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은 자신의 영혼이 자신의 얼굴에 갇힌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 무슨 소리냐. 시도 때도 없이 개그 치고 상황극 하고 혼자 이상한 짓 하는데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건 그의 얼굴 때문이란 거다. 하지만 정재현은 통탄스러웠다. 관심은 관심이긴 한데… 자신의 개그를 받아 친다거나 웃어 주는 게 아니라 얼굴에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와, 재현이는 한마디만 해도 영화 촬영하는 것 같다. 아니? 난 지금 스탠드업 코미디 중인데. 아아, 원통하다. 외모지상주의에 제대로 찌든 대한민국아. 이딴 생각하는 것마저 정재현스럽다. 복 받은 줄 알아, 욘석아. 아무튼 그런 정재현 앞에 뚝 떨어진 스무 살짜리가 있었으니.


“태일 선배는 저거 콘셉트죠? 웃기려 하지 않는데 사실 모두를 웃기는 존재.”

“그런 것 같기도.”

“아, 짱나네. 나도 저런 콘셉트 잡을걸.”

“너도 맥락은 비슷해, 하진아. 웃수저인 척하고 싶지만? 사실은 아니니까. 태일 선배는 진짜 웃기고 귀엽잖아.”

“전 콘셉트 아니고 찐인데요? 오히려 님이 더 재미없고 웃기려고 노력하는 게 너무 티 남요.”

“난 구냥 그렇게 태어난 곤뎁….”

“뭐래, 미친. 말투가 왜 이래?”


질색팔색하며 인상을 구기는 서하진에 정재현이 보조개 깊게 파이도록 웃었다. 얘 앞에서만 자꾸 짓궂게 굴게 되네. 정재현은 평생 기득권층으로 살았기에 대부분의 사람에게 다정하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모두에게 양보하고 다정해야 해, 재현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모님 아래서 컸기 때문이다. 잘생기고 키 크고 집안 좋은 남자로 태어난 건 정재현의 선택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고, 이미 가진 거 베풀라는 뜻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무례한 언사를 사용한 적도, 조금이라도 기분 나쁠 만한 말투나 표정은 삼가는 편이었다. 물론 호구는 아니라 멕이고 싶은 상대 있으면 일부러 그러긴 했지만. 서하진은 그런 상대 아니다. 멕이고 싶던 적도 없고 마음에 안 들었던 적도 없다. 그냥 다만 좀….


“너 반응 때문에 자꾸 놀리고 싶다, 하진아.”

“거참, 취향 이상하셔요.”


그냥 좀 답지 않게 굴게 되는 거지. 자, 대한민국 전형적 로맨스 코미디 시작한다.

하여튼 이상해….



인정한다. 나 서하진이 좋다. 단 한 컷만에 마음을 인정하게 되니 이토록 민망할 수 없는데 정재현은 마음이 헷갈린 적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인정도 빨랐다. 좋으면 좋은 거지. 굳이 디나이얼 시기 겪을 필요 없이 그냥 서하진이 좋았다. 보면 놀리고 싶고, 장난 걸고 싶고, 질색팔색하는 얼굴 귀여워 보이고, 밥 안 먹고 아메리카노 들고 다니면 커피 뺏고 삼각김밥이라도 쥐여 줬다. 사범대 건물 들어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서하진 마주칠까 두리번거리는 걸 깨달았을 때 담담히 인정했다. 서하진 좋아. 하진이 좋아. 그리고 자신 있었다. 아까 외모지상주의에 찌든 대한민국이라고 통탄스러워 했던 건 좀 잊기로 한다. 사범 일 층에 걸린 대형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본다. 내 얼굴이면 자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정재현은 겸손한 인간이니 속으로만 생각한다.


오늘은 일주일 중 정재현이 제일 기다리는 날이다. 국교와 영교 공통 전공으로 한국어로 집필된 고전 소설을 고대 영어로 번역하는 강의였다. 유일하게 서하진과 겹치는 강의였다. 준대형 강의로 수강신청이 전공 강의 중 그나마 수월해 단체로 신청 선공한 서하진과 친구들은 꼭 붙어 앉았지만 정재현 역시 존나 꿋꿋이 서하진 옆에 앉았다.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원래 분명 지 친구들이랑 같이 앉았었는데(좋아하기 전이니까). 갑작스러운 옆자리 스틸에 당황한 서하진이 정재현에게 물었다. 선배 무리에서 팽 당하셨어요? 이 말이 진짜 고등학교 갓 졸업한 스물 같아서 정재현이 피식 웃었다. 웃어? 웃냐고. 기분 꽁기해진 서하진이 반격으로 정재현의 옆구리를 콱콱 찌르자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아- 소리 내고 너털 웃었다. 서하진의 친구들은 존나 어리둥절하다. 지금 연애질 맞지, 이거?


