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항공모함으로 귀환하고, 탑건 졸업생들의 특수 파견 임무가 종료되어 샌디에이고를 떠난 후까지의 이야기


-----------------------------------------------------------


일단 좀 씻고 싶었다. 단지 그런 마음으로, 루스터는 사람들을 피해 라커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이미 충분히 항공모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축하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 믿었던 두 사람이 극적으로 귀환했으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 특수 작전이,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루스터는 솔직히 조금 어안이벙벙한 기분이었다. 한없이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였던 작전에서 매버릭은 자신을 윙맨으로 선택했고, 그 대가로 자신이 맞았어야 할 미사일을 대신 맞고 격추되었다. 


관제소의 명령대로 귀환해야 할까, 아니면. 어차피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다고 했으니까, 매버릭도. 그런 생각으로 돌아가 적기의 기관포에 사격당하기 직전이었던 매버릭의 생명을 구했고, 그리고. 곧바로 격추되어 나란히 사이좋게 눈밭에 엎어져 적진이나 염탐하는 신세가 되었고, 매버릭과 함께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것 같은 골동품을 타고서 5세대 전투기와 맞붙었지. 그러고 보니 자신은 30년 전 아버지가 앉았을 그 자리에서 매버릭과 함께 비행한 게 되는 셈이다. 


와우, 대를 이어 RIO(레이더관제사) 임무 수행이라. 본격적이었다기보다는, 고작 눈에 보이는 적기 위치 말하고 플레어 쏘고 무전 시도하고 레이더 켠 게 전부긴 했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냄새가 조금 났던 것도 같다. 잠시 벽에 등을 기댄 루스터가 씨익 웃었다.


공중에서의 제 운명을 전방석 조종사에게 의탁해야만 하는 후방석이 싫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순직했노라 생각했기에 기를 쓰고 전투조종사가 되었지만. 매버릭이 모는 골동품 톰캣에 실려 돌아왔음에도 지금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데 가까웠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라고 자신이 답했을 때의 매버릭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내려놓지 못할 짐을 지고 있었던 자의 눈빛. 그 눈빛은 진심으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전투조종사의 RIO라는 건, 그렇게 하는 일 없는 자리가 아니었다. 공중에서 자신이 매버릭에게 의지했던 만큼 어쩌면 매버릭도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루스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니, 또 문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 놈의 입만 좀 어떻게 한다면 좀 더 잘 해줄 수도 있을 텐데.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가차없게 굴게 되는 녀석이다. 그래도 오늘은 분명히 빚을 졌다. 근본이 못돼 처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조만간 갚아 줘야지. 그나저나 격추한 적기가 벌써 두 대라니. 그렇지만 자신도 한 대 격추했으니, 아예 처지진 않은 거 아닐까. 하긴 뭐,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졸렸다. 얼른 씻고 쉬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루스터는 머리 위로 훌러덩 옷을 벗어제꼈다. 극한의 긴장이 연속된 순간을 지나고 나니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지금 당장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차피 오늘 밤 안으로 다시 샌디에이고로 돌아갈 테니 잠은 땅 위에서 잘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씻고 나오겠다는 루스터의 계획은 금세 어그러졌다. 공동 샤워장으로 들어서기 전, 막 고개를 든 루스터의 눈에 여전히 얼굴도 몸도 잘생긴 금발이 들어왔다. 뭐야, 같이 씻을 생각인가? 하긴 오늘 극적으로 등장했으니 피로할 만도 하지. 루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 행맨."

"브래들리."

"…뭐야. 내 성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부르니까 너무 낯간지러운데."

"오, 제발. 스윗 하트, 지금 여긴 우리 둘밖에 없다고. 둘밖에 없는데 그렇게 부르지도 못해?"


스윗 하트는 무슨! 순식간에 제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미친 거 아냐?! 저 느끼함에 질식하겠네. 괜히 코밑을 쓱 문지른 루스터가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씩 웃으며 윙크를 날린 행맨이 제 라커 앞에 서서 옷을 벗어제끼며 한다는 말이, 그랬다.


