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희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늘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애를 쓰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10분 넘게 늦어버렸다. 내키지 않는 자리에 미적거린 탓도 있지만 영인이 웬일로 주말에 늦잠을 자지 않고 헤비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탓도 컸다. 


"트럭 몰다 보니 휴게소 음식 먹고 싶어서. 좀 먹고 가. 나 다 못 먹어."

"아침부터 소떡소떡에 알감자라니…?"

"맛있잖아. 맛있는 거엔 아침 저녁 없다구!"


감자에 이쑤시개를 꽂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영인에 희수는 결국 식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감자에 설탕이냐고 케챂이냐고 묻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오늘 받을 스트레스에 기운이 없었는데, (이유는 모를지라도) 눈치채고 위로해 준 건가 싶어 좀 고마웠다. 


"고마워. 알감자 맛있다."

"다행이네. 콜라 마실래?"

"아이구. 완전 건강식이네?"

"맛있으면 0칼로리야."


그러면서도 양심은 있는지 제로 콜라를 따라서 건네는 영인의 선의(?)를 희수는 감사히 받아 들였다. 


"채지수 만나는 거라며. 걔 맨날 늦는데 뭐. 어차피 일찍 가 봤자 기다릴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나랑 아침 먹느라 늦었다 그래. 다 못 먹을 것 같다고 붙잡았다고."

"아하하…. 고마워. 사올 거 있어?"

"아니. 안부나 전해 줘. 뭐 근황 얘기하다 보면 당연히 나오겠지만."

"역시 같이 갈 걸 그랬네…. 지수 보고 싶었구나."

"아니. 귀찮다니까! 딱 안부 전하는 정도의 마음이야."


손을 훠이훠이 내젓던 모습. 덕분에 마음도 속도 든든해진 채 희수는 약속 시간에 늦게 된 것이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니 한눈에 눈에 띄었다. 하얀 피부에 까만 생머리. 깔끔하게 떨어지는 핏의 롱코트가 모델처럼 잘 어울렸다. 나름 차려입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에 희수는 움찔했다. 

역시 빼앗긴 사람은 빼앗은 사람을 못 당하는 걸까. 재석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위에서 쓴물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지수 역시 희수를 발견했는지 살짝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함이 가득한 그 표정은 꽤나 희수에게 낯선 것이었다. 


"오느라 힘, 힘들었지. 미안."

"아냐. 나야말로 늦어서…. 미안해."

"으으응!! 희수 네가 뭐가 미안해! 내가…. 내가 다 미안하지."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뭍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만큼 애처로운 것이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희수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과가 곧이곧대로 다가오질 않았다. 희수는 그래도 웃어 보이며 지수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으응. 괜찮아.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수야."

"응. 훌쩍."




"그랬구나…."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정말 별거 아닌 이유, 실수라는 말 아래에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희수는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재석의 집에 살면서 부른 유일한 친구가 지수였다. 은근히 말을 잘하는 재석과 지수가 비슷한 이름만큼이나 죽이 잘 맞는단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 만남일 거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지수가 그동안 만나 온 스타일과 재석은 꽤 많이 달랐고, 특히 외모가 그랬다. 분위기 있게 선이 고운 재석과 달리, 지수는 늘 훤칠하게 키가 크고 선이 굵은 타입만 만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실수는, 딱히 타입이 아니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그냥 진짜 술이…. 안 믿겠지만…. 미안. 무슨 말을 해도 변명 같겠다. 네가 듣기엔."

"조금. 그래…."

"미안해……."

"후우."


지금. 그게 말이냐고. 재석에게 한 것처럼 냉정하게 처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10년간의 추억은 희수를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로 인해 지수에 대한 애정이 재석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컸던 탓도 있었다. 결국 희수는, 늘 그랬듯이 지수에게 져 주고야 말았다. 테이블 아래로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나 정말 상처 많이 받았어."

"응. 알아. 정말,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 거지?"

"응…! 나 진짜 잘할게. 미안해. 희수야."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아. 채지수."


화악 밝아지는 표정. 희수는 제 안의 무언가 깎여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냥 이 모든 악몽 같은 일에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사랑한다며 자신을 와락 껴안은 지수의 품에서도 희수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선 등을 토닥이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러면 되는 거였다. 이러면. 



6.2.


미안하다며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풀 코스를 대접한 지수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선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며 나섰다. 놀랍게도 평소와 비슷한 모습에 희수 역시 평소와 비슷하게 지수를 대할 수 있었다. 


"유민이한테 얘기도 안 했지…. 진짜. 조희수…."

"응. 뭐 좋은 얘기라고…. 굳이 그래. 유민이나 영인이가 네 욕 하는 거, 듣고 싶지도 않고."

"…넌 진짜 애가 어떻게 그래? 왜 이렇게 착하니!"

"칭찬해도 아무 것도 안 나와~"

"잠, 근데 영인이도…? 너 영인이한테도 말 안 했어?"

"아, 응."


영인이네에 갔다는 것은 유민이든 영인이든 지수에게 전했을 게 분명했다. 그때조차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놀랐는지 눈이 조금 커진 지수에 희수는 팔을 쓸며 말했다.


"영인이는 오늘도 사실 나오고 싶어하는 눈치였는데."

"영인이가? 아니…. 오늘? 나 만나는 거. 얘기했어?"

