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끝났다. 도전기를 진행했던 반년간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훑어봤다. 새삼 블로그를 시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타입에 짧게나마 끄적이지 않았더라면 한 해는 분명 모래알처럼 흩어졌겠지.

결론은, 블로그에 당당하게 도전기까지 쓴 주제에 많이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6월부터 12월 말까지 그림을 그린 날을 다 합쳐봐야 40일이 안 될 거다. 그리고 이건 하루에 5분 이하로 그린 날까지 모두 포함했을 때 얘기다. 부끄럽다. 매일 그림을 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 합쳐서 40일도 안 된다는 건 분명 반성해야 하는 일이다. 예전 포스팅에도 썼지만 아무리 바빠도 10분 크로키는 할 수 있고, 여기에 반론의 여지는 없다.

그럼 지금부터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도록 하자. 


비교할 그림은 두 점이다. 도전기를 막 쓰기 시작한 6월 18일에 그린 그림과 가장 최근에 그린 12월 16일자 그림. 둘 다 모작이고 종이에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6월에 그린 그림은 여유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해 그린 반면, 12월에 그린 그림은 시간에 쫓기다 결국 미완성으로 끝내고 말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도전기 시작이던 6월 16일 바로 이틀 뒤에 그린 그림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점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6개월 전에는 최선을 다해 그렸고, 만족했던 그림이다.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 시간이 없어서 완성은 못함.

12월 16일을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인 그림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6월과 12월 비교

오른쪽 그림이 완성작이 아니라서 그런지 뭐라 말하기가 힘들군. 저걸 내가 그린 게 아니었다면 분명 다른 걸로 가져오라고 반려했을 거다. 하지만 두 그림을 그릴 때의 기억은 아직 내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니만큼, 남길 코멘트는 분명히 있다. 6월 그림은 형태를 잡는 것부터 애먹어서 뼈대를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는데, 12월 그림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프 스케치가 한 번만에 나온 건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1. 형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러프 스케치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2. 원작을 보고 더는 주춤하거나 지레 겁먹지 않는다.
3. 손을 그리는 게 조금 더 편해졌다.

그래서 이 발전상이 6월의 처음 목표와 일치하냐면 그렇지 않다.

1. 그림자와 광원이 고려된, 채색된 그림을 10점 이상 그렸다. (X)
2. 참고자료 없이, 한눈에 보기에 자연스러운 인체를 그릴 수 있다. (X)
3. 참고자료 없이, 밑그림에 어색하지 않은 명암을 넣을 수 있다. (X)
4. 참고자료 없이, 인간의 다양한 표정(e.g., 분노, 당황, 좌절, 기쁨, 슬픔 등)을 묘사할 수 있다. (X)
5. 참고자료가 있으면, 미형이 아닌 인간의 다양한 얼굴과 신체를 그릴 수 있다. (?)
6. 참고자료가 있으면, 밑그림에 명암을 적절하게 넣을 수 있다. (X)
7. 참고자료가 있으면,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다양한 포즈를 취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

애초에 목표가 잘못되었다. ‘자연스러운’ ‘어색하지 않은’ ‘적절하게’와 같은 말은 아주 모호한 표현이다. 아이의 눈으로 보면 게다가 인간을 스틱으로 그리지 않은 모든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일 것이고,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대부분의 아마추어 그림은 수준 미달일 것이다. 대체 누구의 눈에 자연스럽다는 건가? 실제 인체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어색한 건가? 6개월 전의 내가 적어두지 않았으므로 이제 알 길은 없다.

6개월간 사색을 거치며 하나 깨달은 것은, 그림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광고 등 상업적인 영역에 쓰이는 그림은 객관적인 가이드라인 내지 기준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쪽에 뜻이 전혀 없고, 그림을 보여주고 평가받을 대상도 딱히 없다. 하지만 잘 그리고 싶은 건 맞다. 그 이유를 말해보라면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결핍된 존재로 태어났다. 그래서 오늘 손 하나를 그렸으면 내일은 어떻게든 더 나은 손을 그리기를 원한다. 그 기준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건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얘기고, 그림이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무의식의 의식화. 주관의 객관화. 내 머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세계관을 어떤 형태로든 현실에 내어놓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해저 열수구.

쉽게 말하면 그냥 보고 싶은 걸 그리고 싶다는 얘기다. 예컨대 나는 바다, 특히 심해를 아주 좋아하고 해저 열수구에 열광하는데,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내가 저 사진들을 볼 때 느끼는 경외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림을 통해 나타내면 조금은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쓰고 나니 별거 없군. 


pixabay에서 무료 이미지 따다가 1분만에 만든 새해 기념 새로운 썸네일.

이런 점을 감안하면 2021년 그림공부도전기 목표는 다시 적어야 마땅하다.

1. 무의식을 구체화한 그림을 10점 이상 그린다.
2. 전에 그린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는 그림을 10점 이상 그린다.

이만 마치며 2021년에 더 나은 그림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나는 딱히 혼자 삽질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동네 미술학원에라도 다니고 싶지만 당분간은 독학으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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