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독한위스키 06

W. 율이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어. 당장 돈 벌 길도 없고 부모님이 남긴 유산 같은 것도 하나도 없었어. 지금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흔한 조부모님도 친척도 나한텐 없었거든. 아마 넌 몰랐겠지만. 그래서 처음엔 열심히 알바해서 돈 벌었어. 근데 그거 버는 걸로 나랑 동생 한 달 생활하는 거 쉽지 않더라. 그래서 몸 팔았어. 그것만큼 쉽게 돈 벌 수 있는 게 또 없더라. 근데 동생이 스무 살이 되고부턴 관뒀어. 동생도 돈 벌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관뒀는데... 그때 만났던 노인네가 아직도 찾아와. 한 번 하자고. 아니면 자기 세컨드라도 하래. 가끔은 스토킹도 당해. 그래서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 하나만 할게. 오늘 하루 남자친구인 척해주라. 사실 오늘 그 노인네 만나기로 했어. 제대로 떼어내려고. 원래는 동생 부르려고 했는데 너 만나고 마음이 바뀌었어. 동생은 아직 내가 몸 팔았었던 거 모르는데 이런 일에 괜히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아.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한 번 만 들어줘. 종인아. 응?


주현의 사정은 구구절절이 길었다. 종인이 딱히 주현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학창시절 남자친구 하기로 해놓고 그녀를 혼자 힘들게 한 값을 나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화요일이었지만 종인은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사실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었지만 그냥 종인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야?]

주현의 얘기를 듣는 동안 종인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한 듯한 준면의 문자였다. 형 미안, 오늘 점심은 같이 못 먹겠다. 답장은 간결하게 보냈다. 사정 설명은 나중에 할 것이다. 아마 준면은 이해해 줄 것이다. 그는 그런 걸로 삐질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종인은 잘 안다.





*





경수는 결국 마케팅부 직원들과 수제 버거 집에 왔다. 발이 넓은 찬열이 맛집을 찾아냈다며 여기저기 점심 식사를 권한 덕분에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사실 경수는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수 성격상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점심시간이 달갑진 않았다. 


"도대리님! 이번에 KJ랑 계약 진행 대리님이 맡으셨다면서요! 이번에도 대박날 것 같은데요? 또 승진하시는 거 아니에요?"

찬열의 옆에 있던 여사원 하나가 경수에게 아부를 떨었다. 우습게도 이 행렬 중 가장 높은 직급을 단 사람이 경수였다. 눈치 빠른 찬열이 점심 식사라도 맘 편히 하자며 과장급 이상 직원들에겐 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경수는 회사에서 꽤 신임을 받았다. 처음에 인턴으로 들어왔을 땐 회장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경수를 경계했다. 뒤에서는 빽이라고 까고, 앞에서는 혹여나 회장님한테 잘 보일 수 있을까 아부 떨었다. 하지만 경수가 대리 직급까지 오는 동안 경수의 평판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경수가 일을 잘해서임과 친절한 성격 탓이었다. 다소 딱딱한 면은 있지만 경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줄 알았다. 게다가 꽤 귀여운 외모로 찬열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기는 있는 편이었다. 거기에 재벌 2세라는 점 까지 감안하면 경수는 어디 가서 절대 인기 없을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 방금 여직원이 했던 칭찬은 경수에게 달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우고 싶은 일이다. KJ와의 계약. 김종인과의 만남. 경수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분명 KJ 건은 다른 사람한테 넘겼을 것이다. 그렇게 김종인 생각을 또 하고 있는데 또 김종인이 보였다. 눈앞에.


"도대리님 뭐 하세요? 들어오세요."

저... 여기 말고 다른데... 하고 경수가 우물쭈물했지만 이미 찬열을 포함한 직원들은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러니까, 하필 찬열이 고른 이 수제 버거 집에 김종인이 있었다.


"대리님? 여기 앉으세요!"

찬열이 권한 자리에 앉으면서도 경수는 종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종인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김종인, 게이 아니었어?



맞은편의 여자가 떠먹여주는 걸 받아먹는 김종인과 프렌치프라이를 포크로 콕 집어 김종인에게 내미는 여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종인의 표정이 약간 지루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경수의 눈엔 그것까지 보이진 않았다.

그럼 본인이 게이라고 했던 건? 아니, 그럼 나한테 키스한 건?


결국 경수가 내린 결론은 나 가지고 제대로 놀았겠다? 였다. 제대로 속아주는 경수를 보며 김종인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그때 술 먹고 죽으라고 집도 안 데려다주는 건데!






