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철아우... 옛날의 원망은 지금의 원망과 맞바꾸겠네. 자식을 잃은 지금의 내 심정과 그 옛날 자네가 정인(情人)을 잃은 그 심정의 깊이가 꼭 같지는 않으나, 그리 하겠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모든 일, 그리고 부인과의 일 모두 이참에 털어버리세. 그것들에 대해서 자네도 그저 함구하고 조용히 살아가주길 바라네."

성철의 고저(高低)없는 무딘 음성이 이상하게도 진철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아니, 그 많은 일들을 이렇게 묻어두겠다고? 진심인가?'

진철은 성철의 저의를 의심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소현이 저지른 일들이 밝혀졌는데 이렇게 가벼이 넘어간다는 것이 상식 밖이었다.

"아버님!"

명이 성철을 불렀다. 성철이 돌아본 명의 얼굴엔 원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고, 그 단호함에 명은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무런 죄를 받지 않고 저들을 그냥 저렇게 보내려는 성철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집안의 가장이 그러라하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진철아우, 내 며칠 뒤 자네 집에 찾아가 숙부님께 이 모든 사실을 말씀드릴 것이네."

성철의 말에 진철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진철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이가 제 아비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그 노인네에게 이야기를 한다니, 이 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 놀라지 말게. 이 모든 일은 관(官)에 가서 고변하고 처리하게 된다면, 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숙부님이 아시는 것 뿐만 아니라 주변 사대부들에게 자네의 평판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네. 세 가지 벌 중 한가지만 하는 것도 나의 배려라고 생각한다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성철을 향해 진철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말이 맞는 말인 것인즉, 처벌도 처벌이지만 주변에 알려지면 자신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망신은 물론, 사대부 세계에서 아예 사장(死藏)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즉, 생명적으로 죽지만 않았지,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제 아비에게 말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지금은 분하지만 성철이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굽힐 수 밖에 없었다. 

"그대는 오늘 중으로 친정으로 돌아가시오. 뱃 속의 그 아이를 낳던지 말던지는 진철과 알아서 하시오."

성철은 마지막으로 소현에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나가는 성철을 따라 명과 원의도 따라 나갔다. 사랑채 방 안엔 진철과 소현만이 인상을 굳게 쓴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버님, 소자는 이해가 안되옵니다. 어찌 되었건 부정을 저지른 이들이고, 아버님을 해하려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월이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그저 쫓아내고 그 집안에만 알리는 것으로 끝낸다는 것은..."

사랑채에서 성철을 쫓아나온 명이 그의 뒤에 따라붙어 다급히 말하였다. 명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을 때 성철이 우뚝 서서 돌아보며 말을 끊었다.

"속상할테지... 그래... 갖은 수모와 괴롭힘을 당한 너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 집안의 가장으로써 때로는 감정보다는 무엇이 집안을 위한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도 있단다. 저들을 중히 처벌할 수도 있겠지. 허나, 때로는 몸을 상하게 하거나 가두어 두는 것 보다 다른 면으로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일 수도 있단다. 나 또한 우리 집안의 치부를 세상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던져주고 싶진 않구나."

명은 그의 말에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노비였던 명은 완전히 이해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사대부들이 명예와 평판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오늘 밤이면 너를 괴롭히던 이들도 여기엔 더이상 발붙이고 있을리도 없으니,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자꾸나. 저들이 내 집에서 나가는 동안 난 명이 너와 며늘아가와 함께 동네나 한바퀴 돌아야겠구나. 허허."

명과 원의는 그의 말끝에 덧붙여진 웃음소리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성철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솟을대문을 나섰다.


아무 일도 없었는듯, 집안은 평화롭고 고요하였다. 어느 새 밤기운이 스며들며 아늑한 공기가 어두운 밤하늘에 퍼져있었다. 별채에는 아직 따스한 호롱불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서방님."

