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텐도

아무리 권력의 정점에 모여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을 쉽게 처리하거나, 없애거나, 죽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수년 전 과거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으나 현재에선 꽤 쉽지 않은 일이다. 도덕적인 문제나 법을 따지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따지면서 권력을 잡고 있는 멍청이는 아마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규칙을 어긴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도덕성과 법은 완벽하지 않다. 어디든 파고들 틈은 있고 빈 곳은 있기 마련이다.

만약 눈앞에 늑대와 토끼가 있다. 이 둘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늑대는 토끼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럼 이걸 보고 있는 인간은 '자연의 섭리이니 어쩔 수 없지. 잡아먹도록 해.'라고 생각을 할까 아님 '토끼가 불쌍하니 도와주고 싶다.'라고 생각할까? 대게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이게 도덕성의 틈이다.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당연했다. 토끼는 늑대를 잡아먹지 않아도 풀을 먹어 살 순 있지만 늑대는 그럴 수 없다. 당연히 토끼라는 고기를 섭취함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늑대의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고 자신의 목숨을 위한 섭리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알면서도 토끼 입장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토끼가 귀엽기 때문에? 아님 약자라서?

아니다.

그냥 이것은 그렇게 배워온 교육의 결과이다. 인간도 교육이 아닌 야생 그대로의 삶에서 살고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늑대가 절대적인 악도 아니다. 그렇다고 토끼가 절대적인 약자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자연의 규칙일 뿐이다. 근데 인간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지성이 생겼고, 도덕성을 만들어 냈으며, 이것이 양심으로 변한 것일 뿐.

그러니 강자인 우리는 그저 약자인 오메가를 돕는 것 일 뿐이다. 알파들은 자신을 고결하고 절대자인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결국엔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상의 감투일 뿐이지만 그걸 꽤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야 권력이 모이고, 권한이 생기니까. 뒤에선 더럽고 추잡한 짓을 일삼아도 표면적인 모습은 꽤 신사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걸 자극해서 지나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법도 위배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난 말만 했지 뭘 하지 않았으니까.


'알파가 오메가를 발견했는데 센터에 신고를 하지 않고 무작정 강간을 하려 했다. 근데 심지어 그것이 상위알파 클럽에 속한 오메가였다. 이것은 서열을 무너트리고 싶어 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가?'

이런 느낌의 말 한마디면 된다. 그럼 알아서 한다. 열성 알파보다 조금 더 위에 힘을 가진 열성 알파는 그 작은 권한까지 빼앗기긴 싫거든. 자긴 그런 열성 알파보단 그래도 조금 나은 알파라고 믿고 싶거든. 그럼 알아서 해준다.

법이라는 것도 웃겼다. 다수의 인원이 입을 다물면 무슨 나쁜 짓을 했어도 숨겨지기 마련이니까. 결국 위법을 한 알파는 어디 있을까요? 와! 신기해라. 아무도 없네? 그럼 약자를 괴롭힌 알파는 법을 위배했으니까 벌을 받아야지.



짜잔!

결국 그 알파의 이름 위로 까만색 줄이 그어진다. 그 새낀 어떻게 됐냐고? 알 게 뭐야.

나는 여주씨를 위한 카넬레를 만들어야 해서 조금 바쁘거든. 그런 건 알아서 해줄 거야. 그치?




- 스나 린타로

"그 알파. 지금 어디 있지?"

"지금 센터 지하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사님."


나조차도 보고 있으면 닳을까 만지면 없어질까 아끼고 아꼈던 사람이었다. 언젠간 내가 마련한 안락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예쁜 것만 보고, 귀한 것만 걸치며, 누구의 눈에서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오직 나만이 그녀의 버팀목이 되고 싶어서 여주씨에게 자잘한 불행은 알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 도움을 바라는, 아니 제발 바라주길 원해서 그렇게 인내하고 참아왔다.

지하로 향하는 문에 손바닥을 올리자 지문을 인식하곤 거대한 열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문이 열렸다.