"그러니까 작전 나가기 전에 내 프로포즈부터 클리어하자고 말했잖아. 브래드."

"…방금 전까지는 매버릭과 내 인생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웠는데. 지금은 좀 짜증나려고 한다, 행맨."


저 느끼하고 유들유들한 면이 이럴 땐,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꼴 보기 싫긴 한데. 내 목숨을 빚졌으니 나도 오늘만큼은 참아주고 싶어. 그러니 부탁인데 협조 좀 해, 행맨. 루스터의 미간에 굵은 줄이 두어 개 가 있었지만 행맨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저처럼 알몸에 수건 하나만 대충 두른 행맨이, 루스터의 코앞으로 다가와선 천연덕스럽게 제 두 손을 들어보인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러고선 묻는다.


"브래들리. 내가 그렇게 싫어? 도대체 어디가? 나를 싫어할 만한 구석이 있나?"

"…그게 아니라, 세러신 대위."

"거 봐. 이렇게 대답하기 난처하실 때만 내 이름을 부르지. 브래들리, "루스터", 브래드쇼."

"…"

"네가 말했던 대로 난 얌전히 기다렸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도망칠 생각은 말라고. 응?"

"…"


또 약을 올릴 생각인 건지. 부러 한 단어씩 끊어 말하는 것이 상당히 신경에 거슬린다. 망할.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건데?! 행맨. 루스터가 꽤나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쉰다. 아니, 루스터. 정작 서로 간의 거리 책정을 이렇게 헷갈리게 하는 게 누구신데 지금 나한테 이래? 응? 어깨를 으쓱한 행맨은 자기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높이가 엇비슷한 둘의 시선은 줄곧 서로를 향해 있었다. 서로를 향한 거친 숨소리 한 올까지 다 들릴 정도의 거리. 먼저 등을 보이고 뒤돌아선 루스터가 낮게 한숨을 내쉬으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쩌다 저런 놈에게 찍혀서.


루스터를 향한 행맨의 애정 공세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해변에서 다같이 웃통을 까고 미식 축구를 했던 그 날 이후부터였나. 그날 이후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맨의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아니면, 매버릭이 작전팀 리더가 되기로 결정이 난 이후부터인 것 같기도 했고. 어차피 아무리 기를 써도 둘 중 누구도 오를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뭐,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인지 모를 그날 이후로 행맨은 더 이상 루스터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않았고, 전처럼 쓸데없이 기싸움을 거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생각했었다. 적당히 가까운 사이면 충분하겠지. 그래서 내심 이곳 생활이 꽤나 편안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얼마 안 남은 임무 디데이를 세고 있던 루스터에게 행맨이 다가와서 한다는 말이 이 모양이었다.


"이 특수 파견 끝나면 나랑 둘이서 데이트나 하자, 루스터."

"…뭐?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행맨?"

"전혀. 안타깝지만 난 멀쩡해. 그리고 우리 오늘 똑같은 메뉴 먹었잖아?"

"젠장!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은 다른 데 가서나 해. 지금은 그런 시덥잖은 얘기나 들어 줄 여유 없어."


난 어떻게 하면 모두가 이 임무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고민하기에도 머리 터질 것 같다고. 그럴 시간 있으면 너도 어떻게 하면 이 임무에 뽑혀가서 무사히 귀환할지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그래? 미간을 찌푸린 루스터가 저를 지나쳐가기 전, 그의 손목을 덥석 잡은 행맨이 그윽하게 말했다.


"진심이야, 루스터."

"그거 참 놀랍네. 너한테도 진심이라는 게 있었냐, 플러팅맨?"

"Oh god.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말은 조금 상처인걸. 난 언제나 진심을 다해 살고 있는데."

