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릭-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프룩은 팔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7시였다. 우선 시끄러운 알람부터 끄고 기지개를 켰다.


"우웅..."


약간의 애교 섞인 소리.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느라 살짝 눌린 머리가 보인다. 검은색이지만 햇빛을 받아 약간의 갈색빛도 보이는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 끝을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아주 조심스럽게. 프룩에게 7시에 일어나는 것은 일상이지만 제 옆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아이에게 7시는 조금은 이른 시간이므로. 아주 약한 유리구슬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만지던 프룩은 시간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벌써 10분이 흐른 뒤였다. 프룩은 침대 속에서 빠져나와 자느라 굳어있던 몸을 풀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키고는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반듯한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내려본다. '쪽'소리 조차 나지 않게. 그리고 다시 한번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든 그 얼굴을 보며 작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좋은 아침. 누뉴"


프룩의 일상은 이렇다. 7시 정도에 일어난다. 그리고 씻는다. 씻고 나온 후 아침으로 간단하게 토스트, 계란을 먹으며, 커피를 마신다. 그러면서 오늘 해야 할 업무가 무엇이 있는지 체크한다. 그렇게 체크를 다 한 후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긴다. 그리고 잊은 것이 없는지 잠깐 생각한 후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하면 8시. 최근에는 루틴이 하나 더 생겼다. 프룩은 현관으로 향하기 전에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살짝 닫혀 있는 문을 열어본다. 침대에 흰 이불이 둘둘 말려 있는 것이 마치 누에고치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나 움직임은 없다.


"다녀올게"


8시 5분이었다.


My Dear, Sweet Dreams

- Lullaby 그 후 -


"으.. 몇시지"


이불에 둘둘 말려 있던 누뉴는 손을 더듬어 제 휴대폰을 찾았다. 몇 번 더듬어 잡게 된 휴대폰에는 10시였다. 10이라고 쓰여져 있는 숫자에 놀란 누뉴가 벌떡 일어났다가 요일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금요일이다. 다행이야.. 너무 다행이다.."


누뉴 차와린. 현재 3학년으로 유치원에서 실습 중이다. 실습과 별개로 학업을 병행하고 있고, 줄였지만 과외도 두 개 정도 하고 있는 바쁘디 바쁜 학생이다. 실습을 나가는 날은 화, 수, 목. 수업을 나가는 것은 월, 금. 과외도 월, 금. 유치원 실습은 8시까지 가야하고, 수업의 경우 월요일은 10시, 금요일은 다행히 1시부터 수업이다. 수업이야 한 번 지각하는 것 별 문제 되지는 않겠지만 실습의 경우는 말이 달라진다. 실습의 경우 평가가 들어가는데, 지각 게다가 8시까지 가야 하는데 10시에 일어났으면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11시 도착. 완전 지각 이건 성실성의 문제니까.

요새 자도 자도 졸리다는 것을 느끼는 누뉴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느낌이다. 사업을 운영하는 프룩만 하겠냐마는. 요새 누뉴는 직장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실습이 엄청 힘드냐고 묻는다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즐겁다.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자신이 얼마나 이상적인 그림을 그렸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선배들의 말을 잘 새겨들었어야 했다. 누뉴가 입성한 유치원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지옥이었다. 과거 실습 나갔던 선배들이 전쟁터가 따로 없다, 별별 일을 다 시킨다, 모든 것이 나의 몫, 내 몫이 아니어도 내 몫, 제때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것을 반증하듯 진한 다크서클과 함께 좀비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잘 웃고 반짝반짝 빛나는 그리고 귀여운 유아교육과의 햇님이자 청일점인 누뉴에게 실습 나가기 전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줬더랬다.

그들이 했던 말을 종합하자면 유치원이란 곳은 항상 웃고 밝은 곳일 것 같지만 전쟁터와 따로 없고, 일은 엄청나게 많은 곳이다. 그리고 힘든 일은 안 맡으려고 해 돌고 돌아 실습생에게 온다는 것. 그리고 선생님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당연히 실습생은 새우등이 된다는 것. 누뉴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저 순진한 양이 겪을 고난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그렇게 생각해봤자 다들 제 코가 석 자고 별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저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수 밖에. 그래도 아무 이야기를 안 듣고 무방비 상태에서 가는 것보다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는 것이 나을 테니.


