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밤새 거친 숲을 달렸다. 손으로 문지른 듯 삽시간에 시야 밖으로 미끄러지는 풍경, 얼굴을 때리는 공기.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짐승의 울음소리마저 바람에 묻혔다. 준비 없이 부딪힌 겨울의 끝자락, 소년은 난생 처음 공기가 날카로울 수 있음을 깨닫는다.

고양이는 내키는 대로 발을 내딛었다. 그는 세상의 외곽을 떠도는 존재. 잔가지와 모난 돌 따위는 그에게 제약이 되지 못한다.

길이 열린다. 

“지친 거 아니지?”

“아직 여윱니다.”

언제든 붙잡힐 수 있다는 긴장은 피로감마저 잊게 만들었다. 남자는 지금쯤 침입자들을 다 처치했을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새붉은 눈동자가 뇌리에 번뜩인다. 토비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마왕님은 성에 있어.”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출 뻔한다. 우습게도 가슴이 따끔거렸다. 토비오는 작게, 안 물었습니다, 한다. 그를 돌아보는 남자의 눈에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좋네.”

“뭐가…….”

“상처 입은 표정.”

토비오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옮겼다. 하늘을 메우기라도 할 듯 산은 눈 닿는 온데에 솟아 있다. 노른 산맥. 인간들의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저 철벽 같은 산을 넘어야만 한다.

남자를 떠나온 것은 소년의 의지였다. 그는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가 믿는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 산맥, 대륙 최대의 벽을 앞에 두고 토비오는 덜컥 불안해진다. 이 곳을 넘어서면 다시는 남자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그러나 걸음을 늦추기에 밤은 짧았고 앞서가는 이는 소년이 응석을 부릴 대상이 아니다. 그가 두고 온 손은 보다 먼 곳에 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지면을 박차며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만약 오이카와가 다른 답을 주었더라면, 그래도 그가 이곳에 서있었을까.

……알고 있다. 소년은 줄곧 그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고 싶을 뿐이다.

발밑에서 풀들이 서벅서벅 운다. 먹구름 사이로 달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



숲을 벗어났을 때엔 세상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토비오는 깎아지른 벼랑을 따라 미끄러지는 아침을 마주한다. 고양이는 암벽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산을 오르는 것일까. 토비오는 활통의 끈을 조이며 남자의 옆에 섰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여길 어떻게 넘으려고?”

“방법은 고양이 씨가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신뢰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도 여길 넘어갈 방법은 없는데.”

그 말에 토비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양이는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그보다도.”

그는 토비오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소년의 등이 마치 경계심 많은 고양이의 그것처럼 굽는다. 말려올라간 입꼬리와 새까만 눈동자에서 소년은 익숙한 것을 읽어낸다. 

포식자의 여유다.

사고보다 본능이 먼저 경보를 울렸다. 왜, 어째서, 개연성 있는 추론을 시도하기엔 눈앞의 위협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기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것이 본래 마족과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역학관계였으므로.

한 걸음 물러서자 발뒤꿈치에 단단한 벽이 걸린다. 저벅, 발소리에 토비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호선을 그리는 남자의 얇은 입매였다.

“마왕님을, 안 부르네.”

“부르면요?”

“음……. 달려오려나?”

“그럼 안 부릅니다.”

오야. 눈썹을 밀어올리는 얼굴은 어쩐지 허를 찔린 듯하다. 비실비실한 웃음은 이내 시원한 폭소로 바뀌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좋은 향에, 마왕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생물.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소년은 마왕을 닮아 퍽 탐욕스러웠다.

토비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십니까.”

”음, 나 같이 오래 묵은 것들은 특이한 거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특이…….”

“그래. 지루하지 않은 거.”

그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작은 엄니는 송곳니만큼이나 날카롭다. 그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얼굴을 기울이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기꺼이 죽어줄 수 있어.”

