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드에서 벗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릴리의 눈에는 여전히 도시 내부라고 보아야 할 것 같은 풍경이 계속 펼쳐졌다. 물론 성문을 지나고 나서는 도시 중심가 광경과 비교하면 확실히 덜 번성한 느낌이기는 했다. 그래도 지평선이 보이는 풍경이 익숙한 릴리에겐 여전히 밀집도가 높은 도시처럼 보였다. 

그렇게 며칠이나 걸려 이동하고 나서야 릴리가 보기에도 도시에서 좀 빠져나왔다 싶은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부를 생각하면 여전히 제법 큰 마을 중심가 정도로는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안드의 지가 높은 지역에서 지내면서 본 것과 비교하자면 많이 황량해지기는 했다.

릴리와 로라가 탄 마차는 이카트 군대의 후열에 위치한 다른 수레와 마차 따위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 앞으로도 뒤로도 길게 행렬이 늘어져 있었다. 마차 여행은 기대한 것만큼 지루하고 생각한 것만큼 좀이 쑤셨다. 베르타가 마련해준 마차는 무척 훌륭했지만 그래도 마차가 멈추면 내려서 조금이라도 걷거나 움직여야 했다. 

느와는 다른 말에 줄로 매어두고 행렬을 따르는 상황을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저택에 있을 때보다 까탈을 덜 부려 수월한 면이 있었는데, 꼭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이제야 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말의 마음을 읽을 수단은 없으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기분이나 상태가 안정적으로는 보였다.

병사들이 뚝딱 막사를 몇 개 세우고 저녁 식사를 마련하는 연기가 곳곳에서 올랐다. 놀랍게도 그들이 지나는 길은 여전히 포석이 깔려 있었다. 다만 도시 안의 큰 도로처럼 말끔하지는 않고 조금 손길이 덜 닿은 티가 나는 정도였다. 하지만 흙길이 아닌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덕분에 군사들은 빠른 속도로 쭉쭉 나아갔다.

릴리는 지쳐 보이는 로라에게 마차에서 쉬라고 한 뒤 지나는 병사 하나를 잡아다 느와에게 안장 올리는 걸 돕게 했다. 처음엔 자기 일도 아니고 바쁘다며 내빼려고 들었다. 결국 시키는 대로 한 걸 보면 정말로 그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부를 떠나고선 늘 그런 상황이긴 했지만 정해두고 부릴 사람이 없다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이 녀석이 잘 지내도록 종종 봐준다면 중부에 도착했을 때 사례하지." 

도움의 대가로 병사에게 은전 하나를 던져준 릴리가 안장을 올린 느와에 올라탔다. 내내 마차에 실려 있으나 몸이 뻐근하니 조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딱 지금 여기에, 황야가 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풀이 길게 자라난 들판이 펼쳐진 모습은 릴리의 마음을 적잖이 자극했다. 소나 양을 먹이는 이도 없는지 웃자란 풀이 마음에 걸렸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멀리 가진 마십쇼!"

릴리의 눈빛을 봤는지 병사가 외치는 걸 뒤로 하며 느와에 올라 탄 릴리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엔 가볍게 달려보며 상태를 살피다 금방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흔들었다. 릴리가 히야 히야 소리를 냈다. 호응하듯 느와가 다리를 쭉쭉 뻗었다. 

릴리와 느와는 길을 옆에 두고 길게 늘어선 행렬의 옆구리에서 횡으로 빠져나가는 직선을 그리며 빠르게 멀어져 점처럼 까마득하게 변했다가 다시 멀어진 것만큼 빠르게 되짚어 돌아오더니 도중에 방향을 꺾어 다시 횡으로 종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짐승에 따르듯 릴리의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숨이 차오르고 열이 올랐다. 

들판을 빙 돌며 제법 먼 곳까지 간 릴리가 드문드문 놓인 민가들 너머로 펼쳐진 지평선을 보았다. 지상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반대 방향을 돌아보니 펼쳐놓은 막사와 마차와 수레 그리고 인마가 조그맣게 바글거리는 광경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모든 게 아주 작아 보였다. 바람이 들판을 한 번 뒤흔들며 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랴!"

릴리가 다시 달려 나갔다. 검은 털의 말과 금발의 사람은 그동안 쌓인 걸 풀기라도 하듯 종횡무진 한참을 신나게 달렸다.

