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구름과 세계는 연습실 중앙에 앉아 캠코더 영상을 확인중인 은호를 보고, 아니 그 옆에 놓여있는 매를 보고 굳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세계가 맞았던 그 마대자루였다. 은호가 그 매를 들고 일어났다.

 

"어, 왔어? 운동 잘 했어?"

"네, 저… 네."

 

세계가 금세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전세계 요즘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 같더니 또 주간 테스트에서 기대치에 못 미쳤나. 구름은 바짝 긴장한 제 옆의 세계를 흘끗 보며 빠져나갈 적당한 타이밍을 노렸다. 혼나는 데 옆에 있으면 서로 불편하니까.

 

"엎드려."

 

이미 예상한 대사면서 세계는 파드득 놀라 손바닥을 대고 엎드렸다. 구름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연습실 문을 열었다.

 

"넌 어디가. 너도 엎드려."

"네?"

"엎드려서 생각해봐. 너네가 뭘 잘못했는지."

 

둘이 같이 잘못한 거라면 하나뿐이다. 구름은 엎드리기도 전에 상황 파악을 마쳤다. 엎드리자 세계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것도. 얘도 알았구나. 뭘 들켰는지.

세계가 구름의 춤을 봐준 그 날 이후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새벽까지 남아 같이 연습했다. 세계가 준 피드백대로 연습하자 실력은 제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늘었고 세계 역시 연습량을 늘렸더니 고질적인 약점들이 조금씩 지워졌다. 연습을 마친 후에는 연습실 벽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세계는 구름의 평범했던 생활을 흥미로워했고 구름은 묻지도 않았는데 조잘조잘 늘어놓는 세계의 얘기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문제의 그 날도 그런 새벽 중 하루였다. 포카리를 사러 나간 세계가 음료 대신 맥주를 양 손에 들고 돌아왔다. 로비에서 마주친 직원이 세계를 부르더니 고생한다며 봉투에서 맥주를 두 캔 꺼내 줬다고 했다. 야근하면서 마실 맥주를 양보하다니 대단한데. 구름의 말에 세계는 그래도 그 봉투 무거워 보이더라구요, 답했다. 세계에게서 받은 맥주 캔을 딴 구름이 한 모금 넘겼다. 짜릿한 탄산이 혀를 타고 넘어왔다. 한참 땀을 흘린 후라 더 시원했다. 이게 얼마만의 술이야. 입사했을 때 담배는 물론이고 술에 대한 어떤 제지도 못 들었으니 몰래 마신다는 느낌도 없었다. 세계가 제 몫의 맥주를 비울 때에도 그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건 알았지만 안에서 마시는 건데 뭐 어때, 싶었다.

 

"왜 벌서는지 아는 거 같은데. 구름이가 대답해봐."

"…새벽에 맥주 마셨습니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는 한 음주는 금지야. 물론 미성년자는 그런 경우에도 금주고."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이젠 은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게 된 구름이 바닥을 누르는 손끝에 힘을 줬다. 세계도 듣는 데서 한 얘기니까 진짜일까. 아니면 이번에도 설마.

 

"아무리 구름이 네가 성인이라도 동생이 술을 마시는데 막았어야지, 그걸 같이 마시고 있어?"

"…죄송합니다."

"전세계 너는…."

 

은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계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할 말이 없다. 알 거 다 아는 놈이 왜 이래?"

"죄송합니다."

"그냥 못 넘어가."

"네."

 

은호가 구름 옆으로 왔다. 먼저 맞나보다. 구름이 마른 침을 삼켰다. 엎드려서 매 맞는 행위가 아주 생소하진 않지만 숙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연습실에서, 그것도 은호에게 매를 맞는다는 게 낯 설긴 했다.

 

"스무 대야."

"네."

 

매가 떨어지자 어색하고 어딘가 민망했던 감정들이 한 번에 사라졌다. 체벌은 생소하기보단 오히려 익숙했으나 매의 강도는 익숙함과 거리가 멀었다. 순하게 생긴데다 평소에도 다정하게 대해주니 매도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는지 예상보다 강한 세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뭔가 속은 느낌까지 든다. 그래도 구름은 하반신을 적당한 높이로 유지했다. 잘못 맞으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멍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연습에 지장이 가면 안 된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데도 열대를 넘어가자 팔이 떨렸다. 은호는 일정한 간격과 세기로 매를 댔다.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았으나 너무 아프긴 했다. 힘 줘 버티느라 열이 올라 뜨끈해지는 귀를 가리려고 양 팔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매가 끝났다. 옆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끝까지 자세를 유지하며 혼나는데 한몫 했다. 형, 형 하며 저를 따르는 세계가 없었으면 가오 버리고 한번 쯤 무너졌을법한 강도였다. 은호는 가타부타 말없이 세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그의 엉덩이를 매 끝으로 꾹 찔러봤다.

 

"세계 여기 다 나았어? 저번 주에 정우 형한테 맞은 거."

"네."

"안 나았으면 허벅지 맞고."

"거의 다 나았습니다. 엉덩이 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과하게 군기 잡힌 세계가 떨리는 목소리로나마 끝까지 답을 했다. 은호가 매타작을 시작했다. 세계가 원하는 대로 엉덩이를 향해 매가 떨어졌다. 약을 꼬박꼬박 발라 확실히 거의 다 낫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잔멍이 남아있는데 덧대어 맞으려니 괜히 더 아픈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은호 매가 아픈 거일 수도 있고. 세계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절로 굽히는 무릎을 애써 펴냈다. 그러다 결국 넘어졌다.

 

"엉덩이 맞기 힘들면 허벅지 맞을래?"

"엉덩이 잘 맞겠습니다. 허벅지는…."

