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여름은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습을 하느라 성대를 너무 혹사했다는 이유로 잠시 보컬 트레이닝을 쉬라는 명령 아닌 권고가 떨어졌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직전이네. 이럴 때는 트레이닝 쉬어야지.”

 

헤디는 여름의 등을 두드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헤디는 이틀 전에 프랑스 파리 쪽에서 공연이 있다며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질질 끌고 집에서 나섰다.

 

청소기를 모두 돌리고 막대 걸레를 꺼내 방바닥을 닦고 있을 때 폰이 울렸다.

 

에바였다.

 

“너 요즘 왜 회사 안 나와?”

 

에바는 대뜸 물었다.

 

여름은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목이 완전히 가기 직전이에요. 보컬 선생님이 당분간은 트레이닝 쉬래요.”

“그래? 어쩐지 그 동안 무리하더니만...... 말도 최대한 하지 말고 큰 소리 안 내게 조심해. 목 한번 망가지면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가거든. 그래. 알았어.”

 

에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걸레질을 끝낸 여름은 소파에 앉아 따뜻한 꿀물을 마셨다. 인터넷에서 목이 아플 때 뜨거운 꿀물을 마시면 효과가 좋다는 글을 본 덕분이었다.

 

그렇게 소파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폰이 울렸다.

 

여름은 폰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름이 전화를 받자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 씨. 휴식 잘 취하고 있어요?”

 

목소리가 아니라 말투만으로도 여름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은영의 목소리에 놀란 여름은 꿀물이 든 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이, 이사님. 제 번호는 어떻게.......”

“여름 씨가 우리 회사 소속인데 그 정도는 금방 알죠. 여름 씨. 목 상태는 어때요?”

“며칠 쉰 덕분인지 괜찮아졌어요.”

“그래요. 여름 씨도 우리 회사 자산인데 망가져서는 안 돼죠.”

 

잠시 침묵을 지킨 은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름 씨. 점심 먹었어요?”

“아니요. 저는 원래 점심을 조금 늦게 먹거든요.”

“우리 집으로 올 수 있겠어요? 걸어서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사님 댁을요? 제, 제가 어떻게 감히......”

“저도 휴가 기간이라서 그래요. 잠깐 여름 씨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진수성찬은 대접하지 못하겠지만 섭섭하지 않게 차릴게요. 오실 거죠?”

 

여전히 부탁이지만 명령에 가까운 말투.

 

여름은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네. 갈게요.”

“고마워요. 제 집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여름 씨도 놀랄 거예요. 생각보다 가까이 살아서.”

 

***

 

여름은 은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과연 가까운 곳이었다. 네비게이션 어플이 안내하는 대로 걸어갔는데도 금방 도착한 기분이었다.

 

은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 역시 꽤 비싸 보였다. 대충 봐도 헤디 언니의 집과 비슷한 가격일 것 같았다.

 

여름은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 와요. 여름 씨.”

 

편하게 차려 입은 은영이 문을 활짝 열며 여름을 반겼다.

 

여름은 은영의 모습이 낯설었다.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고 한쪽 어깨가 드러날 만큼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은영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화장을 하지 않고 안경을 낀 은영은 본래 나이를 되찾은 것 같았다.

 

“바로 와 주셨네요. 여름 씨. 육회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비싸서 자주 못 먹었지만......”

“저도 육회 좋아해요.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제 손으로 만들어서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은영은 여름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후 말끔하고 기다란 싱크대 앞에 서서 요리를 계속했다.

 

정말 깔끔한 집이었다. 에바도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는 편이었지만 은영의 경우에는 한술 더 떴다.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은 기름을 칠하지 않았는데도 기름을 칠한 것처럼 반짝거렸다.

 

은영의 집은 헤디의 집만큼 넓었지만 어딘지 휑했다. 정말 필요한 가구나 가전제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공백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새하얀 천장과 벽으로는 얼룩 하나 티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마치 집이 아니라 병원에만 있는 무균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 씨. 음식 거의 다 됐어요. 제가 저쪽에 둔 거 식탁에 날라주세요.”

 

은영은 역시나 명령 같은 부탁조로 말했다. 여름은 얼른 일어나서 접시에 든 음식들을 식탁으로 날랐다.

 

“맛있네요. 정말.”

 

여름은 육회를 먹으면서 말했다. 정말 맛있었다.

 

입 안에서 고기가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그렇죠? 이래봬도 제가 요리가 취미거든요. 순수하게 저를 위한 취미에요. 제가 입맛이 조금 까다로운데 다른 사람 손으로 만든 음식은 만족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은영은 육회를 조금 덜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고는 말을 이었다.

 

“역시나 헤디한테 거절당했어요. 저희 회사로 데려오는 건 힘들어 보이더군요.”

“역시......?”

“네. 생각보다 욕심이 없는 친구더라고요. 여기에서 만족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워낙 어릴 때부터 성공했으니까요. 헤디 언니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 지친 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여름 씨가 헤디를 잘 자극해 줬으면 좋겠는데.”

“네?”

 

은영은 여름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헤디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동기 부여도 많이 부족하고요. 헤디는 프라이드라는 명분으로 포장을 하긴 했지만 제 생각은 어디까지나 매너리즘이에요. 이럴 때는 옆에서 소중한 사람이 잘 다독여 주어야죠.”

“제, 제가 어떻게 감히......”

