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낮은 곳으로, 이정하



#. 03 (태형)


귀국 후 매주 방문하는 병원의 진료실은 항상 라벤더 향이 났다. 식상하긴 하지만 그런 평범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담당의는 결혼 후 복귀하고부터 습관적으로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를 만졌다. 어색한 듯, 확인이라도 하는 듯. 으레 조용하고 차분한 다른 상담과는 다르게 무척 쾌활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부담스럽고 어색한 마음에 병원을 옮겨야겠단 생각뿐이었는데, 그런 마음조차 꿰뚫어 보고는 했다. 김태형 씨, 다른 데 찾을 생각하지 말고 다음 진료 예약하고 가세요. 서울에서 나보다 예쁜 의사 찾기 힘들 걸요,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내 인생에는 없는 그 거침없음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에 결국 가기로 했네요.”


끝이 동그랗게 말린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을 듯 말 듯한 하얀 얼굴.


“태형 씨. 보다 어른으로서, 그 스토리에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그 어린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지금 제대로 일어서서 걸어 나가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정작 그 사람이랑 마주하는 게 두려운 건 태형 씨잖아요.”


그 사람이 너 때문이라고 탓할까 봐? 지난 그 시간 중에, 뭐가 너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은데? 상담을 하러 간 건지 혼나고 온 건지 모를 그 큰 누나 같은 말투.


행정 조교와 실습 조교가 한 사무실을 써서 그런지 사진과 사무실은 제법 컸다. 김 교수의 방과 연결되는 문 옆자리를 내가 쓰기로 했다. 입구와 정면이지만 창문과 등을 지는 자리를 나눠준 파티션 끝에 걸린 ‘조교 김태형’ 이라는 이름표가 어색하다. 나도 테이블에 디퓨저를 놓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에 이어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8,323 공백 제외
7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