불행에 흠뻑 젖어도 그녀는 쓰러지긴 해도 꺾이진 않았으니까. 그런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인생, 삶 모든 것에 침범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주씨라면 그런 걸 바라지도 않을 것 같았고, 만약 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면 알파인 나에게 수상함을 느끼며 멀어지려고 할게 뻔하니까. 내가 멍청하게 그런 짓을 할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자꾸 멍청하게 만들어. 여주씨가.


"죽이면 안 되겠지?"

"...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쯧."


우리 비서는 너무 똑똑해서 좋은데, 너무 똑똑해서 싫다니까. 이럴 땐 그냥 모르는 척 도와드릴까요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이런 장단 맞춰주는 건 유능한 비서의 덕목이지 않나? 하는 수 없이 좀 더 우아한 방법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가 마시는 산소조차 아깝지만 그래도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그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여주씨를 만지작 거리였던 손가락을 뽑고, 여주씨의 손목을 아프게 했으니까 그 손목은 잘라도 상관없잖아? 평생의 축복이지. 그리고... 여주씨를 담았던 그 오만불손한 눈알은 뽑아서 터트리고, 역겨운 말을 뱉었을게 뻔한 혀는 잘라서 자신이 씹어 삼키도록 하자!

아, 너무나도 관대하고 너그럽고 가벼운 벌이다.

여주씨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 역겨움과 괴로움에 비하면 너무나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더러운 건 묻는 게 싫으니까. 혹여 그 더러운 것의 체취라도 내 몸에 묻어나면 여주씨가 다시 또 그 일이 생각나선 안되니까 가죽장갑을 바짝 당겼다. 딱 맞게 핏되는 감촉이 만족스러웠다. 손끝을 서로 마주해 조금 더 생각했지만 역시 이것 말곤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이게 내가 여주씨를 위해 하는 일이지만, 이런 끔찍한 일은 여주씨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 더 무서워하면 정말 곤란한 것 같거든. 당신을 위해서 별은 따 올 수는 없지만, 저 새끼의 목은 따줄 수 있지. 내가.


"힘 조절이 안될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지. 금방 뻗지 마. 유흥은 좀 길어야 되는 법 아니겠나?"





- 미야 아츠무

센터라는 이름의 삐까번쩍한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지만 이 곳은 온갖 범죄의 온상지이자 그런 놈들의 아지트나 다름이 없었다. 표면적인 모습은 오메가의 관리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메가의 독점을 위한 짝이 없는 알파들의 애처로운 발악이라고 하는 게 가장 어울리지. 모든 알파들은 이 센터의 소속이 되고 싶어 했다. 센터는 등급 1부터 10까지의 이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쉽게 말해 알파의 등급표다.

10의 센터에 있으면 베타나 다름 없는 열성의 열성 중의 알파. 당연히 떨어지는 정보는 다 떨어진 찌꺼기나 이미 다 상황이 다 끝난 뒷북치는 정도의 수준일 것이다. 그러봤자 민간의 시설에 비하면 빠르겠지만 아무 의미가 없긴 했지. 그럼 1의 센터는?

모든 정보의 근원지이자 발신지라고 보면 된다. 가장 먼저 들어오고, 처리 되어 필요가 없는 것들은 배출해 나머지 센터에서 순차적으로 받아 가는 위치. 뭐 알짜배기라고 보면 된다. 다들 등급의 숫자가 적은 센터로 오고 싶은 게 당연했고, 그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물은 고여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이 센터도 물을 갈 때가 온 것 같긴 하지.


"회장 어디 갔어?"

"아, 미야님. 지금 회장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어쩌라고. 불러와."

"이러시면 제가 너무 곤란해집니다."


진짜 죽고 싶은 건가?

내가 불러오라면 불러올 것이지 뭐가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을까. 진짜 죽여버릴까?


"불러와. 여기에 계속 자리보전하고 싶으면. 아, 그리고 인명록 가져와. 무슨 뜻인지 알지?"