[누뉴 선생님. 실습 아닌 날 미안한데 우리가 졸업하는 7세 친구들 졸업여행을 가야하는데 올 수 있지?]


어디서 자기 생각을 듣고 있는 걸까 갑자기 문자가 왔다. 언젠지도 안 알려주고 올 수 있지라니.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졸업여행이 언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걸 말 안했구나. 다다음주 금, 토]


졸업여행 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올 수 있다고 말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올 수 있지가 그나마 여지를 준 물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물은 이유도. 그렇다. 금, 토는 실습 날이 아니었다. 우선 읽지 않고 어떻게 오는지 보고 생각하고 답해야지 했는데 거의 칼답 수준으로 와서 1이 없어져 버렸다. 망했다. 금요일은 수업도 있고, 과외도 있는 날인데. 수업이야 전공 수업이나 실습 기관 사정을 말하고 빠진다 치더라도 과외는 곧 애들 시험 기간이었다. 읽었으니 빨리 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파왔다.


[안돼?]


성격도 급하시다. 왜 이리 칼답일까 생각해보니 금요일 10시. 7세들 체육 시간이었다. 체육 시간은 외부에서 체육 교사가 와서 가르치기에 담임선생님이 비교적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저 안돼라는 말은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필시 '까라면 까야지'라는 뉘앙스인 것이 분명하다.


[아니요! 알겠습니다!]


결국 누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알겠다고 하며 애꿎은 이불에 휴대폰을 내리쳤다. 아 이제 또 교수님하고 학생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하냐. 머리가 너무 아파왔다.

역시 스트레스 푸는 것은 수다를 떨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누뉴는 생각하며 튜터에게 점심 같이 먹자고 연락하고 바로 준비하고 나갔다. 물론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아둔 이불은 다 정리했다. 그리하여 누뉴 앞에 앉아 있는 튜터와 낫. 낫은 튜터와 같은 동기이다. 튜터랑 동기니까 낫도 동기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튜터는 더 이상 누뉴와 동기가 아니었다.


"야.. 네 얘기 들으면 내가 전과한 게 진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좋겠다아.."

"어쩜 좋아"


둘다 걱정 어린 눈으로 누뉴를 바라보았다. 튜터는 전과를 했다. 아이들이 좋아 유아교육과를 선택했지만 막상 공부해보니 안 맞다고 느껴져 전과를 했고, 그곳에서 낫을 만나 친해지게 되어 셋이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튜터는 1학년 때의 누뉴를 떠올려봤다. 남자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유아교육과에 남학생이 오면 관심을 받고 예쁨을 받지만 그중 누뉴는 제일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예의도 바른 편이었고, 싹싹했다. 튜터가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은 생긴 것은 마냥 아기처럼 부모님한테 사랑 많이 받고 어화둥둥 온실 속 화초처럼 컸을 것 같은데 부모님의 도움을 안 받으려고 노력하고, 공부도 그렇고, 굉장히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제 나이 또래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호구 기질이 있어서 저렇게 오늘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 안 가기 힘들겠지만 분명 또 성실히 한다고 거기서 시키는 것 이것저것 다 하다 보니 거기 선생들도 누뉴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저러는게 분명했다. 사람들이란 영악하면서도 악한 면이 있어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누뉴가 너무 착하고 순진무구하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러니까 그곳에서 아직까지 잘살고 있는 것 아닐까? 자그마치 6개월. 아니지 지난 학기 시작과 함께 들어갔으니 벌써 8개월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 다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오래 있는 누뉴에 놀라면서 궁금해했다. 도대체 그 집에 미스터리는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누뉴도 그 애들이 그렇게 힘들어할 만한 것을 목격했는지, 혹은 당했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별일 없다고 말하는 누뉴를 누군가는 추궁하기도 했다. 물론 튜터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반 궁금증 반이었다. 하지만 별 소득을 얻어낼 수 없었고, 이것저것 자신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누뉴가 그것에 대해서만 꼭꼭 숨기고 말 안 하는 것이 어쩐지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싶다가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집은 좀 어때?"

