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5일 화요일 PM 9:00


여주는 한숨을 내쉬며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크리틱을 하면 할수록 팀에 대한 비판이 아닌데도 자꾸만 자신의 마음에 와닿았다. 어째서 꿈은 닿으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기분일까. 여주는 문득 자신이 건축을 선택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우연하게 본 미술관을 짓고 싶다는 그 욕망. 그게 뭐라고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여주는 좀처럼 예상되지 않는 미래에 한숨을 푹 쉬며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동혁과 재민과 다르게 어색한 팀원들을 뒤로하고 건축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여주의 짝사랑 상대 동혁이 핸드폰을 보며 서 있었다. 뭐야, 나 기다린 건가? 여주가 후다닥 내려가 동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핸드폰을 보고 있던 동혁은 고개를 돌려 여주를 확인했다.



" 뭐야. "

"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 "

" 아. 재현이 형. "

" ... 내가 아는 그 정재현 씨야? "

" 아, 누나 때문에 아나? "



여주의 물음에 동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둘의 걸음이 아래층으로 향하고 여주는 문득 생각난 동혁의 카톡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끝내든지 아니면 냅다 고백을 해버리든지...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해도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여주는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데, 너... 여주가 말을 다시 시작하자 동혁은 핸드폰을 보다가 여주를 한번 쳐다봤다. 여주의 말을 기다리는 동혁은 자연스럽게 건축관의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 엉. "

" 내가 너 좋아하는 사람 궁금하다고 했잖아. "

" 아. 그걸 듣고 싶어? "



여주가 동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동혁은 끼고 있던 안경을 고쳐 썼다. 여기서? 동혁은 건축학과생들이 나오고 있는 건축관의 입구를 한번 쳐다보다가 여주의 팔을 잡고 근처 벤치로 향했다.

근데 나 오늘 여림 언니랑 주빈이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얼결에 동혁과 함께 벤치에 앉은 채로 핸드폰을 한번 흘깃 쳐다봤다. 15분 전, 여림과 주빈이 만났다는 카톡. 분명... 기가 커피에서 둘이 만났을 테니까 여기 도착하면... 모르겠다. 여주는 계획을 짜기엔 게으른 편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여주와 다르게 동혁은 어색한 듯 자신의 핸드폰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니, 나한테 고백할 건가? 얘 왜 이래. 동혁의 핸드폰을 훔쳐보려고 해도 사생활 방지 필름이 붙여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 답답해. 여주가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니, 대체 누구길래 왜 얘기를 못 해? "

" 진짜 궁금해? "

" 어! 나는 모르고 나재민만 아는 게 괘씸해. "



여주의 대답에 동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동혁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재민과 다르게 동혁의 짝사랑 상대를 모른다는 게 싫었다. 아니면 혹시 나를 좋아해서? 여주가 고개를 숙인 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 동혁은 턱을 가린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어, 누나. "



누나?

그제서야 고개를 든 여주는 자신과 동혁의 앞에 서 있는 주빈과 여림을 발견했다. 여림은 동혁에게 살짝 손을 들어 보였고 여주의 옆에 앉아 여주를 쳐다봤다.



" 둘이 얘기 중이었어? 우리 좀 기다릴까? "

" 아, 아니에요. 누나. 별 얘기 아니었어요. "



왜 나한테 물어봤는데 이동혁이 대답을 하지? 여주는 은근히 동혁을 째려봤지만 동혁은 여주의 눈빛을 파악하지 못한 채 여림의 눈치를 봤다. 오히려 여림은 아무 표정 없이 여주의 어깨에 기대고는 주빈을 올려다봤다. 주빈은... 아무 말이 없이 동혁을 한 번, 여주를 한 번 쳐다봤다. 이 미묘한 분위기는 뭐야.

여주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하자 그제야 자신의 턱을 가리고 있던 동혁은 자신의 백팩을 고쳐 매고는 꾸벅 여림과 주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저 갈게요. 주빈아, 나 갈게. "

" 동혁아. "

" 네? 네? "

" 내일 달회장한테 가는 거 알지? 정재현 차 경영관 주차장에 있을 거니까 거기로 오면 돼. "

" 아, 알겠어요. "

" 근데 오빠, 턱은 왜 가리고 있어? "



주빈의 말에 동혁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 면도를 못 해가지고... 나 갈게. "



여주는 동혁의 턱을 가린 그의 손이 그대로 자신의 머리통을 갈긴 기분을 느꼈다. 동혁은 자신과 있을 때는 한 번도 턱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주빈과 여림이 등장하자 턱을 가렸다.

