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살아남은 건 비겁한 거야.’ 앤은 그런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앤은 ‘어디에서’ 살아남았는지 항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졸리로저 호, 그 해적선에서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도 생존자이므로 앤‘만’ 살아남은 것은 아니지만 앤은 늘 그렇게 말하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더욱 비겁한 방법으로 살아남지 않았는가. 물론 이 말이 앤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앤과 일했다. 정확히는 앤의 가게 일을 도우며 살았다. 앤은 새로운 가게를 냈다. 해적이 되기 전에 하던 일이므로 아예 다른 일을 찾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야 어차피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신세이므로 일손을 도와주기로 했다. 항해 일지를 완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앤의 가게 일을 도와준다는-말하자면 직원과 같은 위치라고 생각했지만 앤은 이곳이 온전히 자신의 가게라는 것을 부정하곤 했다. 나도 어느 정도의 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먼저 가게 이름은 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또 가게 경영이나 공사 같은-난 아직 잘 모르겠는,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는 것은 앤이었다. 가까이서 주문이나 서빙 일을 돕는 나의 지분은 아마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보다 적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았는지 앤은 나에게 그런 중요한 일들을 조금씩 알려주곤 했다. 물론 앤의 가게 운영 강의는 정말이지 지루했다. 마치 학교의 늙은 선생님이 따분한 목소리로 수학 공식을 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앤이 늙고 따분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저 수업의 내용이 탱탱볼처럼 머리에서 튕겨져나갔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리 둘은 바다로 나가기 전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전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 둘이 함께라는 것이나 앤이 나에게 가게 운영을 알려준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특히 술집은 앤이 전에 운영하던 곳이 아니었다. 술집이 선착장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앤과 잭이 처음 만난 곳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창문을 열면 짭짤한 향이 날 정도로 바다와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바다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뱃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을 때면, 개중에 해적이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님을 받았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이 다른 해적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무시무시한 해적이라고 떵떵거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앤은 술 취해서 하는 헛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는 날이면 노트와 펜을 꺼내 그 이야기를 받아적었다. 혹시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할지 그 누가 아느냐 하며 말이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며 우리는 꽤 괜찮았다. 속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몇 주를 보냈다. 그래, 겨우 몇 주다. 그 몇 주가 지난 후 앤은 나에게 가게를 맡겼다. 정식적으로 인수인계를 해준 것이 아니라 정황상 나에게 가게를 맡겼다. 눈을 떠보니 앤이 가게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낌새도 없이 훌쩍 떠난 주제에 인수인계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었다. 덜렁 남겨진 쪽지 한 장과 가게에 대해 짧게 쓰인 공책만이 앤의 행방을 짐작하게 했다. 어쩌면 함께한 시간이 나에게 가게 일을 알려주려는 말미라고 생각될 정도로 계획적 가출이었다. 가출이라는 말이 적절한가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보아야겠지만, 하여튼 잘 있으라는 말을 적은 쪽지 어디에서도 충동은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경영이니 뭐니 계속 알려주던 것도 이제 딱 들어맞았다. 앤은 애초부터, 이 가게를 차릴 때부터 이런 결말을 생각하던 사람 같았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선택지는 기다리기였다. 이 일은 내가 잘하는 것이었다. 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으므로 기다림에 있어서 나는 전문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에 이골이 났다. 기다림은 일방적이다. 기다림은 상대의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가, 내 욕심으로 선택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왕 앤의 의사를 무시할 것이라면 가만 앉아서 하염없이 오지 않을 이를 그리는 것보다 스스로 찾아 나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는 바다를 나가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흔히 술집이 소문의 근원지로 여겨지는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술집이란 자고로 소문의 근원지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은 술이 들어가면 속에 있던 말들이 술술 나오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제각기 말을 옮기면, 그것이 불어나서 온 동네가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별을 쏘는 총잡이가 저쪽 마을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우리 술집에서였다. 나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가게 문을 닫았다. 별을 쏠 수 있는 총잡이는 앤밖에 없었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총잡이가 가까운 마을에 둘이나 있기란 꽤 어려운 확률이라는 것은 잭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닫은 다음 할 일은 가방을 싸는 것이다. 사실 새로 챙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원래 짐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몇 가지 없는 내 것이 잘 있는지만 살펴보면 되었다. 가방 속에 항상 들고 다니던 노트와 펜, 로즈 사파이어 보석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선반에 있던 럼주 두 병을 꺼내 넣었다. 하나는 제 몫이고, 다른 하나는 앤을 만나면 줄 것이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가방을 메자 무게가 무거워 한쪽 어깨가 내려갔다. 가방에 든 것은 얼마 없는데 막상 매면 너무 무거웠다. 그럼에도 무엇하나 포기할 수는 없어서 그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앤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사실 찾아 떠난다는 그런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저 소문의 근원지를 묻고 물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앤을 찾는 일은 쉬웠다. 그냥 저쪽 마을 한 바퀴를 돌며 별을 쏘는 총잡이의 행방을 물으면 되었다. 술집에서 보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술집을 찾아갔다. 술집은 정말이지 시끌벅적했다. 나는 우리 술집이 바다 근처라서 시끄러운 줄 알았는데, 술집이란 원래 시끄러운 곳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상기된 얼굴로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술집 주인 보조로서 보장하건대 그냥 손님보다는 주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정보의 질이 높았다. 물론 술 한 잔을 사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술 한 잔도 사기 아깝다면 아무 직원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되었다. 나는 요 며칠 장사를 접었기에 사정이 곤궁했다. 따라서 아무 직원이나 붙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요리사는 소문에 약했고, 조리실로 들어갈 방법도 없으니 제쳤다. 서빙하는 직원 역시 테이블 정리로 바쁠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카운터를 보고 주문을 받는, 비교적 한가한 직원밖에 없었다. 이 직업이 한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앤의 술집에서 그러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직원은 본능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응대했다. 직원은 루이스가 돈이 되는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월급 받는 직원으로서 그런 손님을 내쫓을 의무는 없으므로 친절한 서비스 정신을 보였다.