"뭐가?"

"벌써 8개월 정도 됐잖아"

"아아.. 뭐 똑같지?"

"정말 아무 일 없어?"

"응"


저 거짓 한 점 없다는 진실된 까만 눈. '쩝' 튜터는 입맛만 다실 뿐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저 눈을 보고 있자니 더 물어볼 맛도 안나 커피만 홀짝일 뿐이다. 옆에 있던 낫도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내용을 잘 모르고 친한 튜터에게도 말을 안 하니 물어보기도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누뉴는 둘이 그러던 말던 카페 테이블에 엎어졌다. 시험 기간인데 뭐라고 말씀드리냐면서 거의 울기 직전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누뉴를 보더니 튜터가 커피를 내려놓고 대뜸 과외 시간을 물었다.


"저녁 7시 반... 왜?"

"대타해줘?"

"형!"


누뉴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 마냥 눈을 반짝이며 튜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얘가 징그럽게 왜 이러냐며 손을 떼어냈지만 누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튜터도 과외 알바를 하고 있고, 이 근방 학생일 테니 교과서나 문제집도 비슷할 것이다. 됐다 싶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니께 잘 설명하고, 교수님들께 오늘 가서 양해를 구하는 것.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이 흐느적 거렸던 누뉴에게 생기가 불어넣어지고 있었고, 튜터와 낫은 그런 누뉴를 보며 웃었다.


-


"프룩씨?"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누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진심이었던 것인가? 누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 그러니까 어느덧 2주가 지나 누뉴는 아기들 졸업여행에 함께했고, 오늘은 토요일. 애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냈고, 바로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챙겨갔던 짐도 정리해야 하고, 부모님 기다린다고 갖고 놀던 교구들도 정리해야 했다. 아이들이랑 떠난 졸업여행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작은 아이들이 '누뉴 선생님!'하고 부르며 같이 놀자고 잡아 끄는 것도 좋았고,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도 좋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도! 몸은 고되긴 했지만 보람찬 일이었다. 튜터에게도 저녁 늦게 과외 잘 마쳤다고 문자를 받아서 더 안심이었다. 그런 누뉴는 한 가지 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프룩이었다.


"정말 못 잤어요?"


누뉴는 호다닥 프룩의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맨 뒤 허겁지겁 물어보았다. 낑낑 우는 강아지처럼 두 눈썹을 늘어뜨리며. 그런 누뉴를 지긋이 바라보던 프룩은 시동을 키며 답했다.


"아니"

"아..다행이에요"

"뭐 목이 졸리진 않았으니까"


뭐 또 다른 악몽을 꾸긴 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며 프룩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누뉴는 심각해진다. 누뉴가 신경 써야 할 것이 과외와 수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뉴는 그것을 통보 아닌 통보를 받은 그날 프룩의 방 침대에 누울 때 생각해냈다. 금, 토 1박 2일. 그 말은 금요일 밤에 프룩이 혼자 자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 남자가 혼자 잔다는 것이 뭐가 문제 되냐고 할 수 있겠지만 프룩에게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누뉴의 집주인인 프룩은 더는 크게 악몽을 꾸지는 않게 되었지만 누뉴가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고 잠들고 나서의 일이었다. 누뉴는 바쁜 와중에도 그것은 까먹지 않고 해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소명인 것처럼. 어떻게 이것을 잊어먹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우선은 벌써 침대 안이니 프룩을 재우고, 다음 날이 주말이니 프룩도 웬만해선 회사를 안 가고.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말을 했을 때 프룩은 잘 다녀오라는 말 뿐이었다. 아니 그 말이 정말 다라고? 아쉬워하지 않는 프룩을 보니 누뉴가 다 섭섭했다. 아니 그동안 잘 잤는데! 자신이 어떻게 했는데! 조금 분하기도 하면서.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방학 때 고향도 못 갔잖아'