여주의 생각이 확실해졌다. 이동혁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빈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동혁과 주빈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즉, 이동혁은 주여림을 좋아한다.






2023년 4월 25일 PM 9:20


여주는 학교 근처의 칵테일 바로 향하면서 머릿속의 생각을 곱씹었다. 이동혁이 언니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근데 언니는? 여주는 여림의 남자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친구인데 집착하는 정재현, 여주와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김도영, 여림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걸로 추정되는 김정우, 그리고 외국인 이마크... 까지. 그치만 여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중 누구도 여림과 이성적인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동혁은? 이동혁은 몰라도 언니는 동혁이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 여주야! "

" 어? 어엉?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여림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이동혁이 언니한테 고백한다는, 아니 그러면 내 짝사랑은? 여주가 동혁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 동혁의 책임은 없었지만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동혁을 3년을 좋아했는데! 감정의 순번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동혁의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이동혁... 진짜 이동땡이네.

칵테일 바에 들어서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여주와 주빈이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여림은 둘의 가방을 받아 빈 의자 위로 올려두었다. 뭐 먹을래? 언니가 살게. 여주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동혁 마음을 알아서 짜증 나는데 이 언니는 오히려 자기가 사겠다며 내게 친절하게 군다. 여주는 참지 못했다.



" 언니. "

" 응? "

" 언니는 누구랑 사귈 생각 아직도 없어? 분명 학기 초 때 소개팅 싫다고 했잖아. "

" 내 앞가림 하기도 바쁜데... 무슨 연애. "



여주는 여림의 고갯짓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적어도 언니가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아직 나에겐 기회가 있다. 지지부진한 짝사랑을 청산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다 여주는 문득 자신이 언급한 여림의 소개팅에 대해 떠올렸다. 그거, 이제노가 해달라고 한 건데...



" 언니. 근데 그 소개팅 말야. 내가 학기 초에 얘기한 거. "

" 응? "



이제노가 해달라고 한 거다? 차례로 주빈과 여주에게 앞치마를 내밀고 있던 여림은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아니, 이제노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언니가 이런 표정이지...? 여림을 아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흔히 얘기하는 썩은 표정이었다.

왜? 왜? 아무것도 모르는 주빈은 그저 여림과 여주를 한 번씩 쳐다보면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 그 미친놈... "

" 미친놈? "



여림의 한숨 섞인 말에 주빈은 궁금하다는 듯 턱을 괸 채로 여림을 쳐다봤다. 여림은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주빈과 여주를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깊은 숨을 쉬며 자신의 핸드폰 카카오톡 창을 켜보였다.

여림이 보여준 핸드폰 화면에는 일방적인 제노의 구애... 라고 하기엔 일반적인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냥 초등학생이랑 그걸 달래는 선생님... 같잖아. 여주와 주빈이 어느 정도 카카오톡을 확인하자 여림은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켜 제노의 프로필을 클릭하고는 주빈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생긴 애야.



" 되게... 정상적으로 생기셨는데. "



주빈의 말에 여주는 물을 마시다 푸핫, 하고 물을 뱉었다. 주빈의 순수한 말은 너무 사실이었다. 이제노는 외적으로는 정상적이다 못해 에브리타임에서 실디과 훈남으로 제법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단 두 개의 게시물이 있음에도 팔로워 수는 1000명을 훌쩍 넘었다. 이제노가 잘생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 나도 제노 잘생긴 건 알지! 근데... 얘가 왜 나한테 왜 이러나 싶지. "

" 응? 왜? "

" 얘는 나 안 좋아하니까. "



여림의 말은 단호했다. 근데... 제노가 보낸 카톡을 보면 일방적인 사랑의 구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여주는 지레짐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해지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고 말 하는 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지... 여주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여림을 쳐다보자 여림은 웃으면서 여주의 볼을 톡 쳤다.