“혹시 별을 쏘는 총잡이의 행방을 아시나요?”


 직원은 이 근처 조각가를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그 말만 듣고 감사 인사를 한 후 나왔지만, 직원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조각가는 조금은 험상궂고 딱딱한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조각가의 상점에 들어오자 친절한 목소리로 맞이해주었다. 앤의 행방을 물었을 때 역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석재를 가공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손님과 인상착의가 유사하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고는 조각하기로 한 석재는 마을 가운데 2층 여인숙으로 배달해달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전해주었다. 비록 석재 조각 의뢰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여인숙에 묵는 것은 맞다고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석재 조각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앤을 만나면 물을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절대로 저 험상궂지만 친절한 것 같기도 한 조각가 아저씨가 너무 무서워서 얼른 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락부락한 몸에 칼을 들고 있는 분위기가 위압적이긴 하였지만 절대 쫄진 않았다. 해적이 겨우 이런 것에 무서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여인숙은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그러면 여인숙에서 앤을 기억할 확률도 높았다. 여인숙 주인을 찾아 말을 걸었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던 여인숙 주인이 앤의 생김새를 묘사하자 인상을 썼다. 그 치랑 아는 사이냐고 버럭 화를 내던 주인이 이내 아까의 사건을 일러주었다. 아까 술에 골은 채로 숙박객과 시비가 붙어 좀 전에 쫓아내던 참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앤이 그럴 성격은 아닌데, 혹시 오해를 받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앤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쫓겨나서 어디로 갔는지를 묻자 여관 주인은 퉁명스럽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 동산으로 갔다고 일러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는 앤의 뒤치다꺼리를 위한 뇌물이 있을지 가방을 뒤졌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기에 얼른 동산 방향으로 도망쳤다.

 하루종일 앤을 찾아 떠난 여행의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되었다. 앤이 있다는 동산의 꼭대기에 오르자 앤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들판에 앉아있었다. 벅차오르는 반가움에 앤의 이름을 소리쳤다.


 “앤!”

 “루이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앤의 말은 의문의 형태였지만 말투는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여기 왜 왔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은 조금 상처가 되었지만, 굳은살이 배긴 마음에 이 정도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또한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앤이 더 잘 알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질문 아닌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다가갔는데도 훅 끼치는 알코올 향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앤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는거야?”


 이 역시 물음이 아니었다. 잭도 아니고 이렇게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시는 것은 앤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야 앤을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 도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굴을 벌겋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며 앉은 것도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 아니라 주저앉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나서야 앤 주변에 쌓인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나무나 돌 같은 걸 구해서 만들려고 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땅 위에서 평생을 사는 건 해적에게 고역이니까… 그렇지?”


