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에 누워있었다. 기동이 정지된 아머를 입은 채로, 마치 무거운 돌덩이에 깔린 것 처럼 숨조차 제대로 들이쉬지 못하며 귓가에서 멀어지는 두 명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렵사리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헉!!"


토니는 덮고 있던 이불을 움켜쥐고 소리를 토해내며 침대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쓸어내린 토니의 귓가에.


-보스. 아직 새벽 3시예요.


제 비명에 반응한 프라이데이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그래……,"


몰아쉬던 숨을 고르고 토니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직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참 지난 일이었음에도 바로 전날의 일인 것 처럼 매일 밤 악몽은 저를 찾아왔다. 겨우 잠에 들어도 늘 이렇게 새벽에 깨어나곤 했다. 이대로 다시 잠에 든다고 해도 또다시 찾아온 악몽에 깨어날 것이 뻔했기에 침대에서 내려선 토니는 협탁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까끌하게 마른 입안을 축이고 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들기 전 아무렇게나 어지럽히고 나왔던 랩실 안에 들어서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원형의 방패를 손끝으로 쓸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몸이 떨렸다. 방패 위에 놓인 손을 거두고 토니는 제 얼굴을 감쌌다.


"프라이데이, 수면시간은?"

-오늘은 어제보다 길어요 보스. 1시간 3분입니다.

"나 참, 그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정말"


짧게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고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몸을 숙여 방패 위에 엎드렸다. 뺨을 통해 올라온 찬 기운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짧으면 10분, 길어도 2시간을 체 넘기지 못하는 수면시간에 토니는 점점 지쳐갔다. 벌써 일주일은 넘게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가 떠난 이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있었나 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물른 그 일이 있기 전에도 바쁜 스케줄 탓에 충분한 수면시간을 취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 질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잠을 자는 순간만큼은 편안하게 푹 잠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가 되었다. 이제 그는 제 곁에 없었다. 차가우리만큼 매정하게 등을 돌려 떠난 그는, 곁에 없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배신감에 가슴이 아팠다. 깨어져 조각난 신뢰가 심장을 찔렀다. 심장에 박혔던 파편이 다시 생겨난 것 같은 통증이 몸을 덮었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 소리를 삼켰다. 억센 통증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날 올 것 같았다. 숨을 꾸역꾸역 내리누르고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천장을 쳐다보았다. 매일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회사의 모든 것을 페퍼에게 넘기고 나서 참견한 적 없던 경영에 관해서도 참견했다. 제가 필요로 하지 않는 자잘한 임무에도 자원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없을 때는 랩에 틀어박혀 아머를 만들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책을 들고 시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조금의 틈이 생기면 그리움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오, 토니.'


등 뒤에서 다정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장을 노려보던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다.


'이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야? 몸 상한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대꾸를 하지 않음에도 다정한 목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끊임없이 속삭여오는 것에 손을 들어 귀를 막으며 딴청을 피웠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왈칵 올라오는 감정에 복받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맺힌 눈물을 훔치며 토니는 숨을 토해냈다. 이미 가슴속에 파고든 감정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 이 감정이 고개 숙이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캡…스티브…제발……그만……."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내듯 말을 뱉어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청이 멈추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저를 향한 말이었다. 더는 상상하기를 그만두길 바랐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를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을 토니는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 뜻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리움속에 파묻히는 것은 아직도 제 마음이 그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져버린 신뢰는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왜 내게서 등을 돌렸느냐고, 그토록 그 친구가 소중하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들지 않았다. 그저 지쳤다. 아주 많이.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저를 괴롭힐 만큼 지쳐있었다.


쫒겨나오 듯 환청을 피해 플로어로 돌아온 토니는 협탁 서랍속에 들어있는 구형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게 편지와 함께 배달된 것은 손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울린 적 없었다. 그저 서랍 안에 놓여 배터리를 축내며 꺼져가고 있었다. 깜빡깜빡 빨간불을 빛내는 것을 양손에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꼭 쥐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휴대폰을 뺨에 가져다 대자 금속 맞닿았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를 불렀다. 소리내지 않고 무척이나 애타게,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손에 쥔 것을 마치 절벽 끝에 매달려 붙잡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들며 눈을 감고 어둠에 파묻혀 밤을 떠나보냈다.


커튼 틈 사이로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들어왔다. 어둠 속으로 들어온 빛줄기는 무척이나 따뜻해보였다. 뻑뻑하게 감겨있던 눈을 뜨고 땀이 날 정도로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몸뚱이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고 목은 잠겨 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아…,흠!”