 

세계가 애처로운 눈으로 은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던지. 가벼운 턱짓으로 세계를 다시 엎드리게 한 은호가 매를 높이 들었다. 세계는 무릎이 땅에 닿을지언정 넘어지거나 자세를 아예 무너뜨리진 않고 남은 대수를 채웠다. 마대자루를 내려놓은 은호가 둘을 일으켰다. 피가 쏠려 얼굴이 붉어진 둘이 가쁜 숨을 쉬었다.

 

"소문이 언제, 어떻게 날 줄 알고 연습실에서 술을 마셔? 겁도 없이."

"죄송합니다."

"술 안 돼. 나 한번만 더 말하는 거야. 다음에 똑같은 일 생기면 회사에 말할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지는 너네가 더 잘 알겠지."

"네…."

"세계는 녹음실 가봐. 정우 형이 기다린다."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 정도는 친 아이돌의 첫 솔로 앨범 수록곡에 세계가 피처링을 하게 됐는데 하필 녹음이 오늘이다. 세계가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은호에게 꾸벅 인사하고 연습실을 나섰다. 구름도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망치려고 세계를 따라 나서다가 은호에게 붙잡혔다.

 

"구름인 잠깐 남고."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이미 닫힌 문을 망연히 보던 구름이 몸을 돌려 은호를 마주봤다.

 

"많이 아파?"

"…뭐… 조금…."

 

구름의 답에 작게 웃은 은호가 말을 돌려줬다. 민구름 민망해하는 건 처음 봐서 새롭고 웃기지만 너무 부끄러워하니 넘어가줘야지 뭐 어떡해. 진짜 할 말이 있기도 하고.

 

"연습 영상 보니까 많이 늘었던데. 할만 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진짜 그런 거 같더라. 그러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끊는다고 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


이 얘기가 은호 쪽에서 먼저 나올 줄은 몰랐다. 거짓말 해놓고 당당한가? 답지 않게 당황한 구름이 대꾸할 말을 얼른 찾지 못했다.

 

"…금연… 연습생 규칙 아니라면서요."

 

겨우 뱉은 말은 짧고 단순했으나 뜻은 명확하게 전달됐다. 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연습생 규칙은 당연히 아니지. 걔네 완전 날로 사는데."

"…네?"

"데뷔조는 규칙이 따로 있어. 우리가 세우고 우리가 지키는 규칙. "

"……."

"너도 우리 팀이잖아, 구름아. 그럼 우리 규칙을 지켜야지."

 

'우리' 팀. '우리' 규칙. 이런 소속감을 느낀 건 회사에 들어온 이래 처음이다. 내가 이들과 '우리'로 묶일 수 있는 사람인가. 매 맞는 것보다 더 낯선 감각이 천천히 차올랐다. 따뜻하고 벅찬 감각.

 

"그걸 몰라서 담배를 계속 피웠구나."

"그건… 죄송합니다."

"이것도 그냥은 못 넘어가. 게다가 금주는 몰랐어도 금연은 내가 한 번 말했던 거잖아. 만약 규칙이 헷갈렸으면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죄송합니다."

"방금 맞은 거 많이 안 아프다고 했지. 너 오늘 많이 아플 때까지 맞을 거야."

"…네."

"다시 엎드려."

 

은호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여태 금주 못해서 맞은 매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던 거지 되짚어 생각해보면 억울할 요소가 있지만 이번엔 아니다. 은호는 분명 금연하라고 얘기해줬고, 그를 못 믿고 안 지킨 건 저 자신이다. 매번 냄새를 뺀다고 빼고 들어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좁은 회사에서 정은호가 모르는 게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숨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바닥에 내려놓은 매를 든 은호가 아까 세계에게 했던 것처럼 매 끝으로 구름의 엉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구름이 놀라서 하반신을 슬쩍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작은 자세 변화였지만 구름의 상태를 알기엔 충분했다. 하긴 당연하다. 그렇게 맞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엉덩이는 더 맞기 힘들 거 같고. 허벅지가 낫겠다."

"…네."

"스무 대야. 금연은 내가 미리 말한 내용이라 최소한 서른 대는 때려야겠는데 방금 맞았으니까 봐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한 일인가. 많이 아플 때까지 때린다고 한 사람한테. 그래도 열 대나 줄여준 모양이니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구름은 마음을 다잡으며 몸에 힘을 줬다. 두 시간 넘게 운동한데다 불과 십분 전까지 엎드려있었던 몸이 아까보다 훨씬 빨리 힘에 부쳤다. 허벅지를 툭 건드려본 은호가 매를 들었다. 한 대 만에 전세계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허벅지 체벌만은 피했는지 알게 됐다. 무릎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직 까마득한 끝을 계속 바라게 됐다. 결국 열대도 못 버티고 무릎을 찧었다.

 

"무릎에 멍 들겠다. 관절 아껴. 지금 잘 못 다루면 이 일 오래 하기 힘들어."

"…네. 죄송합니다."