원의는 제 옆에 누워있는 명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있진 않았다. 안자고 있는데 왜 대답을 안하는 것이지 싶었다.

"서방님."

다시 불렀다. 그러면서 저고리 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자신이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아보라고.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명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와, 사람이 부르는데, 이렇게 빤히 보면서 대답을 안하는건 무슨 심보야. 어, 으응?'

속으로 투덜거리던 원의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명의 얼굴이 뾰로통해져 있었다. 

'뭐...뭐지?'

불퉁하게 있는 명이 너무 귀여웠지만 참았다. 답을 안해주는 명이 얄미워서.

"서방님, 무엇때문에 그리 기분이 안좋으십니까?"

원의의 말에 더 볼을 부풀리며 입이 쭉 내밀었다.

"자꾸 그리 부르시지 마십시오."

"아니, 뭐라 불렀다고... 아!"

원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하고 내뱉었다.

"웃지 마십시오. 저번에 저와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단둘이 있을때는..."

"명아."

원의는 고운 눈매를 접으며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명의 코를 살짝 집고 흔들었다.

"아... 아야야야!"

"뭐 이런 걸 가지고 아프다고 그래. 무섭게 검도 휙휙 휘두르는 네가..."

원의가 웃으며 코를 집었던 손을 풀자, 몸이 휙 당겨졌다. 순식간에 눈 앞에 명의 저고리 옷고름이 다가와 있었다. 제 등 뒤에 둘러진 팔에 힘이 지그시 들어감이 온전히 느껴졌다. 그렇게 명의 가슴팍에 얼굴이 폭 안겨지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품에서 나는 냄새가 솔향처럼 싱그러웠다. 분명 아까 산책하고나서 땀이 났을텐데, 왜 명이 몸에서는 이렇게 향기가 나는 걸까.

"아씨... 참 짖궂으십니다. 제가 그리 불러주는걸 좋아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꼭 이리해야 불러주시네요."

불퉁하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에서는 웃음이 묻어있었다. 그녀를 꼭 안고선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근데, 명아... 아까 닭죽 일은 어떻게 된거야? 너 옻이 들어간 닭죽은 못먹어?"

원의는 명의 품에 가만히 안겨 물었다. 이상도 한 것이, 그 예전 막동이 시절 북악산 집에 찾아오곤 했었을 때, 가끔 닭을 잡아 백숙을 해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옻을 넣어서 끓여주었었는데... 아무 문제 없었다. 그리고, 오늘 옻이 약간 들어갔다고는 하나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었나?

눈 앞에 갑자기 멀쑥한 명의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숨이 순간 멎는 듯 하였다. 달빛과 호롱불에 비친 얼굴이 너무나도 야했다. 아니, 자신이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마(魔)가 낀거야. 마(魔)가...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왜 드는건데?'

그런 원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명은 순진하게 말을 이었다.

"아, 저요? 저 사내 아니잖아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명을 보노라니, 아찔하였다. 왜 이렇게 가까운데에서 그러는건데!

"아아... 그럼 진짜 사내들만 옻에 약한거야?"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지는 못하고 정신줄을 잡으며 겨우 물었다.

"네. 그래서 아버님께서 닭죽을 드시기 전에 그걸 중화시켜줄 수 있는 탕약을 미리 드셨습니다."

"어? 그럼 진철종숙은? 그 양반은 안드셨을텐데?"

"아아... 그건... 아버님이 닭죽을 드시기 전에 권한 쌍화차에 그 약재를 넣어서 괜찮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애초에 닭죽에 옻을 덜어 놓았기에 더 괜찮았지요."

싱긋이 웃는 모습에 원의는 더 바라보지 못하고 은근슬쩍 시선을 내리 깔았다. 저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가는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닭죽에 옻을 넣을 것을 어찌 알았던거야? 너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렇고?"

"아씨... 너무 궁금한 것이 많으시네요. 뽀뽀 한번 해주시면 하나씩 답해드리지요."