따끔한 통증을 동반하며 나온 소리는 갈라졌다. 늘어지기만 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이닝리빙룸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 가득 물을 따라 반쯤 마시고 몸을 기대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점점 단축되는 수면시간만큼이나 식욕도 사라져갔다.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챙겨 먹는 영양제를 물과 함께 삼키고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녹즙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고 난 후에 물방울이 맺힌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타워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 핑핑 도는 시야에 눈을 부릅뜨며 핸들을 쥐었지만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프라이데이를 불렀다.


“프라이데이, 회사로.”

-Yes. Boss


차는 부드럽게 지면을 밟고 나갔다. 도로는 한가했다. 평일이었지만 사람들이 출근을 위해 도로로 쏟아져 나오기엔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도로 위를 누비는 것이라고는 화물을 실은 몇 대의 화물차 뿐 이었다. 제 차 옆을 쌩하니 달려가는 화물차를 흘끗 보던 토니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피로에 쩔은 몸은 늘어졌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제 몸을 수마로 끌어들이는 수면욕에 이끌려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했던 시야는 환하게 밝아졌다. 추위가 느껴질 리 없는 꿈속임을 알지만 찾아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재생됐던 시베리아였다. 온몸이 쑤셨고 심장은 난도질 된 것처럼 아팠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맞았던 자리를 쥔 채 숨을 몰아쉬는 그는 입을 열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왔다.


“그는 내 친구야 토니….”


지친 숨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말이 이미 난도질 되어 너덜거리는 심장을 찔렀다. 그래, 반즈는 그의 친구였다. 어린 시절부터 슈퍼 솔져가 된 이후에도 전우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지나가는 사랑? 같은 일을 하는 동료?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에게서 나온 말은 그동안 제가 쌓았던 감정을 무너트렸다. 온전히 주었던 마음의 대가는 이토록 아프게 돌아왔다.







요란한 클락션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번뜩 추켜올렸다. 화물차 한 대가 갑자기 끼어든 차를 향해 울리는 소리였다. 꿈뻑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토니는 시계를 보며 손을 들어 가슴의 흉터를 문질렀다. 실질적으로 토니가 잠이든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그 10분 동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또 보았다.


“이러니 자고 싶지 않지….”


고개를 내저으며 잠을 쫓아낸 토니는 콘솔 박스에 넣어둔 텀블러를 꺼내었다. 안에 담긴 녹즙을 들이키며 그 씁쓸한 맛에 눈가를 찌푸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회사는 한산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CEO 사무실로 올라가는 툭, 툭 손끝으로 제 손등을 두드렸다. 띠롱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토니는 능숙하게 CEO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 페퍼도 출근하기 전의 시간. 고요한 사무실에는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내려 푹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아 토니는 손끝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무겁게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잠을 내쫓고 곧 문을 열고 들어올 페퍼를 기다렸다. 토니가 사무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껏 둔감해진 감각에도 소리만은 예민하게 듣는 토니가 고개를 들자 페퍼와 눈이 마주쳤다.


“토니, 오늘도 일찍 나왔네요.”


이제는 그가 이곳에 앉아있는 것에 익숙해진 페퍼가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손을 들어 마주 인사를 한 토니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졸리면 좀 더 자고 나오지 그랬어요. 예전에는 그렇게 일찍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더니.”

“이젠 나도 늙었나 봐 페퍼, 의도하지 않아도 눈이 빨리 떠진다구.”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 떠는 토니를 보며 페퍼는 겉옷을 벗어 스텐드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그래요, 이젠 50줄이잖아요?”


그의 말에 긍정을 표하며 페퍼는 의자에 앉아 토니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비해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식사는 하는지, 잠은 자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잔뜩 상한 피부, 피로에 터 있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페퍼는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자세하게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와 그의 연인 사이에 일이 있음은 알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과 신념으로 인해 틀어져 버린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선뜻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군가가 참견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의 토니는 되려 누군가의 참견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일같이 이렇게 회사에 출근할 리 없었다. 그것도 엄청 이른 시간에.


“후…….”


페퍼는 다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토니는 한숨을 내쉰 페퍼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토니를 보며 페퍼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조금 고민하다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정말, 제대로 자고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당신한테 회사 일이며 뭐며 다 맡겨놓은 덕에 예전보단 한가해졌으니까. 물론 대외적으로 할 일은 많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페퍼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할 일이 많다는 것 말고, 머리말의 ‘물론이지‘를 믿지 않았다. 저런 몰골을 하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건지. 어째 그와 함께 일을 하던 때보다 한숨과 걱정이 늘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그럼 대체 할 일 많은 토니 스타크씨가 CEO자리를 맡겼을 때도 찾아오지 않다가 갑자기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뭐, 음. 그냥…….”