새까만 눈이 반짝인다. 고양이의 목숨은 아홉. 사내에겐 몇 번의 기회가 남아있을까. 소년은 볼멘소리를 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죽는 것도 의외로 별 거 아냐. 소년이라면 마왕이 도로 되살려줄 걸?”

“……모릅니다. 그런 거.”

소년은 여전히 우스울 정도로 자신이 없다. 그 틈을 쥐고 성 밖으로 끌고 나온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자 단정한 콧날이 검은 머리칼 아래 가려진다. 남자는 무심코 그 앞머리를 넘겨보고 싶은 근지러운 욕구를 느낀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내 이름은 불러도 돼.”

쿠로오 테츠로야.

남자의 이름은 주박의 한 구절 같다. 토비오는 그 단단하고도 예리한 이름이 그의 혀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본다. 쿠로오는 제 이름을 되뇌는 소년을 보며 기이한 포만감을 느꼈다.

“그럼 이제…….”

뜨거운 날숨이 콧잔등 위로 쏟아진다. 토비오는 어깨를 바싹 굳혔다. 생소하지 않은 거리감, 낯선 남자.

‘그런 걸, 오이카와 씨 외의 사람과도 할 수 있는 건가?’

잘은 몰라도 이건 이상했다. 이런 건 좀 더…… 친한? 가까운? 좋아……. 토비오는 엉킨 실타래 같은 기분으로 미간을 좁혔다. 어떠한 표현도 오이카와와 그에겐 맞지 않는 듯했으므로. 순식간에 남자의 입술이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그때였다.

“좀 비켜볼까?”

“예?”

그는 소년의 등 뒤를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볼일이 있어서.”

토비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타오른다. 후다닥 비켜서자 쿠로오가 능글맞게 웃었다.

“오야. 지금 무슨 생각했어? 마왕님이 아주 못된 버릇을 들여놨네.”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토비오가 버럭 외쳤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뭔데?”

남자의 짓궂은 질문을 듣고서야 토비오는 저가 말려든 것을 깨닫는다. 잔뜩 분이 올라 노려보는 얼굴이 남자의 취향이었다. 재미 들리겠구만. 쿠로오는 웃음을 꾹 참고 손으로 암벽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흠. 여기였던가. 아니 여긴가.”

여기저기를 두드리고 만지는 게 비밀통로라도 찾는 모양이었다.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남자의 팔이 돌 속으로 쑥 빨려들어간다. 갖가지 마법에 익숙해진 토비오도 그 모습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통로입니까?”

“아닌 건 아닌데, 쓰면 안 되는 통로지.”

“네?”

“마왕이 썼던 통로거든. 십 년 전에.”

이리로 나가면 순식간에 창에 꿰일 걸. 그 말에 소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억지로 밀어뒀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모든 사고의 종착점엔 그가 있었다. 죄의 뿔을 단 남자.

“음. 이쪽이네.”

쿠로오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을 뻗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손은 저항감 없이 빨려들어갔다.

쿠로오는 토비오를 향해 나머지 한쪽 손을 내밀었다. 마치 첫 나들이에 나선 귀한 집 영애를 에스코트 하듯이.

“갈까.”

토비오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쥐었다. 눈앞의 마족에겐 간지러운 수준도 못 되겠지만 불만의 표현으론 충분했다. 앞장선 남자의 웃음소리가 깎아지른 바위 속으로 사라진다. 눈앞으로 벼랑이 밀려들었다. 토비오는 눈을 감았다.



***



“눈 떠.”

토비오는 연신 눈을 끔뻑였다. 열 걸음도 채 안 걸었건만 눈에 들어온 풍경은 방금 전과는 딴판이다. 사방엔 청록색 이파리가 빽빽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가지 위에서 샛노란 종달새가 포르르 날아오른다. 쿠로오가 주변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이상은 안 되나.”

“여긴 어딥니까.”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숲이지.”

“그게 어딘데요.”

“음…….”

남자의 왼손이 허공을 긋자 잔상처럼 푸른 선이 떠올랐다. 일렁이던 선은 이윽고 소년의 눈에 익은 형태로 바뀌었다. 하인베르크 대륙이었다.

