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런."

"응? 왜?"

"아니….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스케줄 곧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으아. 진짜?"


세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쉬운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창피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꼬물거렸다. 그러면서도 이전 비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는 세빈이가 걱정스러워 미간을 좁혔다. 세빈이는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찬찬히 내려 볼과 귀를 조물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요번에는 중국이고 레이오버 없이 바로 돌아오는 일정이니까. 금방 올 거야."

"응…. 피곤할까 봐. 가깝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게."

"으읏. 언제까지 만질 거야…."

"닳는 것도 아니잖아~~"


한참을 더 주무르고 나서야 세빈이는 떨어져나가고 비행 준비를 한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역시나 걱정이 앞섰다. 스케줄이라는 게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구나. 오프가 긴데도 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답했던 게 이런 상황이구나 싶었다. 

오늘은 모처럼 세빈이에게서 비행 때 들렀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직 가까운 나라들 이야기밖에 못 들었는데…. 아쉬웠다. 


"아."


실망감에 잠이나 잘까 싶어 안방으로 향하니 거울에 내 모습이 비추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짧은 기장감의 미니원피스가 내가 보기에도 퍽 잘 어울렸다. 내 키에 딱 맞는 기장감이 잘 없는데, 세빈이가 일본에 비행 갔을 때 내가 생각나서 사왔다는 원피스는 과연 할인에 할인을 겪을 법도 했다. 작고 짧아서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지 않을까. 그래도 일본 옷이 길이가 짧다더니 그래서 이렇게 몸에 잘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언젠가….'

같이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내가. 세빈이랑. 오프 때는 대기를 해야 했지만, 휴가 때는 할인 받아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 세빈이는 상냥하니까, 서툰 내가 가자고 조르면 좋다고 할지 몰랐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나였다. 


"왕."

"뚜뚜야."

"끼이잉?"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고마워."


안방에 오도카니 서 있으니 뚜뚜가 와서 다정하게 몸을 치댔다. 나는 뚜뚜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서는 원피스를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행을 함께 안 가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행. 그건 우리가 중학교 3학년이던 여름의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뒤, 나는 내 마음이 무겁고 무서웠다. 그래서 세빈이와 거리를 두었다. 많이 슬펐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있었으니까. 

새 학교에서는 어차피 1년, 친구를 사귀지도 않고 그저 공부만 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세빈이가 떠오를 것 같아서 만나고 싶은 마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비정상적인 집착을 품게 될까 두려웠다. 

세빈이와의 연락은 그래도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었다. 좋아했으니까. 유일한 삶의 낙이었으니까. 간간히 오는 전화와 문자에 나는 성심성의껏 답변을 했다. 여전히 세빈이가 좋았지만 만지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다는 그런 충동은 많이 가라앉았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구나. 나는 빨리도 속단했다. 


- 나 용돈도 많이 모았는데….

"아. 그렇구나."

- 고등학교 가면 바빠서 못 볼지도 몰라! 

"그러려나…. 응. 좋아."

- 진짜지? 아싸!!

 

세빈이 외삼촌이 하신다는 펜션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멀지 않다고 한들 같은 도내 정도였지만, 어쨌거나 서울에 비하면 훨씬 가까웠다. 1학기 내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만남을 피해온 내게 세빈은 방학 기념으로 여행을 가자고 권해왔다. 

중학생끼리 무슨 여행이냐고 했던 엄마도 세빈이네 친적이 계신 곳이라니까 마지못해 허락을 내 주었다. 아닌 척해도 이사로 둘을 찢어 놓은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더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세빈이에 대한 애정은 애욕이 아니게 되었을 뿐 여전했다. 보고 싶었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즐거웠던 옛날처럼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솔아! 천이소오올!!"

"…!"


세빈이를 보는 순간 나는 지난 몇 달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게 그야말로 자기 세뇌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안 보던 사이 키도 더 커진 세빈이는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었는데도 맵시가 좋았다. 이제는 어린 티도 거의 나지 않는 세빈이를 보기만 했는데도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입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달려온 세빈이가 자신을 꽈악 끌어안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 여전히 귀여워~ 으~!!"