" 여주 귀여워. "

" 으응? "

" 진짜 귀엽지 않아, 주빈아? "



여림의 물음에 주빈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는 두 여자에 휩싸여 가만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깜빡이기만 했다. 여림이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하고 곧 술이 나오자 여림은 잔을 살짝 부딪히고는 웃으면서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여전히 궁금증이 가득한 여주의 갈증을 해소해주려 입을 열었다.



" 원래 좋아하는 건 티가 나. "



그러나 여주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 이걸 다 먹어? 할 정도의 안주가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여림은 여주와 주빈을 챙기는 데 정신이 없었다. 여주와 주빈의 앞접시에 떡볶이를 덜어주고 휴지를 챙겨주었다. 거의 뭐 엄만데? 여주가 여림에게 얼른 먹어~ 라고 했지만 여림은 고개를 저었다.



" 난 술 잘 안 마셔. "

" 저번에 언니 엄청 취하지 않았어? "

" 어? 나 또 모르는 얘기. "



여주가 얘기한 그때는 신입들이 없었던 시기였다. 여주도 처음 옛날 시티캣을 마주했던 때고 그때도 이제노가... 아니, 이제노는 왜 자꾸 껴있는 거야? 대체? 여주가 그때를 언급하자 여림은 웃으면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나 그때 기억이 없어.



" 정신 차려보니까 집이던데... 누가 나 데리고 갔어? "

" 정우 오빠가? "

" 김정우면 믿을 만 하지... "



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여림과 여주를 번갈아보던 주빈은 그제서야 정우 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하,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주빈은 최대한 이 자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여주는 어쩌면 자신이 동혁을 좋아하는 걸 아는 주빈이, 동혁이 여림을 좋아하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주빈의 입은 열릴 수 밖에 없었다. 여림이 화제를 자신이 아닌 주빈에게로 돌렸기 때문에.



" 주빈아, 학교생활은 좀 어때? "

" 으음, 재밌는 것 같아! "

" 연애는! 성찬이? "

" 에이이, 성찬이는 그냥 동생이지. "



뭐야, 뭐야? 여주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빈을 쳐다보자 주빈은 세차게 손을 저으면서 은근히 여림을 째려봤다. 진짜, 언니... 원망스러운 주빈의 말에 여림은 오히려 웃으면서 물잔에 물을 채워줬다.

왜, 우리는 연애 금지 이런 거 없어. 여림의 말에 오히려 질문을 던진 것은 여주였다.



" 진짜? "

" 응. 근데... 뭐, 사귀어서 사고 날 것 같으면 안 사귀는 게 좋긴 하지만 굳이 못 사귈 이유는 없지? "

" 오... "

" 사고만 안 치면 돼, 사고만. "



여림의 말에 여주는 재민을 떠올렸다. 걔랑 나랑 진짜 사고였을까?










2023년 4월 25일 PM 11:30


원래 수다는 맥락 없이 이어지는 법이었다. 세 여자는 주빈의 구 남친(현 의대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여림의 구 남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여주의 과거 연인에 대해서도? 여주는 기억이 일부가 사라졌다. 술이 끊기지 않게 주문해주는 여림의 덕분인지 아니면 탓인지, 여주는 가볍게 술에 취해버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 김여주. "



사고친 당사자가 앞에 서 있었다.

여주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화장실에 다녀오는지 주빈은 여주의 옆에 앉은 재민을 흘낏 쳐다보다 빈 여림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 언니는 어디 간 거지... 여주가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주빈은 여주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 언니 담배 피러. "

" 아. 근데 얘는 왜 여깄어...? "

" 그 뭐지? 여림 언니가 언니 집을 기억 못 해서 데려다줄 사람 구한다고 제노? 그 분한테 연락하던데... "

" 걔랑 나랑 같이 있었거든. "

" 아? 아... 네. "

" 내가 얘 데리고 갈게. 누나한테는 얘기 좀 전해줘. "



재민은 한 손으로 여주의 큰 백팩을 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여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휘청거리는 여주의 몸에 주빈은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가 손을 놓았다. 주빈은 재민이 선을 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빈이 아는 여주는 재민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것도 주빈이 먼저 언급을 했을 때. 그리고 여주는 재민을 단순히 중학교 친구라고 표현을 했다. 근데 재민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주빈은 의구심을 가득 안은 채로 재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재민이 칵테일 바의 출구로 향하자 연초를 톡 털던 여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민의 옆에 기대 있는 여주에게로 향했다. 여주야, 괜찮아? 여림이 여주의 시야를 살피려 해도 여주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주 잘 부탁해요. 아, 택시 불렀어요. "

" 택시요? "

" 네. 택시 타고 가는 게 편하니까. 카드 줄 테니까 택시비 긁어요. "

" 걸어서 데려다줘도 되는데. "

" 그러다가 또 사고 치면. "



또? 여림의 말에 재민은 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누나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재민이 여림을 빤히 내려다보자 여림은 웃으면서 택시 번호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나를 그렇게 봐서 뭐해요?