“소년도 알다시피 여기가,”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륙의 좌상단에서 떨어져나온 선이 꿈틀대며 안쪽으로 움직였다. 뾰족한 지붕과 광활한 부지. 마왕성이다.

“소년의 집이고 여기가,”

그는 성에서 가까운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모꼴의 산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 그리고,”

남자는 이번엔 오른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손가락을 퉁기자 대륙 동쪽에서 거대한 숲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지. 대륙 동부에서 가장 거대한 숲, 할린 숲.”

“……네?!”

순식간에 대륙 절반을 건너왔다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놀라긴 이른데. 남자가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당혹스런 얼굴의 토비오가 그 뒤를 따랐다.

사박사박 간지러운 풀소리가 귓속을 간질이고, 소년은 어느새 고양이를 따라 성을 빠져나갔던 그 날의 정원을 걷고 있다. 만약 그때 그를 쫓아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토비오는 남자의 등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소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

쿠로오는 친절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걱정하지 마. 마왕님은 성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왔으니까.”

소년이 고개를 팩 돌리자 남자의 눈이 샐그러진다. 드러난 왼눈, 기울어진 웃음은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

그때였다.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토비오가 잽싸게 활을 들었다.

“쿠로.”

수풀 속에서 나타난 것은 키가 작은 소년이었다. 그는 흰 로브를 눌러쓰고 기이한 모양의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었는데, 천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그가 금발임을 유추하게 해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의 눈이 가늘어진다. 토비오는 반사적으로 활을 고쳐쥐었다.

“켄마.”

아무래도 둘은 구면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던 토비오가 천천히 활을 내렸다.

“내가 적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움찔한 토비오가 도로 활을 들자 쿠로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놀리지 마. 그만큼 날 믿는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너무하네.”

쿠로오는 상처 받았단 듯 과장스레 고개를 내저었으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소년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코즈메 켄마야.”

드러난 머리는 심지가 검고, 유별나게 큰 눈은 밤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랗다. 날카로운 눈매와 보다 예리한 눈빛은 느릿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토비오의 옆에서 쿠로오가 끼어들었다.

“카게야마 군이야.”

토비오의 눈이 크게 뜨인다.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다. 코즈메는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그뿐으로, 수긍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쪽이야.”

코즈메와 어느 정도 간격이 벌어지자 토비오가 물었다.

“……대체 누굽니까, 그 카게야마란 녀석은.”

화를 꾹 참고 있는 얼굴이다. 쿠로오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본명을 댈 건 아니었잖아?”

토비오는 반박거리를 찾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이내 실패한 듯 입술을 일자로 꾹 붙였다. 고양이의 얼굴에 미끈한 미소가 걸린다.

“이 쪽이 더 어울려.”

“전 원래 이름이 더 좋습니다.”

“어! 왔다!”

활기찬 목소리에 토비오가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히나타가 보인다. 그는 토비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안도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해 보이네.”

“뭐가.”

“그야 걱정한다고. 넌 인간이고…….”

그 말에 토비오의 눈썹이 뾰족하게 튀어오른다.

“착각하지 마. 너랑 같이 오이카와 씨를 쓰러뜨릴 생각은 없으니까.”

토비오의 말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히나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하하, 하…….”

토비오의 어깨를 잡아챈 히나타가 소리 죽여 말을 쏟아냈다.

“야, 너 진짜! 우린 용사 일행이거든?”

“누가 용산데.”

“당연히 나지!”

노골적인 불신의 눈길이 히나타를 향했다. 소년이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아오네! 빨리 이 녀석한테 내가 용사라고 말해줘!”

소년은 등뒤에 서있던 남자를 돌아보았다. 양손에 건틀렛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격투가인 듯했는데 단단한 체구에 비해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맞다.”

“들었지?!”

“너 쟤보다 약해 보이는데.”

“우왓! 너 여전히 무례하네!”