"으, 어. 나도 보고 싶었어."

"진짜? 진짜?"

"…응. 꺄악!?"


볼에 닿은 말랑한 촉감. 그날밤 그토록 닿고 싶던 입술이었다. 입술이 닿은 뺨을 손끝으로 만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세빈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떨어져 나온 세빈이 멋쩍게 웃으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요새 우리 학교에서 유행이거든."

"아, 그렇구나."

"응. 미안, 싫었어?"

"아니야. 괜찮아."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뽀뽀를 받은 것도, 그게 입술이 아니라 볼이었던 것도. 그러나 가장 내 머릿속을 물들인 것은-

'학교에서?'

'다른 사람한테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희석되어 회색에 가까워졌던 색깔이 순식간에 탁해졌다. 까맣게 까맣게. 질투와 독점욕이라는 새까만 감정으로. 




그 마음은 학교에서 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는 세빈이에 더 더 커져만 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왜 라는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내가 모르는 사람 얘기를 하는 거야?'

'여기 있는 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그래?'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는 안 그래?'

'나는 너를 잊으려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

정신이 든 것은 계곡에 물놀이를 하러 와서였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물을 끼얹은 사람, 세빈이는 눈썹을 끌어 모으고 물었다.


"이제 좀 나 보네!"

"아, 미안."

"사과는 됐구! 딴 생각한 벌이다앗!!"

"꺄악! 앗, 차가워! 아하하."


차가운 계곡물을 어푸어푸 쓸어내리면서 나도 반격을 했다. 그래 봤자 키도 손도 큰 세빈이에 비하면 물대포와 물총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맑은 물에서 몸을 쓰며 놀다 보니 나를 사로잡던 싱숭생숭한 감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계곡에서 한참을 물놀이를 하고, 세빈이네 외삼촌께서 준비해 주신 수박까지 알뜰하게 나눠 먹은 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펜션이라기보단 민박에 가까운 방이었지만 둘만의 공간은 꽤 아늑했다. 

푹 젖어서 씻어야 될 때가 됐을 때, 욕실 하나를 앞에 둔 내 마음에 다시 음험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같이 씻을까? 우리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아, 그. 나 괜찮아. 세빈이 너 먼저 씻어!"

"무슨 소리야. 맨날 양호실 죽순이인 게 누군데."

"그래도 같이 씻는 건 좀…."

"욕실 되게 넓다. 시골이라 그런가 봐!"

"으."

"같이 들어가자~ 욕조도 되게 넓어!"

"그래도 같이는 조금…."


나를 붙들고 설득하는 세빈이에도 나는 고래를 저었다. 지금 나는 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네 몸을 볼 수 없어. 그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더욱 어려운 거절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나는 세빈이의 그 눈빛에 약했다.


"…미안. 내가 너무 강압적이었나?"

"아, 아니야!"

"나는 같은 여자끼리구…. 지금 추우니까 꽤. 우리 둘 다 빨리 씻어야 할 것 같아서."

"응. 그렇지. 응."

"싫었다면 미안해. 그, 먼저 씻어! 진짜 난 괜찮아."


그러면서도 재채기를 하는 모습이 퍽 불안했다. 나를 향한, 나와는 달리 순수한,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에 나는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결국 나는 욕망과 죄책감에 져 버리고야 말았다. 


"알, 았어."

"진짜? 같이 씻어도 돼?"

"응. 춥겠다. 빨리 들어와…."

"응!!!"




"……."

"후우. 진짜 좋당! 그렇지!!"

"으, 으응."


옛날식 플라스틱 욕조는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여자 아이 두 명이 들어가기에 충분히 넓었다. 그러나 서로 접촉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넓지는 못했다. 게다가 불행히도 세빈이는 그런 자세로 있을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세빈이의 다리 사이에 앉은 나는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의 감촉에 이미 뇌는 가동을 멈춘 지 오래였다. 


