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처럼 따스한 체온을 지닌 필리엔의 손이 릴리의 귓가와 턱 주위를 한 번에 감쌌다. 조금은 거칠고 단단하며 뼈마디가 벌어진 큰 손이 부드럽게 움직여 릴리의 목 근처까지 닿았다.

그때 갑자기 감은 눈 너머로 릴리의 머릿속에 아무 관계도 없는 기억들이 갑자기 시작도 모르게 떠올랐다. 바닥을 모르는 어둠 속에 도사린 것들이 있었다. 릴리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필리엔의 옷을 움켜쥐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예전에 느꼈던 감정들이 어디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전한 형태를 갖추어 머릿속을 점령해 나갔다. 소음이 릴리를 뒤덮었다. 릴리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곧 필리엔도 이상을 알아차리고 눈을 떴다. 키스가 멈추었다.

"……릴리?"

릴리는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필리엔을 좋아했고 그와 닿는 것도 키스하는 것도 좋았다. 필리엔의 손은 사실상 목 옆쪽을 짚는 정도였지 릴리의 목을 완전히 감싸거나 짓누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릴리는 그만 불현듯 찾아온 악몽에 굴복해 굳어버리고 말았다.

푸른 파도가 흰 거품으로 노래하고 맑은 햇살이 세상을 눈부시게 비추며 바다와 맞닿은 도시를 유리구슬처럼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짠 해풍에 바다내음이 섞이고 짙은 이파리가 싱그러운 나무에 하얗게 맺힌 꽃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으며 릴리의 곁에 사랑하는 필리엔이 있었다. 무너지는 협곡에서 목이 졸리던 상황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다 지나간 일이다. 과거일 뿐이고 이미 끝난 일에 불과했다. 약을 쓰면 잊어버릴 수 있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릴리는 견디지 못하고 필리엔의 손을 확 밀어내고 말았다. 

"왜 그래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제가 한 게 기분 나빴다든가 그런 거라면……."

"아니, 아니에요. 필리엔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그냥 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에요. 난 괜찮아요."

필리엔이 있는 방향을 외면한 채 릴리는 재빨리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그러는 중에도 몸이 가늘게 떨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필리엔이 놀랐을 텐데 뭐라고 해주어야 좋을지 떠올리기 힘들었다. 필리엔은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하고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포옹해도 괜찮겠어요? 릴리만 괜찮다면 위로를 해주고 싶어요."

릴리는 우울한 감정으로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이것저것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릴리가 허락하자 필리엔은 건드리면 순식간에 부서져 내리는 가느다란 얼음 조각을 끌어안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처럼 정말로 조심조심 릴리에게 팔을 둘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갑갑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해지는 포옹 속에서 릴리는 자신의 옆에 있는 게 필리엔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필리엔에게 기댄 채 릴리가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릴리가 불편한 것만 아니라면 조금 더 이렇게 있어요. 혹시 불편해요?"

"아뇨. 전혀요."

사실 꽤 편했다. 필리엔이 비단 위를 미끄러지는 구슬의 움직임처럼 릴리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가 대체 이런 걸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리르먼일까? 두 사람은 꽤 닮았으니까. 하지만 왜인지 리르먼이 필리엔의 등을 이토록 부드럽고 다정하게 만져준 적은 없을 것 같았다. 중서부인 특유의 거리감 있는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필리엔을 이카트 가문으로 보낸 그의 어머니가 다정한 사람이어서 그에게 많은 것을 물려받은 필리엔도 이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마 누구도 모르겠지. 필리엔조차 기억하지 못하니까.

"괜찮지 않아도 돼요.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이 얼굴을 파묻은 가슴팍에서 흉통을 진동하는 울림으로 느껴졌다. 필리엔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얇게 입은 옷 위로 필리엔의 향기가 느껴졌다. 릴리는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곳에 돌아온 것처럼 포근함을 느꼈다.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로렌의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릴리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왔고 필리엔은 릴리에게 돌아와 주었다. 돌아왔다. 릴리는 다시금 생각했다. 지금 필리엔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두 사람은 온화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느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 지나온 곳과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새로운 장소를 걸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다.

필리엔이 자연석으로 보이는 뾰족한 바위 위로 가볍게 뛰어 오른 뒤 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릴리가 팔을 뻗어 필리엔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필리엔이 릴리의 손을 붙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밑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위로 올라가니 생각보다 더 큰 바위들이 이어져 있는 구조였다. 파도에 깎이고 남은 바위는 울퉁불퉁 모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단단하게 붙잡은 손 때문에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필리엔의 손을 잡고 바위 위를 건너가니 배를 댈 곳을 마련해둔 길고 잘 다듬어둔 선착장이 나왔다. 서부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곳도 나름 붐볐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선착장을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낯선 해풍이 폐 속을 채우자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우울한 기분이 마저 씻겨져 나가는 것 같아서 썩 나쁘지 않았다. 