"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쯧.

요즘 너무 얌전히 지내긴 했다. 딱히 오메가와 짝을 짓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둔 적이 없어서 이름만 올려놓았지 신경을 쓴 적이 없었는데 막상 만난 오메가는 나를 충분히 흥미를 가지게 했다. 알고 있던 오메가들과 반응이 달라서 그런가 신선하기도 했지. 여주. 여주...

학창시절에도 오메가는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되게 미묘했다. 페로몬도 잘 안 느껴지고... 내 페로몬을 맡으면 좋아서 덤벼드는 것 반, 역겨워하면서 뛰어나가는 게 반... 그런데 여주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건지 싫은 건지 정확하게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 조금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요즘 제법 이름을 날린다고 했는데 나를 누군지도 모르는 어디에서 숨어있다 튀어나온 오메가. 아니 여주.

우성 알파라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굳이 그런 생각도 안 해봤다. 왜냐하면 나한텐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런데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내 흥미를 못 부른다는 그 무감정한 표정을 볼 때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승부욕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이런 기분 느끼게 하는 건 배구 이후로 처음이란 말이지. 하! 고 가시나 맹랑하니 알파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요령이 좋다. 본인은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알파고, 그녀는 오메가이니까. 알파가 오메가에게 끌리는 것은 파도를 막아내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거, 내가 데려갈게."

"예?"

"우리 쪽에서 처리해준다고. 너넨 그냥 모르겠다고만 해."

"아! 예!"


어쩐일인지 이 열성 알파가 피떡이 되어있지만 상관없었다. 센터에서 이런 일 뒤집어써 주면 환장하면서 뛰어오거든. 뭐 자신들의 위신이 있어서 어느 정도 비밀 유지는 하겠지만 까발려졌을 땐 입 다물며 모르쇠를 할 테니까. 그런데 뒤집어써 준다는 쪽이 있으면 환영할 만하지.

그녀를 만나기 전에 칭찬 받을 일을 해서 머리를 들이미는 게 좋을 것 같다. 딱히 물욕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니까 이런 선물은 괜찮지 않을까? 여주는 순진하게 굴면 꽤나 무르게 대해주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너에게 귀여운 개새끼 취급도 나쁘지 않더라고. 다음엔 머리도 쓰다듬어주면 좋겠다.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 처럼, 그녀도 나를 그렇게 만져주면 기분이 너무 좋을 것 같다.

네 앞에선 배라도 발랑 까주겠다고. 이 미야 아츠무가.





-후타쿠치 켄지

이 미친 새끼들이 살살해서 데리고 오라니까 반송장으로 만들어왔다. 이러면 내가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금방 뒤질 것 같은데 내 몫은 남겨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믿은 내가 등신이었다.

뭐, 그 자식들의 분노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 순서가 더 빨랐더라면 아마 지금 이것보다 더 한 것들도 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역시 물리적인 보복을 하지 못하게 된 건 좀 짜증 난다. 하, 이럴 땐 내가 막내인 게 제일 짜증 난다.


"야, 이거 물어."


하, 진짜 이거 누구 짓인지 모르겠네. 이 새끼 혀는 또 어디 간 거야. 혀가 없으니 제대로 물지도 못하네. 이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진짜 열을 받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았다. 이 분노는 도대체 뭐 때문인지 모르겠다. 눈앞에 있는 이 역겨운 새끼 때문일까, 아님 이 새끼한테 아무것도 못 하는 나 때문일까, 아님... 이 모든 것을 지 의도대로 유도하고 있을 게 뻔한 그 자식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어디 굴러다니는 절연테이프를 주워 덕지덕지 입에 붙였다.


"그러게, 건들일 것을 건드려야지. 너 클럽도 가입 못하는 도태 중 도태라며."