"으응."

"…!"

"여전히 가느네. 우리 이솔이는."


기다란 두 팔로 내 등을 완전히 껴안은 세빈이 덕에 우리 두 사람의 상반신은 완전히 겹쳐졌다. 그 상태로 욕조에 쭈욱 기대며 세빈이는 판판한 내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랫배 안쪽이 꾸욱 옥죄는 듯한, 안타까운 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좋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한 감각에 나는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밥 잘 먹고 다녀. 다리도 엄청 가늘어!"

"흣. 아, 아니야."

"그런가."


큰 손바닥이 허벅지 안쪽을 쓸자 몸이 더 이상했다. 이상해. 내 몸인데 내 몸 같지가 않았다. 등뒤에 닿는 부드러운 세빈이의 몸과,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 뜨거운 열기. 모두가 다 너무 자극이 강했다. 

'더 만져 줬으면 좋겠어'

'이상해. 이상한데 기분이'

'좋아'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더운 물을 내 어깨에 끼얹어 주몀서 귓가에 속삭이는 걱정어린 목소리가 달콤했다. 계속 듣고 싶었다. 그리고 나만 듣고 싶었다. 눈을 꾹 감았다. 새빨개진 내 몸이 보기 싫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탕과 내 안의 열기에 정신을 잃었다. 



9.


"끼잉, 낑."


옛날 꿈을 꾸기라도 한 걸까. 뚜뚜가 밥을 달라며 얼굴을 핥으며 깨웠을 때 베개가 흥건할 정도로 땀이 흘러 있었다. 


"뚜뚜…."


아. 일났다. 뚜뚜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환절기라 주의했어야 했는데. 바로 뒤이어 마른 기침이 찾아왔다. 천근 같은 팔을 들어 이마를 짚으니 열이 펄펄 끓었다. 감기구나. 


"끼이잉…."

"미안, 뚜뚜야. 하. 누나 조금만…."

"왕."


뚜뚜도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챘는지 다가와서 몸을 얼굴에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그러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애교가 아니라 약과 물이었다.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고서는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어서자마자 저혈압에 머리가 핑 도는 게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거실로 나와 뚜뚜 사료를 주고 내가 마실 물을 컵에 따랐다. 시야가 흐릿해서 물이 다 튀고 난리가 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약이…."


다행히 사다 둔 약이 남아 있었지만, 불행히도 두 알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거면 나아지겠지. 생각하며 입안에 약을 털어넣었다. 위에는 좋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걱정되긴 해서 제산제까지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흘러내리는 몸을 붙들고 침대까지는 가지 못할 것 같아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엄마한테 전화를 할까. 오빠나 새언니? 그렇지만 하는 일도 없으면 아프기나 한다고 속으로 귀찮아하진 않을까. 아니야. 아닐 텐데. 아프니까 계속 사고가 부정적으로만 흘러갔다. 


"으앙."


아직도 걸핏하면 아픈 몸뚱아리가 원망스러웠다. 담요를 덮고선 몸을 공처럼 말았다. 세빈이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었다. 지금은 부르면 안 돼. 세빈이도 잇다른 비행에 피곤할 게 분명했고, 비몽사몽간에 할말 못할말 못 가릴 게 분명했다. 


"뚜뚜야."

"왕왕…. 왕."

"누나 너무 바보 같애."

"왕왕."


다정하게 손을 핥으며 위로를 건네는 뚜뚜에 나는 다시 까마득 정신을 잃었다. 그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화가 왔던 것 같고, 목이 잠겨 말을 제대로 못했던 것 같은데. 고열에 횡설수설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상대가 누구였지. 상대가…. 

"이솔아."

상대는…. 안 돼!!!

눈을 번쩍 떴을 때, 나는 내 침대 위에 고이 누워 있었다. 그날과 똑같이 몸은 깔끔하게 닦여 있었고 새로 꺼내입힌 듯한 옷은 보송보송했다. 초저녁 어둠이 드리운 방안에는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나에게 초자연적인 힘이라도 난 걸까. 