순간 퍼뜩 떠오른 듯 히나타가 묻는다.

“맞다, 이름.”

“뭐?”

“저번에 안 알려줬잖아.”

힐끔 시선을 옮기자 빙글빙글 웃고 있는 쿠로오가 보였다. 토비오는 탐탁찮게 대답했다.

“……카게야마.”

“오! 엄청 어울리네.”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쿠로오가 히죽거린다. 토비오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 카게야마!”

히나타는 정식으로 소개해 주겠다며 아오네와 그늘 아래 서있던 코즈메를 끌고 왔다.

“자자, 인사하자! 악수해!”

히나타는 마치 십년지기라도 되는 양 카게야마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이 엄청난 에너지, 엄청난 추진력……. 마왕성에선 일찍이 접해 본 적 없는 타입이다. 기세에 눌리지 않겠다는 듯 토비오가 눈을 부릅떴다. 쿠루오가 키득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토비오는 노골적인 시선을 향해 눈을 옮겼다. 날카로운 금안이 그를 꿰뚫어보는 듯하다. 용사 일행의 백마도사, 코즈메 켄마다. 토비오는 반사적으로 눈을 치떴다. 코즈메가 말했다.

“……고양이 같아.”

“고양이는 마물이라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샅샅이 간파당하는 듯한 감각에 토비오는 뒷목의 솜털이 찌릿하게 서는 것을 느낀다. 그의 말처럼 역시 활을 내리지 않는 게 옳았던 것일까. 납득했다는 듯 코즈메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왕도, 결국은 생물이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략법이 있다는 말.”

토비오는 이번에야말로 번개처럼 화살을 메겼다. 히나타가 곧바로 검을 뽑고 아오네가 켄마의 앞을 막아섰다. 팽팽한 긴장을 깬 것은 쿠로오의 느긋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이래봤자 서로 손해야.”

“똑바로 설명해 주세요.”

무서워라. 쿠로오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양쪽의 바람을 들어준 것뿐이야. 카게야마 군은 인간과 접촉하고 싶어했고, 용사 일행은 카게야마 군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지.”

잠자코 듣고 있던 코즈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행동은 너한테도 도움이 안 돼.”

“협박입니까?”

“사실이야. 우리는, 마왕을 막기만 하면 그만. 그러기 위해서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네 계획……, 굳이 실패할 확률이 높은 선택지를 고를 필요는 없으니까.”

토비오는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소년이 인간들을 설득하겠노라 말한 것은 오이카와가 단 둘이 있었던 그 날 밤뿐이다. 엿들은 말을 옮기다니, 듣던 대로 고약한 취미였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코즈메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비오는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사실입니다. 오이카와 씨는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다고……!”

“인간에게 필요한 건 확실한 생존이야.”

그 말에 토비오의 말문이 막힌다. 코즈메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소년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활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코즈메는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쓰며 말했다.

“……마을에 들어가면 방금 한 이야기는 삼가는 게 좋아.”

“전 제가 틀렸다곤 생각 안 합니다.”

“야, 카게야마.”

히나타가 격앙된 토비오를 제지한다. 몸을 돌리려던 코즈메가 그를 응시했다. 날 선 시선은 명백한 경고였다.

“우린 네 목을 두고 마왕과 협상할 수도 있어.”

“쉽진 않을 겁니다.”

살갗에 닿아오는 공기가 찌릿찌릿하다. 그때였다.

“뭐하는 거야, 너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움찔했다. 둘 사이에 선 히나타가 분해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로 외쳤다.

“기껏 만났는데 왜 싸우고만 있는 거냐구! 야, 카게야마!”

삿대질을 하며 히나타가 외쳤다.

“너 애초에 설득할 생각이 있는 거 맞아? 그렇게 말하면 아무도 네 말 안 들을 걸!

“뭐?”

“켄마도! 이 녀석 말하는 게 왕님 같고 좀 짜증나긴 같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라도 화날 거라고!”

“야!”

