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한 수한이 한바탕 욕을 하려 입을 열자 수한의 목소리 대신 허율의 혀가 쑥 들어오고야 말았다.

 

“읍!”

 

꼿꼿하게 힘이 들어간 혀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수한은 눈을 크게 뜨고 그저 당하기만 했다. 키스를 안 할 거라는 다짐처럼 요령 없는 혀가 수한의 볼을 찌르고 혀를 찔렀다. 수한도 키스를 안 해보긴 마찬가지라서 이 혀 놀림이 키스가 아닌 공격인 것을 알지 못했다.

 

뻣뻣하게 굳은 혀는 수한의 입안을 쑤실 대로 쑤시고 빠져나갔다. 로맨틱함이나 에로틱함은 전혀 섞이지 않은 행위였다.

 

수한은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대로 굳어있었다. 허율은 수한을 보며 입술을 손으로 대충 닦았다.

 

“별것도 아니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고 머리가 움직였다.

 

“이… 이…. 씨…!”

 

그러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수한은 부들부들 손을 떨며 씩씩대다가 허율이 그랬던 것처럼 팔을 뻗어 허율의 멱살을 잡았다.

 

“씨발, 씨… 씨발, 내… 처, 첫…!”

 

덜덜 떨리는 입술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욕을 퍼붓고 싶었는데 혀가 마비라도 되었는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입안을 가득 채우던 허율의 혀가 빠져나간 지는 한참이었지만, 아직도 안을 쑤셨던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제 마음대로 쏟아내지 못하니 갑갑함이 눈으로 밀려들었다. 뿌옇게 흐려진 눈에서는 곧 툭툭 물이 터져 나왔다.

 

“으… 으흑….”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라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허율은 갑작스러운 수한의 눈물에 되레 제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평소에 하던 말본새를 쉽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튀어 나갔다.

 

“… 울어?”

 

퐁퐁 눈물을 쏟아내던 수한에겐 폭발의 도화선이 되는 말이었다. 수한은 어설프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멱살을 잡고, 있는 힘껏 다른 손을 휘둘렀다.

 

빡! 야무지게 쥔 주먹이 허율의 뺨에 명중하며 불을 붙였다. 고개까지 옆으로 돌아간 채 얼얼함이 도는 턱을 손으로 짚자 수한이 크게 소리쳤다.

 

“이 씨발 도둑 새끼야!”

 

수한은 그대로 허율을 밀치고 달아났다.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앞을 보고 뛰었다.

 

눈물이 나와서 앞이 안 보일 때마다 허율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어두운 거리에 곳곳에 피어난 가로등이 번지며 수한의 앞길을 막았다. 수한은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무작정 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참 먼 거리까지 뛰어간 수한은 술기운과 분이 사그라들자 집부터 향했다. 집이 학교 근처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밤새도록 거리를 방황했을 거다.

 

분노를 원동력 삼아 뛰는 것에 지쳐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수한은 첫 오티 날처럼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씨발, 권허율 죽여버릴 거야.”

 

아직도 꼿꼿하고 빳빳한 덩어리가 쿡쿡 입안을 쑤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한은 또 찔끔 눈물이 났다. 첫 키스인데, 내 첫 키스인데! 하필 그 씨발 새끼가…! 열받은 수한이 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처음에는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는데 살이 닿으니 허율의 입술이 닿았던 감각이 떠올라 손길이 점점 거칠어졌다. 종내에는 박박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입술을 닦았다. 하지만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길게 누웠던 수한은 대충 발을 흔들어 신발을 툭툭 벗어 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씨발….”

 

마주한 거울 속의 자신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뛰면서 우느라 불어 터진 눈 하며 벅벅 손으로 문질러 울긋불긋한 입 주변까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개 씨발 새끼, 진짜 죽여버릴 거야.”

 

건너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수한이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는 칫솔을 집어 들고 분노의 양치질을 시작했다.

 

 

*

 

 

“수한아, 너 왜 어제 말도 안 하고 그냥 갔어? 가방도 자리에 두고 가고.”

 

같은 수업인 줄도 몰랐는데 미나가 먼저 수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한은 생각하기도 싫은 어젯밤 일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어두웠던 골목과 권허율의…. 권허율의 혀가 또 입안을 쑤셔대는 것 같아 수한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취해서 실수할까 봐 그냥 먼저 갔어.”

“그래도 가방은 가지고 가지. 내가 챙겨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너 잃어버렸다?”

 

어디서 많이 본 가방이더라니 제 것이었다. 수한은 미나에게 가방을 건네받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 가방 놓고 온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취했었어? 몰랐네. 하긴, 양주 섞인 거 마셨으니까. 오늘은 괜찮아?”

 

때마침 미나의 뒤로 뻔뻔한 무표정을 한 허율이 걸어왔다. 그리고는 비어있던 수한의 앞자리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아니, 안 괜찮아.”

“어?”

 

수한이 들으란 듯 크게 말했다.

 

“하- 나- 도- 안- 괜찮아.”

 

일부러 길게 늘어트리기까지 했는데도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미나만 당황했다.

 

“그, 어, 그럼 뭐… 숙취해소제라도 사줄까?”

“아니,”

 

수한은 당황한 미나에게 눈을 맞추고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나 괜찮아. 장난친 거야. 놀랐어?”

“어…. 조금?”

 

장난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긴 하지. 수한은 짧게 반성한 뒤 미나가 들고 온 제 가방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고마워. 이건 가방 가져다준 값.”

“뭐 이런 걸 줘….”