"자세 바로 해."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조곤조곤한 말투. 시답잖은 잔소리. 다 똑같았다. 사정없이 떨어지는 매만 빼면. 구름이 크게 심호흡하며 자세를 추슬렀다. 매가 올라가는 걸 바닥에 그려진 그림자로 봤다. 그러다 문득 전세계 생각이 났다. 주간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못 내 매를 맞던 전세계. 그 때 저는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불쌍하다? 안됐다? 아니, 부러웠다. 잘못하면 잡아줄 지지자가 있는 게. 더 못 맞겠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감사할 일이 맞았다. 매를 줄여줘서가 아니라 매를 들어줘서. 잘못한 일에 너 잘못했으니 고치라고 혼을 내줘서. 그런 생각을 하니 안 날 것 같던 힘이 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몸이 버텨졌다. 물론 마음가짐이 바뀌었다고 해서 아플 매가 안 아픈 건 아니었다. 허벅지에 닿는 매는 아까 둔부에 닿던 매와 같은 강도로 떨어졌다. 아까보다 배로 아팠다. 많이 아플 때까지 맞는다고 하더니 허풍이 아니었나보다. 그래도 구름은 버텼다. 은호가 조심하라고 주의 준 무릎이 바닥에 떨어질 일 없게 했다. 매가 끝나자 몇 시간 연습한 것처럼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운동하고 샤워한 게 소용없어졌다. 그래도 끝났다. 일어나란 말에 구름이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댔다. 허벅지가 타는 것 같다. 손을 대 식혀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구름이 일어나는 동안 은호는 매를 원래 자리에 세워놓고 왔다. 은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안쓰러움이 드러났다. 이렇게 때려놓고.

 

"담배도 안 돼. 끊어. 이것도 한번만 더 기회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진짜로."

"응.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자. 부축해줄게."

"괜찮습니다. 그보다 형."

 

절대 물어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이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예상치 못한 체벌에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지금이라면.

 

"저 지난주 주간 테스트 완전 망쳤는데 왜 전 안 혼냈어요?"

"응?"

"세계는 혼났는데, 분명 저보다 훨씬 잘했을 세계는 혼났는데 전 왜 그냥 보냈어요?"

"아. 무슨 말인가 했네."

 

땀범벅인 구름을 거리낌 없이 부축한 은호가 연습실 문을 열었다. 구름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 속도에 맞춰 은호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때는 노래하고 춤 출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당연히 연습한 만큼 보여주기 힘들었겠지."

"……."

"너 열심히 하는 것도 알고. 세계는 그 때까지 열심히 안했으니까 혼난 거야."

"……."

"열심히 하는 데 환경적인 문제로 실력 못 보여주는 거 충분히 이해해. 근데 혼자 삽질할 거 알았으면 그 때 그냥 혼내줄걸 그랬나."

 

은호가 짓궂게 말하며 웃었다. 은호가 하는 얘기를 반 박자 늦게 따라가던 구름도 아, 형. 작게 그를 타박하다가 따라 웃었다. 웃기는커녕 걸을 힘도 없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잔뜩 맞아 연습도 못하는 주제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

 

담배사건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 날이 풀려 히터를 틀지 않아도 연습실에 훈기가 돌았다. 가벼워진 복장으로 팀원들 앞에 선 구름이 주간 테스트를 시작했다. 한 달 내내 구름은 주간 테스트에서 제 실력보다 조금 더 어려운 곡, 조금 더 힘든 곡을 택했다. 이번 주간 테스트 역시 비트가 빠르고 댄스가 복잡한 노래로 선곡했다. 더 오래, 집중해서 연습하느라 밥 먹는 시간도 잠 자는 시간도 줄였다.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전했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팀원들 앞에서 테스트를 마친 구름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뒷짐 지고 바르게 섰다. 진지한 표정으로 구름이 준비한 걸 보던 정우가 웃었다. 구름의 테스트를 보고 이정우가 웃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여유가 생겼네."

"그쵸? 표정이."

"어. 그동안은 다음 동작 따라가기 급급했는데 이젠 좀 자신 있어 보여."

 

정우의 칭찬에 구름보다도 은호가 더 환하게 웃었다. 세계는 옆에서 작게 박수를 쳐줬다.

 

"민구름도 이제 모작하지 말고 창작해. 원작 가수랑 춤 똑같이 안 춰도 돼. 네 느낌대로 조금씩 바꿔봐. 턴 어려우면 횟수 줄여도 되고."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표정 연습 시작해. 이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보컬 연습 더 열심히 하고."

"네."

"하다 모르겠으면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보통은 은호가 상세한 피드백을 주면 정우는 옆에서 부연 설명만 하는 식이었는데 오늘은 정우의 말이 길어졌다. 최종 보스한테 인정받은 기분에 구름이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만하지 말고. 이제 겨우 기본기 깔린 거 알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젠 잘 해야지.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하고."

"네. 잘… 해보겠습니다."

 

담배 사건 이후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민구름 연습 스타일이 바뀌었다 싶었는데 그게 테스트에서도 드러났다. 전엔 혼자 기계적으로 열심히 하는 느낌이었다면 담배 사건 후로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구하는 티가 났다. 모르면 선생님이든, 팀원이든 잡고 물어보고 더 다양한 노래를 듣고 다양한 무대를 봤다. 무조건 몸을 움직여 연습하는 단계가 지난 거다. 가히 빠른 성장이다. 긴장한 얼굴로 잘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구름에 은호가 씩 웃었다. 구름의 발전에 제가 다 뿌듯하다. 정우는 저보고 사람 볼 줄 모른다고 했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정우는 틀리는 법이 없지만 이번엔 틀렸을 수도 있지. 구름은 순하고 열심이었다. 정우가 말하는 양아치 끼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여름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늘어지는데 춤추며 노래까지 해야 하는 연습생에게 여름은 고역의 계절이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스탠드형 에어컨은 냉기가 빠져 찬바람이 아닌 그냥 바람만 나오기가 대다수였다. 덥고 무료한 나날들이 지속되던 중 연습생들 사이에서 핫한 이슈가 터졌다. 민구름 월말평가 영상이 연습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닌 거다. 캠코더에 담긴 평가 영상을 회사 컴퓨터로 옮기고 캠코더에선 지운 후 연습실로 돌려줘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해 평가 영상이 캠코더에 담긴 채 연습실로 돌아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데뷔조가 아닌 다른 연습실로. 연습생 하나가 우연찮게 구름의 영상을 보고 다른 연습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돌려 보여진 영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연습실로, 또 다른 연습실로 돌았다. 너 그거 봤어? 어, 하도 가오 부려서 엄청 잘하는 줄 알았잖아. 춤도, 노래도 볼 거 없던데. 평타는 치나? 못 칠 거 같은데. 주임님이랑 친해 보이던데 인맥 빨로 꽂아준 거 아냐? 아님 집에 돈이 많은가. 빽이 있나. 구름을 까 내리고 무시하는 소문이 제법 그럴듯한 것부터 허황된 것까지 가리지 않고 회사 곳곳에서 만발했다. 그 소문은 오래지 않아 구름에게까지 당도했다. 구름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봤자 데뷔조는 뒤에서 쑥덕이는 이들이 아닌 저였다. 스스로 떳떳할 만큼 연습했고 실력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금은 저들만큼 못하지만 하던 대로만 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자신 있었다.

