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렸던 게 10일 전이다. 변명해 보자면, 지난 10일간 상당히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우선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석사 학위에 아무런 생각이 없지만, 가족이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거절하려면 ‘왜 대학원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 문제를 가지고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다.

첫째, 하루라도 빨리 내 삶을 책임지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 내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여가를 즐기고, 적금을 들고, 나아가 인생을 계획하고 싶다. 둘째,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딱히 없다. 면담한 교수님께서도 내게 ‘연구하고 싶을 때만 대학원에 오고, 더 공부하고 싶으면 오지 마라’는 말씀을 하셨다. 셋째, 한국에서 공부하기 싫다. 가능하면 석사 공부는 문화가 다른 타지에서 하고 싶다. 아예 이민을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내 인생과 자아에 대한 고민을 연이어서 했다. 재학 중일 때 응당 했어야 할 고민이지만, 그때는 별 쓸데없는 데 관심을 쏟느라 감히 나 자신을 탐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 타인의 평가나 시선, 외부적인 척도는 내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의무가 아닌 이상 아주 작은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내게 의미가 있어야 하며, 의미가 없어지면 바로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다.

2. 자기 세계가 강하다. 외부 세계가 일방적으로 내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한다. 내게 삶이란 자기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외부 세계에 맞서 내부 세계를 지켜내는 저항의 과정이다.

3. 설계와 분석을 좋아한다. 직접 설계하는 것도 재미있고, 다른 사람이 한 설계를 해부하는 것도 재미있다.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일이라도 설계와 분석이 포함되어 있으면 가리지 않고 즐긴다.

4. 동시에 할 수 있는 생각이 적고, 많은 양의 정보를 한번에 수용하지 못한다. 기사 읽는 것 이외에 인터넷을 거의 안 하고, SNS는 아예 안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간 분명 뇌가 폭발할 거다.

5. 기록과 저장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내게 의미 없는 것들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내게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호더 수준으로 간직하고 기록한다. 

6. 내게 ‘의미 있는 무언가’에게서 내가 느끼는 주관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감정은 시시각각 변하므로, 내 안에서 진심을 발견하면 어떤 식으로든 남겨야 한다고 믿는다.


이 중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유는 5번과 6번에 해당한다. ‘의미 있는 것’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는 곧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로 이어지며, 같은 맥락으로 음악에 있어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연주보다는 작곡이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그 형태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이라도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를 보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림인가? 단순한 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는 내가 느낀 의미를 결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순간 대상에게 느낀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주관적인 매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림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매체다. 도화지 위는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세계니까. 그 위에서 인간은 동그랄 수도 있고 홀쭉할 수도 있으며, 바다는 붉을 수도 있고 파랄 수도 있다. 

이만하면 자아 성찰도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다시 그림 공부를 조금이라도 할까 한다.


근면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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