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아무 전력 6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문자메세지' 입니다.

- 원페이스 라이 X 트리플 페이스 후루야 레이 X 원페이스 오키야 스바루

- R15 (필터링 없는 묘사, 약간의 유혈 표현 등)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아무로 토오루라는 남자는 섬세하고, 신중하며, 기본적으로 선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지인들로부터는 신뢰를 받았고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몇 분 이내면 그의 상냥함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로 토오루라는 남자는 후루야가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낸 남자였으므로.

하지만 지금 후루야 레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아무로 토오루라는 청년과,

 

“버번.”

 

발가벗은 채 침대 위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버번이라는 남자뿐이었다.

후루야는 제 코드네임을 부른 남자 쪽으로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만났다고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다. 그는 눈길 대신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후루야의 손바닥 위로 은색 USB 하나를 놓았다.

이미 화려한 방 안을 더 사치스럽게 만들어주는 샹들리에의 오렌지색 빛이 USB 표면을 미끄러진다. 후루야는 노트북 옆면에 USB를 꽂아 넣고 다시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 됐습니다. 나머지는 진에게 마지막으로 보고하는 것뿐입니다.”

 

드디어 지시 받은 일을 마친 후루야가 화면의 숫자가 100%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곤 노트북을 덮었다. 그는 밤샘과제를 마친 학생처럼 개운한 얼굴로 양 팔을 위로 뻗었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목을 조금만 돌려도 뚜둑, 뚜둑,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뭉친 근육은 목욕으로 푸는 것이 가장 좋았다. 후루야는 침대 위와 아래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옷을 들어 껴입기 시작했다. 남자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벽에 기대어, 후루야가 옷 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죠. 라이.”

 

그가 코트까지 완벽하게 입고, 이 방을 들어왔던 때와 같은 모습이 되고 나서야 라이라고 불린 남자는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리고는 후루야의 경호원이라도 되는 양 그의 뒤를 반 발자국 뒤에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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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비에

 



일주일 전 갑자기 런던으로 날아가야 했던 것은 조직의 변덕이었다. 정확하게는 진의 변덕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후루야는 그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황당해하면서도 조직에 대한 충성을 증명해야 했으므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진은 때때로 후루야, 즉 버번의 충성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대체로 코드네임이 부여된 조직원의 위치를 쥐고 있는 진이 버번의 위치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이유라면 베르무트나 라이도 진의 울타리 밖 사람들이 아닌가. 후루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밖에는 도출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로 씨. 괜찮으세요?”

“… 네?”

 

이름이 불린 후루야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입가를 끌어올린 얼굴은 완벽했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보통 사람은 눈치 채지도 못할 위화감이었으므로 상관없었지만, 그를 ‘아무로 씨’라고 부르며 걱정하던 오키야의 눈썹 사이는 살짝 찌푸려졌다.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여전히 후루야의 얼굴에는 위화감이 둥둥 떠다녔다. 오키야의 눈꼬리가 더 가늘게 좁혀지면 후루야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거나, 지금처럼 고개를 돌리곤 했다.

오키야 스바루. 그는 후루야가 아무로 토오루라는 이름으로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쯤에 베이카가로 이사를 왔다. 원래는 좀 더 먼 곳에 살고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지인의 집에 잠깐 머무르고 있다고 했던가. 후루야는 이전, 오키야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솔직한 감상을 하자면, 후루야는 오키야가 불편했다. 시종일관 웃고 있는 얼굴도,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말투도,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도 전부. 마치 자신에게로 보내는 호감의 신호 같았다. 우쭐해질 것 같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오늘도 오키야는 후루야가 드러내는 목소리와 행동에서 평소와 다른 작은 차이를 잡아내지 않았던가. 괜찮으냐 물어본 것은 정말로 궁금해서가 아니었음을, 후루야는 알고 있었다.

 

“아무로 씨, 오늘 오픈부터 나와서 일하셨죠. 곧 닫을 시간이기도 하고, 나머지는 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그만 퇴근하세요.”

 

후루야와 오키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노모토가 걱정에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란 후루야가 두 손을 거칠게 흔들며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강제로라도 그를 퇴근시킬 모양인 듯 보였다.