말끝을 흐리는 토니를 보며 페퍼는 다시 입을 열었다.


“토니…, 나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니까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힘내라는 정도의 뻔한 위로뿐이에요. 당신과 캡틴 로저스씨 사이는 예전의 나와 당신의 사이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게 엮여있겠죠. 하지만 토니.”


잠시 단어를 고르기 위해 페퍼는 입을 다물었다. 제 앞에 앉은 저 초췌해 보이는 남자가 제가 알고 있던 그 토니 스타크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상처를 헤집지 않을만한 단어들을 골라 사용해야 했다.



“…토니, 감정은 누르고 참는 것보다 발산시키는 게 더 좋다고 해요. 내가 당신의 상담사가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담아두고 있다면 내게 해도 좋아요.”


물론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지만요. 누구씨 덕에 무척 바빠서 말이죠. 부러 농담을 덧붙이며 페퍼는 토니의 안색을 살폈다. 토니는 그저 웃으며 페퍼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 하지 마 페퍼…. 난 정말로 괜찮거든.”


정말로, 괜찮아.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토니는 속으로 다시 말을 반복했다. 그녀에게 걱정을 끼칠 만큼 제 상태가 말이 아니긴 했나보다고, 당분간은 회사 출입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스케줄은 어때? 바쁘지 않다면 오랜만에 같이 식사라도?”

“oh, 토니 제안은 고맙지만 오늘 저녁엔 빠질 수 없는 약속이 있어요. 당신만 괜찮다면 스케줄이 빈 날 연락할게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토니는 몸을 돌렸다. 손을 들어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제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던 비서가 토니를 보고 몸을 일으켜 묵례를 해보였다. 토니는 그의 인사를 받으며 차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보다 하루가 길었던 것 같다고 토니는 제 플로에어 있는 소파에 위스키를 반쯤 따른 글라스를 들고 앉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가 길었던 만큼 밤은 더더욱 길 거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술은 좋은 수면제였다. 취해 기절하듯 잠이 드는 잠깐은 지옥 같은 악몽도, 환청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면역이 생겨나는 탓에 초반 술로 지새던 밤을 청산했다. 아무렴은 효과 좋은 약도 더 이상 듣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최근 수면시간이 대폭 줄어든 탓에 토니는 즐겨 마시던 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늘은 부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그를 떠올리지 않고 잘 수 있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글라스에 채우고, 그것을 단숨에 비우고를 제법 반복하니 지쳐있던 몸에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아프던 두통도 사라지고 몸과 정신이 붕 뜨는 기분이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자 그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지만 그 얼굴은 다시 눈을 깜빡이면 사라졌다.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쇼파에 파묻히듯 앉아있던 토니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술병을 들어 술잔에 가득 채웠다. 술병을 내려놓으며 넘어트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술잔을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비틀비틀 넘어질 것 같이 위태롭게 걸으며 술잔의 술을 한 모금씩 비워내고 침대에 다다르자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직 남아있던 술이 시트 위에 뿌려졌고 쓰러지며 놓친 글라스잔이 침대 위를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르작 침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던 토니는 손으로 더듬어 협탁위에 놓인 휴대폰을 잡았다.


평소라면 절대 열어보지 않았을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눈을 반쯤 감고 아무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를 통해 신호음이 들렸다. 두근, 두근 평소의 배는 빠르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신호음과 같이 귓가에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신호음이 끊겼다.


“……."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술과 잠에 취한 토니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규칙적으로 들리는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았을 뿐이다. 눈을 감기 전 무언가 소리가 들린 것 도 같았지만 그것이 수마에 빠져드는 토니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수마로 빨려 들어가며 토니는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다. 꾼 것 같았다. 아주 달콤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말 성공적으로 수면을 취했다. 비록 테이블 위에 넘어진 위스키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카펫을 적시고, 제가 들고 침대에 쏟은 위스키가 시트에 얼룩져 남았다는 것만 뺀다면 만족스러웠다. 악몽도 찾아오지 않았고 1-2시간에 맴돌던 수면시간이 무려 6시간으로 껑충 뛰어올랐으니, 자고 일어난 토니는 조금의 숙취를 제외하고는 아주 많이 만족했다.