릴리가 돌아온 건 야영 준비가 다 끝난 뒤였다. 릴리는 로라와 함께 그냥 마차에서 자니까 따로 막사를 치거나 땅을 고르는 등의 일은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식사는 해야 했다. 로라가 두 사람이 먹을 끼니를 챙겼는데 직접 조리를 하는 건 아니고 이카트군에서 취사한 것을 받아오는 정도였다. 물론 일반 병사들이 먹는 음식과 같은 건 아니었다.

너무 늦으면 로라가 기다리느라 굶고 있을 것 같아서 서둘러 돌아가던 릴리의 눈에 이전에 없었던 것이 잡혔다. 릴리가 당장 느와에서 뛰어내렸다. 

"필리엔!"

필리엔은 보통은 선두 쪽에 있었지만 시간이 될 때면 릴리를 찾았다. 대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보고 싶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릴리는 신나게 내달려서 필리엔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망아지처럼 마구 달려온 릴리를 이번에도 솜씨 좋게 받아낸 필리엔이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헥헥대는 릴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위험하잖아요."

"안 위험하거든요? 저도 다 안전한지 보고 이러는 거라고요."

릴리가 어느새 난 땀 때문에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대충 떼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고개를 뒤로 젖혀서 머리를 탈탈 털어버린 뒤 필리엔의 목에 팔을 감고 헤죽 웃었다. 필리엔도 자연스럽게 릴리의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얘기 없이 서로를 보며 히죽거리는 시간을 가졌다. 느와는 혼자 달려가 버린 릴리를 잠시 기다리다가 자기를 놔두고 가버린 릴리에게 터덜터덜 다가왔다. 릴리가 필리엔의 목을 감은 팔에 무게를 실으며 히히 웃었다.

"우리 지금 말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죠?"

"전 괜찮은데요."

"그래도 이렇게 멀뚱거리기만 하면 이상하잖아요. 아, 오늘은 노을도 참 멋지지 않아요? 저쪽에 펼쳐진 들판을 달렸는데, 휴지기인 목초지 같아요. 풀이 꽤 무성하더라고요."

필리엔이 릴리가 냅다 말을 타고 달리다 돌아온 들판 쪽을 보았다.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지상에도 내려 들판은 어둡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길게 자란 마른 풀들이 사각 거리는 소리를 냈다. 필리엔은 별 말도 없이 붉게 물든 들판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아는 곳이에요?"

필리엔은 무슨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던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아뇨. 모르는 곳이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무슨 몇십 년 전 즘에 떠나온 그리운 고향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홀린 듯이 봤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걸요."

필리엔이 실없이 웃었다.

"그냥…… 서글프게 보여서요."

필리엔의 말에 릴리도 들판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노을빛도 약해지며 어둡게 가라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사라지고 점차 검게 잠겨 가는 광경은 섬세한 사람에게 멜랑꼴리한 감상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해 보였다. 어두워가는 땅을 바라보는 필리엔의 옆얼굴은 길게 옆으로 늘어진 노을빛을 받아 묘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찍으면 묻어나올 것 같은 색이었다.

릴리는 필리엔의 뺨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린 뒤 바람에 흐트러진 필리엔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필리엔의 어깨와 가슴 위를 느릿하게 토닥이는 릴리의 손을 필리엔이 감싸 쥐었다. 릴리가 차분한 노을에 물든 필리엔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필리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필리엔의 시선이 릴리에게 돌아왔다. 필리엔이 되묻기 전에 릴리가 부연했다.

"서부로 다시 가야 한다는 걸 미리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요. 전 정말 까마득하게 모른 채 기뻐하기만 했는데, 나중엔 그게 너무 바보 같더라고요. 떠나기 직전에나 알려주다니 정말 너무했어요."

"아, 그거요? 그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

필리엔이 흐물거리는 난처한 낯을 했다. 희한한 표정이었다. 릴리는 일부러 좀 짓궂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뭘 또 잘못한 게 있기에 그런 반응이에요?"

필리엔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뭘 숨기고 있는 건가? 릴리가 의심스럽게 필리엔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릴리가 사람 속마음까지 다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대마법사도 아니고 그렇게 본다고 뭘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말로 중요한 거라면 결국엔 알게 될 테니까 억지로 입을 열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미리 말해주는 편이 훨씬 좋겠지만 말이다. 릴리가 입술을 비죽였다.