 

"오른쪽부터~ 오른쪽, 왼쪽, 오른쪽, 턴. 엇, 여기서 어깨를 더 확 돌려야 멋있어요. 어, 안녕하십니까-"

 

늦은 저녁, 연습실엔 구름과 세계 둘뿐이었다. 정우나 은호가 있었으면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꿨을 연습생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그 선두엔 김대식이 있었다. 몇 년 전 데뷔조 초기 연습생이었던 그는 데뷔조에서의 낙오와 그 후로도 지지부진하게 늘지 않는 실력에 염증을 느끼고 배우 연습생으로 전향했다. 이후에도 종종 아이돌 연습실에 찾아와 괜히 선배 대접 받으려고 했다. 다 세계가 귓동냥으로 들은 내용이고 구름은 김대식이 누군지도 몰랐다. 키와 비례에 덩치도 큰 김대식이 턱짓으로 구름을 가리켰다.

 

"너 새로 왔다며? 얼마나 잘하나 보자."

 

기 죽이려는 게 뻔히 보이는 반말과 명령조. 기분은 좋지 않지만 김대식 진상인데다 회사에서 나름 입김이 센 걸 아는 세계는 눈치를 보며 슬슬 일어나 노래를 틀러 갔다. 얼른 원하는 걸 보여주고 보내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구름은 달랐다. 김대식이 누군지도 모르는 구름은, 세계보다도 더 기민하게 그의 기싸움을 눈치 챘다.

 

"그걸 그 쪽이 왜 봐요?"

 

그리고 받아줄 생각도 없었다. 이런 놈들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파리 떼처럼 여럿이 끈질기게 들러붙는다. 뒤에서 구름이 춤추기만을 기다리며 조롱할 준비를 마친 연습생들의 눈이 기름에 번들번들 빛났다.

 

"허, 뭐? 내가 왜 봐? 너 이 새끼야.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내가 누군지 모르냐?"

"모르는데."

"미친 새끼가 앞뒤 분간 못하고 덤비네. 너 데뷔 못하고 싶어?"

 

김대식이 누구를 데뷔 시킬 힘은 없지만 데뷔 막을 정도의 힘은 있을 거다. 졸지에 중간에 낀 세계가 대식과 구름을 번갈아보며 절절 맸다. 대식이 앞에서 뭐라고 하든 당황하는 건 전세계 하나였다. 구름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인상을 찡그리며 대식을 마주봤다. 큰 눈을 부라리며 욕지거리를 내뱉는데도 눈을 피하지 않고 대꾸 없이 가만히 쳐다봤다. 상대가 뭐라고 반응을 보여야 욕도 계속 할 텐데 아예 무시하니 대식 쪽에서 힘이 빠졌다. 키로는 어디서 밀리지 않는데 구름도 큰 편이라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누구 하나 주먹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세계가 비교적 만만한 구름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형, 이제 그만해요….

 

"뭘 꼬라봐, 이 새끼야. 뒤질라고 확."

"말 다 했으면 나가라. 남 연습하는데 들어와서 깽판 그만 치고."

 

아닌가. 비교적 만만한 건 구름이 아니라 대식인가. 민구름 또라이인 거 새벽에 그렇게 내일 없이 연습할 때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할 말 다 하네. 속 시원하긴 한데 뒷감당 괜찮으려나. 그동안은 만만찮은 이 바닥에서 민구름이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만만찮은 건 이 바닥이 아니라 민구름이었다. 같은 편이면 든든하고 적이면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너 두고 보자."

 

대식이 씩씩대며 연습실 문을 부술 듯 열고 나갔다. 구경꾼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구름이 연습하느라 뻐근해진 목을 돌려 풀며 세계에게 말했다.

 

"노래 틀어주라. 연습 이어 하자."

"형. 괜찮을까요?"

"뭐가."

"김대식… 빽 장난 아니라던데."

"뭐 어때. 나도 그렇다던데."

"누가요?"

"애들 다 그러던데?"

 

형은 아니잖아요. 김대식은 진짜라구요. 세계는 목 끝까지 나오는 대꾸를 삼켰다. 저 혼자 불안해 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 연습이나 하자. 세계가 노래를 틀었다.

김대식과 민구름의 대면은 구름의 평가 영상 유출에 이어 두 번 째 파장을 불러왔다. 이젠 더 노골적이고 더 구체적인 소문이 돌았다. 말 안하려고 했는데 민구름이 내가 다니던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학교 다녔었다. 우리 학교까지 소문 장난 아니었다. 걔 그냥 쌩양아치였다. 애들 패고 오토바이 타고 여자 만나고 임신까지 시켰다더라.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연습생 중 이를 주장하는 이가 있으니 신빙성이 생겼다. 소문은 당연히 정은호 귀에도 들어왔다. 은호는 구름을 조용히 불렀다. 구름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일이 이렇게 커지기 전에 소문을 어떻게든 무마시켰어야 했나. 아니, 그냥 덮을 일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소문의 진상을 들어야 했다.