평소였다면 그녀의 근엄한 표정에도 적절한 말을 꾸며냈을 텐데, 최근 들어 진이 괴롭히는 횟수가 는 탓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마땅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에노모토의 연약한 손힘에도 등이 떠밀려지고 말았다.

탈의실에 들어온 후루야는 양 손을 뒤로 돌려 앞치마의 끈부터 풀었다. 깔끔한 리본 모양으로 묶여 있던 매듭이 순식간에 형태를 잃는다. 앞치마는 그대로 후루야의 손 안에서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으로 개어졌다.

후루야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다 입고는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새까맸던 화면이 몇 초 지나지 않아 밝아지고, 곧 전원이 꺼져 있는 동안 도착한 메시지가 줄줄이 화면 위를 점령했다. 몇 개는 진이었고, 또 몇 개는 베르무트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런던에서의 일은 잘 해결했을 터인데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후루야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진다. 진의 호출이야 요 5년 간 익숙해졌으니 거슬리기는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일반인 놀이는 언제 끝나지? 끝나는 대로 전화해라, 버번.]

 

Rye라는 글자가 화면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지간히도 버번을 신뢰하지 못하는 진이 라이에게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그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라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우중충했던 하늘에 이제는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다.

후루야는 답장도 하지 않고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어차피 라이는 오늘 버번의 일이 몇 시에 끝나는지 알고 있을 테니, 그 시간에 맞춰 연락을 넣으면 될 터다. 후루야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정돈하고, 짜증스러움을 갈무리했다. 다시 아무로 토오루로 돌아가야 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후루야가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 동안 손님이 절반으로 줄었다. 습관적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던 후루야는 이제 막 돌아가려는 듯 일어서는 오키야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로 씨.”

“… 아, 네.”

 

아무로 씨. 오키야가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면, 후루야는 목이 타들어갔다.

 

“우산 있으세요?”

“네?”

“우산이요. 밖에 비와요.”

 

정말이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것인지 창문이 온통 빗방울이 미끄러진 흔적 투성이었다. 마지막 손님에게 서빙을 마친 에노모토가 후루야의 양 손이 텅 빈 것을 보고 ‘어머!’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게에 여분 우산도 없는데….”

“아, 저… 괜찮아요. 친구한테….”

 

후루야가 아무로의 습관을 드러냈다. 양 손을 좌우로 휘젓는 것. 주로 그가 ‘자신은 괜찮음’을 어필하거나 상대의 배려를 거절할 때 선택하는 습관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차피 오늘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라이와 함께 가야 했고, 그로부터 메시지도 도착해있으므로 라이에게 지금 끝났다는 말만 전하면 데리러 올 터였다.

 

“제가 데려다 드릴까요?”

 

오키야가 가방에서 작은 우산을 하나 꺼냈다. 짙은 녹색 우산이 어쩐지 그의 진중한 분위기와 닮은 것 같았다. 곧 후루야는 쓸 데 없는 감상을 치우고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절해야 했다. 곧 라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고, 지금 자신에게 몇 명의 감시가 붙어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일반인을 조직의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분명 그럴 터인데, 그래야 하는데….

 

“그럼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후루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보고 흥분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짜증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라이는 쓰임을 다 한 성냥개비를 구두 끝으로 밟아버렸다. 분명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번쩍번쩍 광이 났던 구두가 피와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피와 진흙? 아니. 저것은 진흙이 아니라 정액이었다. 노리는 타겟의 취미가 난교라는 점이 오늘의 가장 짜증나는 일이었다.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에 취한 사람들은 바로 옆방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것도 모른 채 허리를 흔들었다.

짐승도 저렇게는 흔들지 않으리라. 추한 광경을 눈앞에 둔 라이는 문득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의 벗은 몸.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몸을 떠올려버렸다.

버번을 처음 본 것은 4년 전이었고, 그와 처음으로 페어를 짜 맡은 임무에서 그의 벗은 몸을 봤다. 능숙하게 타겟을 침대로 이끈 남자는 넥타이, 와이셔츠, 바지, 속옷 순으로 옷을 벗어던졌고, 400m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이는 버번의 벗은 몸을 보고 ‘젠장.’하며 욕을 뱉었다.

예고 없이 남자의 벗은 몸을 봐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도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흥분해버린 자신을 향한 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왔나?’

‘네? 뭐가요. 허니트랩?’

‘그래.’

