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는 태준을 보며 등골이 오싹했다. 

오…오지 마. 이러면 안 돼. 제발이야.

“미안. 내가 술에 약해서.”

태준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순식간에 유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이마에 뽀뽀를 했다. 

아니 뽀뽀하는 척을 했다. 아쉽게도(?) 입술은 닿지 않았다. 일부러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를 크게 냈다.

“쪽!”

“와아!”

구경꾼들이 재미나는 구경거리라도 본 듯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유하는 진짜로 뽀뽀하는 줄 알고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태준의 입술이 가까이 오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씨발…. 강한결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못 봤으면. 

한 건 아니지만.

유하가 눈알을 또르륵 굴려서 한결을 보았다. 한결은 게임인 걸 알기에 화도 못 내고 눈빛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태준을 불태울 듯이 쏘아보았다.

멀리 있어서 한 것처럼 보였나 보네. 어휴.

유하는 곧 방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당황했다. 

“어… 근데 좀 수상해요. 안 닿은 것 같은데….”

“그래…나도 좀.”

여자 후배들이 웅성거렸다. 소현이 잽싸게 달려가서 눈을 부라리며 여자동기들의 입에 커다란 튀김 안주를 하나씩 밀어 넣으며 말했다.

“봤어. 내가 아주 가까이에서 봤어. 닿았어. 눈은 장식이야!”

눈빛으로 더이상 말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듯 쏘아보았다. 다행히 소현이 나서면서 대충 수습이 되어 유하는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

깜빡 속은 구경꾼들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푸하하하!”

“태준 선배. 의외로 화끈하다.”

“유하 선배 눈빛이 좀 반한 거 같지 않냐? 엄청 수줍어해. 난 이 커플 찬성!”

“에잇, 아무리 그래도 이마는 좀 그런데…. 뽀뽀는 입술에 해야지. 두 사람 다 애인도 없으면서 너무 몸 사렸다.”

구경꾼들의 말에 한결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서 폭주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흰자 위에 붉은 핏발이 가득 섰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듯 소주를 병째 들고 마셨다.

“미…미안 한결아. 게임이니깐 내가 이해 좀 해줘.”

소현은 두 사람이 당연히 벌주를 마실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예상 예외 상황이 벌어져서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뒤늦게 한결에게 사과를 하려 했지만 이미 한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안 닿았다는 사실을 지금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꺼져! 김소현. 그딴 야시꾸리한 게임 다시는 안 해. 나라에서 저런 게임은 법으로 금지 시켜야 해.”

유하는 한결이 폭주하는 모습에 간담이 서늘했다. 

한결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 유하는 무사히 잠을 잘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둘 다 술이 너무 약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로 돌아가서 여유롭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다시 술자리는 더욱더 후끈 달아올랐다. 다들 흥청망청 취해서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상 여기저기서 빈 술병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드러누운 사람도 있었다. 

한결은 이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혼자 씁쓸하게 술을 마셨다. 주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구 마셔댔다.

유하는 미안한 마음에 은근슬쩍 한결의 곁으로 다가갔다. 죄를 지은 것처럼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선배, 왜 왔어요. 게임 하느라 나한테 관심도 없더니.”

이미 술에 만취한 한결이 눈을 게슴츠레하고 뜨고 말했다.

한결은 유하를 서운함 가득한 눈빛으로 보았다. 많이 서운했는지 취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 가슴이 답답한 듯 손으로 탕탕 쳤다.

“제 속이 오늘 새까맣게 다 타버렸어요. 알아요? 왜 자꾸 한눈을 팔아요?”

“내가 뭐? 그런 적 없거든.”

유하가 발끈하며 말했다.

한눈은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너 마음 상할까 봐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데.

한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손을 뻗어 유하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곧 이마를 손으로 빡빡 청소하듯이 문질렀다.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유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결이 너무 세게 문질러서 이마가 붉게 변했다. 

“닦아야 해요. 빡빡. 내 꺼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거 싫어요.”

유하는 그 말을 누가 들을까 봐 깜짝 놀랐다. 급히 주변 눈치를 살폈다.

어휴…. 그런 닭살 돋는 말 좀 하지 마. 사람들 오해할지도 모르잖아.

유하는 한결의 손목을 붙잡고 말렸다.

한결은 유하를 한 번 쓱 보고는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그만 마셔. 내일도 생각해야지. 이렇게 많이 마시면 몸 다 상한다.”

한결은 시무룩하게 유하를 보았다.

“머리가 빙빙 돌아요. 잠깐 술도 좀 깰 겸 산책하고 싶어요. 같이 갈래요?”

“어? 산책?”

유하는 이 밤에 산책을 나가고 싶다는 한결의 말에 머뭇거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관광지라서 거 그런지 가로등이 많이 켜져 있었고 아까 보니 밤이라도 시원해서 계곡 주변에는 돗자리 깔고 눕거나 텐트 안에서 사람들이 노는 모습이 보였다. 별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 가자. 산책.”

한결은 조금 마음이 풀린 듯 실쭉 웃었다.

유하는 한결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계곡 근처라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결의 까만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술에 취해서 홍조 띤 얼굴이 조금 우스웠다. 질투해서 소주 한 병을 통째로 마시다니 귀여웠다. 실제로 뽀뽀를 하지 않았지만 조금 더 골려주고 싶었다. 