그럴 리 없단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마 위에 고이 얹어진 물수건이 그 증거였다. 그때와 꼭 같았다. 나를 챙겨 준 사람 역시 아마도 같은 사람일 게 분명했다.


"솔아. 정신이 좀 들어? 어떡해. 괜찮아?"


눈부신 빛과 함께 열린 문, 그 사이로 뚜뚜를 품에 안고 있는 세빈이 보였다. 어둠과 빛. 그 극렬한 대조에 나는 눈을 꿈벅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아. 괜찮아? 탕에 너무 오래 있었나? 감기는 아니지?? 어떡해."

"아. 응. 미안. 열이 올랐나 봐. 괜찮아."

"진짜 깜짝 놀랐어. 갑자기 추욱 늘어져서…. 으앙."

"헉. 미안. 진짜 걱정했지. 미안."

"난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진짜…."


눈물을 쏟아내는 눈망울을 보며 나는 세빈이를, 정세빈을 떠날 각오를 했다. 이런 눈빛을 보며 계속 마음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이라도 네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비비고 싶다고. 이 마르지 않는 갈증을 채우고 싶다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이 순수한 애정과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중학교 때 만난 정답고 좋은 친구 정도로 남고만 싶었다. 내 더러운 집착과 욕망을 들키지 않고. 나를 싫어하는 세빈이를 보게 된다면 나는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잘래…."

"응. 빨리 쉬자. 이구."

"응."


이게 세빈이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욱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갑자기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린 나를 본 세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숙이고 같이 울었다. 아마도 세빈이는 오늘이 가면 한동안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마음에 울었을 것이다. 내가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동안.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여행지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며 부모님께 새로 사 달라고 했다. 죽어라 공부만 해서 성적도 올랐겠다 이전 핸드폰도 오래 썼겠다 아빠는 조심하지 그랬냐고 한 소리 하면서도 내 손을 잡고 대리점에 가 주었다. 


"번호 바꿔 주세요."

"응? 이솔아. 번호 바꾸게? 불편할 텐데?"

"그게 더 싸다잖아. 괜찮아."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친구들한테는 바뀐 번호 꼭 알려 주고."

"응."


바뀐 번호를 알려 줄 친구 따위 세빈이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빈이는 나에게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바뀐 번호를 가족들에게만 알려 주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도망쳤다. 언젠가 나의 집착과 새까만 마음을 보고 질색할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내가 먼저 그 옆을 떠났다. 눈물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엄마 아빠, 오빠는 내가 핸드폰과 사진을 다 잃어버려서 그런가 보다 하며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를 해 줄 뿐이었다.




"정신이 좀 들어?"

"응……. 미안. 내가, 콜록."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그래도,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나는 손을 뻗어 세빈이의 얼굴을 더듬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고 뺨에는 눈물길이 선명했다. 


"놀랐지."

"응."

"쓰러졌다 일어나면 또 나를 버릴까 봐."

"내가… 버려?"

"…이번에는 정말, 안 그.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몰라…. 왜 그랬어? 아니야. 아냐. 아픈 애한테 내가 또 무슨."


뭐라뭐라 작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귀엽고 안쓰러웠다. 나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상대를 상처입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없는 번호를 마주한 세빈이는 기분이 어땠을까. 버림받은 것 같았겠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내 감정의 이름을 분명히 안다. 성욕, 소유욕, 독점욕, 집착, 애집, 그리고 사랑.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내 모든 감정이 다 이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누구를 만나도 마음속 한 편에서는 다정했던 세빈이와 비교를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이 쏟아지는 거대 감정이 두려웠다. 그래서 인간 관계를 회피했다. 회사에서 겪은 일은 그저 가족들과 뚜뚜에게 말하는 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 몇 달이 뭐라고. 

몇 달간 희석해 온 감정이 단 몇 시간만에 무너졌듯, 십 년이 넘게 흐려온 감정은 몇 달 앞에 허무하게도 무너졌다. 또 다시 밀어내고 도망치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안 버려. 버린 거 아니야. 나… 도망친 거였어."