'아..그건'

'하룬데 별일 있겠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해주니 뭔가 한시름 놓이긴 했다. 하지만 졸업여행 날이 다가오자 다시 스멀스멀 불안함이 올라왔다. 또 다시 그 악몽이 도지면 어떻게 하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자는 것에 대한 행복을 조금씩 되찾아주었는데!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누뉴를 보고 있자니 프룩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 웃음이 났다. 그런 프룩에게 누뉴는 자기 전에 침대에 눕게 되면 전화해달라고 했다. 이유인 즉 슨 자장가를 불러주겠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프룩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자신은 진지한데 웃기만 하는 프룩이 얄미워 샐쭉한 누뉴는 입이 댓 발 나왔다. 귀여워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은 누뉴의 몫이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빠르게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일찍 일어난 누뉴를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누뉴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렇다면 토요일에 데리러 나오겠다고 했었고, 정말로 데리러 나온 것이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에요? 여긴 집 가는 방향 아닌데"

"나온 김에 드라이브 어때?"

"좋아요!!!"


아주 힘차게 외치는 누뉴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이들을 1박 2일로 돌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좋다고 하는 누뉴를 보니 프룩은 또 다시 웃음이 났다. 프룩이 드라이브를 권한 이유가 있었다. 8개월 동안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즐거워하는 누뉴를 볼 수 있었다. 드라이브를 처음 권했던 것은 거의 어딜 나가지 않고 주말에 집에만 있는 집돌이 누뉴가 리프레쉬할 수 있도록 돕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밖에 나가 놀거나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누뉴는 그렇다고 했다. 특히 사람 많은 백화점 같은 곳은 안 가고 싶다고. 더 정신 없을 아이들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물어보면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사랑으로 돌본다고 하겠지.

8개월. 자신이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가까워진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모난 사람은 아닌지라 고루고루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깊게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악몽장애가 심해진 이후에는 더더욱. 그날 그러니까 이제 말로도 글로도 담기 싫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누뉴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잘 잠들 수 있도록 도닥였다. 그 손길에 대충은 없었다. 늘 따스한 손과 목소리. 그것은 누뉴가 실습을 하면서 바빠져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은 피곤할 텐데 먼저 자라고 했지만 피곤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절대 안 잔다고 말하는 누뉴였다. 그런 그를 위해 부러 일찍 누운 적도 있었다. 누뉴는 알까? 처음에는 그저 착하고, 따뜻하고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프룩은 그런 누뉴가 이제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보답하듯 늘 자신보다 늦게 일어나는 누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좋은 아침이라고 주문을 건다. 오늘 누뉴의 하루가 좋은 하루이길. 힘들고 지치고 슬픈 일보다는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 가득하길 바라며.


"근데 무슨 꿈을.. 꾼거에요?"

"아..음..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지"

"무슨 꿈이길래요? 네?"


누뉴의 고운 미간이 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걱정 어린 눈. 얼마나 심각한 꿈이길래 그런 거냐며 눈으로도 추궁한다.


"농담이야. 그냥 뭔가에 약간 쫓기다 끝났어"

"그래요?"


그러면서 프룩의 얼굴을 살피는 누뉴다. 프룩은 운전을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약간 안도를 했는지 '휴'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1박 2일 동안 있었던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 절대 말 못한다. 쫓기는 게 아니라 쫓아가는 꿈이었고, 네가 자신을 떠나는 꿈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프룩이었다. 쫓기긴 쫓겼지 불안감에 쫓겨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만큼 프룩에게 있어서 누뉴는 어느 순간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너야 말로 괜찮아?"

"응? 뭐가요?"

"지금 괜찮냐고"

"뭐... 이래저래 바쁘긴 하지만 제 나이 때 애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요?"