“오늘 강의 끝나고 뭐 해.”

“집 가요.”

“영화 볼래?”


서하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재현을 쳐다본다. 또 뭔 꿍꿍이지? 또 뭔 개수작이지? 서하진이 생각하는 수작과 정재현이 생각하는 수작이 좀 달랐다는 게 이 관계의 문제였다. 서하진만 몰랐다. 서하진 옆에 앉은 친구들도 귀 막고 연애질은 저리 가서 하라고 질색을 하는데도.


“뭔 영화요?”

“걍 영화.”

“그니까 뭔 영화요.”

“커다란 스크린으로 빵빵한 사운드와 함께 어두운 곳에서 좌석 예약하고 보는 것.”

“아니, 뭔.”


뭔 영화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영화 보며 두 시간 정도 같은 공간에 있는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듣다 못한 서하진의 친구들이 서하진의 등을 떠밀었다. 가, 하진아. 우리 오늘 같이 집 가기로 했잖아. 아니? 꺼져. 꺼지라고. 제발 좀 꺼져. 둘 다…(정재현은 선밴데 둘 다라고 해도 되나 싶어서 눈치 좀 봤다) 꺼지라고. 서하진 등 뒤에 정재현은 따봉을 날리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서하진을 보낸 친구들이 말했다. 사범 캠퍼스 커플의 탄생이라…. 아예 대놓고 공개 씨씨 할 건가 보다. 이렇듯 둘의 서사는 유명했다. 둘이 원래 싸워서(아니다) 사이 안 좋았는데(아니다) 싸우다 정들어서 사귄대(아직은 아니다). 둘이 사귀는 건 기정사실화였고, 정재현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사귀지 않을까. 나 모난 곳 없는데 날 좋아하지 않을까.


“오키, 저 그럼 과방 좀 다녀올게요. 책장에 제 전공책 좀 껴놓고 옴.”

“책장 공용이잖아. 누가 가져갈라. 무거운 거면 내 가방에 넣어.”

“거기 다들 책 안 읽어서 먼지 쌓임요. 제 거 하나 껴놔도 진심 아무도 몰라요.”

“그래, 나 여기 벤치에서 기다릴게.”

“정문까지 가고 있어요. 선배 걸음 개느리잖아. 전 개빠르거든요.”

“그렇구나. 나는 개~느리구나.”

“네, 전 개~빠르니까 가고 있으세요.”


같이 가고 싶은데. 선배 걸음 느려서 같이 걸으면 속터지니까 빨리 가 있으라고 축객령을 내린다. 정재현은 입술 한 번 비쭉이고 일부러 더 느리게 걸었다. 같이 걷는 시간이 많아야 즐겁지. 평소보다 더 느리게 걸어 그런지 삼십 분 만에 정문에 도착했다. 원래 이 정도 아닌데 좀 오버 해서 느리게 걷긴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재현이 정문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얘 왜 안 오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다쳤나? 걱정이 훅 끼친 정재현은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뒤졌다가 탄식했다. …우리 번호도 없구나. 결국 카카오톡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입술 물어뜯는 버릇 다 고쳐갔는데 지금 입술 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지. 불안하게. 정재현의 느린 걸음이 바빠졌다. 점점 뛰듯이 사범대 건물로 돌아가는 중에 갑자기 우뚝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재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귀에 가까이 했던 핸드폰이 서서히 멀어졌다.


“선배!”


긴박한 목소리였다. 정재현을 부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밭은 숨소리를 조절 못하고 헉헉댄다. 서하진의 머리카락엔 분홍색 벚꽃잎이 가득했고 손에는 작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서하진이 건넨 무언가에 옆에 있던 남자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진아? 그렇게 말하며 서하진 머리칼에 앉은 벚꽃잎을 떼어 준다. 정재현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과방… 헉, 연고 있었어요. 그거 주려고 뛰어온 거야? 그 외 대화는 정재현 알 바 아니었다. 서하진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뛰어 누군가에게 연고를 건네 줬다는 것. 저 남자가 다친 걸 신경 쓰고 저렇게 필사적이었다는 것.

이런 걸로 질투하면 너무 추한가. 사실 그 일련의 상황보다….


“아,”

“…….”

“선배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진짜….”


아까 그 남자를 선배라고 부르던 하진이 표정이 너무 이례적인 것이라 이런 속상한 마음이 드는 건데.