“여름 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헤디는 여름 씨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여름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여름을 한참 바라보던 은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올해 첫 휴가에요.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몸이 조금 안 좋아졌어요. 회장님이, 저희 숙부님이 억지로 휴가를 쓰게 하셨죠. 그래서 이렇게 집에 있는 거예요. 저는 이 상황이 굉장히 낯서네요.”

“네?”

 

여름이 육회를 우물거리며 반응하자 은영은 대답했다.

 

“이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건 이혼하고 나서 처음이거든요. 어쩌다 보니 여름 씨랑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아요. 회사 연습생이랑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건 좋지 않은 일인데......”

“죄송해요.”

 

여름은 황급히 사과를 했다. 은영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여름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저의 과오죠. 그렇다고 이 상황을 되돌릴 생각은 없어요. 여름 씨랑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느낌이거든요.”

 

여름은 지나에게 받았던 부탁이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괜히 긁어 부스럼 상황이 되는 게 아닐까?

 

여름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 들었는데요. 저희 회사에서 내년에 또 걸그룹을 데뷔시킨다던데..... 사실일까요?”

 

조심스럽게 육회를 먹던 은영이 대답했다.

 

“계획상으로는 그래요. 그런데 이 바닥 일이 늘 그렇듯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올해 데뷔한 애들이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오면 내년에 나올 애들은 데뷔가 연기되는 거고요. 반대로 올해 데뷔한 애들이 성적이 안 좋으면 내년에 나올 애들이 빨리 데뷔하겠죠?”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여름은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나 은영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을 한참 바라보던 은영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물었다.

 

“여름 씨. 누가 물어보라고 시켰어요?”

“네?”

“누가 시켰어요? 말해 봐요.”

 

여름은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졌다. 이렇게 빨리 들통이 나다니. 이 사람 뭘까?

 

“아, 아니에요. 순전히 제가 궁금해서......”

“여름 씨.”

 

은영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말했다.

 

“여름 씨 거짓말 하는지 안하는지는 훤히 보여요. 괜히 제 앞에서 가식적으로 굴지 말아요. 저는 이쪽으로 도가 튼 사람이거든요. 누가 여름 씨한테 물어보라고 시켰는지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희수? 지슬이? 영신이? 지나? 미정이? 이 중에 한 명이죠?”

 

여름은 눈을 꼭 감고 움찔했다. 여름은 이내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은 한참 뒤에 낯을 들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면목이 없어요. 이사님. 저도 거절하고 싶었는데 결국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왜죠? 왜 여름 씨가 거절을 못하죠? 여름 씨 일이 아니잖아요?”

 

은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응했다. 여름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애들이...... 너무 절박해 보였어요. 이렇게라도 도와줄 수 있을까 싶어서......”

“여름 씨. 그건 그 애들이 선택한 길이에요. 그런 감정 가질 필요 없어요. 그 애들이 데뷔조에서 떨어지면 누굴 원망할까요? 저 김은영을 원망해요. 반대로 그 애들이 데뷔조에 든다면 누구한테 고마워할 것 같아요?”

“화이트로드를.......”

“천만의 말씀. 일이 잘 풀려서 고마움의 대상이 되는 건 자기자신 뿐이에요. 끽해야 자기 가족들이겠죠. 이게 무슨 의민 줄 알아요?”

“......”

“여름 씨가 절박한 처지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기본 마인드가 이런 식이라고요. 화이트로드 아이돌 연습생이면 이미 준연예인이고, 개네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마인드가 오래 전부터 뿌리박혀 있어요. 저는 그중에서 그나마 실력 좋고 인성 좋은 아이들을 골라내는 역할이고요. 여름 씨가 저한테서 정보를 얻어낸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여름 씨한테 고마움을 느낄 것 같아요?”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하. 순진해요. 진짜.”

 

은영은 처음으로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여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결국에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도 이사님한테 결국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웃기면서도 슬프지 않아요?”

“무슨 의미죠?”

“저희 인생이요. 블랙코미디 주인공이 행복하진 않잖아요? 서로를 믿지 않고 등에 칼 꽂을 궁리만 하는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라니. 이런 블랙코미디가 어디 있을까요?”

 

은영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름은 다시 육회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순진하다고 저를 욕하셔도 좋아요. 다만 저는 그 아이들이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래서 부탁을 해오는 걸 차마 거절을 못했고요. 이건 믿음 이전에 감정의 문제에요.”

 

여름은 거기까지 말하고 육회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데.......”

 

저편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던 은영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헤디하고 에바가 왜 넘어갔는지 알겠네요. 여름 씨 같은 사람 옆에 있으면 인생이 외롭진 않겠어요. 제 눈에는 여름 씨가 너무 낙관주의자인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요. 여름 씨는 살아가면서 더 배신도 당하고 그럴 거야.”

“그럴 것 같아요. 다가올 일은 그렇게 겪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괜찮아요. 아는 동생이 했던 말인데...... 저는 제가 마음에 들어요.”

 

무표정하게 눈을 뜨고 여름을 바라본 은영은 말했다.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게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일어났다.

 

은영은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름 씨한테 질문 부탁한 아이한테 이렇게 전해줘요.”

 

여름은 은영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은영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다시는 저한테서 뭐 캐내려고 하지 말라고요. 한번만 더 맞먹으려고 들면 누군지 찾아내서 당장 잘라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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