‘전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합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서 제 몸도 꽤 잘 팔리거든요. 몰랐다는 눈치네요, 라이. 말도 안 하고 못 볼 꼴을 보여드린 건 사과하죠. 이제 알았으니 다음부터는 뭐, 알아서 대처하세요.’

 

버번은 침대 아래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주워 입으며 말했다. 라이는 그가 옷을 마저 입는 동안 그를 지나쳐 죽은 타겟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원래 목적이었던 열쇠를 꺼냈다. 지금 뒤를 돌면 또 그의 벗은 몸을 볼 수 있을까. 그 날, 라이는 제 손 안에 있던 열쇠를 부러뜨리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그 후로도 버번과의 임무는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그가 얼굴과 몸으로 타겟을 유혹하고, 옷을 벗고, 저격이 필요할 때는 라이가 방아쇠를 당겼으며, 버번은 빠르게 정보를 빼돌렸다. 그리고 라이는 반드시 버번을 데리러 갔다.

라이가 라이플을 정리하고 그를 데리러 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래야 버번이 발가벗은 채로 정보를 옮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라이 씨, 라이 씨! 여기요. 전에 찾아봐달라던 사람들.”

 

담배의 수명도 거의 다 될 무렵,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지만 입은 완전히 사자의 것이었다. 흡혈귀처럼 드러난 송곳니가 그가 입 벌려 웃을 때마다 반짝였다.

남자는 라이에게 베이지색 봉투 하나를 건네었다. A4 용지 크기의 봉투 안을 슬쩍 확인한 라이는 남자의 손 위로 흰 봉투 하나를 떨구어 주었다. 방금 전 죽인 자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이번에 새로 루트가 뚫렸다는 마약인지 무엇인지 알 바 아니었지만 가루 몇 그램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값은 상당했다.

봉투 안으로 새끼손가락을 쑥 넣고, 가루가 잔뜩 묻은 손가락을 빨고 난 남자는 해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입 벌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키야 스바루….”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라이가 봉투 안에서 들어 있던 자료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자료 안에 글자로 정리된 남자는 평범하디 평범한 남자였다. 거슬리면 언제든지 치울 수 있는 남자.

라이는 코트 안에서 성냥 하나를 더 꺼내었다. 그리고는 봉투와 종이에 불을 붙였다. 끝에서부터 타오르던 불길이 곧 종이 전체에 붙었다. 라이의 손이 종이에서 떨어지자, 그 많던 종이는 언제 있었냐는 듯 전부 사라졌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그랬던가. 그를 데리러 가기엔 좋은 변명이었다.

 

 



 



“일반인이랑 잘도 떠드는군.”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시동이나 걸어요.”

 

차 문을 열고 시트에 등을 기댄 후루야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쾅, 하고 불필요하게 큰 소리가 났다. 누가 봐도 신경질적인 움직임이었고, 그 감정은 라이를 향한 것이었지만 정작 라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므로.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후루야의 손에 우산이 들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라이는 신호가 붉게 변한 틈을 타 룸미러 너머의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라이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그가 지금 어떤 얼굴로 창밖에 내리는 비를 감상하고 있을지는 대충, 상상이 되었다. 오키야 스바루라는 이름의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 라이는 신호가 녹색으로 바뀜과 동시에 핸들을 꺾었다. 가소로운 놈이었다.

 

“근처에 있었습니까?”

“… 아니.”

“그런데도 빨리 왔네요. 연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후루야가 라이에게 일이 끝났음을 알린 것은 조금 전이었다. 그 전까지 그는 오키야와 우산 아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후루야는 자신이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 우산을 들겠다고 했지만 오키야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키가 더 크니, 자신이 들어야 마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우산을 든 오키야의 손은 점점 후루야 쪽으로 기울어졌다. 후루야는 그의 어깨가 빗물에 젖어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후루야는 오키야가 불편했다. 자신을 아무로 토오루라고 부르는 그가 불편했다.

 

‘저… 여기까지만 데려다 주셔도 돼요. 실은,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요.’

 

오키야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후루야는 그것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의 사람이 하는 무언의 표현임을 알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착각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로 토오루가 제 이름이고, 오키야가 제게 기울이는 호감이 애정이라고 착각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루야가 먼저 걸음을 멈추었고, 그를 따라 오키야도 걸음을 멈추었다. 후루야는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원래 일이 끝날 시간이 조금 넘어 있었다. 후루야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조금은 다급한 손놀림으로 짤막한 메시지를 입력했다.