"…shit, 행맨.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정도껏 해. 그런 장난은 다른 데 가서 치라고 말했잖아, 방금. 성난 루스터의 시선이 행맨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행맨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랑 데이트 한 번 하자는 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당연하지! 여기에 네가 꼬실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이제 정말 이 마을에 플러팅할 상대가 다 떨어지기라도 한,"

"이번엔 너라서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브래들리 브래드쇼."

"…"

"그동안 난 충분히 친절하게, 잘 말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늘 껄렁껄렁하던 목소리 톤이 이렇게 차분해진 것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루스터는 생각했다. 더불어 갑자기 무게추를 매단 것마냥 진지해진 시선도 그렇고. 


"난 그동안 말할 수 있을 만큼 말했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 잘 생각해 봐. 루스터."


루스터의 손목을 놓은 행맨이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 잘생긴 뒤통수를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루스터가 외쳤다.


"hey, 행맨! 어찌 됐든, 일단 이 빌어먹을 임무부터 끝내고!"

"…?"

"우리 둘 다 무사히 살아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Yeah, copy that. 씩 웃은 행맨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 시야에서 사라졌었다. …제기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렇게 마무리됐던 그날의 대화를, 한참 만에 기억해낸 루스터가 샤워실 문을 짚은 채 행맨을 내려다보았다. 하란 대로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었으니 상을 달라는 얼굴이다. 그 멀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루스터는 기가 찼다. 저건 당연히 Yes라는 답이 나와야만 한다는 얼굴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글맞은 그 얼굴을 보니 또 오기가 생긴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루스터가 행맨과 시선을 맞춘다.


"다른 사람 알아봐, 행맨."

"…왜?!"

"그냥. 그 이유를 굳이 다 너한테 설명해야 해? 난 너와 그러고 싶지 않… Holy shit! 백맨!"


끼익. 루스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샤워실 문을 민 행맨이 그대로 루스터의 몸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져 고스란히 제 뒤통수를 바닥에 갖다박을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샤워실 벽에 기댄 루스터가 온 힘을 다해 행맨을 노려보았다. 하마터면 뇌진탕으로 골로 갈 뻔했네! 저 눈 펄펄 내리는 적진에서 골동품 훔쳐 타고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목숨 구해줘 놓고선 하루도 안 되어 날 다시금 죽일 셈이야?! 루스터는 버럭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지만, 불행히도 행맨이 더 빨랐다.


"제기랄, 나라고 해서 나보다 키 큰 콧수염쟁이한테 플러팅이나 날리게 될 줄 알았겠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내 탓이 아니야!"

"미쳤어?! 그건 또 무슨 개소린데?!"

"God damn it! 루스터, 잘 들어.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게 아냐! 그런데 언제부턴가 네가 자꾸 신경 쓰이고, 살피게 되고, 알고 싶어졌다고! 멍청한 수탉 같은 그 답답한 비행 스타일도! 끔찍하게 촌스러운 노래 취향도! 평소에는 그 컬러풀한 하와이안 셔츠나 휘날리며 피아노나 치고 앉았는데도 타깃한테는 죽기 직전까지 덤비는 네 그 싸움닭 같은 기질도! 자꾸 알고 싶어져 가는데 이 빌어먹을 수탉은 계속해서 그 짧은 다리로 내 시야 내에서 한가하게 도망만 치고 있지. 저 좆같은 미그기들처럼 순식간에 레이더 밖으로 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나는!"

"…뭐?"


뇌가 얼얼했다. 9G의 중력가속도만큼이나 충격적인 단어들이 루스터의 뒤통수를 휘갈기고 지나갔다. 그대로 선 채 잠시 눈만 껌뻑이던 루스터가 느릿느릿 물었다.


"행맨… 그, 내가 잘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거, 혹시 고백… 뭐 그런 거야?"

"몰라, 나도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Shit, 도대체 이게 뭐람!"


