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카는 조금 고민하는 듯 싶더니 말을 이었다. 마치 어려운 주제를 어디까지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아무리 관찰하는 입장이라지만 세기 어려울 만큼 배드 엔딩인 아가씨를 보면 관여하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다른 차원에 떨어진 당신을 찾고 이 세계에 대해 예습 시킨 다음 되돌린 거야."
"예습이라뇨? 그럼 전생에서 제가 플레이한 라피의 이야기들은……?"
"정확히는 전생이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한 것들이지. 전부 이 아가씨의 이야기 였던 것들이야. 기록은 모두 삭제 되었지만 인과는 남아있어. 괜히 5년 만에 최강자가 되는 게 아니지."


"그 뭐라더라, 루프물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다회차 플레이?" 메타성 발언을 쏟아내는 류카의 말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되돌렸다고? 다른 세계에 있던 나를? 그러고보니 류카는 단 한 번도 라프레티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라프레티의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을 아는 것 처럼.


"그럼 당신이 신이라는 거예요?"
"정답! 똑똑하네. 그래서 우연이 겹쳤다고 하는 거야. 뭐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도 있지만."


류카는 멋지게 손가락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딱 소리는 매우 작았다. 약간 부끄러웠는지 마른 입맛을 다신 그는 내 손에 들린 머리핀, 허리춤에 장식된 라프레티가 선물로 준 유리 백합, 그리고 아래, 마지막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의식이 잠들어 있던 한 쌍의 머리핀, 사막의 달빛을 받고 피어난 유리 백합, 그리고 세계수의 가지, 그리고 세 가지의 물품에 신력을 모이게 할 신녀. 모두가 모였으니 가능했던 거야. 증폭의 증폭의 증폭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세계수의 가지가 이 아래에 있단 거지? 황제의 기밀 정보가 이렇게 가볍게 폭로되다니. 역시 신이라 인간의 비밀 정도는 하찮다는 건가.


"궁금한 거 더 물어도 돼요?"
"음, 물어보는 건 자유지. 답하는 건 자유롭지 않지만."


류카는 하품을 하더니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다보니 졸리다는 듯 눈을 비볐다. 앞으로 백년은 더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나를 되돌리는 데 상당히 힘을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

"라피는 왜 그렇게 많은 생을 살아온 거죠?"
"그 아이는 여러모로 주인공이거든. 주인공은 신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지. 자세히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리스 신화식 신들의 사랑인가. 신들의 사랑을 받은 인간은 꼭 행복할 수는 없단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 좀 더 개인적인 질문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제 죽음은? 기억나지 않는데요."
"에이 뭘 그런 걸 기억해. 아서라, 인간이 기억할 건 죽기 전 정도가 적당해."


류카가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기엔 사후 세계의 일을 기억하는 걸로 봐서는 라프레티의 전생처럼 일부러 지웠다는 뜻인가. 여러모로 상냥한 '관찰자'구나. 류카는 하품을 한 번 더 하더니 자러 들어간다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류카가 사라지자 샤를로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와 내가 부축하고 있는 라프레티와 루이와 기사들이 기절해 있는 방 안을 당황스럽게 둘러보다가 내 팔을 잡았다.


"따라 와."


라프레티를 부축하며 샤를로트의 뒤를 따랐다. 샤를로트의 뒤에 우리를 안내했던 여기사가 보였다. 아무래도 루이의 명을 받고 움직였지만 샤를로트에게 일을 전한 모양이었다. 그녀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 내 전용의 휴게실이야. 들어가."


정갈한 방의 문을 열었다. 긴 소파에 라프레티를 눕히고 흘러내린 땀을 닦자 샤를로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샤를로트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손수건이었다. 고맙게 받아 땀을 닦았다. 지금은 뭐든 거절 할 처지가 아니었다.


"고마워요."


내 감사 인사를 받은 샤를로트가 여 기사님 쪽을 힐끗 보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황녀님이라니, 내가 깜짝 놀라 샤를로트의 어깨를 잡자 샤를로트가 말했다.


"미안해, 저딴 게 오빠라서. 미셸은 명을 받아서 어쩔 수 없었어. 황실 기사단은 황족의 명에 불복하면 검을 사용하는 쪽의 손목이 잘리거든."
"손목이요?"


샤를로트의 뒤에서 기사님이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손목이라니 무슨 수틀리면 손가락 자르는 야쿠자도 아니고. 사실 황실 기사단 쯤 되면 라프레티 보다는 못해도 검의 달인들일 테니 반역의 위험을 제거하는 의도겠지만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님도 바로 샤를로트를 부르러 갔고, 신의 도움도 있었고 황녀님이 용서를 구한 판에 어쩔 수 없으니 용서 하기로 했다. 사실 이제와서 이정도의 일에 화를 내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도 크기도 했지만.


"용서 할게요."


그나저나 여기사님의 이름이 미셸이었구나. 진짜 마리아니, 미셸이니, 코코니 엑스트라 이름이라고 대충 짓는구나 개발자 녀석들. 아니 이쪽이 내 진짜 세계라는 걸 알았으니 이게 리얼한 건가. 모두가 여주인공 같은 이름이면 이상하긴 하지. 잠들어 있는 여주인공 라프레티는 진짜 공주님 같았다. 그럼 내가 왕자님 역할인가. 나쁘지 않을지도.


"신력을 좀 더 직접적으로……."


온 몸의 신력을 끌어모아 토하는 느낌이면 되려나. 라프레티에게 입을 맞추며 그대로 신력을 쏟아 부었다.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의 놀란 신음이 들렸지만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라 무시하기로 했다.

약 기운을 몰아내자마자 눈을 뜬 라프레티는 벌떡 일어나 가장 먼저 내 몸을 더듬으며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를 폭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건 내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아주 살기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 새끼 고자로 만들거야."


와, 찢어 죽인다 같은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무서운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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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온다네요 모두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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