어설프게 뭔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은 항상 이 꼴이다. 자신도 알파라는 그 타이틀이 그렇게 좋았나. 딱히 좋은 거 하나도 없는데. 오메가 하나에 미쳐 정신 나간 알파만 몇이냐. 안 그렇냐? 그 덕에 네 인생, 네 삶, 네 모든 것들 엉망으로 만든 게 네가 으스대며 잘난 척 하던 알파라는 타이틀을 가진 다른 알파 놈들인데, 그래도 좋냐고. 하긴 모르겠지. 베타로 살다 알파로 사니 세상이 뒤집히고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긴 마련이지.

미디어에서 나오는 알파들은 최상급 알파들이니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들 착각을 하긴 하더라. 특히 늦은 발현의 열성 알파들이. 왜 그렇게 의미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잘난 이들과 왜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까? 우성 알파로 태어난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정신상태이긴 했다. 뭐 딱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모니터에 심박수가 잘 표시가 되어있는지 확인을 한다. 약한 전기 충격을 주니 이 작은 아픔에도 심장이 널뛰며 심박이 올라간다. 개자식이.

너는 이런 작은 통증에도 아프다며 그 작은 심장이 발악을 하는데, 우리 여주씨는 얼마나 심장이 뛰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역시 이렇게 살려두면 안될 것 같다가도 덧없는 고통을 영원히 주는 게 맞다 싶다.


"오래 살고 싶으면 오래 버티는 게 좋을 거야. 나 다음에 만나는 놈은 진짜 성격 더럽거든."


혀가 없어 말도 하지 못하면서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정말 혐오스럽다.


"여주씨도 너한테 그랬을 거 아냐. 하지 마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듯 눈물을 질질 흘리던 놈의 눈빛이 여주씨의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사납게 변한다. 우습기도 하지.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그대로 여주씨 보내줬어?"


발악을 하듯 몸을 뒤튼다.


"왜? 여주씨는 되고 넌 안돼?"


정말 하찮은 발광이었다.


"네가 정신을 잃을 때마다 이 모터가 돌아가면서 너를 깨울 거야. 이거 내가 만든 거거든. 그러니까 전기충격이 올 때마다 내 생각 해라. 이건 오직 너를 위해 내가 밤낮으로 만든 거야. 개새끼야. 원망할 거면 나를 하라고."


괜한 사람 떠올리지 말고. 네가 여주씨를 떠올리는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니까.




-시라부 켄지로

잘 눕혀진 오물을 무감각하게 내려다 보았다.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고정되어있는 부분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혈액 팩을 확인해 저 자식과 같은 혈액 팩으로 수혈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못 했는데 피가 부족해서 죽으면 곤란했다.

비교군과 대체군 또 실험을 위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살아있어야만 했다. 수액 팩을 하나 더 꼽았다. 아, 영양부족으로도 죽으면 안되니까.

뭘 자꾸 꼽으니까 버둥거리는 게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혈관에 바늘을 잘 찌른다고 해도, 이렇게 움직이면 나도 모르게 대동맥을 끊으면 안 되잖아. 그리고 난 너를 살려야 하는 입장이라 여간 귀찮은 일을 맡은 게 아니라고. 언제든 원할 때 너를 내보내 그 미친 알파 새끼들이 물어뜯게 해줘야 한다고. 그러니까 제발 버둥거리지 마라고. 쓰레기 같은 새끼.

그 자식의 목 혈관에 진정제를 투여하자 버둥거리던 몸이 차츰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 이거 근육 이완제야.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빠지지."


그리고 다른 약물을 준비한다. 이때까지 나에게만 투여해봐서 어떤지 모르겠는데 드디어 비교군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알파를 위한 게 아니니 부작용이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없으면 더 좋겠다.


"이건 촉매제."


징그러운 페로몬을 직접적으로 맡아야 하는 건 역겹지만, 그런 건 괜찮았다. 난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싶으니까. 강제로 당겨진 러트에 미비하게 페로몬이 풀어진다. 진짜 향이라고도 하기 아까울 정도네. 이런 새끼한테... 아니 이런 새끼가 감히...