“게다가 이 녀석 마왕성 안에만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반박하려던 토비오가 입을 다물었다. 무작정 부정하기엔 아픈 구석이 있었다. 히나타의 열변에 코즈메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그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진정해, 쇼요.”

그리고 코즈메는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마왕은 아주 교활해. 너는 분명 중요한 패가 되겠지. 하지만 쿠로의 얘길 듣고 우린 너한테 기횔 주기로……(이 대목에서 히나타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말한 가능성을 고려해 보기로 했어.”

코즈메가 로브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냥은 아냐. 우린 다시 왕도로 돌아갈 거야.”

토비오는 마왕성의 정문 너머로 타오르던 횃불들을 떠올렸다. 올해는 얼마 남지 않았다. 예언 속의 멸망이 코앞이라는 뜻이었다.

“용사 일행이라면서요.”

토비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히나타를 흘끔거렸다.

“뭐! 말로 하시죠, 카게야마 군!”

“……네 주장에 대한 신탁을 들어야 해. 그러려면 신에게 증언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코즈메의 시선에 토비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까진 왜 온 겁니까?”

“쇼요가 시끄러웠으니까. 그리고…….”

히나타가 옆에서 항의했으나 코즈메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검은 고양이, 쿠로오가 여유로운 미소로 응대했다. 토비오는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쿠루오를 바라보는 코즈메의 시선은 토비오를 볼 때의 그것과 흡사했으므로. 저것은 의심하고 가늠하는 이의 눈이다.

“……신전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거든.”

“저 강합니다.”

“코즈메 씨.”

아오네가 코즈메를 부른다. 코즈메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서서 명령하는 건 싫지만……,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져버릴 테니까.”

둘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쿠로오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선 토비오의 등을 떠민다.

“자자, 빨리 안 움직이면 이리떼가 몰려온다니까.”

“딱히, 이리 같은 거,”

“걱정하지 마. 신속하고, 안전하게, 신전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언제 보아도 신용이 가지 않는 미소다. 혀를 찬 토비오가 그를 뿌리치듯 잰걸음을 했다.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



마지막 침입자의 목을 내던졌을 때 철퍽, 소리가 홀을 울렸다. 검붉은 빛으로 점철된 실내는 마치 암막을 두른 듯하다. 

마왕은 짓이겨진 사체들 속에 서있었다. 남자의 새하얀 뺨 위로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선명한 대조는 가짓수가 모자란 물감으로 그린 그림 같다.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할 일은 아주 명확했다. 

소년을 데려올 것이다. 동이 트기 전에. 더러운 것들의 손이 닿기 전에.

철벅, 철벅, 무거운 발소리가 홀을 울린다. 전투의 함성도, 비명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모두가 숨을 죽이고 웅크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의 부하가 아닌 이, 검은 마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목 안쪽을 긁듯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비켜.”

경고는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대기마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마녀는 고개를 조아리는 대신 말했다.

“막을 수 없어요.”

순간 지나치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가 천천히 시미즈를 돌아본다. 분노를 몸에 두른 남자는 평소보다 수배는 더 거대해 보인다. 지옥 밑바닥, 그 최후의 불을 담은 눈. 오이카와의 입꼬리가 씰룩임과 동시에 홀의 모든 창문이 폭발하듯 깨졌다. 유리조각에 찢긴 마녀의 뺨에 핏방울이 맺혔다. 마왕이 말했다.

“토비오에겐 내가 유일해.”

“맞아요.”

시미즈는 순순히 수긍했다. 순간 오이카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가 티테이블 위에 때 아닌 서리를 내렸던 날, 마녀는 말했다.

‘당신은 결코 인간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때 그는, 그랬다. 웃었다. 소년이 영원히 그의 품안에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마녀 쨩은 알고 있었구나.”

“…….”

“하하, 알고 있었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공허한 웃음소리가 홀의 높은 천장을 울린다. 