 

"요즘 회사에 도는 너에 관한 소문 알아?"

"…네."

"그거 진짜야?"

 

구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뒷짐 지고 서있는 태가 이미 혼나는 것 같다.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닌데.

 

"내가 정확히 알아야 소문을 막든 회사에 말을 하든 하지, 구름아. 이렇게 입 다문다고 해결될 문제 아냐."

 

은호는 초조했다. 어제 대표가 은호를 슬쩍 불러내 한 얘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제 슬슬 데뷔해야 하지 않겠니.'

 

대표가 먼저 데뷔를 입에 올린 건 처음이었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는 말에 은호는 목이 부서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괜히 초치기 싫어서 정우에게만 얘기한 거라 구름과 세계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속이 끓는 건 어쩌면 구름보다도 은호였다. 이번 일로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데뷔가 엎어질 수도 있었다.

 

"폭력도 썼어?"

"……."

"피해자가 있었니, 구름아."

"…일방적으로 때리거나 삥 뜯은 적은 없어요. 소문 도는 강간이라던지… 그런 여자 문제도 없었고요. 근데 패싸움한 적은 있습니다."

 

최대한 담담히 답하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구름이 안쓰럽다기 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억울했다. 오년을 뛰어서 겨우 손에 잡힌 데뷔가 모래알 빠져 나가듯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나이는 계속 먹고 있는데. 기회가 다시 오긴 올까? 온다는 확신만 있다면야 기다릴 수 있지만 그 확신이 없다면. 데뷔를 위해 포기한 십대 후반은, 이십대 초반은 어떻게 보상받지. 은호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걸 본 구름이 다급히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잘 해서-"

"이게 열심히 해서 해결될 문제 같아?"

 

은호의 냉정한 답에 구름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설사 매를 들고 있다고 해도 다정하던 목소리가 저렇게 냉하게 변하는 건 처음 봤다.

 

"일단 알겠으니까 나가봐."

 

고개를 꾸벅 숙인 구름이 연습실을 나섰다. 구름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연습실 아니면 숙소뿐인데 연습실에선 쫓겨나고 오전부터 숙소에 가자니 소문을 피해 숨는 느낌이라 기분이 더러웠다. 어디 가서 대기하면 화가 조금이나마 풀린 은호가 호출했을 때 제일 빠르게 뛰어올 수 있을까. 구름이 엄지손톱을 꾹꾹 눌렀다. 숨 쉬기가 불편했다. 목을 누르거나 덮는 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연습실이 쭉 늘어선 복도에 가만히 서있던 구름이 아는 체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구름아. 오랜만이다."

"……."

"요즘엔 왜 담배 피러 안 와? 너 없으니까 심심하잖아."

 

언젠가 제게 담배를 권했던 노란 머리. 얘는 몰랐을까. 데뷔조 규칙 중 금연이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안 그래도 마음 복잡한데 이런 애들까지 받아줄 여력이 없다. 구름이 문현재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너 데뷔 한다더라?"

"……."

"양심 있으면 알아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때문에 팀 데뷔가 목전에서 박살나게 생겼는데."

 

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회사에 얘기해줄까? 영상 보니까 솔직히 그렇게 잘하지도 않더만. 네가 있다고 해서 못 뜰 팀이 뜨고 그럴 거 같진 않은데. 확실히 같은 연습생이라도 너랑 나랑 급이 다르긴 하더라. 야, 그동안 왜 목에 힘주고 다녔냐? 너 내가 우스웠지? 구름에게서 대꾸가 없자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이젠 어깨를 툭 밀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벽을 뚫고 이 소란이 내부까지 전해졌는지 연습실 문이 하나, 둘 열리고 연습생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은호도 다 듣고 있겠지. 은근히 구름을 커버 치며 이 상황을 무마시켜 줄까. 그간 그랬던 것처럼.

 

"사실 너뿐만 아니라 데뷔조 애들이 다 그냥 그렇긴 해. 어차피 데뷔해도 좆망했을걸. 차라리 잘됐네. 네 덕에 데뷔도 못하는 게 나아. 괜히 회사 이미지만-"

"뭐?"

"…뭐가. 그렇잖아. 잘났으면 애초에 데뷔했겠지. 지금 이 거지같은 연습실에 쟤들이 몇 년이나 처박혀있었는데 아직도 제자리인 거 보면 분명 앞으로도-"

 

무시할 수 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지금 흥분하는 건 개한테 먹이를 던져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다 아는데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은호에게 한소리 들어서 무너진 멘탈이 회복되기도 전에 속 긁는 소리를 듣자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저 반질반질한 얼굴을 부숴놓고 싶다. 다신 제 앞에 못 나타나게, 저 입을 못 열게 만들고 싶다. 구름이 주먹을 들었다. 문현재가 눈을 꽉 감았다. 의도했어? 맞을 걸?

 

"……."

"……."

 

스무 명 남짓이 구경하며 자연스레 발생하던 소음이 멎었다. 쉬지 않고 나불대던 문현재도, 구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문현재의 흥분한 숨소리만 구름의 귓가에 닿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죽고 싶어!"

 

제가 한 짓에 현실감을 못 느끼고 있는데 출근하던 정우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주먹 쥔 손이 아팠다. 움푹 파인 가벽이 보였다. 문현재의 얼굴은 멀쩡했다. 그리고 데뷔조 연습실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이정우는 민구름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연습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안에는 정은호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이런 생각 할 상황은 아니지만 첫날의 제 모습을 보는 거 같아 민구름은 조금 웃겼다.

 

"너 나가있어."

"…형."