"이건 내가 요즘 개발하고 있는 베타 2817"


이 알파의 귀밑으로 약물을 투여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구석에 있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얼마나 걸릴려나... 몇 번 더 해봐야 하는데 그전에 망가지지 않으면 좋겠다.

아, 뒤에 숫자가 뭐냐고? 2817번째 실험이란 소리야. 영광인 줄 알아. 넌 여주를 위해 그 필요 없는 목숨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귀찮음을 감수하고 그 자식들에게 내가 빌었지. 살려만 두라고. 아님 쓸데없게 그런 짓을 왜 하겠어. 너 같은 알파가 하나 더 빨리 죽는 게 세상에 이로운데. 특히 센터의 감시를 받는 나는 그 센터를 자유롭게 운신하는 것도 힘드니까 짜증 나더라도 그 알파들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깟 자존심 따윈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여주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여주 너를 위해서.



29.


주춤 거리며 계단 난간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앞에서 등을 돌리고 뛰는 것은 빨리 나를 잡아먹어 주세요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였다. 저 들의 시선을 나도 놓쳐선 안되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서는 것에 따라 알파들도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눈이 반쯤 돌아있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뒷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계단 한단을 올라가자 알파들도 한 걸음 다가온다. 하, 진짜 좆됐다. 그냥 목구멍이 콱 막히더라도 방에 처박혀있어야 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잠깐의 안락했던 생활들이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편안함에 속아 나태해진 내 자신에게 너무 짜증이 났다. 미련했다. 저들도 알파인 이상 내가 오메가라는 것은 언제든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일을 절대로 잊어선 안되었는데 너무 멍청했다.


내 페로몬에 반응하듯 저들의 페로몬도 풀어지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난 역시 그런 일을 당했어야 했는데 그 시기가 하루 미루어진 것 뿐이었을까? 어제 당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5배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인가. 운명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진짜 너무 하잖아.

귀 밑 뿐만 아니라 향낭이 존재하는 모든 부위가 화끈거렸다. 자제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되었다. 물감을 쥔 손을 물속에 넣은 것 처럼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꾸 흘러나오는 물감처럼. 내 페로몬이면서도 내 의지대로 되질 않았다. 그들이 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자상한 모습의 탈을 쓴 것을 오늘에야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그 가면이 벗겨진 민낯이 저것이었다. 번뜩이는 눈빛과 아찔하게 내 코를 자극하는 페로몬이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나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할까? 아님 이러고 싶지 않는데도 본능에 이끌리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고 있을까.

이게 뭐가 중요할까.


내가 몸을 돌려 방으로 달려간다면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다시 머리채를 붙잡혀 질질 끌려 나오지 않을까? 너무 무섭다. 너무 무서워.

갑작스럽게 터진 히트 사이클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공포를 느끼면서도 나는 페로몬의 노예인 오메가였다. 그들의 자극적인 페로몬의 향기가 원하지 않는 나도 원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감각도 너무 무서웠다. 결국 오메가의 결말은 이런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시라부가 품에서 주사기를 꺼내 들더니 자신의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헐떡거리며 숨을 급격하게 내뱉고 쉬는 게 내 페로몬을 인지하자 마자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은 본인도 알파라 내 페로몬에 취한 것 때문일까? 주사기를 뽑아내 아무렇게나 던지더니 빠르게 계단 밑으로 다가와 섰다.

그 모습을 본 알파들은 더 자극이 되었는지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었다. 정말 동물의 왕국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빨리 가!"

"나, 나는... 시라부 넌?"

"난 괜찮으니까 빨리 가! 나 혼자선 이 이상은 버거워!"


낯익은 상황과 낯익은 대화.

난 또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왜 시라부를 두고 가려는 게 마뜩잖을까? 난 저 사람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럼 내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빨리!"


이제 정말 한계라는 듯 소리치는 시라부의 목소리에 퍼뜩이며 정신이 차려졌다. 주춤 거리다 결국은 발걸음을 올렸다. 계단 아래에선 욕지거리와 함께 몸싸움이 일어나듯 피부와 피부가 마찰하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서둘러서 방문을 잠그고 억제제를 찾았다. 열감에 어지러웠지만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이 움찔거려 너무 기분이 나빴다.