녹즙으로 쓰린 속을 달래며 침대 위에 폴더가 열린 상태로 놓여있는 휴대폰을 보며 토니는 눈가를 찌푸렸다. 배터리가 다 나간 휴대폰은 화면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열려있었는지, 설마하니 술을 먹고 전화를 한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토니는 충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협탁 서랍에 넣었다. 술을 먹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악몽에 시달린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물론 휴대폰이 열려진 상태로 제 옆에 놓여있던 것은 처음이었으나 이틀 전 밤에도 배터리가 없다고 빛을 내던 것이니 아마 어젯밤엔 꺼진 상태였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사흘이 지나도 스티브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괜한 생각이었다며, 최근 조금 늘어난 수면 시간 덕에 괜찮아진 컨디션에 아머를 손보기 위해 랩실에 내려온 토니는 쭈우욱 기지개를 켰다. 그날 이후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마크46은 랩실 한쪽에 놓여있었다. 그게 늘 토니의 눈길을 끌었으나 쉽사리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걸 고치기 위해 분해한 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부품을 교체해야 할 부분은 교체하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을 손보는 작업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얼추 기본 작업을 끝내고 시간을 본 토니는 그만 자야겠다며 랩을 빠져나왔다.


언제 다시 악몽이 시작될지 모르는 상태이니 잘 수 있을 때 자두자는 생각에서였다. 평소라면 밤을 꼴딱 지새웠을 테지만 최근 토니에게는 수면이 정말로 필요로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 올리며 토니는 눈을 감았고 쉽게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좋은 꿈은 아니더라도 푹 잘 수 있길 바랬던 바람은 차갑게 부는 바람에 깨져버렸다. 토니는 또다시 시베리아에 서있었다. 어느정도 고쳤던 마크46이 다시 부셔진 체로, 뒤돌아가는 남자의 등과 발소리를 들었던 그 날로 돌아와있었다.


악몽은 다시 시작됐다. 기분 좋게 잠에 들었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기분은 최악이었다. 오랜만에 꾸는 탓에 피로감이 더 밀려왔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한숨을 내쉬고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힐지 의문이 들었다. 떠나간 스티브보다 그런 스티브를 잊지 못해 조금이라도 바뀔까 싶어 그가 떠나는 장면을 그토록 반복하는 이 바보 같은 행동에 지쳤다. 차라리 이렇게 괴롭힐 거라면 두 눈 딱 감고 그에게 보고 싶다고 전화하면 될 것을,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무언가를 놓지 못하고 스스로 절벽 끝으로 몰아가는 것이 넌더리가 났다.


그렇게 다시 토니는 밤을 지새웠다. 돌아온 1-2시간의 수면, 악몽과 함께 10분, 20분의 쪽잠을 자는 그때로 다시 돌아갔다. 잠시 괜찮아졌던 컨디션은 최악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은 배로 늘어났다. 어벤져스 본부의 이동이었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여러 자선행사에 참가하며 토니는 어벤져스 본부의 이동에도 신경 써야 했다. 날로 수척해지는 것을 보며 나타샤나 비전이 말을 건넸지만, 평소처럼 가볍게 넘겨버렸다.


본부이동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타워를 둘러보며 토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신의 플로어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버린 다리에 급하게 벽을 짚었다.


“하…….”


쌓인 피로에 시야가 흐려졌다. 벽을 더듬으며 토니는 플로어에 도착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힘이 없는 다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몸이 바닥과 부딪히며 소리가 울렸다.


-보스?


프리이데이의 부름에 토니는 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아머를 부를까요?


평소 토니의 목소리와 상이하게 다른 것과 바닥에 쓰러져 아직 일어나지 못한 것을 보며 프라이데이는 그의 의사를 물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물어보지 않고 아머를 시켜 토니를 도왔겠지만 최근 종종 이런 일이 있었고, 토니는 그때마다 아머를 부를필요 없다며 저지했기에 프라이데이는 그의 의사를 물었다.


“아니…….”


엎어졌던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토니는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누워있다 보면 몸의 컨디션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아주 잠깐 건전지가 나간 것뿐이라며 토니는 눈을 감았다. 다시 찾아올 악몽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충전을 위해서 잠시 악몽을 마주 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아 잠에 빠진 토니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였다. 평소에 바라보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따뜻한 햇볕이 저를 비추고 있었다. 그게 너무 포근해 토니는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으음…….”