혼자 남은 서하진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귀에 갖다 대다가 뒤늦게 근처에 서 있는 정재현을 발견하고 넙죽 엎드렸다. 진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화도 못 내게 이런다. 평소엔 왈왈대면서 정말 미안한지 눈썹 축 쳐진 게 귀여워서 어처구니가 없다. 생각이 많은 정재현이 아무 표정 없이 아무 말 않자 서하진은 더 쭈굴쭈굴해졌다. 정말 죄송해요. 변명이라도 하겠습니다. 명백히 제 잘못이지만 왜 늦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친, 친구? 아니 아는 선배가 손에 화상 입은 것 같길래 사범대 건물 안에 있는 편의점 갔는데 거기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건물까지 뛰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저도 진짜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중간에 연락 못 해서 죄송해요.”


정재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설명을 들으니 마음이 더 복잡해져서. 아는 선배라고 정의하기엔 네 표정이 꽤 급박해 보이던데. 너 기다리는 데 쓰는 시간은 전혀 안 아까웠는데, 마음이 좀 쓰렸다. 정재현이 화났다고 생각했는지 서하진은 더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오늘 영화도! 밥도! 다 제가 사겠습니다!”


그 표정이 얼마나 결연하고 귀엽던지. 정재현은 쓰린 속으로 설핏 웃었다.


“어, 웃었다.”

“아닌데.”

“화 풀리신 겁니까? 제가 오늘 싹 모시겠습니다, 행님.”

“그래, 돌쇠야. 어디로 모실 거냐.”

“아니 행님이라니까 제가 왜 돌쇠! …죄인이니까 오늘만 돌쇠 하겠습니다, 마님.”


정재현은 딱히 호칭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누가 냅다 선배 말고 형이라고 하든 형이라고 친한 척하던 애가 뭐에 빈정 상한 건지 갑자기 선배라고 호칭을 바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훨 어린 애가 야라고 부르든 니라고 부르든 별생각 없었다. 유학파라 그런가 호칭은 관계에서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선배 말고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나?”


이 뭔 개 같은 발언입니까? 마치 잠자리 가지다가 지는 충분히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로 하아… 좋아? 이 지랄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 발화자가 정재현이라고? 서하진이 먹던 콜라를 주르륵 흘리며(만화적 표현 아니다) 두 눈을 깜빡였다. 진정, 진정. 전후사정이 있다. 그날 온종일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는 서하진의 얼굴에서 아까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 부를 때랑 자신을 부를 때가 아주 달라서 선배 소리 들을 때마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단 말이다. 쫌생이 같다고? 맞다. 정재현은 질투가 많단 말이다.


“오우, 오.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오빠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다.”

“그것 또한 축하할 일이네요.”

“진짜야. 그냥… 우리 나름 친해졌는데 선배 호칭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일부 거짓이다. 사실 오빠 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래, 나 오빠 소리 좋아한다. 오빠 소리 뱉는 서하진이 귀여울 것 같아서 좋아한다, 왜.


“그래요, 오빠.”

“헐.”

“왜, 뭐요.”

“진짜 할 줄 몰랐어서.”

“아, 됐다. 반응 별로라서 그냥 선배 해야겠다.”

“오빠 아니어도 되니까 선배는 하지 마.”


갑자기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잔뜩 서운한 표정으로 선배는 하지 말란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표정이 찐이라 서하진은 자신이 치려던 장난을 쏙 집어 넣고 말했다.


“그럼 그쪽 어떱니까, 그쪽.”

“선배보다 더 멀어졌는데.”

“나름 애칭 같지 않아요? 그쪽.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그쪽이, 저쪽이 하다가 서로 눈 맞는 거.”


눈맞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 키득키득 웃더니 정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피부가 투명해서 그런가 살짝 상기된 복숭아 색 볼과 약간 커진 동공이 보인다. 거기에 살짝 벌려진 입술까지. 급히 정색했다. 물론 저는 선배랑 눈맞으려고 그쪽이라고 부르는 거 아닙니다? 개정색하고 말해서 일 초 전까지만 해도 심장 쿵쿵 뛰던 정재현 역시 차게 식었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릴 뱉는다. 어, 바라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화장실 간다 해 놓고 결제까지 다 마치고 돌아왔다.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눈 맞는 거 안 바란다면서 예쁨 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퍽 눈물겹다.

그렇게 선배 사건은 정재현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정확히는 지우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그렇게 쫌생이스러운지 처음 알게 된 사건이라 잊기 쉽진 않았지만 쫌생이 기억 갖고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그렇게 지내는 중에 서하진이 폭탄을 갖고 온다. 정재현 가슴에 대못 박다 못해 쑥대밭 만들어 놓을 폭탄 말이다.


