도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네.”

 

맞닿은 그의 팔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고 눕는다. 나도 그를 보고 누웠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살살 쓴다. 또 그 기분이다. 낯선데 싫지 않은 기분. 내가 똑같이 머리를 쓸면 전정국 팀장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까? 나도 손을 들어 그의 머카락을 쓸었다. 그가 기분 좋은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저 진짜 전화하려고 했어요.”

“압니다.”

“태형이는 저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걔는 우리 누나 좋아해요.”

“....”

“장난이 심해서 그런 거니까 싫어하지 마요.”

“싫어하진 않고, 질투는 할게요.”

“에이 질투를 왜 해요 괜히.”

“내가 박지민이랑 제일 친해야 하니까.”

“....”

“박지민씨 가족과도 내가 가장 가깝고 싶으니까.”

 

표현에 늘 솔직한 그였다. 비록 회사에선 전 팀장 모드로 나를 여타 사원과 다를 것 없이 대하지만 우리 둘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좋다, 싫다 확실하게 말하는 그다. 지금도 질투가 난다는 본인의 마음을 가감 없이 말한다.

 

“팀장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나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떤 사람?”

“네.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내가 말한 ‘아는 건’ 물론 그의 사생활이었다. 대놓고 물어보는 건 실례인 것 같아 돌려 말했다.

 

“박지민씨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술도 마셨고, 우리의 거리도, 공기의 무게도 괜찮다.

 

“부자.”

“음. 나보다 더 부자들도 훨씬 많은데.”

“평균적으로요.”

“그래요, 인정. 그리고요?”

“잘생겼다?”

“뭐,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그것도 인정.”

“헐 자뻑.”

 

내가 킬킬대며 웃으니 그도 흐흥-하며 웃는다. 또, 또 그가 어떤 사람이더라. 내가 그를 연인으로 마주한 건 고작 며칠이기에 그간에 봐온 전정국 팀장의 모습만 떠오른다.

 

“부자고 잘생긴 게 끝입니까, 설마?”

“아뇨, 뭐.. 유능하고.. 또..”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생각해 봐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없다. 대답하길 포기하고 웃자 그도 다시 웃는다. 콧김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팀장님이 보는 박지민씨는요? 저는 어떤 사람인데요.”

 

그가 고심하듯 ‘음-’소리를 내며 미간을 찡그린다. 손가락으로 그의 찌푸려진 미간을 콕콕 찔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성실하고, 일에 대해 욕심도 있고, 속도 단단한 거 같아요.”

“오, 좋은 칭찬이네요. 그리고요?”

“부러운 사람.”

“엥. 제가요?”

“네. 부러워요.”

“뭐가요? 외모?”

“아뇨, 그건 안 부럽습니다.”

“재수없다..”

 

내 말에 전정국 팀장이 웃으며 머리칼을 마구 헤집는다. 나도 질세라 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전정국 팀장의 얼굴을 비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해준다. 아니, 그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것도 같다. 크고 맑은 그의 눈은 성격만큼이나 솔직했다.

 

“이런 집에 사는 것도 부럽고, 아침마다 어머니가 깨워주시는 것도, 아버지가 리모컨 차지하는 것도 부럽고, 퇴근하고 같이 술 마실 동네 친구 있는 것도요. 다 부러운데 나는.”

“뭐야. 놀려요? 그런 건 다 엄청 평범한 거잖아요.”

“박지민씨한텐 평범한 게 나한텐 특별할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묻고 싶었다. 전정국 팀장님의 집은 어때요? 혹시, 혹시 이경식 차장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직접적인 질문에 곤란해하면 어쩌지 싶어 망설여진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네요.”

“티 나요?”

“네, 많이.”

“에이, 들켰네.”

 

괜히 민망해져서 전정국 팀장을 휙-등져 누웠다. 뭐라고 물어보지? 아니 뭐부터 물어보지? 집안? 가족? 음...

 

“으아, 간지러워요.”

 

전정국 팀장이 뒤에서 나를 꽉 안아온다. 그의 큰 품 안에 갇혔다. 단단한 가슴팍이 날개뼈에 닿았다. 콧김이 목덜미에 스쳤다 떨어지길 반복한다. 간지러웠다.