"너도 전세계도, 아니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일단 좀 진정하시고-"

"그냥 내가 문을 잠글까?"

"아뇨. 제가 나갈게요."

 

은호가 연습실을 나가는 내내 걱정스레 구름을 봤다. 구름은 그의 시선을 받아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벽을 친 주먹이 얼얼했다.

 

"주먹 쥐고 엎드려."

 

은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정우가 명령했다. 구름이 자세를 낮춰 엎드렸다. 붉게 까진 손가락이 바닥에 맞닿았다. 체중을 실어 누르니 욱신거렸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방금 전의 상황으로 사고가 돌아갔다. 데뷔를 한다고 했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지만 문현재는 여기저기서 정확한 정보를 잘 주워듣고 다니는 거 같으니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데뷔가 정말 저 때문에 엎어진다면 여기서 정우한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속으로 한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정우가 매를 질질 끌고 왔다.

 

"밖에 있는 애들한테 들릴 만큼 세게 때릴 거야."

"…네."

"쟤네 들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네가 그만큼 잘못했으니까 때리는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대수를 말해주지도, 더 말을 잇지도 않은 정우가 매를 높이 들었다.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올라간 매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구름의 바지 위에 부딪혔다. 구름의 무릎이 굽혀졌다.

 

"뭐야, 어디서 맞고 왔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몸 망가뜨리지 말고."

"진짜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차라리 이미 어디서 맞은 거였으면 좋겠다. 잘못한 주제에 보이는 구멍만 있으면 그게 어디든 숨고 싶을 정도로 아픈 매였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구름이 눈을 꾹 감았다. 매는 다시, 또 다시 떨어졌다. 은호한테 맞은 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아프다. 밖에서 들릴 정도로 세게 때린다고. 이건 고작 밖에서 들릴 정도가 아니라 복도를 쩌렁쩌렁 울릴만한 세기였다.

 

"야. 입술 물지 마."

"으, 네?"

"언제 뮤비 찍거나 앨범 자켓 촬영할지 모르니까 입술 안 터지게 조심해. 입 안 살도 물지 말고. 잘못하면 얼굴 부으니까."

"…네."

 

우리 진짜 데뷔해요? 염치가 아무리 없더라도 그건 못 물어보겠어서 속으로 삼킨 구름이 작게 대답만 했다. 아직 뮤비나 앨범 자켓이나 다 다른 세상 얘기 같다. 정우의 매 아래에서는 사실 현실감이 느껴지는 게 별로 없다. 기껏해야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고 욱신거리는 하반신 정도. 게다가 주먹까지 쥐고 있으려니 배로 힘들었다. 뼈 마디 마디가 아렸다. 넓은 손바닥으로 체중을 지탱할 때보다 팔이 더 금방 떨렸다. 어깨며 팔꿈치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얼마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은호는 연습실 앞에 서있었다. 아까 구름이 그랬던 것처럼. 등 뒤에선 매소리가 살벌하게 났지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꿋꿋이 앞만 봤다. 은호가 문 앞에 서있으니 다른 연습생들은 문 위의 작고 투명한 틈 너머로 안을 볼 수 없었다. 그뿐인가.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로 안의 상황을 유추하자니 은근하게 미소 짓는 은호가 빤히 쳐다봐서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은호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디 구경났니. 결국 구경꾼들이 하나, 둘 연습실로 들어가자 복도에 남은 건 은호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은호는 꿋꿋이 서있었다. 아까 구름을 냉대한 게 마음에 걸렸다. 피해자가 없으면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닌데 워낙 중요하게 여겼던 데뷔 기회가 날아간 것 같은 기분에 더 냉정하게 말했다. 복도에서 문현재가 까불 때 적당히 제가 컷해줬으면 이런 일까진 없었을 텐데. 은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제 옆의 움푹 파인 나무 가벽을 봤다. 그래도 사람은 안 때려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일이 정말 커졌을 거다.

 

"…형?"

"……."

"안에, 안에 무슨 소리에요?"

 

출석 일수 때문에 등교했다가 오전 수업까지만 받고 연습하려고 조퇴한 세계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가방 끈을 꽉 쥐었다.

 

"저 소리 지금 로비에까지 들려요. 설마 구름이 형은 아니죠…?"

"……."

"맞아요? 형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니 잘못을 했어도 사람을 저렇게…."

"세계야, 우리 오늘 연습 없어. 먼저 숙소 올라가봐."

 

하얀색 하복을 입은 세계가 은호의 말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다. 자세 똑바로 안 잡아! 갑자기 안에서 울리는 사자후에 밖에 있는 세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정우 형이 구름 형 때리는 거예요…?"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일찍 쉬어. 학교 다니면서 새벽까지 연습하느라 요즘 계속 피곤해 했잖아."

"우리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은호와 세계가 마주보고 서서 엇나간 대화를 했다. 안에 있는 구름이 걱정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세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이라도 문 앞을 막고 서있는 은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갈 것 같다. 그 상상을 하니 뒷골이 싸해졌다. 언젠간 정우를 말려야겠지만 그게 지금 전세계가 할 일은 아니다.

 

"세계야."

"형, 저러다 구름 형 죽어요."

"세계야."

"…네?"

"들어가라고 했어."

 

은호의 다정하고 단호한 목소리. 제가 무슨 얘기를 해도 저 문을 열 수는 없겠다는 직감이 든 세계가 울상이 되어 은호를 간절히 바라봤다. 그간 같이 생활하며 몇 번 혼날 때 눈이 벌개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울지는 않더니 지금은 제가 혼나는 것도 아니면서 눈망울이 촉촉했다. 걱정되겠지. 저도 그렇다.