“술 이제 좀 깨는 것 같아?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아직도 정신이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

“유전적으로 술에 강해요. 간세포가 좋은 것 같아요. 저희 누나도 술 엄청 세거든요. 크큭.”

한결은 유하가 다정하게 말하자 헤벌쭉 웃었다.

계곡 근처에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밤이라도 안심하고 걸을 수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제법 운치가 있었다.

물에 발만 담그고 수다를 떠는 아이들이 보였다. 유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동생과 함께 저렇게 밤새도록 놀았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빠듯한 살림에 가족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번 엠티도 사실 한결이 아니었다면 안 올 생각이었다. 비용도 문제였고 주말이 끼여 있어서 알바를 빼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한결이 꼭 같이 가자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오긴 했다. 막상 와서 놀다 보니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한결의 조각 같은 옆모습이 가로등 조명을 받아서 빛났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눈빛이 조금 흐리멍덩했다. 조금은 모자란 바보 같은 이 눈빛은 이 눈빛대로 좋았다. 

아까 태준과 벌칙은 예전의 자신이라면 분명히 설렜을 것이다. 지금은 어째서인지 한결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앞섰다. 태준의 센스있는 모습에 감탄했다. 역시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바보 강한결 혼자만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크큭.

한결이 이끄는 데로 가다 보니 인적이 드문 조용한 길을 걷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은 환했지만 길 양옆으로 수풀이 우거졌다. 

“어…. 여긴 좀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유하가 주변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말을 말하자 한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유하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조용한 곳이 좋아요. 가끔은…….”

한결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근두근.

유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걸 하려는 게 아니겠지.

한결이 유하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어딘가로…. 자꾸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것 같아서 유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몸이 떨려왔다.

“이런 데…. 위험하지 않을까? 막 뱀 같은 게 나올까 봐 무서워.”

“아이… 괘…괜찮아요.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요. 뱀 나오면 제가 물리쳐 줄게요.”

한결의 광대가 왠지 모르게 볼록 솟은 것 같았다. 눈빛이 끈적했다.

“어엇….”

유하는 한결이 이제 손목을 잡지 않고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놀랄 새도 없이 도망가지 못하게 깍지까지 꼈다. 길이 없는 수풀만 무성한 곳에 도달했다. 수풀을 헤치면서 걸었다.

아직은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오고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향긋한 풀내음이 났다.

“야…이제 그만 돌아가자.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는 사람들이 똥 싼단 말이야. 위험해. 밟을 수도 있다니깐. 진짜야.”

“하아….”

한결이 유하의 말에 분위기 좀 깨지 말라는 듯 인상을 팍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끌려갔다

이런 곳을 찾아온 걸 보니…. 설마….

유하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떨렸다. 깍지 낀 손에서 땀이 축축하게 베어져 나왔다. 너무나 진지한 한결의 눈동자를 보니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핀잔을 주면 오히려 한결을 자극해서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정신 차리자. 좀 더 긴장하자.

조금 더 가자 수풀이 우거진 나무 뒤에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쪽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인들이 은밀하게 키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어둠 속이라서 실루엣만 보일 뿐 잘 보이지는 않았다.

야…야하다. 실제로 하는 건 본 적 없는데…. 소리만 들어도…좀 그렇네.

유하는 침을 꿀떡 삼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결은 눈치채지 못한 건지 눈치채고도 모른 체하는 건지 몰라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계속 걸었다.

원체 체력이 약한 유하는 숨을 헐떡였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 정도면 지…지옥 훈련이다. 아까 일을 복수하려는 거 아닐까?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으니 내 체력을 소진 시켜서 정신줄을 놓게 만들려는 게 아닐까.

“헉헉…. 한결아 나 힘들어. 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유하는 또 한결이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이건 아니지 싶었다. 반바지를 입은 탓에 풀이 다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벌레에 계속 물렸다. 다리 여기저기가 물려서 간지럽고 따가웠다. 

“왜 이렇게 안으로 자꾸만 들어가. 가로등 불빛도 곧 있으면 안 보일 것 같은데. 위험해.”

“선배는 그냥 따라와요.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

한결은 오히려 유하에게 무언의 압박을 행사했다. 눈빛이 형형했다. 

오늘 너 왜 이렇게 박력 터지냐. 

유하는 입을 꾹 다물고 한결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체력이 딸려서 다리도 아프고 잠도 왔다. 그냥 뭘 할 거면 바로 앞에 있는 나무 뒤에서 대충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하아…. 나도 이제 미쳐가나 보다. 어휴. 대충하고 가자. 나 피곤해. 쉬고 싶다.

한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드디어 얼굴에 화색을 뛰었다. 이제 가로등 불빛이 거의 희미해져 버렸다. 어두워서 핸드폰으로 빛을 비추어 앞을 향해 걸었다.

새까만 하늘에 달빛만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한결이 우뚝 멈춰 섰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유하를 잡은 손이 떨렸다. 

유하는 한결이 멈춰서자 더 깜짝 놀랐다.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저 나무 뒤에서 뭔가를 한다면 사람들 눈에 절대로 안 띌 것 같았다. 생각보다 한결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성격인 것 같았다.

유하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자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한결이 환하게 웃으면서 커다란 나무 뒤로 유하의 손을 꽉 잡고 잡아당겼다. 눈빛이 번뜩였다.

드…드디어 하는 건가.

두근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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