올 때와는 반대편으로 향하는지라 릴리는 대략의 방향만 짐작하는 게 전부였지만 필리엔은 익숙한지 거침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면 자기 손금처럼 훤할 터였다. 

거리는 도시의 과밀한 인구를 드러내듯 적당히 지저분 했지만 꽤 넓어서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이야 잘 닦여 있었지만 그뿐, 어느 모로 봐도 좋은 집에서 사랑 받는 사람이 자주 다니고 싶어 할법한 장소는 아니긴 했다. 그럼에도 날씨는 좋아서 신맛 나는 과일처럼 맑은 햇빛이 개방감을 주는 길이었다. 필리엔은 이곳을 지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관광이라도 나온 것처럼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며 릴리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자주 왔어요?"

조금 맹맹하긴 했지만 발음도 발성도 평소와 비슷하게 돌아와 있었다. 필리엔은 릴리의 손을 단단히 쥔 채 계속 걸어가며 대답했다.

"갈 곳이 없을 때면 그랬어요."

"필요하다면 이번엔 필리엔이 제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줄게요."

"친절은 고맙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걸요."

릴리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렇게 큰 활기 없이 구석구석 바닷바람만이 불어 드는 길을 지날 때였다. 맞은 편에서 오던 어떤 남자와 릴리가 부딪혔다.

"악!"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릴리가 순간 휘청이며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남자는 덩치가 큰 편이어서 릴리가 우연히 더 떠밀렸을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서로가 미처 반대 방향에서 오는 걸 보지 못하고 실수로 부딪힌 사고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래야 했다.

하지만 릴리와 부딪힌 남자는 살짝 앞서 걷던 필리엔이 깜짝 놀라 릴리를 부축하는 것을 싱거운 얼굴로 보더니 웃었다. 

그렇다. 웃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의 일행인 다른 남자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가는 목소리를 내며 "끼약!"하는 소리를 냈다. 세 번째 남자는 재밌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것처럼 흥미로운 표정으로 릴리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질문이 떠오르자 머릿속에서 바로 답이 찾아왔다.

만약 필리엔이 갑주를 걸치고 검을 차고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옷이나 망토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필리엔과 릴리가 반대로 서 있었고 릴리 옆쪽으로 지나갈 공간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며, 만약 릴리가 중서부의 지체 높은 귀부인처럼 옷을 차려입었거나 머리에 귀금속 고리나 밴드를 장식해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비겁한 자들은 감히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부딪히긴 커녕 알아서 멀리 피해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필리엔은 무기도 갑옷도 없이 평상복에 가까운 천옷을 입고 있었고 그의 신분을 보일 법한 것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신원 증명이 아주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겉보기에 무언가 보이는 건 없었다. 그건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적당히 곱게 자라 세상 무서운지도 모르고 쭐레쭐레 돌아다니는 철부지들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릴리는 중서부의 귀족 같은 외견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마주친 남자들이 저열하고 비겁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 물정 몰라 마냥 행복해 보이는 어린 남녀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조롱하고 모욕해도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두려워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평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왕과 비견할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좋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을 정도 여유가 있는 자들이었으며 소수의 계급을 제외하자면, 그러니까 적어도 이런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 정도는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종들이라는 뜻이었다. 

중서부 문화에 통달하지는 않았지만 로렌의 딸은 짧은 순간 모든 상황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해설을 듣거나 정해진 답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 떠올리는 것처럼 저 무례한 남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도 훤히 알 수 있었다. 판단과 반응은 그 뒤를 따랐다. 릴리는 무척 불쾌해졌다.

릴리를 불쾌하게 만든 생각의 흐름은 사실에 매우 근접해 있는 것이었다. 남자들의 생각은 아주 수준 낮고 그들의 기준에서 상식적이었다. 어린 여자애는 덩치 큰 남성이 일부러 피하지 않고 와서 부딪혀도 무섭기도 하고 자신이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망설이다 더 해코지 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 도망칠 게 뻔했다.

중서부에 사는 남자에게는 당연한 귀납적 추론이었다. 남자에겐 신분과 부와 무력이 있었으므로 그가 사는 세상은 늘 그렇게 남자의 무례에 관용적이었다.

만약 상대 남성 쪽에서 괜히 여자 앞에서 남자처럼 굴어보겠다며 뻗대어도 자신들이 수가 많았으므로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여자 옆에서 헤실대는 꼴이 대가 약해 보이기도 했고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인상이기도 했다. 괜히 대들기라도 하면 본때를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부딪혀 비틀대던 여자애가 일행인 남성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더니 이렇게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사죄하지 못해?"

한 명은 피식 웃었고 릴리와 부딪힌 남자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만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아~ 그쪽이 넘어진 건 나 때문이 아닌데. 하, 어이가 없으려니까.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녔어야지. 어…… 그래, 미안합니다."