물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와그작 씹었다. 너무 썼다. 하지만 씹었다.

나는 어제 내가 원치 않았지만 나쁜 일을 당했다. 오메가라서. 오늘도 내가 믿음을 줄 뻔한 이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할 뻔했다. 오메가라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침대를 부여잡고 울었다. 내가 오메가라서.


실망은 내가 상대에게 믿음과 기대를 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슬픔은 실망이었는지 아님 내 상황에 대한 비참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실망이 없었다고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경계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간 대 인간이라는 정을 조금은 나누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배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믿어버린 내 마음이 바보인 것이지. 그러니 이런 배신감을 들어서도 안되었다.


사정없는 범죄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범죄자의 서사를 들으면 그럴 법 할 만도 하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착하고 멀쩡한 사람이었다고 평을 하는 주변인들이 있다. 나도 그런 주변인이었던 거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법도 하네? 라고 생각했던 바보 같은 사람.

그러나 범죄자는 범죄자다. 그것을 이해하거나 옹호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알파들이 나에겐 그러한 놈들이었다. 이들은 나에겐 범죄자 혹은 예비범죄자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사정과 속마음. 그딴 것을 듣고 이해해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 피해자니까.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정을 듣고 선처하는 것 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내가 왜 가해자 사정까지 생각해 줘야 하는데?


그럼 상처받고, 아팠던 나는 누가 이해해주는데? 저 알파들이 그럴 수나 있을 것 같아? 퍽이나 그러겠다.

가장 최초의 기억을 재생한다. 다시 마음을 먹는다.


나는 베타가 되고 싶은 오메가이다.





30.


학창시절을 회상하면 다들 재미있었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헛소리에도 웃긴다며 배를 잡고 웃고, 엉뚱한 생각을 하며 즐겁게 장난치던 그런 천진한 시절을 말이다. 물론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교 마치고 맛있는 거 사 먹자며 친구랑 약속하고, 학원 가는 길에 놀이터에 들러 놀다가 빼먹기도 하고. 그런 철없고 귀여웠던 시절.


우리집은 형질과 전혀 연관이 없는 집이어서 나는 당연히 내가 평범한 베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평범하게 자라서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평범하게 살 거라는 것에 의심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가끔은 나도 숨겨진 초능력이나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며 설레발을 쳤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오메가의 형질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부터 알 수 없는 열이 오르며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병원에선 원인을 찾지 못했고 그저 열이 높으니 해열제만 처방받던 그런 나날들. 오메가는 대게 나라에서 관리를 해왔고, 보통 발현되고 난 뒤 찾아낸 경우가 많아 어떻게 발현이 되는지 베타인 의사들은 잘 모르기도 했다. 형질마다 신체 구조가 다르니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열에 취해 혼란스러운 정신에도 정확하게 맡아지는 백합 향기에 나는 그 어린 나이에 깨달은 것이다. 이건 페로몬이라고.

그 뒤 절대 병원은 안된다며 악다구니를 쓰니 부모님께선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숨이 넘어가면서도 그런 부탁을 하니까 스트레스나 외부 자극을 더 주어선 안된다고 판단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현명한 대처였다. 만약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갔다간 나도 그 센터 혹은 알파들에게 끌려갔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며칠 동안 고열로 인해 죽니 사니 하며 고통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발현이 끝난 것이었다. 어설프지만 페로몬의 갈무리를 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혀졌다.

그래서 나는 나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다. 페로몬이라는 이 존재가 얼마나 악질 같은지 베타로 자란 나와 베타로 살아온 부모님에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발현 이후엔 베타들과 다름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아직 어리기도 했고 히트 사이클이란 것이 딱히 없기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라나고 성장을 한다. 당연히 내 오메가의 형질도 자라나고 성장을 하고... 이차성징이 찾아오자 첫 히트가 터졌다.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했었는데 이젠 숨길 수도 없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애 상태가 이상하니까.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원은 절대로 안 된다고만 하니 고민이 많이 되셨을 것이고 저렇게 아파하는데 이유를 모르니 속이 타들어 갔을 수 밖에.