아니, 그래 누뉴같이 성실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애들도 많지만 다 그런 건 아닌데. 일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프룩이 할 말은 아니지만 가끔 누뉴를 보면 헤르미온느가 떠오른다. 주말에는 그래도 좀 쉬는 것 같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과제를 한다거나 실습을 준비한다거나 아니면 과외를 준비한다거나. 과외라도 그만두고 그냥 실습하고 공부에 전념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진심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고쳐지지 않은 악몽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해준 누뉴는 어떻게 보면 프룩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금전적인 것이 문제라면 프룩이 해결해 줄 수도 있었다. 이 집이야 공짜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일상생활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예를 들어 밖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교통비도 들고 이것저것 움직이게 되면 그게 다 돈이다. 하지만 누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부모님께 의지하기보다는 가급적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단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제안을 좋다고 받아들 일은 없기에 하고 싶은 말을 뒤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누뉴는 어딘가 평온해 보였다. 자리에 없었던 만큼 이것저것 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을 텐데도 에너지 충전 되어서 그런 것일까. 집에서 먹자고 사 온 음식을 꺼내 두니 누뉴가 때마침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둘의 식사 시간. 프룩의 말이 제법 많아졌지만 누뉴를 따라가려면 아직은 한참 멀었다. 차 안에서, 근교 카페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 저녁 먹으면서까지 이야기한다. 재잘재잘 하는 것이 역시나 누뉴는 어미 닭이 아닌 병아리에 가깝다고 생각한 프룩은 엉뚱하지만 누뉴의 학생이 되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분명 안 좋아하고 못 배길 것이다. 맨날 애들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저렇게 난리인 것을 보면 그만큼 사랑을 줄 텐데 저렇게나 귀여운 선생님이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면 안 좋아할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프룩이었다. 반면 그런 프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누뉴는 오물오물 입에 있는 것을 다 씹어 삼킨 뒤 입을 뗐다.


"아니 글쎄 튜터가 어제 과외 대신 해줬다고 했잖아요? 근데 아까 대뜸 대신 해줬으니 이 집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하는 것 있죠? 그래서 제가 하루 과외해준 것하고 밥 사기로 했으니까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왜 알려주지"

"싫어요!"


이따금씩 누뉴는 프룩에게 이 집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애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앞서 있었던 룸메 학생들 때문이겠거니 싶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혹시 퍼졌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누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왔으니. 실제로 누뉴도 그 두 아이들에게는 전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고, 다들 모른다고 했다. 누뉴의 말에 의하면 '누뉴가 미스테리한 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로 요새는 이야기 되고 있다고 한다. 미스테리하긴 하겠지. 앞서 두명은 별로 되지 않아 나가버렸고, 누뉴만 8개월째 멀쩡히 아무렇지 않게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법도. 집에 대해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하면서 누뉴 또한 왜 그러는지 이해는 되지만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마도 프룩 자신의 프라이버시와 연관이 되어 있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싶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당사자들이 밝히지 않은 마당에 구태여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누뉴에게 있어서 그것은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 아픈 것은 모두 아물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프룩은 더 이상 그러지 않고, 그런 반복되는 악몽을 꾸지 않으니까. 프룩의 밤은 무섭고 괴로운 밤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다 누뉴 덕분이었다.


-


"자자, 빨리 누우세요"


밥을 다 먹은 뒤 여느 때와 같이 누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기에 프룩이 하겠다고 나섰다. 보통은 귀찮아서 미루는 설거지를 둘은 서로 하겠다고 실랑이를 벌인다. 결국은 한 명이 거품 내고, 한 명이 닦는다. 밖에서 사 온 것을 먹은 것이라 설거짓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걸로 서로 하겠다고 했다니 결국 둘이 같이 설거지를 한다니 둘 다 웃음보가 터졌다. 다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7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누뉴의 말에 그렇게 하라고 한 뒤 프룩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제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일을 잠깐 보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서재에서 처리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주말에는 이렇게 거실에 나와서 처리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누뉴도 자신의 과제를 거실로 가져온다. 있을 가전이나 가구는 다 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적막했던 거실은 어느새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 되었다. 기실 사람의 온기가 안 밴 곳은 이제는 없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더니 벌써 11시인 것이다.