 

“나는 박지민씨와 출발점부터가 다른 사람.”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다. 그가 무슨 말을 이어갈까.

 

“출발점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요?”

“궁금합니까.”

“궁금한데, 또 안 궁금해요. 뭔지 알아요?”

“네. 저도 말하고 싶은데, 또 안 말하고 싶어서요.”

“왜요?”

“그냥, 아직은 용기가 없어요.”

“....”

“박지민씨가 도망갈까 봐 무섭고.”

 

나도 무섭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나와는 완전히 다를, 그의 인생의 시작점이 어떨지. 내내 궁금했는데, 막상 이야기보따리를 내 앞에 두고도 풀지를 못한다. 나의 평범한 생활을 신기해하는 것이 아닌 ‘부러움’의 시선으로 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부럽다는 그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산 것일까? 정말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클리셰 범벅의, 다 가졌지만, 마음은 공허한, 뭐 그런 인물쯤 되는 걸 까? 그의 이야기를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다. 저렇게 말하니까 괜히 무섭잖아.

 

“…팀장님이 조금 더 좋아지면 그때 들을게요. 지금 들었다가 진짜 도망가면 어떡해요. 아직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아깝잖아요.”

“그래요. 박지민씨가 나를 아주 사랑하게 됐을 때 말해줄래요. 나는 박지민씨가 내 옆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게 단단히 빠진 것 같다. 사실 그 못지않게 나도 전정국 팀장이 좋아졌는데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이 막 시작될 때가 가장 사랑할 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직장 상사로 지내며 미묘한 순간들을 겪었고 연인이 된 건 고작 며칠인데도 좋다. 그가 너무 좋다.

 

“팀장님 거기 딱딱해졌다.”

 

뒤에서 나를 꽉 안아 맞닿은 그의 앞섶이 어느새 조금 딱딱해졌다. 그의 몸을 의식하고 나니 나 또한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당연하다.

 

“어쩔 수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이렇게 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하잖아요.”

“그건 그렇네.”

“박지민씨 지금부터 잠들기 전까지 나보고 눕지 말아요. 계속 이렇게 있읍시다.”

“왜요?”

“돌아보면 키스할 거고, 키스하다가 만질 거고, 만지다가 못된 짓 하려고요.”

“오, 괜찮은 전개에요.”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린 티키타카가 꽤 잘 맞았다. 내가 그의 말에 계속해서 맞받아치니 나를 안은 그의 몸통이 들썩인다. 그래요, 제가 좀 웃겨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잘자요.’ 하고 말하니 그가 ‘박지민씨도요.’하고 속삭인다. 마주 보고 누워 키스할까, 내가 전정국 팀장을 확 덮칠까 고민하다 눈을 감았다. 방문을 닫아놨어도 거실에서 자는 김태형의 코골이가 들리는 걸 보면 우리 집은 방음이 좋은 편이 아니니까. 속으로 애국가를 삼 절까지 부르니 비로소 잠이 몰려온다. 불편해 보이는 그의 팔을 거둬 제대로 눕혀주고 잠을 청했다.

 

 

*

 

 

눈을 뜨자마자 전정국 팀장을 놀래줄 생각이었다. 일어나라며 뽀뽀할지, 간지럽힐지 고민하다 잤는데 허전한 옆자리에 김샜다. 뭐야, 집에 간 거야?

 

과일이 갈리는 소리가 나야 하는 주방에선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소음을 대신했다. 엄마의 목소리와 웅얼거리는 남자의 낮은 소리도 한데 뭉개져 들려온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비비며 방문을 여니 콩나물 삶는 냄새와 함께 보이는 건 엄마와 넓은 등판의 낯선 투샷이다.

 

“정국이, 더 자지 왜.”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아휴 일할 사람이 아침부터 고생하면 어째.”

“저는 어머니 밥이 제일 맛있어요.”

“으이구, 정국이 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하시겠다.”

“그래도 사실인 걸 어떡해요.”

 

엄마가 까르르 웃는다. 엄마의 옆에 바짝 붙어 엄마가 손질한 재료들을 프라이팬에 넣어 서툰 손길로 볶는다. 아무리 봐도 식품 마케터라고 하기엔 요리 실력이 영 꽝인데. 전정국 팀장은 엄마가 좋아할 만한 문장들을 쏙쏙 뱉어냈다. 어제 우리 가족과 제일 친한 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 오늘부로 전정국 팀장이 엄마의 원픽이 되지 않을까?