“하하, 하, 하…….”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창살이 경련하듯 덜그럭거렸을 때, 마녀는 엄습할 재난에 대비하듯 눈을 감았다. 밖에서, 아니, 그에게서부터 태풍이 휘몰아친다. 굉음과 함께 채찍 같은 불길이 벽 위에 짙은 화인을 남겼다.

“토비오에게 나 외의 선택지는 없어.”

짐승이 뱃속을 울리듯 흉폭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앤 내 거야.”

마녀는 마주한 얼굴 속에서 포악하게 날뛰는 충동을 본다. 그럼에도 결코 소년을 향하지 않는 그의 분노. 

“경이롭네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미즈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막을 수 없어요. 이건 세계의 의지니까.”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마녀는 생각한다. 세계는 모든 이를 위한 비극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



서두른 덕에 일행은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사치들이 여기저기서 마지막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토비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 위가 맨질맨질하고 뿔이 없다. 히나타가 마을 구경에 정신이 팔린 토비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카게야마!”

“어디……, 야!”

히나타가 곧바로 달려간 곳은 과일 가게 뒷편의 작은 잡화점이었다. 안녕하세요! 히나타가 활기차게 인사하자 주인이 알은 체를 한다.

“아저씨!”

“아, 그거 찾으러 왔구만.”

주인이 계산대 아래를 뒤지더니 반듯하게 접힌 천을 꺼내놓았다. 망토였다.

“자.”

엉겁결에 망토를 넘겨받은 토비오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시원스레 웃으며 히나타가 재촉했다. 

“빨리 걸쳐봐!”

선물을 받는 건 저인데 외려 그가 더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토비오는 망토를 펼치곤 어색하게 어깨에 두른다. 부들부들한 쑥색 천은 가벼우면서도 보온성이 있어 홑옷만 걸치고 나온 그에게 꼭 맞는 것이었다.

“어때?”

“어떠냐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그야 네가 하도 춥게 다니니까 그렇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년은 계절에도 무지했다. 일련의 사건 탓에 희석되긴 했으나 첫만남,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희뿌연 김을 뱉는 토비오의 모습은 히나타에게 소소한 충격을 주었다. 결국 그것이 마음이 쓰여 망토를 보자마자 값을 치러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데?”

“뭐……. 나쁘진 않은데.”

“그게 다야?!”

히나타가 도로 내놓으라며 망토를 잡아당기고, 토비오는 줬다 뺐는 게 어딨냐며 ‘멍청이!’를 연발했다.

“색이 너무 칙칙해서 네가 생각난 것뿐이거든!”

“그럼 결국 내 거 아냐, 히나타 멍청아!”

다섯 살 꼬맹이들 싸움이 따로 없었다.


밤새 달린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토비오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모험가로 보이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소년은 어깨에 두른 망토를 가볍게 쥐어 본다. 쿠로오는 활통을 고정시킬 수 있는 가죽끈을 사주었고 아오네는 노점상에서 꼬치를 사서 나눠주었다. 동경했던 이야기 속에 이런 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땅거미가 내리자 차양에 매달린 호롱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인간의 손으로 피운 불꽃이었다.

‘도구를 써서 불을 피운다고요?’

‘응. 마도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간들은 마법을 쓰지 못하거든.’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듯 골똘히 궁리하는 소년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복잡한 표정을 했다. 절반의 인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응당 소년이 영위했어야 할 삶이라는 것을.

초저녁 어둠을 밀어내듯 색색의 등불이 차례로 거리를 수놓는다. 주홍, 연노랑, 연두와 심홍……. 일렁이는 빛의 파도에 토비오는 미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소년은 이 거리에 융화될 수 없는 존재다. 설사 남자가 또다시 마을을 짓밟고 인간을 학살한다 해도, 종국엔 그를 등질 수 없을 자신을 알았다.

‘아직은.’

토비오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가 전부 바로잡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 어둠이 고요히 쌓이고, 소년의 방 문이 열리고, 결코 다정하지 않은 남자가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던 이 시간, 낯선 인파 속 처음으로 그의 부재를 실감하는 이 순간만큼은

그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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