 

‘아, 죄송해요. 친구한테 지금 있는 곳을 알려줘야 해서….’

‘그런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위치추적이 가능한 핸드폰이었으므로, 후루야가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도 라이는 어디인지 알 터였다.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후루야는 라이와의 대화가 단축되었다는 사실에 좀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아무로 씨.’

‘네.’

‘이거 빌려드릴게요.’

‘네?’

‘우산이요.’

 

오키야는 후루야가 습관적으로 괜찮다며 손을 휙휙 저을까봐 얼른 비어있는 왼손에 우산을 쥐어주었다. 당황한 후루야가 다시 그에게 손잡이를 쥐어주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산이 비를 막을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벗어난 오키야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가차 없이 떨어졌다.

후루야의 눈동자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아기 새의 부리처럼 뻥끗거렸다. 오키야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 벌려 쿡쿡, 웃었다. 너무 대놓고 웃으면 후루야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전히 당황한 얼굴의 후루야가 어쩌지도 못한 채 오키야의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멀어졌던 거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로 씨는 정말 귀여운 사람이네요.’

‘… 저기, 제가 연상인 걸로 아는데. 연상한테 그런 말은 좀….’

‘기분 나빴나요?’

‘…… 그… 렇진 않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하는 게 좋아요.’

‘괜찮아요. 아무로 씨 아닌 사람한테는 이런 말 안 하니까.’

 

맥박이 요동쳤다. 후루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친 것 같았다. 착각하고 싶은 충동과, 지켜야한다는 의무가 그의 머리 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팽팽한 경기였지만 어쨌거나 심판은 후루야 레이 자신이었다. 설령 의무가 이긴다고 할지라도, 후루야가 충동의 손을 들어버리면 경기의 결과는 쉽게 바뀌는 것이다.

핸드폰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키야는 일반인이었고, 자신은 사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직의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그에게 접근해서는, 이 이상 관계가 깊어져서는 안 되었다.

 

‘우산… 받으세요. 저는 곧 친구가 데리러 올 테니까 괜찮아요.’

 

떠나야 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 라이에게 이 모습을 들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라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그를 조직의 눈에 조금이라도 노출시켜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독뱀처럼 부딪쳐오는 호감을 얼른 쳐내야만 한다.

 

‘저 우산 하나 더 있어요. 이건 아무로 씨가 쓰고 가세요.’

 

오키야가 가방 안에서 작은 접이식 우산을 하나 더 꺼냈다. 후루야의 눈이 동그래진 채로 우산의 움직임을 따랐다. 우산이 펼쳐지자 다시 그와 후루야의 사이가 벌어졌다.

 

‘… 그럼, 이 우산은 다음에 가게에 들를 때 돌려드릴게요.’

‘음. 그러지 말고…. 핸드폰 줘볼래요?’

 

후루야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오키야의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오키야가 볼과 어깨로 우산대를 지지하고는 후루야의 핸드폰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곧 그는 후루야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오키야의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제야 후루야는 주고받은 핸드폰이 조직에서 지급받은 것임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빨간 경고 표시가 떠올랐다. 조직이 모든 핸드폰을 해킹하거나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지만 그렇다고 일반인의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는 것은 위험했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후루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 날 때 돌려줘요. 아무로 씨가 전화하면 바로 달려올게요.’

‘… 논문 준비나… 여러 가지로 바쁘시잖아요.’

‘괜찮아요. 어떤 일이든 상관없으니까 연락하고 싶을 때 해요. 부끄러우면 문자도 좋아요.’

‘오키야 씨, 저는….’

‘친구 분이랑 만나기로 하셨다고 했죠? 전 이만 가볼게요.’

 

후루야는 커다란 가위를 들고 충동과 의무가 각각 반대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줄 가운데를 싹둑, 잘라버렸다. 힘의 반동으로 뒤로 넘어진 두 인영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후루야는 충동 쪽으로 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이겼어.

정신을 차렸을 때 오키야는 어디에도 없었고, 건너편 길가에서 클랙슨이 울리고 있었다. 후루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식었다.