 

초콜릿을 건네받은 미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수한은 미나의 반응보다 제 가방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마워. 미나야.”

“아니야. 내가 다음에도 또 챙겨줄게. 걱정마!”

 

미나가 주먹을 살짝 쥐며 말했다. 수한은 미나의 마음도 모르면서 다정한 말을 건넸다.

 

“하하, 나 이제 너랑만 술 마셔야겠다.”

“어? 난… 좋아.”

“그래, 그러자.”

 

미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는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영민이 수한의 어깨를 꾹 찔렀다.

 

“뭐야? 뭔데?”

“뭐가 뭐야?”

 

수한이 무심하게 영민을 바라보자 영민이 묘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한수한, 너 어제 무슨 일 있었지?”

“내가 무슨 일이 있어.”

 

수한은 영민의 물음을 지나치려다가 불쑥 앞자리에 앉은 넓은 어깨에 화풀이를 하고 싶어졌다. 가라앉았던 분노는 작은 불씨에도 쉽게 활활 타올랐고 수한은 허율의 등을 노려보며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들으란 듯 크게 목소리를 내도 여전히 허율은 미동도 없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수한은 의자를 책상에 바짝 가져다 붙이고 앞에 앉은 허율의 의자 다리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허율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한은 눈에 검은자가 사라질 정도로 치켜뜨고 허율의 등짝을 노려보았다. 수한의 적대적인 모습에 오히려 영민이 당황해서 수한을 말렸다.

 

“야, 한수한 너 왜 그래.”

 

영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한의 시퍼런 서슬에도 놀랐지만, 내일 없는 깡패처럼 의자 다리를 차는 모습에 평화를 사랑하는 영민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덜덜 떨기까지 하며 수한의 팔을 붙잡으니 초영과 한나가 가세했다.

 

“왜 그래? 수한이는 왜 이러고 영민이 넌 또 왜 그래?”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게 된 수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하필 그 비밀을 허율과 공유해야만 하는지, 잊고 싶은 기억이 또 불쑥 떠올랐다. 수한은 바짝 열이 올라 입에 바람을 잔뜩 넣고 입을 꾹 닫았다. 한일(一)자로 닫힌 입이 수한의 불편한 심기를 대신했다.

 

“뭐야, 애교 부리는 거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보고 초영이 놀려댔다. 수한은 화 난 거라고 말하려다 그냥 바람을 빼고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무어라 변명을 찾기도 전에 타이밍 좋게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셨고, 좋지 않던 분위기는 허공을 배회하다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한은 이제 완전히 대놓고 허율을 적대시했다. 허율이 근처에만 다가와도 눈을 뾰족하게 뜨고 째려봤다. 수한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수한의 적개심을 모르려야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유를 구태여 묻지 않았다. 성격 좋은 수한이 싫어하는 이유가 있겠지 하는 이유 모를 믿음과 더불어 싸늘한 허율의 태도에서 내심 알아차렸는지도 몰랐다.

 

수한과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허율보다 수한이 더 가까웠기에 수한을 위해 허율과 되도록 부딪히지 않으려고 했다. 수한이 허율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과 얼음 같은 둘을 붙여놓았다가 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수한이 허율을 배척하든 말든 과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남아있었고 과 행사에 불참할 수 없는 수한은 싫어도 허율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바로 오늘 개강총회처럼.

 

과대를 뽑는다며 모여서 투표하더니 결국은 또 술판으로 이어졌다. 대학교 행사들은 늘 술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점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허율이 끼어있는 점에는 불만이 아주 많았다.

 

사교성이 좋아 여기저기서 주는 술을 받아마시다 보니 수한은 또 금세 눈이 돌아갔다. 원래도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은 아닌데 허세만 잔뜩 들어서 꼭 단번에 술잔을 비워냈다. 게다가 쓸데없는 쇼맨십을 부린다며 다 마신 잔을 머리 위에 거꾸로 들고 탈탈 터는 것까지가 수한의 버릇이 되었다.

 

정수리도 축축하고 눈앞도 빙빙 돌았다. 당장 움직이기 힘든 수한은 혼자 구석에 처박혀 숨을 골랐다.

 

“얼마… 안 마셨는데….”

 

얼큰하게 취해 얼굴을 쓰다듬는 손도 느려진 채로 화장실로 가는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있던 수한은 하필 딱 화장실에서 손을 털고 나오는 허율을 발견했다.

 

술과 권허율.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이어지는 기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몽롱하던 술기운도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수한은 정말 깡패처럼 걸어가려는 허율의 앞을 막았다.

 

“뭐야?”

“야, 얘기 좀 해.”

“난 할 이야기 없어.”

“씨발, 왜 할 이야기가 없어?”

“취하려면 곱게 취할 것이지.”

 

허율은 앞을 막은 수한을 피해 몸을 살짝 틀어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한 수한의 고집스러운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딜 가?”

 

잽싸게 손을 뻗어 허율의 허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 그대로 허율의 옷자락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옷이 볼모로 잡힌 허율은 무력하게 끌려갔고 수한은 인적이 드문 곳이 나올 때까지 허율의 옷자락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술집을 나오고서도 한참을 걸어 도착한 어두침침한 흡연구역은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좌우로 고개를 휙휙 돌리며 확인 사살까지 마쳤다.

 

드디어 오롯이 둘만 남자 수한이 가슴속에 꾹꾹 담아두었던 분노를 터트렸다.

 

“너는 씨발 나한테, 그, 그 짓거리 했으면!”

 

차마 그 짓거리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 그거 성추행인 거 몰라!!”

BL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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