다른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것에는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화를 낸 적이 거의 전무하던 행맨의 눈이 벌겋게 타오르는 것을 보며 루스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렇게 파르르 화를 내니, 순간적으로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새삼스럽게 제 맨등에 와닿은 샤워실 타일의 촉감이 뼈가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잠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던 루스터가 시선을 다시 바로했을 때, 어느새 행맨의 잘생긴 얼굴은 제 코앞에까지 와 있었다. 훅 끼쳐온 행맨의 체향에 루스터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미리 경고하는데. 싫더라도 밀어낼 생각 마, 루스터." 


행맨이 말했다.


"나도 충분히,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하니까."

"행맨,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 좀 해ㅂ…!"


냅다 루스터의 목을 휘감더니 제 쪽으로 팍 끌어당기는 행맨의 박력 있는 동작 때문에, 미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딸려내려간 루스터가 제 입술에 거칠게 부벼지는 무언가에 흡 하는 소리를 냈다. Jesus! 날 잡아먹을 생각이기라도 한 거야?!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더니, 말은커녕 그 사이로 혀가 박력 있게 쑤욱 밀고 들어온다. 그러자 루스터가 흡, 하고 딸꾹질 비스무리한 소리를 냈다. 참지 않겠다는 제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급발진하는 초음속 전투기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밀고 들어온 행맨의 입술은 좀체 루스터가 숨쉴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비행 중 급상승을 했을 때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살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키스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피지컬로는 절대 밀릴 리가 없는데 왜 몸에 힘이 안 들어가지. 자세가 엉거주춤해지면서, 꺾일 수 있을 만큼 앞으로 한껏 꺾여내려온 고개 탓에 뒷목이 뻐근했다. …젠장, 행맨. 허우적대던 루스터의 팔이 결국은 행맨의 허리에 감긴 것과 동시에, 초점이 흐릿해진 그의 눈꺼풀도 아래로 스르륵 내려앉았다. 애닳게 맞닿은 보드라운 점막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후끈거리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습하고, 뜨겁고, 집요한.


후욱, 후욱.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이 거칠어진 숨소리들이 서로 얽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들이 루스터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결 굵은 근육으로 꽉 짜인 행맨의 팔이 루스터를 안에 가두자, 그 힘을 견디지 못한 루스터의 몸이 뒤쪽으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간다. 다행히 그의 뒷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행맨의 팔뚝 덕에 두 번째 뇌진탕은 면할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꼼꼼하게 맞붙은 입술 새로 헉 하고 아픔이 섞인 신음소리가 비어져나왔다. 넘어가면서 서로의 이에 부딪혀 입술이 찢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탄탄한 근육으로 꽉 짜인 서로의 가슴이 서로 맞닿고 비벼지자 아주 조금씩, 묘한 감각이 스물스물 루스터의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아, 이런 빌어먹을. 뭐야. 나 왜 이러는 건데?


여전히 제 숨을 죄다 잡아먹을 기세로 입을 맞추는 행맨을 보며 루스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근데 이걸 키스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냥 짐승들끼리 서로 영역싸움하려고 입질하는 거 아니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할 틈 따위는 사치라는 듯이, 행맨의 반대쪽 손이 순식간에 제 하체를 감싼 수건 밑으로 파고든다. 


미친! 지금 어디로 손이 들어오는 거야?! 기겁한 루스터가 주먹을 쥐고 저를 온전히 깔고 누운 행맨의 등짝 한가운데를 퍽하니 내려친다. 그러자 컥 소리를 내며 드디어 떨어져나간 행맨이 곧바로 날아오는 루스터의 긴 다리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Fuck, 행맨! 이 개새끼야! 지금 어디에다 손을 넣어?!"

"브래들리! 잠깐! 진정, 진정해!"