"………나한테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나…. 나한테서."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지만 세빈이는 더 묻지 않았다. 아픈 사람의 횡설수설이라고 생각하려나 그건 싫었다. 내가 준 과거의 상처를 나는 꼭 사과해야만 했다. 


"내 감정이 그때 너무 감당하기 힘들었어."

"나 때문이 아니었다는 소리야?"

"넌 나한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는걸. 늘 잘해 줬어."

"그럼…. 어."

"그냥 내가 너를…. 어?"


침대 헤드에 비스듬이 기대어 이야기를 하던 나는 바로 드러눕혀졌다. 당연히 나를 눕힌 건 세빈이었다. 올라타듯 두 팔 사이에 나를 가두고 세빈이는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지독한 소유욕과 독점욕만 통제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아주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걸까. 


"좋아해. 이솔아. 아니. 사랑해."

"……."

"그때도. 잘 몰랐지만. 그랬어."

"아."

"너도 그랬ㅈ, 그랬어?"

"………응."

"지금도 그래?"

"응."


꿈 꾸는 건가. 열 때문에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그러나 거부할 이유도 거부권도 내게 없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잡아먹을 것 같은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이게 뭘까. 알 수 없었지만 좋았다. 좋은 냄새 달콤한 맛. 따뜻한 체온. 모든 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10.


정신이 들었을 때는 한낮이었다. 열 때문에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꿈과 현실이 도무지 구분이 가지를 않았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숨을 멈추었다. 눈앞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때문이었다. 섬뜩하다면 섬뜩할 장면이었지만 그가 너무나 내가 그려온 사람이라 그런 부정적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깼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아프기도 했고 메기도 했다. 도대체 어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열에 취한 나는 원더우먼이라도 되는 걸까. 여전히 뿌연 머릿속에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니 세빈이가 나를 당겨 안았다. 그제서야 무언가 실감이 나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훌쩍."

"또 우네. 울보."

"으응."

"뚜뚜가 배고프다고 난리길래. 식탁 위에 사료 줬는데. 맞아?"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며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말하고 웃을 때마다 나를 안고 있는 몸이 잘게 흔들렸다. 꿈인가. 좋은 냄새. 좁디좁은 슈퍼싱글 침대였지만 둘만의 공간이 되니 놀랄 만큼 아늑했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끙끙거리며 더 품을 파고들었다. 웃으려나 싶었지만 세빈이는 그저 나를 더 꽈악 안을 뿐이었다.


"어제 일."

"응…."

"꿈도 뭣도 아니니까."

"응."

"네가 기억 못해도 상관 없어."

"기억, 나. 콜록."

"그래?"

"응."

"목 아프니까 말 시키기 싫긴 한데. 그럼."


세빈이는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는 듯 조금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 조금의 틈이 싫어서, 춥게만 느껴져서 나는 다시 품에 파고 들었다. 세빈이가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고동과 그 주인이 내 거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이솔이의 뭐야…? 우리 무슨 사이야?"

"아."

"말해 줘. 네 입으로. 솔아."

"…ㅏ친구."

"……아직 친구? 또 친구? 진짜?"

"………여자친구."

"Not just friend?"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완전히 밀착한 상태라 작은 몸부림이었지만 그대로 세빈이에게 전해졌다. 심장소리가 더 커졌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 둘 모두. 


"이솔이 여자친구가 나야? 내 여자친구가 이솔이고?"

"……으응. 안, 될까?"

"그럼 이제 너 내 거야?"

"…진즉…. 응. 응."

"하."


북받치는 듯 세빈이는 탄식을 내뱉고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이런 사인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고백한 건 세빈이였지만 아마도 더 오랫동안, 훨씬 더 무겁고 질척한 마음으로 좋아한 건 나일 것이 분명했다. 차마 그 어린 10대 때도 네게 욕정을 느꼈다는 말은 털어놓지 못했다. 