"응. 안부 전해 달랬어."

"공영인…. 둘이 많이 가까워졌네?"

"아무래도 같이 사니까…."

"아 아직, 지금도?"

"응."


살짝 느슨해진 팔짱. 희수는 뭐가 이상한가 싶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이내 고개를 살짝 젓더니 해맑은 미소를 띠고선 다시 물었다.


"고생이었지. 갈 집은 구했어? 우리 같이 방 보러 다닐까?"

"아…. 일단은 영인이랑 같이 살기로 했어."

"……아?"

"유민이 부모님 모시러 내려 가고, 방이 비어서. 내가 그 방 쓰기로 했어. 영인이가 되게 싸게 빌려 줘서."

"그렇구나- 친구라도 같이 사는 거 쉽지 않을 텐데."


약간 만감이 스치는 얼굴로 지수는 이내 자기 때문에 미안하다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희수는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모습에 조금 더 마음이 풀렸다. 영인이가 잘해 준다고 너무 걱정 말라는 말에도 지수의 좁아진 미간은 펴질 생각을 않았다. 


"걔가 괴롭히면 바로 나와? 내가 방 구하는 거 도와 줄게!!"

"듣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네."

"진짜야. 걔 꼭 영감쟁이처럼 투덜거리잖아."


새끼손가락까지 거는 모습에 희수는 웃으면 마주 걸었다. 영인은 무심해 보이긴 해도 좋은 사람인데 두 친구 모두 이러는 게 한편으론 좀 아쉽기도 했다. 



6.3.


"뭐야! 아무 것도 안 샀어? 구경하려고 기다렸더니."

"미안.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결정장애 때문에 못 샀어? 사야 후회가 없어! 나처럼."

"너는 너무 막…. 아하하. 째려 보지 마~."

"아주 무례해. 처음으로 후회할 뻔했어."

"미안. 미안."


저녁 안 먹었냐며 능숙하게 배달어플을 켜는 영인에 희수는 마트 비닐봉지를 들어올렸다. 뭐냐는 듯 눈빛으로 묻는 영인에게 희수는 미소로 화답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조희수 나름의 방법, 그건 바로 요리였다. 


"오늘은 집에서 해 먹자. 내가 해 줄게."

"오?"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한테 맞을진 모르겠지만."

"안 그렇게 생겨서 편식하는구나. 조희수?"

"풋."


누가 봐도 자기 얘기인 걸 모르는 척 돌리는 영인을 보고 희수는 말없이 장을 봐온 식품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었다. 영인은 별 말이 없이 웃기만 하자 멋쩍어졌는지 자기 그렇게 까다로운 거 아니라며 옆에 와 수납을 도왔다. 




된장찌개와 호박전, 브로콜리 참깨 무침까지 곁들인 밥상은 소박하지만 따뜻했다. 영인은 맛있겠다며 냠 하고 찌개를 한 술 크게 떠 먹었다. 그리곤 반찬들을 하나씩 맛 보았다. 희수는 마치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의 의견을 기다리는 참가자처럼 조심스레 영인의 평을 기다렸다. 


"맛있는데?!"

"그래?! 다행이다…!"

"빨리 해 주지. 그럼 더 빨리 같이 살자 했을 텐데."

"너무 목적성이 짙은 거 아니야?"

"맛있네. 집밥다운 집밥 진짜 오랜만이다."

"그래? 진짜?"

"속고만 살았어? 진짜야."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뚝딱 찌개에 밥을 말아 퍼 먹는 모습이 복스러웠다. 적게 먹는 것치고는 (입맛에 맞을 때 한정이지만) 깨작거리진 않는다는 점이 또 영인의 장점이었다. 

희수는 자신 역시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술 떴다. 오랜만에 만들었지만 꽤 맛이 좋아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비록 신부수업의 일환으로 배운 요리였고, 행복한 유월의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눈앞의 제 오랜 친구가 꼭꼭 씹어서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또 보람이 있었다. 


"또 해 줄게. 먹고 싶으면 말해. 해놓고 나가도 되고."

"주말에 너 한가할 때 해 줘. 출근하기도 바쁘면서."

"그래도. 저녁 집에서 먹잖아."

"사먹고 올 때도 많고, 원래 저녁 그렇게 거하게 안 먹으니까."

"그럼 주말에 해 줄게. 같이 먹을 사람 있으니까 만드는 재미 있어서 좋아!"

"일등신붓감이네."

"아…. 응! 고마워."

"아."


젠더감수성도 부족한 발언이었을 뿐더러 파혼한 지 얼마 안 된 희수에게 하기엔 더더욱 부적절한 발언이었음을 깨달은 영인은 눈을 꾹 감고 후회했다. 착한 희수는 그런 영인이 민망할까 말을 돌려 주었다. 


"내가 장 볼 때 필요한 거 있으면 사올게. 얘기해 줘."

"…생활비 지갑 만들어서 화이트보드 옆에 놓을게. 식재료도 거기서 사."

"나는 아점도 먹는걸."

"나도 간간히 꺼내 먹을 거니까. 괜찮아. 돈 안 내면 꺼내 먹을 때마다 허락받아야 하잖아. 찐으로 네 거면 이름표만 붙여 둬."


경험자다운 영인의 말에 희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 밥술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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