 

"혹시 소문 때문에 그래요? 소문 그거 진짜 아니에요. 여자랑 억지로 자지도 않았고 애도 없대요. 형이 저한텐 말해줬어요."

"……."

"당사자가 나서서 부인하기엔 찔리는 부분도 있어서 못 그런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최소한 여자 문제는 없었대요. 그리고 학교 폭력에 연루된 적도 없대요. 이건 구름 형이 한 말이 아니라 제가 구름 형 졸업한 학교에 아는 형 있어서 물어본 거예요."

"……."

"술 마시고 담배 피는 학생은 많잖아요. 형, 제발요."

 

은호는 말없이 세계를 바라봤다. 들어가라고 했고, 더 할 말 없다. 적어도 지금은. 와중에도 매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매 소리가 끊기면 정우의 고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시간이 갈수록 매 소리보다 정우의 고함 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구름이 지친 거다. 오래도 버텼다. 은호에게서 답이 없자 세계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들어갈게요."

"그래, 울지 말고."

 

짧은 말에 울음기가 섞였다. 울지 말란 은호의 말에 답도 없이 돌아선 세계가 계단을 올라갔다. 짧은 기간 새에 많이 친해졌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저만큼 친해질 정도로 오래 붙어 연습했던 거겠지. 잠 안 자고 밥 안 먹으면서. 민구름도, 전세계도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연습생 기간 육 개월 만에 데뷔한 아이돌은 여럿 봤지만 그 육 개월 동안 이만큼 성장한 아이돌은 본 적 없다. 최근 겪거나 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쭉 늘어놓은 은호가 다시 생각했다. 마냥 매끄럽지만은 않은 앞날이 기다린다고 해도 이 팀원들과 같이 가고 싶은가. 답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할 만큼 금방 나왔다. 같이 가고 싶다.

맞다가 뼈 잘못되고 싶어? 정우의 질책에 구름이 겨우 하반신을 들었다. 온 힘을 다했으나 바닥에서 배가 한 뼘도 떨어지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온 몸에 땀이 났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뚝뚝 떨어졌다. 제일 힘든 건 이 매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였다. 정해진 대수는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기절할 때까지 맞는 걸까. 이 매를 다 견딜 정도로 저는 정말 데뷔가 하고 싶은가. 모르겠다. 오래, 깊이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뜨는 것도 힘들었다. 눈을 떠도 매가 떨어지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입술을 깨물지도, 입 안을 씹지도 못하게 하니 아픈 소리가 절로 나갔으나 최대한 참았다. 매 소리는 밖에서 들려야 한다고 정우가 단언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아픈 소리 내는 건 밖에서 듣지 않았으면 했다. 밖에 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너 오늘 한 행동 그냥 아이돌 하기 싫다는 거였어. 보는 눈이 몇이었는지는 알아?"

"죄송합니다."

"누구 한명 동영상이라도 찍고 있었어봐. 지하에 널린 게 캠코던데. 그럼 시작도 전에 끝나는 거잖아."

 

생각해보면 그렇다. 제가 주먹을 들자 문현재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았다. 만약 문현재가 정말 제 데뷔를 막고 싶어서 일부러 속 긁는 말을 한 거라면 그 자리에 캠코더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자연스럽다. 찍어서 터트리면 끝이니까. 그런 단순한 개수작에 넘어갈 뻔 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짜… 죄송합니다."

"똑똑한 새끼가 멍청하게 굴고 있어. 제대로 엎드려."

 

꾸짖으며 짧게 쉬는 시간을 준 정우가 다시 매를 단단히 쥐었다. 구름도 자세를 잡았다. 엉덩이며 허벅지 할 거 없이 피부가 터졌을 게 분명했다. 속옷이 피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세 잡았다. 정우가 엎드리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매를 맞지도 못하고 다시 넘어졌다. 제가 규정짓고 싶지 않지만 이젠 한계다. 정우가 얘기하기 전에 주먹을 단단히 받치고 팔을 세운 구름은 자세를 다 잡기도 전에 또 넘어졌다. 오래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에서 피 맛이 났다. 숨이 찼다. 어지러웠다. 눈앞이 까매졌다가 다시 색을 찾았다. 구름의 상태를 죄 보고 있을 정우는 여전히 매를 쥐고 정승처럼 서있었다. 언젠가 전세계에게 물은 적이 있다. 전 회사에서 선배들이 그렇게 때렸다고 했으면서 왜 나오지 않았냐고. 그 때 전세계는 데뷔하고 싶어서 참았다고 했다. 저는 지금 무엇을 위해 참고 있는가. 이정우가 매를 끝내주길 바라면서 왜 스스로 이 난데없는 체벌을 끝내진 못하는 걸까. 데뷔하고 싶어서? 아니면,

 

"저… 선배님."

 

녹슨 문이 열리면서 꽤 큰 소리를 냈을 텐데 정신이 없어 듣지도 못했다. 고개만 빠끔 들이민 은호가 구름의 상태를 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뒷짐 지고 선 은호는 아주 낯선 호칭을 대며 정우를 불렀다.

 

"선배님, 저…."

"알았어."

 

은호가 용건을 꺼내놓기도 전에 정우가 답을 했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매를 바닥에 던져놓고 그 옆에 있는 구름을 내려다봤다.

 

"민구름. 우리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

"…네."

"네가 벽을 쳤으니까 여기서 끝내는 거야. 사람 얼굴 쳤으면 오늘 못 나갔어."

"네, 죄송합니다."

 

매가 옆에 놓인 걸 보고도 구름은 몸에 힘을 줘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자세도 못 잡을 정도로 힘들면 중간에 그냥 못 맞겠다고 드러눕지 그걸 때리는 대로 다 맞고 있냐. 무식하게. 구름을 물끄러미 보던 정우가 드물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오늘 일… 너 아니고 다른 놈이었으면 그냥 짐 싸서 나가라고 했어."