조금이라도 더 온기에 닿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멀어질 것 같아 꽉 움켜쥐고 태양에 더 닿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잡힐 리 없는 태양이건만 어째선지 제 손에 쥐어진 따스함에 절로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양손에 가득 잡힌 따스함을 품에 안고 토니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토니는 플로어 바닥이 아닌 침대에 누워있었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프라이데이가 아머를 움직여 저를 옮겨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동을 위한 정리를 한 탓에 텅 비어 조금은 쓸쓸한 느낌을 주던 플로어가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느낌을 들게 했다. 토니는 침대에서 발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결코 눈에 보일 리 없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캡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어있는 건지 아니면 제가 깨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뒷모습이. 토니는 숨을 멈췄다. 대체 왜 캡틴이 여기 있는 거지? 숨을 삼키며 뒤통수를 노려보자 제 부름에 몸을 일으킨 캡틴 아메리카가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에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정한, 조금 초췌한 얼굴이었다. 저만 힘들었던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이 상황에서 할만한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토니는 생각을 지우며 입을 앙다물었다.


“…….”

“…….”


서로 대화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스티브는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가 괜찮은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네.”

“하, 괜찮아 보여 이게?”

“아니, 음…….”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토니 역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바보 같다고 중얼거렸지만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만이 맴돌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문 토니도, 할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스티브도 그저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토니의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며 그렇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스티브는 몸을 돌려 아직도 저를 보고만 있는 토니를 쳐다보았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그날 아무런 말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겨서…….”

“그날?”


스티브의 말에 토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과 전화 두 단어가 이어지지 않아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문득 폴더가 열려있던 술을 먹은 그날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서 잘못 걸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전화가 다른사람에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자네에게 다시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만 들려서 후, 그래서 걱정이 돼서…….”


주먹을 꽉 쥔체 스티브는 말을 골랐다. 당장 괜찮은 것을 봤으니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토니의 모습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하…, 보다시피 난 멀쩡하니까, 뭐 방금 안 괜찮다고 했지만 어쨌거나 그만 가는게 좋지 않겠어? 당신 일단은 전범이고, 또… 이제 나랑은 아무사이 아니잖아? 이렇게 불쑥불쑥…물론 전화는 내가 걸었다지만 찾아오는 거 실례라고.”


다다다, 말을 뱉어내고 토니는 다시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자신의 마음과 다른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사실은 가지 말라고, 사실은 보고 싶었다고, 와서 꽉 안아달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뱉어내진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 괜찮다면 그걸로 됐네, 그럼… 토니.”


다음에 또 보지.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스티브는 몸을 돌렸다. 토니는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잡지 못하는 손을 뻗었다 다시 쥐었다. 이젠 못 보겠지. 이게 끝이겠지. 그렇다면 조금은, 조금은 더 괜찮지 않을까. 머릿속에 말들이 떠올랐다. 잠깐은 더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도 되지않을까. 고운 말이 나가진 않겠지만 그렇지만.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도착을 알렸다.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보며 토니는 한 발 더 발을 내디뎠다.


“정말…! 정말, 그걸로 되는 거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위해 움직이던 스티브가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이 움찔이는 것을 토니는 보았다.


“당신은… 정말, 그걸로 되는 거냐고…….”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혀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티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어깨가 떨렸다.


“내가, 그걸로 되지 않는다고 한들, 자네에게 무슨 염치로. 무슨 낯으로…….”


달려가서 내 품에 자네를 다시 품겠나. 떨리는 어깨에, 삼켜지는 말에 토니는 여전히 제게 등을 보이고 있는 스티브를 향해 팔을 벌렸다.


“빨리 와…….”


움찔 떨리던 몸이 돌아 저와 눈을 맞추었다.


“이젠, 당신이 보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 스티브….”


무너지는 목소리에 스티브는 주먹을 움켜쥐고 뛰었다. 아주 멀어 보이기만 했던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고 저를 품는, 제 품에 안기는 그 몸은, 제 코에 스치는 체향은, 닿는 온기는 너무도 그리운 것이어서 스티브는 눈을 질끈 감고 조용히 눈물을 떨구었다. 아직도 스티브는 그날 토니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제 신념대로 움직이는 것과 별개로 마음이 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았지만 후회했다. 그렇게 혼자 두고 온 것에, 그렇기에 편지를 남기고 전화기를 보냈지만 울리지 않는 전화기에 더더욱 후회는 짙어졌다. 무엇을 선택해도 그 후회는 똑같았을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후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에게 상처를 준 것은 후회했다.


“날 으스러트려 죽일셈이야?”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토니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힘을 풀었다.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손이 올라와 제 뺨을 감쌌다.


“스티브.”

“토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숨결이 맞닿았다. 아주 오랜만에 플로어 안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기나긴 악몽의 끝. 아주 잠깐이지만, 끝이 났다. 아주 잠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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