 

“뭐합니까, 라이. 안 내리고. 늦으면 또 진이 신경질 낼 거라고요.”

 

후루야가 먼저 내려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차키를 뺀 라이가 문을 열어 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후루야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태워버린 종이뭉치에는 오키야 스바루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 버번, 후루야 레이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종이를 불태워버린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오키야의 신원 따위 어디에 굴려져도 상관없었지만 후루야는 아니었으므로. 버번이 후루야 레이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어야 했으므로.

 

“재촉하지 마라, 버번.”

 

이번에도 라이는 후루야의 반 발자국 뒤에서, 그를 따랐다.

 

 



 



언제든 치울 수 있는 장애물을 그대로 둔 것은 오만에서 기인한 판단이었다. 다시 태어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버번은, 그리고 후루야 레이는 오키야 스바루의 것이 되지 못했다. 아니,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불가능했다. 그 때에도 라이 자신이 후루야의 곁에 있을 것이므로.

어쩌면 후루야의 반응이 두려워서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는 해도 두렵다는 말 이외의 적당한 표현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후루야의 눈앞에서 오키야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그가 포효할 것을 생각하면, 온 몸의 세포가 굳는 것 같았다.

발버둥 쳐봐야 이루어지지 않는, 하찮은 감정이었다. 핸들에 팔을 올리고 그 팔 위에 턱을 괴어 창밖의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후루야가 그에게만 기울이는 호의가 애정을 기반으로 한 것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후루야 본인은 모를 터였다. 오키야를 마주할 때의 자신의 얼굴이 갈등으로 일그러지고 있음을. 눈앞에 거울이라도 들이밀어 주지 않는 이상, 후루야는 평생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확인 하고 싶었다. 확인 받고 싶었다. 결국 너는 그가 아니라 나를 선택할 것이라고. 끝내 너는, 나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고.

 

“컥…, 쿨럭, 컥…! 라, 라이!”

 

후루야의 입술이 피로 물들었다. 턱 주변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바닥에 흘린 피, 옷에 묻은 피, 얼굴을 적신 피를 합하면 출혈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라이는 후루야의 목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쩌다가 한 번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첩보원이라고 하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임무를 완수해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후루야는 필요하다면 제 몸도 수단으로 쓰는 남자였다. 무모한 방식을 고수하는 임무에 라이가 몇 개의 요소만 추가하면, 그는 높은 확률로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그리고 반드시, 라이를 찾았다.

라이는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골목을 기고 있는 버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자신에게로 전화를 거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신호음이 걸리기도 전에 눈앞에 나타나 그를 안심시켜줄 생각이었다. 답지 않은 상냥함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딱딱한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댄 채 밑으로 미끄러진 후루야는 가쁜 숨을 내쉬며 코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라이는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차 문을 열고 나와 후루야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순간, 내리 깐 시선 속에 용납할 수 없는 이름이 들어왔다.

오키야 스바루. 또 그 남자였다.

 

“버번. 그놈에게 네 이런 꼴을 보여주기라도 할 건가?”

 

라이가 후루야의 멱살을 잡고 위로 끌어올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겨우 붙들고 있던 핸드폰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때까지도 눈앞의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후루야는 흐린 시야 속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목소리가 영락없는 라이였다. 후루야가 속으로, 혀를 찼다.

 

“… 라, 이… 이, 거 놔… 읏, 아파, 젠장….”

“그놈에게 기대기라도 하려고?”

 

속이 끓었다. 후루야의 멱살을 잡은 라이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늑대의 앞발에 짓눌린 것처럼 숨 쉬기가 불편했다. 후루야가 피를 토할 때마다 라이의 손등이 붉게 젖어들었다.

 

“그놈은 너에게 친절하게 구니, 이번에도 웃으면서 너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랑은… 상관없는 일, 이잖아. 애초에 당신, 왜… 여기에,”

 

후루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푸른 하늘이, 그리고 또 푸른 바다가 색을 잃고 흔들렸다. 라이의 팔을 잡은 후루야의 팔에는 힘이 없었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추락하지 않기 위해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눈에 이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떨어지는 눈물의 색깔이 붉게도 보였다. 흐릿한 시야, 그리고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후루야는 곧 라이에게 매달려 있던 팔을 풀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눈앞이 한없이 흐려지니 그가 울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울지, 말아요…. 왜, 울, 어…. 울지 마, 오키야, 씨….”