결국 털어놓았다. 내가 오메가란 것을.


베타로 사는 사람들도 오메가의 운명엔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뉴스엔 항상 헤드라인으로 나오는 소식이 오메가들에 대한 소식이었으니까.

알파들의 강간, 살인, 폭력 모든 범죄의 주요 타깃은 오메가였다. 물론 알파끼리의 치정극이나 베타에 대한 범죄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극적일수록 시청률은 올라가고 구독자 수는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부모님은 우셨다.

나도 울었다.

우린 그렇게 비통에 잠겨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진실을 알게 된 엄마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집 안에 내 모든 것의 흔적을 없애기 시작하셨다. 가끔 펼쳐보며 내가 얼마나 귀엽고 소중한 아기였는지를 회상하던 많은 추억이 담긴 사진첩도, 나의 성장을 기록하던 육아일기도, 내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셨다.

아빠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셨다. 조금이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집과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는 값비싼 억제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오메가인 내가 직접적으로 구할 수 없으니 뒷골목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것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나는 그래도 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베타인 척 학교를 졸업했다. 마음 같아선 대학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계시는데 당사자인 내가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린 이사를 갔다. 집은 거의 1년 단위로 옮겼다. 혹여 수상하게 여기게 되는 이웃들이 생기면 안되니까 철저한 고립을 선택했다.

나는 괜찮았다.

그러나 부모님껜 아니었나보다.


엄마는 어느 순간 부터 시름시름 앓으셨다.

항상 괜찮다고 했는데 맨날 밤마다 우시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자꾸 몸에 상처가 생기셨다.

항상 괜찮다고 하는데 약을 사 오실 때마다 몸에 상처가 느셨다.


내가 베타가 아닌 오메가라서. 그래서 우리 가족의 단란했던 시절은 엉망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젊으셨을 때야 그런 고생이 부담은 되어도 버틸 만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계셨다. 늙고 계셨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간 정신이고 몸이고 망가질게 분명했다. 다 나 때문이었다.


편지를 남겼다.

사랑한다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나의 부모님이 훌륭하신 분들이라 나는 행복했다고.

그러니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이제 다 커서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혹시 내가 오메가인 것을 알고 있었냐고 추궁하는 사람이 온다면 의절하고 가출한 딸이라 그런 건 모른다고 잡아떼시라고. 사랑한다고...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언젠간 꼭 다시 우리 세 가족 행복하게 살자고... 

눈물에 젖은 편지를 그렇게 부모님 방에 두고 집을 나왔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내가 다음에 울게 될 때는 기쁨의 눈물일 거라고 그렇게 맹세를 했었다.


손에 쥐어진 종이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베타(β) 테스터 모집합니다.


내가 다시 베타가 된다면 우리 가족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난 이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알파들이 화려하고 귀한 것을 내밀어도 나에겐 그만한 값어치를 느끼질 못하겠다.


과거를 돌아보며 미련을 보이는 짓은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한들 나는 과거의 추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 사랑하는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제 복을 발로 차버리는 멍청이로 보인다고 한들 상관이 없었다.

의미를 두는 것은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었다. 다른 이는 알파가 주는 값비싼 것들이 더 의미가 있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한텐 아니었다. 나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당연히 우리 가족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꿈을 놓지 못하겠다. 내 꿈은 베타로 돌아와 그들의 품에 안기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게 다였다. 반갑게 맞아주며 따뜻할 그 품으로 안아주시진 못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들과 같은 땅에 묻히고 싶다.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였던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로.



난 베타로 '되돌아가고 싶은' 오메가이다.





먹고싶은 맛이 있는데 아직 메뉴에 없다면 직접 조리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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