"됐어요. 사과 받고 싶어서 한 얘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 같았을 거 아니에요. 필리엔은 마음이 복잡했을 텐데 그런 것도 몰라줬잖아요. 게다가 생각 없이 있다가 급하게 떠날 준비를 하느라 며칠은 정말 정신 없었단 말이에요."

"그것도 미안해요. 하지만……."

필리엔은 좀 어설프게 웃었다. 릴리의 손을 쥔 필리엔의 손이 꿈지럭거렸다. 노을빛이 필리엔의 뺨 위에서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필리엔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아침에 눈을 뜨니 제가 집에 있고 형이 어쨌든 살아있고……. 거기다 당신이 이렇게 여기 함께 있다니, 이렇게 평화롭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그랬어요. 말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만 같았거든요. 한심한 소리지만요."

릴리는 맞잡은 손을 위로하듯 바꿔 쥐었다가 깨금발까지 하며 필리엔의 뺨과 이마와 눈두덩이, 곧은 콧날에 모두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필리엔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노을빛이 다시 찾아드는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밖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요."

실제론 한참 전부터 남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분홍빛 아우라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뽀뽀 좀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릴리는 발뒤꿈치를 들어 붉어진 필리엔의 귓바퀴 위에 다시 쪽 소리를 낸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엮어 깍지를 꼈다. 

그냥 손을 잡고 있는 것뿐인데 필리엔이 희롱당하는 사람처럼 움찔거리더니 못된 짓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주변의 눈치까지 살폈다. 릴리는 애매모호하고 진득한 미소를 띠고 그런 필리엔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쁜 여자처럼 말했다.

"우리가 이런 정도로 부끄러워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필리엔은 과장해서 건들거리는 릴리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 귀가 다시 빨갛게 변했다. 차갑게 흐려지는 노을 빛으로도 분간이 될 법한 변화였다.

필리엔은 곧 목까지 시뻘게져서 입만 뻐끔거리다 결국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고개를 살짝 숙여버리고 말았다. 부끄럼쟁이처럼 구는 모습이 귀엽고도 애틋해서 릴리는 능글거리는 걸 이만 자제하기로 했다. 조금 더 했다간 빨개져서 펑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누군가 다가오다가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보았는지 슬그머니 멀어지는 걸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멀어지려면 아예 가버리든가, 덩치도 큰 남자가 왜 근처에서 알짱거리는지 신경 쓰였다. 그렇게 거슬리게 알짱대고 있었으니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필리엔도 곧 그 남자를 발견했다.

"롱겟?"

아, 그래.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어도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더니만 필리엔이 돌아온 날에 봤던 필리엔의 부관이라던 남자였다. 필리엔이 이름을 부르자 롱겟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억지로 따르는 것처럼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물질적인 무엇도 그를 강제하지 않았으나 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 같은 걸음이었다. 

그들을 향해 다가온 롱겟은 얼핏 보기엔 흑마처럼 근사한 외견을 지닌 사내였으나 릴리는 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방해꾼을 보는 표정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릴리의 귀에는 어째 말하는 게 왜 자신이 찾아버리게 여기에 계셨느냐는 듯이 들렸지만 필리엔의 귀에는 달랐던가 보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편향된 릴리의 시각으로 보기엔 아주 반기는 듯한 모습으로 필리엔이 롱겟을 맞이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요. 이 좁은 곳에 복작이며 다들 붙어있는데 오다가다 보이기도 하는 거 아닙니까."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는 눈치를 살피더니 롱겟이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오늘도 스라듀레와 똘마니들이 모여서 음습하게 또 뭘 속닥이고 있더군요. 중부에서 뭘 또 할 생각인가 봅니다."

"아, 그쪽 사람들은 원래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니까……. 특별한 일은 아니지. 자기들끼리 친분이 깊잖아."

왜인지는 몰라도 롱겟이 방금 필리엔을 짧게 째려본 것 같은데 그냥 기분 탓인 것 같지는 않았다. 



-


이제 4부 후반부기도 해서 썸네일 이미지를 바꿔봤습니다. 그리고 바닥이 안 보이는데 저렇게 막 달리면 위험하니까 하지 맙시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