나는 그냥 더듬더듬 세빈이의 작은 머리와 큰 귀를 찾아 만지작거렸다. 놓아 달라는 내 해괴한 바디랭귀지를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세빈이는 팔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나는 조심스레 볼과 귀를 어루만지다가 입술을 세빈이의 입술 위에 올려놓았다. 

다정하고 조용한 입맞춤이었다.




세빈이가 가져다 준 차를 마시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나는 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그 소유욕과 애집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큰 감정에 혼란스럽고 두려움을 느꼈다고. 그때 자신을 이겨내지 못해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세빈이에게 거듭 사과를 했다. 

세빈이는 그렇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때문에 도망간 게 아니라면, 저를 완전히 버린 게 아니라면 상관 없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늦된 편이라 그런 감정이 처음이라 잘 처신을 못한 것 같다고, 그저 가까이에 있고 싶고 닿고 싶은 마음이 다른 마음인 줄 알았다고. 떠난 뒤에야 그게 첫사랑인 줄 알았다고 털어 놓았다. 

닮은 듯 다른 우리의 엇나감은 길었지만, 운명 같은 우연이 다시 우리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이제는 나는 내 감정에서 더는 도망만 치지 않을 것이고, 세빈이는 제 감정의 명확한 이름을 깨달았다.


"지금 만난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그래?"

"응…. 회사 다닐 때였으면, 너 만나기 힘들었을 테니까."

"어떤 회사 다녔어? 이제는 물어봐도 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세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너와 그렇게 헤어지고 공부만 했다고. 그래서 나름 괜찮은 공대에 가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과정이 올라갈수록 예민해지는 인간 관계 때문에 박사 과정을 밟지는 않았다고. 그 뒤 회사에 들어가 했던 일들과 있었던 일들. 지금도 전화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세빈이에게는 아주 시시콜콜한 일일 텐데도 고개를 끄덕여가며 열심히 들어 주었다. 


"과장 아주 개자식이네."

"으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자기 일 떠넘기고 새벽에 술처먹고 전화하고. 그게 개자식이 아니면 누가 개자식이야. 팀장도 그래."

"화내 줘서 고마워…. 그래도 좋은 분들도 많았어. 지금은 그분들 통해서 외주 개발 일 받아서 하거나 그러고 있어."

"어쩐지 컴퓨터가 엄청 좋더라니."

"아하하."


예전에는 정말 미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 덕에 너랑 만난 거니까. 화가 난 세빈이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오래도록 쌓여 온 원망이 조금 누그러졌다. 웃는 나를 보며 세빈이는 귀여워서 탈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쪽 다 남탕이잖아. 으."

"그래도 이제 너랑, 있으려면."

"진짜야.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거 어렵지 않다?"

"먹여 살리다니……."

"뭐 나 먹이는 건 너지만 말이야. 히히."


세빈이의 그말에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배고프지? 벌써 시간이. 내가 밥…."

"이미 죽 시켰어. 뭘 밥을 해 주려고 그래?"

"아. 그런가."

"물론 네가 만든 밥이 훨씬 좋지만."

"히이."


세빈이는 눈이 마주치자 다시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스킨십이 원래 많은 편이었는데,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니 더했다. 간지러운 감각에 눈을 접고 있으니 세빈이가 조금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사실."

"응."

"나 네가 만든 밥만 맛있는 것 같아."

"와. 진짜 고마운 말이야."

"그런 휘황찬란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으응?"


세빈이는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맛있다고 생각되지를 않았어."

"아…."

"컵라면이나 미슐랭 스타 받았다는 라멘이나 큰 차이가 안 느껴지는 거야."

"어떻게 그런."

"그래서 그냥 맨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이나 사먹었지. 참치는 질리기는 했지만…. 뭐."

"그랬구나……."


승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면서 다이어트하면서 그렇게 된 걸까. 먹는 즐거움이 삶의 즐거움 중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런데 네가 만든 건 너무 맛있는 거야. 모르겠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런가?"

"진짜? 맛있었어?"