미친놈아! 너 같으면 진정이 되겠냐?! 그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훅 제 명치로 들어오는 루스터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해낸 행맨이었지만 결국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손은 피하지 못했다. 그대로 철퍽, 얄짤없이 뺨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행맨이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보통 뺨을 갈겼을 때 나는 철썩 소리 대신 둔탁한 퍽 소리가 났다. 젠장, 루스터. 겨우 키스 한 번 한 것치고는 대가가 엄청난데. 고개를 왼쪽으로 꺾은 행맨이 이내 바닥에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낸다. 맞기 직전에 이 꽉 안 깨물고 있었다면, 아마도… 무조건 이 두어 대 정돈 가볍게 나갔을 거다. 저 정도의 힘이 들어간 펀치라면.


부대 내에서 육탄전을 벌였다간 사이클론 사령관에게 불려가 징계를 면치 못할 텐데, 그 가능성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냥 우유부단한 스타일이 아니란 건 최근에 아주 잘 알게 되었지만, 저 정도로 호전적인 모습도 숨겨 두고 있었나. 입 안에 고인 비릿한 무언가를 꿀꺽 삼키며, 행맨은 성난 루스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사실은 저런 점이 좋았다. 늘 고요한 휴화산 같다가도, 한 번 폭발할 기회만 생기면 순식간에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저런 불같은 면이.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제 몸에서 피가 터졌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일까. 


잠깐, 루스터. 일단 내 말부터 좀 들어봐.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현한 행맨이, 루스터가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하기 전에 재빠르게 입을 연다.


"그래서 싫었어?"

"…뭐?"

"그렇게 싫었느냐고, 나랑 키스한 게. 루스터."

"백맨, 너 이…!"

"다른 건 원하지 않아, 브래들리. 솔직하게 대답해 줘. 난 그거 하나면 돼."

"…"


싫었느냐고?


당연히, 라고 대답하려던 루스터가 문득 제 아래로 가 닿는 행맨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제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수건 가운데, 무언가 굴곡이 져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 지점에,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루스터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행맨은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그 여유만만한 눈빛이 꼴 보기 싫어 다시금 시선을 내렸을 때, 루스터는 행맨의 허리에 걸쳐진 수건에도 저와 비슷한 굴곡이 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 이런 망할. 절로 욕이 새어나와 루스터가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 키스 한 번으로… 섰다고? 둘 다? 루스터의 확연한 동요를 눈치챈 행맨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자자는 얘기는 안 해."

"…그게 무슨,"

"하지만 너도 부정하고 있지 않잖아, 브래들리. 아냐?"

"…"

"아까 그게, 좋았다는 거."


침묵은 곧 긍정이라 했던가. 끝끝내 소리내어 대답하지 않는 루스터의 시뻘게진 얼굴을 응시하던 행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치 그 자리에 키가 껑충한 석고상처럼 굳어진 루스터의 곁을 스쳐지나며, 행맨이 낮게 말했다.


"오늘부터 나랑 만나는 거다, 브래들리. Check your heart?"

"행맨, 너…"

"…"

"…루스터. Copy that."

"좋아."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반쯤 포기해버린 루스터가 대답하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 행맨이 위풍당당하게 샤워실 문을 나서며 말했다.


"먼저 씻어. 난 이따 씻을 테니까."

"…어어."

"음, 아래는… 알아서 처리할게. 굳이 이것까지 말해 주진 않아도 되겠지, 스윗 하트?"

"…제발 빨리 좀 꺼져, 백맨."


무언가에 꾹 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거위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에 하하 웃은 행맨의 뒷모습이 이내 제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지자, 다시 굳게 닫힌 샤워실 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은 루스터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서 도무지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매버릭의 윙맨이 되어 작전에 출격했고, 생애 첫 적기 격추 기록을 세웠고, 아버지만큼 소중한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고, 골동품 안에서 탈출도 못하고 함께 죽게 될 줄 알았는데 기적처럼 살아 돌아올 수 있었고, 그리고. 극적인 순간에 내 목숨을 구해낸 동료에게 키스당해서 아래를 세웠고. 


이런 빌어먹을, 뭐가 이래. 제 머리를 쥐어뜯은 루스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정말 장난 아니게 피곤했음에도 오늘 밤은 제법 길 것 같았다.


라알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