"……."

"은호가 데리고 들어가라. 매 저거 금갔으니까 새 걸로 다시 가져다 놓고."

"…네."

 

갑작스런 말에 구름도, 은호도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둘을 당황시켜놓고 정우는 큰 보폭으로 연습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번엔 크게 들렸다. 금 간 매와 바닥에 거의 붙어서도 배는 들어 올리려 노력하는 구름을 번갈아보던 은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무릎 꿇어."

 

구름이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접는 동안 은호는 금 간 매를 가지고 나갔다가 어디선가 멀쩡한 마대자루를 갖고 돌아왔다.

 

"이거 걸레 분리하다가 회사 사람들한테 걸리면 욕먹는다. 회사 기물 부순다고."

"……."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이를 얼마나 악물고 버텼는지 어금니가 얼얼하다 못해 머리까지 아팠다. 다 터진 엉덩이나 허벅지에 체중이 실리자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움찔거렸다. 상태가 이러니 은호가 하는 말이 반만 이해됐다. 은호는 벌서는 구름을 그대로 두고 연습실을 정리했다.

 

"전에 한 번은 매 새 걸로 가져다 놓으라는 말이 너무 무서운 거야. 그렇잖아. 새 거는 더 튼튼하니까 더 아플 거 같고. 그래서 금 간 매에 그냥 전기테이프를 감아 놨다?"

"……."

"그건 더 아파. 그리고 그거 금방 부러지니까 선배님이 직접 새 거 가져오더라. 잔머리 굴려봤자인 거지."

"……."

"이것도 너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잔머리 굴리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긴 한ㄷ… 야, 너… 울어?"

 

그 매를 다 버티고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으면서. 은호는 정리하던 걸 내팽개치고 구름 앞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소리 없이 잘도 운다. 티내도 되는데. 은호가 손을 뻗어 구름의 눈물을 닦았다. 쓸 데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놀라고 무서웠을 구름을 끌어안고 위로해주는 게 먼저여야 했다. 쓸 데 없는 소리로 조용한 연습실에 오디오 채우는 건 괜히 냉하게 애 쫓아내놓고 사고치는 거 다 알고도 무시한 저나 편하지 민구름이 편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구름아, 왜 울어."

"…죄송, 죄송해서…."

"뭘 죄송해. 너 때문에 데뷔 못할까봐?"

"……."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서럽게도 운다.

 

"아이고. 민구름아. 그런 걸로 무산 안 돼."

"……."

"너 데뷔 못하면 전세계도 안 할 기세던데. 그럼 나 또 언제 만들어질지 모르는 데뷔조 기다리면서 연습생 하라고? 악담 자제해주라."

 

구름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가려졌지만 떨리는 머리통으로 아직 못 그친 건 알 수 있었다. 은호가 구름을 부축해 편히 앉도록 도왔다. 방석 위에 다리 펴고 앉은 구름이 진정할 때까지 그 앞에 가만히 앉아 기다려줬다. 생각보다 잔울음이 길게 갔다. 생긴 걸로 보나, 하는 행동으로 보나 못 울 것 같았는데 잘만 우네. 하긴 나도 여기서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진데 민구름이라고 못 울 것 있나. 늘 무뚝뚝하고 냉하던 얼굴이 푹 젖어서 눈까지 벌개진 걸 구경하고 있자니 그제야 민망해졌는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너… 데뷔곡 뮤비에서 울면 좋겠다. 그럼 우리 대박날 거 같아."

"형, 좀…."

"너무 세속적이었어? 미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구름이 슬쩍 웃었다. 그걸 본 은호가 그제야 마음 놓고 표정을 풀었다.

 

"왜 그렇게 울었어, 인마. 너무 아팠어?"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다. 원래 잘 안 우는데. 누가 있을 때는 더더욱. 정말 아파서 그랬나. 아픈 게 끝나서 안도감에? 무섭고 어렵기만 하던 이정우가 드디어 저에게 마음을 열어서? 아니면 다신 저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을 줄 알았던 정은호가 너무 쉽게 마음을 돌려준 덕에? 구름이 눈물에 젖어 무거워진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였다. 난데없는 체벌을 끝내지 못하고 버틴 이유. 데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종일 고생해서 지끈지끈 아픈 머리가 일순 가벼워졌다.

 

"형."

"응."

"저 데뷔하고 싶어요."

 

형들이랑, 세계랑. 속으로만 생각한 뒷말까지 다 들었는지 정은호가 환히 웃었다. 나도 그래. 정은호가 힘주어 하는 말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이슈 있는 민구름을 데뷔조에서 안고 갈 건지에 대해 회사에선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았지만 정은호의 웃음을 보고 있자면 아주 중요한 게 결정된 기분이 든다. 소문이 돌았던 며칠간 불편한 마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던 구름이 여직 젖어있는 눈가를 닦았다.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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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구름의 과거 일탈은 현실에선 용서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치만 민구름은 어쩌다 보니 질 나쁜 무리와 어울려 놀았을 뿐 크게 질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는 설정이니ㅜㅜ(판타지지요...)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폭력으로 말이 많은 시기에 하필 이런 글을 쓰게 되어 저도 맘이 편치 않네요...ㅜㅜ

2. 결제선 밑에는 TEAM 관련 깨알 설정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나 에스크에 푸는 썰 정도의 퀄리티입니다. 천원에 파는 느낌이 아니라 후원해주셔서 감사하니 이거라도 보시라는 느낌이 훨씬 강한... 잡글입니다. 어쩌면 전에 에스크에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용돈 주고 싶으신 분들만 봐주세요. 

3. 오늘도 역시 구독자 분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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