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의 말에 따라, 일행은 다들 신경 써서 천천히 걷는다. 빨리 걸을 때는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던 골목길 양옆의 가게들과 집들이 좀더 자세히 보인다. 마치 동화책이나 사진첩 같은 데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아기자기함이 일행의 눈을 확 사로잡는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평범한 골목길이겠지만, 독특한 건물의 외관과 각양각색의 매대의 물건들, 건물 안에 보이는 주민들, 그리고 골목길 너머로 보이는 호수의 풍광이 어우러져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골목길의 끝이다. 조금조금 커지던 골목길 너머의 호수와 사원의 광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온다. 마치 터널에서 완전히 나올 때처럼, 또는 그림책을 확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그림들처럼, 일행의 눈을 확 사로잡는다.


눈에 확 들어오는, 호수 너머의 산이 비치는 테르미니호. 크다. 한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호텔 객실에서 본 게 떠오른다. 그 높은 곳에서 봐야 겨우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만큼 크다.

그 호수의 자태가, 맑으면서도 도도하다.

마치 연청색의 비단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 같다. 왜 호수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또 테르미니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호수 사원도, 호숫가에서 가까운, 그러나 아주 지척은 아닌 곳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라서 인터넷 사이트나 안내 책자에도 빼놓지 않고 나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저렇게 호수 한가운데 있는 걸 보는 건 또 다른 것이다. 아무리 백 번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들, 한 번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 더 나은 건 없으니까 말이다.

호수 사원이 보이자마자, 미켈은 재빨리 일행보다 조금 빨리 걸어서 호숫가의 난간 앞에 다다른다. 그리고 짝짝하는 손뼉으로 일행에게 신호를 주자, 골목길을 막 빠져나온 일행은 언제 그렇게 천천히 걸었냐는 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미켈의 앞에 선다. 일행이 다 모인 걸 확인하자, 미켈은 침을 한번 삼키고는, 특유의 굵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자, 드디어 첫날의 목표이자, 테르미니호 한가운데서 그 자태를 뽐내는, 호수 사원이 여러분의 눈앞에 보입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 미켈은 조금 우쭐해졌는지, 한껏 과장스러운 추임새를 넣어 호수 사원의 소개를 계속한다.

“여러분,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게 있죠?”

앞의 현애부터 시작해서, 다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제가 아까 했던 말에는 이 호수를 구경하는 포인트가 모두 녹아들어 있죠. 제가 뭐라고 했죠?”

“이 호수는... 보통의 고대 유적들과는 다르게... 뭐냐...”

니라차가 얼른 입을 연다.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어울려 보인다고 했죠, 안 그래요?”

“맞습니다, 핵심을 잘 짚어 주셨군요!”

미켈이 니라차를 추어올려 주자 니라차는 괜히 기분이 좋은지 으쓱거린다.

“흔히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봤던 분들, 그리고 이곳에서 여행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유적은 원래 있던 그대로 두어야 유적답다고 말이죠.”

미켈의 목에 힘이 들어간다. 한껏 자신감이 붙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마치 연설가라도 된 듯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대의 유적이라도, 그걸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만 해서는, 그건 옛 시대의 건물일 뿐 지금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건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냥 원형 그대로 보존만 해 놓고 정체되기만 한 유적은, 좀 과격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냥 죽어 버린 그 시대의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거기서 말을 잠시 멈추더니, 미켈은 몇 걸음 걷는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일행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조금 더 걷자, 다른 각도에서 유적의 광경이 펼쳐진다. 특히 일행의 눈을 사로잡은 건 유적과 마주 본 호숫가의 건물들.

“오! 저거, 저거 봐봐!”

일행 중 조제가 자기도 모르게 호숫가를 보고 감탄사를 뱉으며 말한다.

“저거 마치, 판타지에 나오는 장면 같지 않아?”

조제를 따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조제가 가리킨 방향을 본다.

과연, 조제의 말대로다. 마치 판타지 만화나 게임에 나오는 한 장면이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것 같다. 오른쪽에 보이는 호수 사원은 마치 웅크린 사자처럼 보이고, 왼쪽에 보이는 쇼핑몰 건물은 마치 온몸에 철갑을 잔뜩 두른, 사자를 향해 공격할 준비를 마친 용처럼 보인다. 비록 누군가는 비약이 들어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현대적인 건물들과 어우러진 고대의 유적은 처음 본다.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 유적은, 지금의 도시 경관과 함께 숨쉬고 부대껴야 한다고. 그리고 저의 이런 생각에 가장 잘 맞는 유적이 바로 이곳, 호수 사원이란 말이죠! 그럼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호수 사원에 오신 것을!”

미켈이 말을 마치자마자, 다들 호수 사원과 맞은편 호숫가에 있는 건물들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기념사진도 한 장씩 찍는다. 물론 일행 중 가장 먼저 사진을 찍는 건 니라차의 가족.

“저, 아저씨! 아주머니! 이쪽으로 서세요!”

카메라를 든 시저가 니라차네 가족의 포즈를 이리저리 맞추어 본다. 조금은 까다롭게 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분이 좋은데 그런 것 정도는 신경 쓸 새가 없다. 시저가 하라는 대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어때? 잘 나왔니?”