 풀린 혀로 내 질문 아닌 질문에 무어라 중얼거리던 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는 내 가방에 관심을 보였다. 아마도 평소보다 훨씬 통통한 가방 때문인 듯했다. 앤은 취한 사람처럼-실제로 취한 사람이었긴 하지만- 내 가방을 열어 보았다. 가방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것은 당연 두 병의 럼주였다. 앤은 나와 럼주를 번갈아 보며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였다. 내가 둘이 같이 나누어 먹을 생각이었다고 대변하였지만 내 말은 귓등으로 흘린 채, 꼬맹이가 무슨 술이냐며 내 몫의 럼주까지 모두 빼앗고는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랑 있으면 과거가, 제대로 씻지도 못해 냄새나는 해적들이나 시끄러운 앵무새들 목소리 같은 것들이 아른거려. 술 냄새와 바다의 소금 냄새, 화약 냄새가 합쳐지면 무슨 냄새가 나는지가 생생해진다고. 결투가 끝날 때가 다 돼서야 슬금슬금 나오는 잭도 그렇고... 메리도.”


 뜬금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알았다. 앤은 가게를, 나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듯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나를, 바다를 보는 것만 해도 과거가 떠오르는 것이다. 나와 바다는 앤이 해적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매개라는 점에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싫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앤을 볼 때마다 그런 것이 떠올랐으니까 말이다.


 “루이스, 연고가 없는 사형수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아?”


 앤은 내가 가져온 럼주를 한 병 열어서 병째로 들이켰다. 이 역시 질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답을 원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 전의 이야기와 달리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술주정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선원들의 시체라도 찾아오자는 뜻일 수도 없었다. 혼자 이것저것 짐작해 보았자 정답에 가까워지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만두고 잠자코 듣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니 사형수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한 번도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의 시체처럼 묻거나 화장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적당한 맞장구의 말로 이 정도 답이면 족했다.


 “모르겠어. 불태우거나, 어디 묻거나... 그렇지 않을까?”

 “맞아. 그리고…”


 앤의 시선이 바다 방향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어렴풋이 보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멀었다. 이곳은 바다의 내음보다는 알코올 냄새가 더욱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우리 해적은 언제 어디서든 바다의 냄새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악기 연주자가 눈을 감고도 악기를 연주할 수 있듯이 우리는 눈을 감고도 바다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퍽 멋있는 특기였는데, 꼭 향이 아니더라도 푸른 바다의 빛깔이나 파도가 배에 부서지는 소리와 찬 공기까지 전부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퇴역 해적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인 능력이지만 말이다. 특히 자진하여 퇴역한 것이 아니라면 더욱, 괴로운 능력에 불과했다.


 “바다에 뿌려지기도 한대. 바다로 돌아가는 거야. 멋있지?”


 실제로 교수형에 처한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모두 밧줄에 매달리는 장면을 보고 통쾌하다 여길 뿐 밧줄에서 내려오는 순간까지 궁금해하는 것은 아니니까. 강에 뿌려지기도 한다지만 여기는 강보다 바다가 더 가까운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뒷말을 덧붙였다.


 “나는 바다에서 죽고 싶었어.”


 물론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지, 앤은 허탈하게 웃었다. 죽지 못하여하는 후회가 가당키나 한가 싶다가도 앤의 생각을 일부 이해했다. 비록 내가 보기엔 저승 꽃밭보다 이승 똥 밭이 나았다. 나는 드물게 잭과 생각이 통했다. 비굴하더라도 사는 것이 낫다. 어쩌면 그 생각 때문에 잭이나 나는 큰 인물이 되지는 못할 상인 듯싶었다.


 “그거 알아? 난 내가 너무 미워. 해적답게 죽지도 못해 살아가고 있지. ...사실 메리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앤도 알잖아, 마리아는 분명 앤이 살아서 기뻐했을 거야.”

 “응... 맞아, 메리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있지, 내가 매일 꾸는 악몽이 있거든. 졸리로저의 해적들이 모두 밧줄 춤을 추는 꿈. 그런데 나는 해적들을 비웃으려고 나온 구경꾼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밧줄 춤을 지켜보기만 해. 사실은 나도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혼자 빠져나와서 말이야. 나는 나도 저기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속절없이 밧줄 춤을 보는 거야. 곧이어 잭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메리가 나오면 꿈속의 나는 눈을 감아버려. 그리고 끝이야.”