마지막에 선심 쓰듯 사과의 말을 붙인 남자는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옆의 남자는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건지 혼자서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새된 목소리로 계속 비명 비슷한 걸 깩깩거렸고 세 번째 남자는 성질을 부리는 여자애를 보며 이죽댔다. 그의 시선이 계속 여자를 훑었다. 

금발 여자애- 릴리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후통첩을 했다.

"누구인지 모르고 저지른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똑바로 용서를 빈다면 선처를 고려해주마."

릴리는 화가 나 있었다. 단순히 상황만이 아니라 저들 세 남자가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를 알게 되어서 훨씬 불쾌한 것이었다. 릴리의 상식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 양식이었다. 릴리는 무례한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그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알았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지 귀찮게 구네."

어느새 바닷가에서 일어났던 감정은 찌꺼기도 없이 전부 증발하고 없었다. 릴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 

중서부인들은 북부인을 야만인이라 부를 자격이 없었다. 잘 닦인 대로, 좋은 날씨, 맑고 온화한 공기, 낮은 문맹률, 모두에게 개방되지는 않아도 한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여럿이 지식을 나눌 수 있도록 만든 도서관, 야만을 경계하는 우아함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레이스 손수건과 거기에 뿌리는 향수 같은 것을 지닌 고상한 문화 같은 것들은 이 앞에서 순식간에 퇴색되었다.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있다지만 굳이 지금 자신에게 닥친 불쾌한 상황 앞에서 굳이 먼저 선해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값비싼 재료를 쓰고 실력 있는 이가 정성을 들여 조리한 음식이어도 쓰레기와 같은 접시에 담겨 나온다면 그 요리에 가치가 있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지금 릴리에게 중서부의 가치는 그 정도였다.

"똑바로 용서를 구해."

필리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금 호리호리한 감이 있었지만 필리엔은 여기 있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다. 옷에 가려있긴 했어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잡힌지라 사람에게 사나운 기개는 없어도 썩 만만해 보이는 상대는 아니었다. 남자는 새삼 보니 필리엔이 그리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은 탓에 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용서를 구했다.

"내가 미처 레이디를 발견하지 못해서 실례를 저질렀네."

그런데 남자가 필리엔에게 사과했다. 마지막에 말을 한 게 필리엔이긴 했지만 원래 살짝 뒤에 서 있었던 터라 한 걸음 나왔어도 릴리와 거의 나란히 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릴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정확하게 필리엔을 향해서만 말했다. 필리엔은 지극히 차분해졌다. 바로 릴리가 직접 나서서 말했다.

"왜 나에게 사과하지 않지?"

남자는 릴리를 힐끗 보았지만 바로 다시 필리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냥 실수였으니 서로 없던 일로 넘어가는 게 서로 좋지 않겠나? 서로 괜히 가문 이름 들먹이며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필리엔은 계속 말이 없었다.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릴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부딪힌 사람은 날세. 그러니 사과 받을 사람도 내 쪽이야."

그때 릴리는 대단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남자가 릴리를 무척 성가신 동물을 보듯이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남자가 언짢음을 드러내며 다시 필리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릴리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반복된 행동은 마치 사람을 보고 짖는 개를 보고 그 목줄을 쥔 개 주인에게 왜 제대로 짐승을 통제하지 않느냐고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물게도 릴리가 눈치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릴리는 지금 자신이 낯선 타지에 있으며 이 작자가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는 걸 명백하게 느꼈다. 릴리는 자신이 받은 모욕을 잘 용서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 이후에 이어진 건 당연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릴리는 손등으로 앞에 있는 자의 오만한 낯짝을 후려쳤다. 

'찰싹'보다는 '퍽'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남자는 휘청거렸으며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곧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일을 받아들였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미쳤-"

퍽! 정정.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자의 얼굴을 릴리가 한 번 더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두 번이나 맞은 남자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맞은 부위를 가렸다. 어린 여자에게 맞았고 그걸 아파했다는 수치심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것도 다른 친구들 앞에서 말이다! 

손으로 뺨을 감싸고 얼굴을 확 붉히는 남자의 섬세한 사고 흐름 따위와 관계 없이 릴리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서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나는 동부 로렌의 땅을 다스리는 엘리 그레이스의 유일하며 정당한 후계자인 릴리 그레이스다. 날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방금 맞은 건 건방진 네 태도를 벌하는 것이었으니 내가 받은 모욕의 값은 따로 받겠다. 그러니 너의 가문과 이름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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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눈에 낀 콩깍지가 좀 두꺼운 것 같죠. 하지만 본인이 좋다면야. 하지만 훈훈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중서부남... 하지만 사이다 한 모금 드린 다음에 끊는 저 제법 대견해요. 쟈근(안 작음) 릴리를 건드리면 큰일 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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