*





경수는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했다. 이제서야 슬그머니 지려고 하는 해를 보며 퇴근하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분명 낮에 본 김종인을 생각하면 화가 끓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정시 퇴근이라 나름 들떠있었다. 물론 누군가 시켜서 야근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시 퇴근이 기분 좋은 일이란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런데 그 들뜸은 곧바로 누가 한 대 친 것처럼 축 처졌다.


김종인이 있었다. 또, 또!

아까 봤던 여자와 헤어지는 길 같았다. 김종인은 여자를 손까지 흔들어가며 보냈다. 그리고 경수가 있는 쪽으로 왔다. 아직 김종인은 경수를 본 것 같지 않았다. 지금 도망가면 김종인을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경수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도망가.



"여자친구?"

"도경수?"

경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김종인이 뭔가 의외란 듯이 경수를 쳐다봤다. 


"야근할 줄 알았는데 정시 퇴근?"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경수는 종인이 뭐라고 대답할지 예상 가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이 할 답도 정해두지 않았다. 그냥 물었다. 종인이 맞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혹은 아니라고 하면? 그럼 아까 수제 버거 집에서 봤던 그건? 아, 모르겠다. 정말 김종인 같은 거 한 치 앞도 예상 가지 않았다. 


"여자친구... 아닌데."

"아까 보니까 막 서로 떠먹여주고 난리던데, 아니긴 뭐가..."

"혹시 이거 질투인가?"

"그럴 리가."

종인이 착각한 대로 질투 같은 거 절대 아니다. 경수가 종인에게 질투할 이유 같은 건 개미 똥만큼도 없다. 오히려 게이가 아니라고 하면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경수가 이토록 김종인 여자친구 존재에 집착하는 건 종인이 경수를 놀려먹었다는 점에서 있다. 게이도 아니면서 경수를 놀리려고 게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정말로! 그뿐이었다.


"어쨌든, 진짜 여자친구 아닌데."

"..."

"나 근데 도경수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네?"

"오늘도 저번처럼 저기 있으면 만나지 않을까 싶어서."

종인이 저번에 경수를 만났던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그런데, 날 왜.



"왜긴, 왠지 몰라도 보고 싶으니까."





*





종인은,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본인이 게이일 리 없다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데 도경수가 보고 싶었다. 우습지만 그랬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주현의 남자친구 대역을 해주느라 회사는 땡땡이쳤고, 그 남자친구 대역이 일찍이 잘 끝나서 경수가 일하는 곳으로 온 것이다.


종인은, 지금도 스토킹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현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수제 버거집에서도 진짜 남자친구인양 행동했다. 그런데 주현의 그 말이 사실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랑 잔지 몇 달이나 됐다고 새 남자친구를 만들어?! 라고 소리쳤다. 그에 주현이 제가 아저씨랑 잤다고 해서 아저씨 애인이라도 된 줄 알아요?! 하고 받아쳤다. 아주 재밌는 싸움거리였다. 씩씩대던 남자가 주현을 한 대 치려고 해서 종인은 중간에 막았다. 그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쳐 줬다. 한 대 맞은 남자가 욕지거리를 작게 내뱉더니 줄행랑을 치는 걸 잡으려다 말았다. 일은 그렇게 끝났다. 그 남자가 다음번에 주현에게 또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그 땐 종인의 몫이 아니다. 어찌 됐든 주현은 고마워했다. 그리고 서로의 연락처는 교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종인은 경수 앞에 있다.




종인은 꽤 솔직한 편이었다. 항상 그 솔직함이 단점이긴 했지만. 어쨌든 종인은 도경수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보고 싶고, 보니까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고 싶다."

그러니까, 종인은 가끔은 솔직해지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다.


종인이 아버지 회사에 취직하고 난 후로부터는 말 수를 줄였다. 항상 너무 솔직한 것이 단점이었던 종인은 세상을 살면서 너무 솔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래서 말 수를 줄였다. 그런데 술만 마시면 나오는 습관이 어디까지나 솔직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얘기까지 주절주절하는 걸로 보였다.

그런데 도경수 앞에서는 취하지 않았음에도 왠지 솔직해지고 싶었다. 이유는... 으 그러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이유 같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도경수 마음이 종인과 같진 않았다. 종인의 말에 이미 저만치 멀리 도망가 버린 도경수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애초에 경수와 가까워진 적 한 번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더 멀게 느껴졌다. 

더 이상 도경수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종인은 마침내 인정했다. 


아 나는 도경수를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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