 앤은 밧줄춤을 보았을까? 내가 캡틴 칼리코 잭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도 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한번도 궁금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밧줄 춤은 나로서도 선뜻 꺼내기 달가운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내는 것은 아무런 이점이 없었다. 항해일지의 마지막 장은 한 줄도 쓰지 않은 것 또한 이러한 이유였다. 상실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까? 완전한 극복이라는 단어가 상실과 함께 쓰일 수 있을까? 아끼던 사람의 상실은 제 일부를 도려낸 것처럼 괴로웠다. 그래서 아직 내 키가 이만한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메리를 꿈에서도 그리지 못해. ...메리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있겠어?”


 앤은 또 럼주 병 주둥이에 입을 갔다 댔다. 앤의 꿈에는 마리아가 나오지 않는다. 그 한 문장이 이번 가출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떠한 위로의 말도, 공감의 말도 전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앤에게는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해적 규칙, 동료를 속이거나 물건을 가로챈 자는 무인도에 버려두고 간다. 어쩌면 그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살아볼게, 라는 안이한 거짓말을 앞에 세우고 도망간 죄, 같은 거 말이야.”


 삶의 원동력을 빼앗긴 것이다. 사람은 목표 없이 살 수 없다. 설령 살아 있더라도 산 것이 아니다. 목표 없는 삶이란 빈 껍데기에, 말 그대로 숨만 붙은 것과 같다. 나는 항해 일지를 끝마쳐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래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그것은 잭이 나에게 부여한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앤은? 앤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지 앤은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이다. 목표 없는 삶의 공허함을 알코올로 채우고 말이다. 사실 알코올마저도 목표의 부재를 확실시해주어 공허함을 증폭시킨다. 앤은 그것을 알지만 다른 것을 선택할 수는 없기에 알코올을 계속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이 무인도에 버려두고 오기지, 사실상 죽으라는 거잖아. 살아 나오는 걸 기대하고 만든 형벌이 아니니까…”

 “아니야.”


 나도 놀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단호함은 취기가 도는 앤도 살짝 움찔할 정도였다.


 “무인도에 버려진 해적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알아?”

 “어떻게 살아남는데?”

 “바다거북을 타고 탈출하면 돼.”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있는 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앤은 내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앉아서 글만 써봤지, 가게를 운영해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나 혼자서 그 술집을 하면 대출금도 다 못 갚고 쫄딱 망해서 뱃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짐짓 과장하며 내 의견을 피력했다. 물론 대체로는 사실이었다. 나는 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대출금도 갚지 못하고 빚에 허덕이며 배에 갑판 닦기나 맡는 소년 노예가 될지도 몰랐다.


 “바다거북이 눈앞에 있는데, 무인도에서 혼자 죽는 건 너무 미련한 일이잖아. 안 그래?”

 “...무인도에서 나가봤자 갈 곳도 없고, 육지를 찾다가 죽는대도 탈출해야 할까?”

 “해보기 전엔 다 모르는 거야. 그리고 만약 나가는 걸 선택하면 바다거북이도 있잖아.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바다거북이와 함께인 게 파도를 헤쳐가긴 더 좋을 거야. 혹시 알아? 바다거북이가 데려갈 곳이 보물섬일지도 몰라.”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잡으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보았다. 그 모습에 앤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러고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 웃음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앤의 진실된 미소였다. 손님을 응대할 때 나오는 그러한 의무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정 웃음이 나서 웃는 그런 미소 말이다. 나는 그 웃음을 따라서 함께 웃었다.





 “그런데 이 럼주 어디서 났어?”

 “그거야 당연히 가게에 있던 거 가져왔지!”

 “뭐? 오, 루이스... 럼주값은 네 몫에서 뺄게.”

 “어, 어? 난 한 방울도 못 마셨는데?”


 나는 억울하여 항변해보았지만 앤은 그것을 깔끔히 무시하고 앞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조금 앞으로 걸어가다가 내가 곧바로 따라오지 않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뒤를 휙 돌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앤은 나에게 손을 뻗었다. 아까 내가 앤에게 손을 뻗었듯이 말이다.


 “시끄러워. 얼른 돌아가자,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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