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유료 발행 |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물론 모든 것은 자신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고양잇과라는 건 크게 상관이 없는 건가? 재현은 손가락으로 널따란 제 사무용 책상을 의미 없이 탁탁 쳤다. 비서가 한참 전 가져온 결재서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잡았다 싶으면 도망치고 되었다 안심하면 이렇게 감감무소식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낚아채 제 옆에 두고 싶었지만, 그러려고 그리 오랜 시간 공들인 게 아니었다. 반류주제에 무슨

재맠 | 권력과 재력.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어지럽게 뒤엉켜 발전 혹은 퇴보해왔다. 모두를 동시에 지닌 자는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봉건사회에도, 근대 사회에도, 심지어 현대사회에도 그 형태와 이름만 달라졌을 뿐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딴 어려운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이러한 인간의 역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현재 세상을 뒤흔드는 화두는 바로, 히어로. 그리고 그 히어로가 되기 위

재맠 | 열아홉. 청소년이라기엔 다소 억울하고 성인이라기엔 채 자라지 못한 시기. 하지만 그럼에도 열렬히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다는 것. 이보다 더 짜릿한 일은 없을 테니까. “야, 정재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글쎄……. 요즘 하는 생각의 끝에는 늘 그가 있다. 시작이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마지막은 같았다. 온통 마음속에, 머릿속에 그

재맠 (소장본용 수정본) | 분명 괜찮았다. 약간의 열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무더움에 짜증이 확 인다든가 입맛이 돌지 않는다든가 따위는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지난주까지는. 하지만 분명 달랐다. 아니, 달라졌다. 어느새 5월이 지나고 6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세상이 봄을 벗고 여름을 입는 시기. 이는 만고불변한 자연의 이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작 며칠 차이로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걸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에는 퍽 이른 감이 있는 초여름이었다. 그러

재맠 | “네? 어디시라고요?” 마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주위의 시선에 다시 소리를 낮췄다. 덕계못은 불문율이 틀림없는데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믿을 수가 없어 전화를 건 당사자에게 몇 번이나 확인 작업을 했다. 전화를 끊은 마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크!!” “야, 정신 차려!” “이 새끼 눈에 초점이 없는데?” 그때 마크가 자리에서 다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다음 생은 없어.

재맠 | 그 시절 우리는. w. ir 1. 우리 학교에는 몇 가지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째서 한문 선생님은 하나같이 개량한복을 선호하시는가? 영어 선생님은 가방이 아닌 까만 비닐봉지에 교과서를 들고 오시는가? 급식실에는 종이 치자마자 가는 데도 늘 다른 사람이 먼저 밥을 먹고 있는가 등등의 시답잖지만 꽤나 흥미로운 것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미스터리는 대단한 수재이신 이 몸, 바로 김정우님의 근래 최고 관심사인 정재현과 이민형,

재맠 | 스물 넷. 요새 나이를 세는 일이 잦아졌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딱 좋은 시기. 일반적인 인생의 길이를 생각한다면 셈하는 것 자체가 이른 것일지 모르지만 요즘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나이라는 게. “이민형.” “…·어?” “무슨 고민 있어?” 술에는 인연이 없는 김정우와 카페에서의 만남은 이제는 퍽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내놈들끼리 무슨 카페야? 라며 우스운 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건 제 편견이었다. 생각보다 분위기와

재맠 | 생방송 시작 30분 전. 스튜디오는 분주했다. 메인 조종실에는 이미 피디와 스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종이라 쓰인 큐시트를 보고 있음에도 절대 ‘최종’은 존재하지 않은지라 현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타이틀 걸었어요? 자막은? 오디오? 조명? 모두 준비됐죠? 피디의 우렁찬 목소리에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얼추 마무리가 되어가는 상황에 그제야 스튜디오 온에어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피디가 입을 열었다.

재맠 | 스물. w. ir 20살. 성인이 되면서 ―법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다.― 민형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들 다 겪는, 대부분 십대에 마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금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뒤늦게 몰아닥친 걷잡을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민형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