“바깥에 축제 하나 본데.”

“근가 본데요.”

“같이 가 볼래?”

“그쪽은 진지하게 친구가 없으세요?”

“근가바.”

“아이고…. 불쌍해서 가드리겠습니다.”


겹강 끝내고 짐싸는 중에 늘 그렇듯 정재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대학교 와서 첫 축제라 살짝 궁금하긴 했던 서하진이 수락하고선 뒤를 돌았다. 서하진의 친구들은 꺼지라며 손짓 중이었다. 우리랑은 내일 보자~ 선배랑 가라! 썩 꺼져라! 뭐지? 친구 없는 정재현 때문에 나도 친구를 같이 잃는 느낌이네. 서하진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정재현을 따라나섰다.

둘이 제일 먼저 한 건 푸드트럭을 조지는 거였다. 현금 있어요? 정재현이 뿌듯한 얼굴로 복숭아 웃음 지어 보이며 지갑을 촥 펼쳤다. 어, 나 다 뽑아왔어. 매 축제 때마다 뽑아 놓거든. 와, 준비성 미쳤따리. 이게 바로 화석의 축제 짬빠? 정재현은 자연스레 먹금 하고 가까운 푸드트럭부터 조졌다. 타코야끼 먹어 봐. 이거 닭꼬치도 맛있다. 헐, 여기 치즈볼 팔아요. 헐, 너 저기 서 있어. 나 여기 서 있을게. 자, 여기 현금. 저 이거 대자로 사 왔는데 괜찮아요?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난 무조건 제일 큰 걸로만 시켜. 그리고 서로 눈 마주치며 깔깔 웃었다. 둘이 죽이 아주 척척 맞았다. 


“하진아, 너 여기 묻었….”

“예?”

“묻었었는데 네가 혀로 낼름 해서 먹었구나.”


이때 좀 정떨어졌

어야 하는데 귀엽다. 오히려 낼름 한 혀가 귀여워서 바람 빠지듯 푸시식 웃었다. 얘가 뭘 해야 안 귀여울까 싶다. 정재현은 벌떡 일어나 푸드트럭 앞에 셀프존에서 휴지 챙겨 서하진에게 건넸다. 서하진이 또 장난을 걸었다. 방금 혀로 낼름 한 게 아니꼬우셨습니까? 더러웠습니까? 저 더럽습니까? 장난 톤이면서 상처받은 척하는 게 귀엽다. 평소 같으면 썩소조차 안 짓고 정색하며 응, 더러워 할 정재현이 계속 웃고 있다. 뭐지? 이 사람 콘셉트 바뀌었나? 정재현은 혀로 낼름 안 된 곳에 묻은 닭꼬치 소스를 닦아 주며 대답했다.


“걍 바보 같아서, 바보야.”


문장과 다르게 굉장히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 사람 낯간지럽게 왜 이런대. 정재현과 있을 때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로 붉어진 적 없던 서하진의 볼과 귀가 살짝 붉어졌다. 괜히 분홍분홍한 느낌에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아 서하진이 다른 손에 있던 알감자를 한입에 넣고 볼 빵빵한 상태로 말했다. 이제 그만 먹고! 놉시다! 뜹시다!!

첫 번째는 타로집이었다. 이미 배 빵빵한 상태라 여기서 무슨 활동을 했다간 화려한 토사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재현과 서하진 둘 다 연애운을 봤다. 물론 동상이몽이었다. 정재현은 마음 고생 꽤 하겠다는 결과를 받았고, 서하진은 누군가 자신의 길에 떡 버티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둘 다 서로를 위로했다. 저런 거 걍 다 미신 아닙니까? 전 안 믿습니다. 하지만 정재현은 어느 정도 믿었다. 실제로도 눈앞에 있는 얘가 틈을 안 줘서 마음 고생을 좀 하고 있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와씨! 개쩔어! 정재현 가즈아!!! 체교 이겨 보자!!!”


타로집으로 망친 기분은 몸을 움직여 풀었다. 체교를 이겨라 타이틀을 걸고 벤치프레스 무게 치기 대결을 했는데 체교 못지 않게 많이 치는 정재현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서하진 목청 때문에 쏠린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정재현이 십 키로 더 쳐서 이겼다. 서하진은 난리가 났다. 와~ 개미쳤다. 이제 안 깝칠게요. 미쳤다, 미쳤어. 여태 본 것 중에 제일 멋있는 순간이었어요!! 정재현이 잔뜩 상기된 볼로 수줍게 웃었다. 소매를 올려 민소매처럼 만들었던 탓에 팔이 펌핑 된 게 다 보였다. 핏줄까지 서 있는 게 신기해서 서하진이 물었다.