 

“간 좀 볼래?”

 

내가 뒤에서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엄마는 국자로 국물을 떠먹여 주고 전정국 팀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둘이 난리가 났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괜한 볼멘소리가 나왔다. 나를 확인한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정국 팀장의 입에 계란말이를 넣어준다. 저 단순한 계란말이를.. 미슐랭 쓰리스타는 받은 레스토랑의 고급 음식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크게 떠가며 ‘와, 진짜 너무 맛있어요!’라고 호들갑을 떤다. 계란말이를 오물오물 씹는 전정국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게 찡긋 윙크해 보인다. 참나, 아침부터 설레네. 나는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얼른 욕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잘생겼어, 아침부터 짜릿해. 혼자 머릿속으로 방금전, 그의 윙크를 상기시키면 비실비실 웃었다. 전정국 팀장이 이미 샤워를 마쳤는지 욕실엔 습기가 가득했다.

 

씻고 나오니 거실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김태형은 이제야 눈을 비비며 식탁을 한번 쳐다보곤 비척비척 걸어온다. 트렁크 팬티에 런닝만 입은 아빠도 식탁에 앉았다. 내가 옷 좀 입고 나오시라고 투덜대도 아빠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크지 않은 식탁에 여섯 명이 둘러앉았다. 문을 열고 수줍게 나온 누나의 얼굴엔 눈썹도 그려져 있고, 틴트도 발라져 있었다. ‘아침부터 웬 화장?’하고 물으니 ‘쌩얼인데?’ 하며 받아친다. 더 놀리면 나중에 크게 욕먹을 것 같아 코웃음 한번 치고 숟가락을 들었다.

 

늘 과일주스와 견과류로 아침을 대신했는데 잘 차려진 밥을 먹으려니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건 아빠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콩나물국을 요청했던 김태형은 정말 국만 두 번을 더 가져다 먹곤 반찬엔 손도 대지 않았다. 다들 엄마의 눈치만 보며 밥을 깨작거리는데 딱 한 사람, 전정국 팀장의 젓가락만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정국이 잘 먹는 것 좀 봐.”

 

엄마가 전정국 팀장 앞에 장조림을 갖다 놓았다. 전정국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 장조림에 메추리알까지 집어 입 안으로 넣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오늘 하루 걱정 없어요, 어머니.”

 

엄마에게 말한 그가 도톰하게 눈 밑 살을 접어가며 웃는다. 작정했네, 작정했어. 밥을 금세 비우곤 조금 남은 내 밥을 가리키며 ‘제가 먹어도 되죠?’하고 묻는 그는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릇을 가져간다.

 

전정국 팀장만 배불리 먹은 아침 식사가 마무리됐다. 누나는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전정국 팀장에게 ‘잘 드시네요.’ 한 마디를 내뱉곤 방으로 쏙 들어갔다. 누나. 거 참 미안하게 됐네, 이 분은 나랑 사귀는데. 김태형은 전정국 팀장을 한껏 째려보곤 누나 방문에 대고 ‘누나 출근하기 전에 모닝커피 하자!!’ 하며 노크를 해댔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아직 정리하지 않는 거실의 이부자리로 가서 철푸덕 눕는다. 쟤 진짜 여기가 지네 집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저 속 옷 좀 빌려주세요.”

“에?”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전정국 팀장의 목소리에 ‘어’?도 ‘네’?도 아닌 대답이 나왔다. 속옷? 내 속 옷? 급히 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봤지만, 새것은 없다. 세탁이 되어 있어도 좀 그렇지 않나.

 

“아예 새것은 없고….”

“괜찮아요.”

“아니 사이즈도….”

“작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죠.”

 

서랍을 뒤적이다 전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가장 비싼 속옷을 꺼냈다. 유일한 명품 속옷. 딱 두 번 입은 거. 가장 구석에서 드로즈를 꺼내 건네자 그가 흐흥 웃는다.

 

“이거 제일 아끼는 거 아니에요? 거의 새것 같은데.”

“아닌데요? 저 그런 거 엄청 많은데?”