" 네? "

" 제노랑 여주랑 그렇게 해서 친구라던데, 맞아요? "

" 아, 네... "

" 내가 뭐 여주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



재민은 묘하게 여림에게 경계심을 느꼈다. 우선 김여주부터 태우고. 재민이 차 뒷좌석에 여주를 태우고 자신이 옆에 앉자 여림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재민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여주 통해서 돌려줘요.

이거 안 받아도 돼요. 재민은 한번 여림의 카드를 거부했지만 여림은 택시 기사에게 결국 자신의 카드를 쥐여주고는 말을 덧붙였다. 나 부산에서 10만원 긁히면 재민씨 책임이에요. 웃으며 얘기하는 여림에 결국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런데요.



" 누나랑 이제노랑 무슨 사이세요? "

" 이제노한테 전해요. "

" 뭐라고요? "

" 내 눈에 뜨이면 진짜 죽는다고요. "



재민은 여림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2023년 4월 25일 PM 11:45


다행히 여림이 잡아준 택시 덕인지 재민은 수월하게 여주를 옮길 수 있었다. 문제는 나 얘네 집 비번을 모른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도. 생각해보면 여주는 늘 재민과 제노가 함께 사는 집으로 왔다. 즉, 여주의 집에 재민은 출입해본 적이 없었다. 이걸 어떡하지. 재민은 우선 공동현관 문 앞 계단에 여주와 나란히 주저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노 말 한 마디에 낚여가지고, 진짜...



" 김여주, 여림 누나랑 술 마시나 본대? 혹시 데리러 올 수 있냐고 그러네. "

" 아. "

" 헌포 갔으면 어떡하냐. "



이제노의 그 말 한마디에 재민은 벌떡 일어났다. 걔는 은근히 나를 이용해... 먹을 줄 안다. 하긴 20살 때부터 같이 살았는데 재민의 마음을 제노가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재민은 계단에 앉아 간혹가다 꺼지는 현관문의 불에 몇 번 팔을 휘저었다.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여주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잠에 빠져있었다. 간혹가다 으음, 이러면서 잠꼬대를 하기도 하고. 어떻게 그때는 취해서 나한테 입술을 부빈거지. 재민은 여주를 툭 건드렸다.



" 김여주. "

" 우웅... "

" 김여주, 집 비번 좀 불러봐. "

" 우리 집...? 307호 1445... "



와. 취한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네. 재민은 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문제는 공동 현관문 비밀번호를 모른다. 에휴... 망했네.

그렇게 재민이 무작정 여주를 부축한 채로 가만히 서 있자 대학생 한 명이 다행히 원룸 오피스텔의 공동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싫다... 재민은 속으로 이 사이를 노리고 들어가는 자신이 되게 멋없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얘를 우리 집에 데려가서 재울 순 없는 노릇이었고 또 길바닥에 던져놓고 갈 순 없었다.


엘레베이터에 올라타 3층으로 향하고 재민은 307호 앞에 멈추어 섰다. 재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미친 거 아냐? 여전히 헤롱 거리는 여주에 재민은 한숨을 쉬고는 여주가 얘기한 비번을 꾹꾹 눌렀다.

다행히 문이 열리고 재민은 여주를 거실 한 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눕혔다. 와씨... 내가 언제까지 김여주 따까리 노릇을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 없는 얘를 좋아하는 내가 비참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재민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쩝쩝대는 여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 김여주. "



재민은 한번 여주를 불렀다.



" 김여주. "



재민은 또 다시 여주를 불렀다.



" 기억 안 했으면 좋겠다. "



재민은 여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뗐다. 그리고 여림의 카드를 부엌 테이블에 올려둔 채로 밖으로 향했다. 진짜 청산할 때가 됐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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