짖궂은 표정의 명이 제 얼굴 앞에서 씨익하고 웃고 있었다. 아니, 저런 얼굴로 들이밀면 어쩌라고!

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제 스스로 입술이 명의 입술로 다가가는 것을 자제할 순 없었다. 

- 쪽.

제 입술에 살짝 와닿은 원의의 보드라운 입술에 명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흠흠! 그건 말이죠."

약속은 약속이니 뽀뽀 한번에 답을 해주는 명이었다. 그동안 화양각의 수향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수향이 홍화회주라는 이야기와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며칠 전 성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명을 부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예전에 말했었던 홍화회주 수향을 찾아가자고 말하였다. 그런 성철의 뜻에 따라 명은 수향에게 그를 데리고 갔었고, 수향과 성철은 한참동안 단둘이 밀담을 나누었었다. 명은 그 안에 같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날 이후 성철이 자신을 따로 불러 일러주었다. 닭죽에 옻이 들어갈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소현이 그리할 것이라는. 그리고, 그를 위해 자신이 모종의 준비를 하였으니, 매일마다 자신이 건네주는 탕약을 아침에 마시라는 말을 하였다. 명은 성철의 말에 따라 그 날 이후로 탕약을 아침마다 마셨고, 바로 오늘 옻이 약간 들어간 닭죽을 먹은 것이었다. 명은 아마도 성철이 수향에게서 소현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들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리고, 수향의 정보를 통해 미리 옻을 적게 덜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일에 대한 결과가 바로 오늘 발생한 것이리라. 명은 원의에게 말을 해주면서도 수향이 수장으로 있는 홍화회의 치밀함과 그 정보능력에 다시금 감탄하였다. 그 모든 일을 어찌 거미줄처럼 촘촘히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지... 그런 홍화회와 적대가 아닌 친분을 쌓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명이었다.

"아씨?"

수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명은 아까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원의가 이상해서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입이 댓발 나온 아씨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볼을 꼭 누르면서 그 입술에 살짝 뽀뽀하였다. 

"흥... 나 절대 투기해서 그러는거 아니니까 굳이 그러지마."

툴툴대는 원의는 말하면서 절대 명을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화나지 않았다고 말을 하면서 눈은 그런 속을 들킬까 싶어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투기... 안하시죠. 우리 아씨는... 푸흡!"

투기라고 말하면 분명 삐질 것이기에 명은 그녀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뭐야. 웃는거야? 나 진짜 그런거 안한다니까! 그저 기루의 기녀일 뿐. 그리고, 뭐, 지하조직의 사람일 뿐인데 나랑, 그리고 명이 너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

 "아, 네, 그렇지요. 푸흐흡!"

"아, 진짜! 웃지 말라니까!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라고!"

명은 그녀의 말에 이제 숫제 웃음이 터져 나와버렸다. 웃다 못해 눈에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였다.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저렇게 신경쓰는 것은 무언데? 

예전에 자신이 수향과 한방을 쓰게 되었을 때, 그렇게 부득불 잡아서 넷이서 한방에서 자게 한 것은 무엇인데? 게다가 수향이 제 옆자리에서 자는 것조차 갖은 핑계를 대어 자리를 바꾼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명이 너... 지금 나 비웃은거지?"

"아.. 아뇨아뇨! 제가 어찌 아씨를 비웃습니까? 아씨가 너무 귀여우셔서..."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원의가 예뻐서 환장할 것만 같았다. 오늘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그닥 다른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투기를 하면서 귀여운 부인이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생각지 않게 마음과 몸이 몹시 동하는 명이었다. 명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면서 서서히 몸을 밀착시켜갔다. 단 한장의 저고리 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이성을 풀어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명은 그녀의 단단한 속저고리 옷고름을 이내 풀어내고는 거칠게 몸을 겹쳐갔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조선최고한량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