“그래요? 내 눈엔 그 엄청 많다는 게 안 보이네.”

 

그가 내 서랍을 빤히 쳐다본다. 엄마가 이마트에서 사다 준 이름 모를 브랜드와 CK 속옷 몇 장이 전부다.

 

“부자라고 째는 거예요? 팀장님 별로다.”

“박지민씨가 입었던 걸 내가 입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우와 변태이기까지 하네.”

 

부쩍 친해진 기분이다.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도 그가 없는 틈을 타 최대한 멀끔하게 출근 준비를 마쳤다.

 

거실로 나오니 아빠도 출근 준비를 끝내고 뉴스를 보고 있다. 아빠 옆에 나란히 앉은 전정국 팀장도 바른 자세로 화면을 응시한다. 김태형은 씻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것들이 내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니, 쯧-”

 

고무장갑을 끼고 뉴스를 빼꼼 보던 엄마가 말했다. 화면에선 부산의 유명 정치인이 조폭과 유착해 무리하게 재개발을 진행해 시장 상인들이 농성하는 모습이 나왔다.

 

“저 사람은 거의 조폭이나 다름없지 뭐.”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겠지만. ‘누군데?’ 의미 없이 물었다. 대충 대답만 듣고 출근하려고 전정국 팀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어나요.’ 살짝 입 모양으로 말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성호 의원. 너 몰라? 너희 회장 아들 아니냐?”

“전성호?”

“어, 너희 회사 회장 첫째 아들 아냐?”

“맞습니다.”

 

나를 대신해 전정국 팀장이 대답했다. 전성호. 전화령 회장의 첫째 아들. 부산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으로 이미 3선 의원이었다. 매번 조폭과의 유착, 중년 연예인들과의 스캔들이 끊이질 않는. 혼외자식도 많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일찌감치 전화령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우리 회사는 회장의 둘째 아들인 전성진 대표이사가 승계 구도에 올라 있었다.

 

그가 ‘맞습니다.’하고 대답한 게 별일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전화령 회장. 전성호 의원, 전성진 대표이사. 원래도 알고 있던 그들의 관계인데, 그게 뭐. 왜 이제와 새삼스럽지….

 

“출근할까요?”

 

전정국 팀장이 멍하니 티비를 보는 내게 말한다. 그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

 

 

전정국 팀장의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덕에 몸이 편했다. 그는 역시 라디오를 틀었다. 활기찬 디제이가 음악을 소개한다. 학창시절 즐겨들었던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도 아는 노래인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원래 답답한 걸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다. 본래 성격이었으면 ‘부모님이 뭐 하세요?’하고 물어보고도 남았을 텐데 어젯밤 전정국 팀장과의 대화로 이 답답함은 견디기로 했다. 대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론 다짐하기로 한다. 그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든 지금 내 앞의 전정국 팀장은 아주 괜찮은 남자고, 나는 그를 좋아하니까. 혹시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집안이 이더라도, 설령 외계인이어도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을 보자고, 그렇게 다짐한다. 그리고 그가 내게 온전히 털어놓을 때까지 들쑤시지 않기로 했다. 저 입으로 ‘용기가 없다.’ 말한 사람에게 내 궁금증을 해결하자고 꼬치꼬치 묻는 건 아무래도 못 할 짓이다.

 

 

“팀장님, 속옷 안 불편해요?”

“수영복 입은 기분입니다.”

“그렇게 작아요?”

“네. 박지민씨가 나보다 작은 만큼, 작죠.”

“저 평균 이상이거든요? 어디 가서 기죽을 그런 거 아니거든요?”

“오, 부럽네요.”

 

결국 그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그가 콧바람을 내며 웃는다. 우린 회사로 향하는 40분이 넘는 시간을 계속 티격태격하며 왔다. 대게는 그가 나를 놀렸고, 나는 한 마디도 지지 않다가 결국엔 그의 팔을 꼬집거나 때리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비로소 연애하는 기분이다. 호감과 좋아함을 넘어서 사랑이 시작될 것도 같다.

 


‘나는 박지민씨가 내 옆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제 했던 말처럼 나도, 그가 내 옆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주, 오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겠네요!

다음편은 조금 일찍 가지고 오도록 할게요!

(내 글 너무 너무 구려병 퇴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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