어김없이 누뉴는 제 옆을 팡팡 두들기며 프룩에게 누우라고 한다. 예전에는 방에서 베개와 이불을 가져오더니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어느 날 부턴가 베개를 가져오지 않기에 왜 안 가져왔는지 물었더니 어차피 침대에 베개가 두 개니까 하나는 자신이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하긴 놀고 있는 베개니 그렇게 해도 되겠지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불마저 안 가져온다. 그러고는 어차피 자고 나면 프룩의 이불을 덮고 있다며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거야 이불을 돌돌 말길래 추운가보다 해서 프룩이 아침에 일어나 덮어준 것이었지만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원래 침실에 있는 베개를 쓰고, 이불은 같이 쓰기 시작했다. 악몽 때문에 침대라도 편했으면 해서 큰 침대에 거기에 맞는 이불을 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둘 다 남자여서 절대 같이 못 덮었을 것이다. 그 지경이었으면 다시 누뉴가 이불을 가져왔겠지만.

바로 눕지 않고 빤히 침대와 누뉴를 바라보는 프룩에 이제는 '쓰읍'이라고 하며 다시 한번 팡팡 두들긴다. 어서 누우라는 저 신호. 이미 잠옷 차림인 프룩은 누뉴가 두들긴 자리로 가서 눕는다. 그러자 만족스러운지 '쿡쿡' 웃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프룩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올려 덮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쪽도 이불이 올라간다는 것을 누뉴는 알고 있을까. 덮어준다고 덮어주는데 그게 끌려 올라가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누뉴에게는 이불을 뒤집어쓴 모습과 같다. 얼굴만 빼꼼 나와서는. 그리고 도닥도닥 일정한 리듬. 프룩에게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리듬대로 이불로 가려진 프룩의 가슴께를 부드럽게 두들긴다. 그리고 프룩을 위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익숙한 리듬과 목소리, 루틴에 프룩은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하고도 편안한 시간이었다. 얼마나 자장가를 불렀을까. 잠들었나 싶어서 살피려던 순간이었다.


"있잖아. 누뉴"

"헉! 네"

"놀랐어? 미안"


잠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프룩이 말을 걸자 누뉴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라고 하며 프룩 쪽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프룩은 몸을 누뉴 쪽으로 고쳐 누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큰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기다려본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 사실 네가 떠나는 꿈을 꿨어.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어. 왜 그렇게 까지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을까 생각해봤는데"

"..."


프룩은 말을 하며 누뉴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누뉴 또한 그런 프룩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 끝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네가 없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 하루가 컸군요? 그러니까 나한테 전화하라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이렇게 누워서 네 토닥임과 자장가를 들으며 생각했어"


그 루틴이 이미 뿌리 박혀서 그런 게 아닐까. 근데 아닌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돌아봤다 일상을. 실습 때문이지만 어쩌다 같이 하는 아침 식사, 일상을 마치고 돌아와서 어쩌다 같이 먹는 저녁, 이제는 업무를 거실에서 보는 것이 익숙한 일상, 주말에 가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어떤 일상을 지내더라도 침대에서 마주하게 되고, 매일 같이 들려주는 자장가와 규칙적인 리듬으로 토닥이는 손. 그리고 그에 보답하듯 감사와 애정을 담아 둥글고 예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는 것. 그러니까


"너는 내 일상이야. 그러니까"

"떠나지 않을게요"


이렇게 항상 같이 있어 줄 수 있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누뉴가 선수 쳤다. 이번에는 선수를 뺏긴 프룩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자장가처럼 부드럽지만 그 말이 참으로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안심이 되는 프룩은 어느 때보다도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런 프룩을 따라 누뉴도 웃었고, 이제는 정말로 자야하지 않겠냐며 다시 자장가를 부를 태세였다. 프룩은 그런 누뉴의 머리 밑으로 자신의 팔을 넣어 팔배게를 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누뉴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울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우니 더 잘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후 누뉴는 프룩이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말 때문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도 좋은 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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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공부가 정말이지 싫지만..

이제는 미룰 수 없다..! 다음에는 진짜로 시험 끝나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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