“네. 잘 나왔죠.”

시저가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니라차네 가족의 표정은 대만족이다.

“오빠들도 오라고 할걸...”

“괜찮아,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니라차가 조금 아쉬운 듯 말하자 부모님은 괜찮다고 한다.

“응? 너 오빠도 있었어?”

“아, 맞아.”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보던 외제니가 묻자, 니라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두 명 있는데, 요즘 회사 일이 바쁘다고 해서 같이 오지는 못했어.”

“어, 그래?”

“너희 오빠들은 무슨 일 하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투자회사에서 일해. 둘 다.”

“저, 정말?”

세훈, 조제, 외제니, 시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래. 그래서 가족끼리 휴가도 제대로 못 가다가, 이번에 겨우 시간 내서 가게 된 거야. 이 와중에도 부모님은 업무 전화 받으시고, 정말이지 눈코 뜰 새가 없어.”

니라차의 가족에 이어, 이번에는 조제와 외제니의 차례다. 둘은 커플인 걸 여기저기 자랑이라도 하듯, 한껏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마지막에는 스킨십으로 마무리한다. 이어서 시저, 세훈, 그리고 현애도 호수 사원을 배경으로 원없이 사진을 찍는다. 특히 현애는 뭔가 사진 찍는 데 한이라도 품고 있었던 건지, 약 5분 넘게 다양한 자세로 계속 혼자서 사진을 찍는다.

“야야! 언제까지 너만 찍을래?”

“아니, 왜? 좀 더 찍어 보자!”

세훈이 뭐라고 해 봐도, 현애는 요지부동이다.

“너 무슨 모델 되지 못해서 한풀이하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사진 찍으면 좋잖아!”

“같이 찍으면 더 좋지!”

세훈과 시저가 사진을 찍던 현애의 양옆에 끼어든다.

“자자자, 여러분!”

사진을 찍던 일행에게 미켈이 큰 소리로 말하며 손을 흔든다. 어느새 미켈의 손에는 카메라가 하나 들려 있다.

“단체사진 하나 찍겠습니다!”

미켈의 손짓에 따라 여덟 명이 자리를 잡는다. 양옆에 니라차의 부모님이 서고, 앞에는 현애와 외제니, 니라차, 뒤에는 세훈, 조제, 시저가 선다. 호수 사원을 배경으로 그럴듯한 구도의 사진이 완성된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잠시 후.

“자, 사진 나왔는데, 그냥 뽑아서 드릴까요, 아니면 편집해서 드릴까요?”

말은 안 하지만 다들 보정을 원하는 듯하다. 미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이따가 호텔에 돌아가면 한 분씩 드리죠. 그럼, 이제 더 특별한 경험을 할 시간이 됐습니다. 자, 다음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호수 사원 안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보이시나요?”

미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수 사원 한가운데에 있는 아치형 공간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가이드의 주문에 따라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단체 관광객도 보이고, 혼자나 둘이서 온 사람들도 보인다.

“다음으로는 사원 안에 직접 들어갈 것인데요, 사원 안으로 직접 들어가려면 저쪽에 보이는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람선이 호수를 도는 코스가 있고 30분 간격으로 다니기 때문에 한번 사원에 들어가면 30분은 있어야 하죠. 그러면 시간이, 어디 보자...”

미켈이 잠시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전 9시 22분을 가리키고 있다.

“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유람선이 출발할 시간이군요. 가시죠!”

미켈을 따라, 다들 선착장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현애의 귀에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저,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 가이드가 갑자기 못 나오게 되어서...”

“아니, 가이드가 못 나오는 건 그렇다치고 제대로 설명이나 해 주셔야지, 안 그래요?”

임시 가이드로 보이는 남자가 여행객 일행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데도, 중년의 여자 여행객은 화가 안 가라앉았는지 고개를 숙이는 가이드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항의한다. 뒤에서 지켜보는 다른 일행도 중년 여자처럼 소리만 안 지를 뿐 다들 싸늘한 표정이다.

“그런 사정이었으면 처음부터 알려 줬어야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그 중년 여자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그냥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번씩 그쪽을 보고 지나갈 정도다. 현애 일행도 예외는 아니다. 현애에 이어 세훈 역시, 그쪽을 한번 흘끗 본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세훈은 안됐다는 듯 혀를 찬다.

“에휴... 우리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네.”

세훈이 그 일행을 흘끗 보고 말하자, 현애도 한 마디 한다.

“그러게.”


한편 그 시간.

푸른 조끼를 입은 한 남자가 현애 일행의 뒤에서 일행이 유람선에 타러 가는 걸 보더니, 급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여... 여보세요? 지금 잘 들리나?”

“왜? 무슨 일로 전화했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걸려온 전화가 귀찮다는 듯, 짜증 섞인 큰 소리로 말한다.

“나 지금 손님들 상대하고 있어. 특별한 일 아니면 좀 나중에 전화해!”

“이봐, 잘 들어. 중대 뉴스야.”

“뭐, 중대 뉴스?”

전화 너머 남자가 놀란 듯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진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레베카가 실패했어.”

푸른 조끼의 남자는 목에 힘을 주고 말한다.

“파울리 녀석, 유유히 활보하고 있다고!”


글 쓰고,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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