"응. 나 혈색도 완전 좋아졌잖아! 다들 그래. 그러니까. 이솔아."


세빈이는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쥔 손은 내 마음과 같았다.


"나 너 없이 이제 못 살아. 나 절대 버리면 안 돼."

"내가 뭘 버려. 그런 말 하지 마…!"

"응. 그거면 돼."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빈이는 눈을 휘며 웃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몰랐지만(진짜라면 세빈이의 건강이 조금 걱정이긴 했다) 세빈이를 놓을 생각도 없었고 세빈이가 내가 한 밥을 맛있게 먹고 있다는 게 기뻤다. 내 표정이 좋아보이는 걸 세빈이도 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뚜뚜랑 나랑 같다고 보면 돼."

"무슨 소리야?"

"책임감을 가지고 보살펴 달라는 거지~"

"오늘도 네가 나 보살펴 줬는걸."

"그런가?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나한테도 당연하고 기쁜 일이야. 세빈아."

"오늘 우리 솔이 귀엽고 멋지고 난리났어!"

"으. 하지 마아. 창피해."


여기저기 소리지르는 척 예쁘다 귀엽다 요리도 끝내준다 같은 말을 외치는 세빈이에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하지 말라며 그 입을 틀어막았다. 세빈이는 손은 또 왜 이렇게 앙증맞게 작냐며 주접을 떨고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죽이 배달 올 때까지 는실난실 히히덕거렸다.




"우리 같이 여행도 가자."

"와. 여행?"

"응. 우리 이솔이가 좋아하는 여행~"

"응. 좋아!"


죽을 먹고 세빈이의 무릎 위에 앉아 함께 소파에 늘어져 있자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세빈이가 미국에서 사왔다는 해열제를 먹으니 열도 많이 내리고 컨디션도 많이 돌아왔다. 


"근데 나 아직 무서워서 한번도 못해 봤다?"

"아니야. 이솔아."

"응?"

"나랑 가려고 아직 안 갔다고 하는 거야. 그럴 땐."


큰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세빈이의 농담에 나는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고 싶은 여행지를 하나씩 이야기했다. 세빈이는 가 본 곳은 계획에 살을 붙여 주고, 안 가본 곳은 알아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럼 뚜뚜는?"

"아. 그렇구나. 우리 뚜뚜…. 오빠네나 부모님집에 잠깐 부탁하거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해지네…."

"그러게. 그럼 우리 일단 국내 짧게 놀러가자. 당일치기로"

"아."

"그 정도는 뚜뚜도 혼자 괜찮지?"

"왕!"

"아하하. 귀여워. 우리 뚜뚜."


내가 뚜뚜를 안아올리고 뽀뽀를 해 주자 세빈이는 부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강아지랑 간접키스인데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서 쪽 하고 입에 뽀뽀를 해 주었다. 세빈이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내 품안의 뚜뚜의 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기분 좋은지 완전히 늘어진 뚜뚜가 귀여웠다.


"그래도 펫캠 같은 거 있으면 좀 낫겠다. 그지?"

"아,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사촌언니도 고양이 키우거든. 펫캠 있으면 확실히 좀 안심이래."

"그럴 것 같아! 한번 알아볼까…."

"내가 언니 뭐 쓰는지 알아볼게."

"응! 고마워. 세빈아."

"뚜뚜랑 사랑하는 이솔이를 위한 일인걸~"

"꺄악! 간지러워."


허리를 간지르다가 웃옷 안쪽으로 들어온 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뚜뚜를 안고 조심스레 눈을 또르르 굴려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세빈이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을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빨리 컨디션 회복해."

"아, 응. 고마워."

"나는 플라토닉 아니야."

"아, 으응. 응. 나도…."

"이솔이도?"

"응……. 나도 아니야아."


꿈틀. 미간이 움직이고 세빈이는 내 허릴 더 꽈악 안고서 진짜 순진한 주제에 꼬시지 말고 빨리 나으라고 중얼거렸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놀랄 텐데 싶었지만 나는 정정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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