“만져봐도 돼요?”

“…….”

“싫으면 죄송합니다. 다른 의도 없이 진짜 갑자기 팔이 이렇게!! 커진 게 신기해서요.”

“난 쓰레기야.”

“예?”

“만져도 돼.”


스물셋 정재현 아직 혈기왕성하구나. 근데 좋아하는 여자애가 자기 몸 만져봐도 되냐는데 살짝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정재현은 자신의 팔을 신기한 듯 툭툭 건드리다 곧 물건 집듯이 꽉 팔뚝을 잡는 서하진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난 쓰레기구나. 정재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서하진은 감탄을 연발했다. 와, 진짜 개쩐다. 저 이제 진짜 안 깝칠게요. 이거 한 대 맞으면 죽겠다.

그 뒤로도 여러 과를 도장 깨기했다. 국교 부스로 가서 동화책 빨리 읽기도 했다. 태생부터 모든 게 느린 정재현은 개같이 지고 서하진한테 딱밤 개세게 맞았다. 이마도 투명하게 하얘서 그런지 아주 빨개진 게 잘 보인다. 서하진은 어떡해, 어떡해 하면서도 푸하학 웃었다. 아, 선배 진짜 죄송해요. 어쩌지? 이거 멍 드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덮어 주는데, 정재현은 볼은 맞지도 않았으면서 붉게 물들였다.


“이제 집 갈까요? 오늘 진짜 재밌었다.”

“지하철 역까지 같이 가자.”


정문까지 가는 길에서도 서하진은 계속 조잘댔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아니, 선배는 체교를 갔어도 됐겠던데요? 왜 영교 갔대? 영어 잘해요? I lived in America for 4 years, that’s why I’m here man. 와, 영어 발음 미쳤네. 유학파였어? 저 진심 몰랐음. 이런 대화를 하며 가던 중 서하진이 웃던 걸 뚝 멈추고 다른 곳을 쳐다봤다. 정재현 역시 서하진의 시선을 따라갔다. 풍선이 얼굴을 딱 가리고 있어 안 보이더니 아주 깜찍하게 풍선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다.


“하진이 집 가?”


그때 그 남자. 김도영이다. 부스 콘셉트인지 뭔지 토끼 귀에 토끼 페이스 페인팅을 한 김도영에 서하진은 심장 멎기 직전이었다. 미~친. 개귀여워. 김도영 너무 귀여워. 속으로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정색을 했다. 굳었기 때문이다.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앞머리를 정리한다. 귀는 잔뜩 붉어진 채로.


“아, 네…. 이제 집 가려고요, 헤헤.”


어쭈? 정재현이 역대급으로 싸늘한 표정으로 서하진을 쳐다봤다.


“그래? 집 조심히 가. 내일도 축제 와? 그때면 나 있을 거야.”

“네에~ 내일 꼭 올게요! 내일도 토끼 귀 하고 계세요?”

“아, 이거? 아, 부끄럽다. 뷰티과 갔다가 꾸밈 당하고 왔어. 이상해?”

“아뇨아뇨! 너무 귀여워요!!”

 

둘이 아주 화기애애하길래 정재현이 서하진의 소매를 쭉 당겼다. 그제야 김도영에 취해 헤롱헤롱하던 거 정신 차리고 정재현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곧 갑시다. 이런 의미였는데 정재현은 털이 삐쭉 설 정도로 놀랐다. 물론 서하진은 김도영 보고 있느라 신경도 안 썼지만.


“뭐야.”

“뭐가요.”

“저 토끼는 누구냐고.”

“그쪽이 봐도 우리 선배 토끼 같아요?!”

“뭔 소리야. 그냥 토끼 귀를 쓰고 있으니까….”

“도영 선배 진짜 토끼 같죠. 진짜 귀여워….”


그러다 정신이 들었는지 큼큼 거리며 정재현에게 속삭인다. 제가 도영 선배 좋아하는 거 비밀입니다. 정재현은 귓속말을 듣기 위해 살짝 숙였던 허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사람이 또 장난 치네 싶던 서하진은 에휴 됐다 하고 먼저 가 버렸다. …진짜 굳은 건데. 팔랑팔랑 뛰어가다 뒤돌아 웃으며 빨리 안 오십니까? 하는 서하진에 정재현은 애써 웃었다. 처음 하는 짝사랑에 심장이 걸레짝이 됐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정재현은 아까 서하진이 달래듯이 잡아 준 손의 온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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