 

파란 눈에도 붉은 눈에도, 그리고 또 젖은 눈에도, 어디에도 라이는 비치지 않았다. 힘없이 떨어진 팔이 다시 중력을 거슬러 앞으로 뻗어나갔다. 남자의 뺨에 닿은 손끝은 차가웠는데, 손바닥은 한없이 뜨거웠다.

당신은 내 이런 꼴을 보고 뭐라 말할까, 또 어떤 얼굴을 할까.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 동정해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울어줄지도.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에게 그 이상의 우월감을 주지 말아줘.

 

“…… 버번.”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열기를 잃는다. 라이는 제 볼을 스치듯 미끄러지는 후루야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관망했다. 한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인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미친 듯이 화가 났다. 분명 자신은 그의 눈앞에 있는데, 그 눈동자에는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까무룩 정신을 잃은 버번은 이름을 불러도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맥박이 약했고, 곧 죽을 사람처럼 가벼웠다.

라이는 후루야의 목을 조였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후루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단단하지만 가벼운 몸이 중심을 잃고 라이의 품으로 쓰러지듯 들어왔다. 후루야의 호흡을 방해했던 손이 그의 뒷머리와 등으로 향한다.

 

“후루야.”

 

이름을 불렀지만 불린 이에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후루야, 레이.”

 

우월감에 젖을 생각이었다. 언젠가 적당한 기회만 얻으면 오키야의 앞에 후루야를 앉혀놓고 전부를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한 남자는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고. 그러면 배신과 실망으로 범벅된 얼굴을 마주한 후루야가 스스로 제 품에 뛰어들 터였다.

오키야의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는 경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후루야가 제 발로 들어오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결과였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오키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더라도 후루야가 그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다면. 얄팍한 우월감은 한낱 종이쪼가리보다 못하다.

 

“레이, 레이….”

 

라이가 흙투성이가 된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떨어뜨릴 때의 충격으로 화면이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라이는 핸드폰을 부술 기세로 쥐고 후루야를 끌어안은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어떤 불안도 남지 않도록.

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까지 싹싹 긁어모아 너를 데리러 갔어야 했던 것이다.

 

 



 



“요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스바루 씨.”

“그래 보이나요?”

 

야식으로 오렌지를 깎아 온 쿠도가 책상 위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기척을 눈치 챈 오키야가 고개를 올려 그렇게 보이냐며 웃었다. 오키야를 지나쳐 책장 앞에 선 쿠도는 늘 읽던 책을 뺀 뒤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 오키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엄청요. 논문 잘 풀려요?”

“음.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마 기분이 좋은 건 그 때문인 것 같군요.”

“엥?! 스바루 씨가 연애?”

“아직 제 짝사랑입니다.”

“와. 그거 뭐야. 완전 흥미로운 얘기잖아요. 상대는 누구예요? 헉, 설마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제일 좋아하는 책의 첫 문장도 제대로 읽지 않고, 쿠도는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의자의 위치를 바꾸어 오키야의 앞에 자리 시켰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오키야와 마주 보게 된 쿠도가 스탠드의 방향을 숙여 취조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쿠도가 형사고, 오키야가 범인 역할인 듯 했다.

소꿉친구와 오랜 친구 생활을 접고 최근, 겨우 연인이 된 쿠도는 오키야의 사랑을 응원한다며 뭐든 좋으니 그 사람과의 진전에 대해 얘기해보라 보챘다. 진전이라고 해봤자 요전에 일방적으로 연락처를 준 것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말해야 소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오키야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엇. 진동.”

 

그 때 책상 위에 두었던 오키야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쿠도의 손이 빠르게 핸드폰으로 향했다. 발신인은 지정되지 않았는지 11개의 숫자만 늘어져 있었다.

 

“아무로? 스바루 씨. 아무로라는 분한테서 문자 왔어요.”

“아. 그 사람입니다.”

“네?”

“신경 쓰인다는 사람.”

 

쿠도가 우왁!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얼른 오키야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핸드폰을 받아 든 오키야가 화면을 켜고 메시지함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 우산을 돌려주겠다고만 보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우산을 돌려받는 것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번화가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었으니, 우산 받을 장소를 일부러 그 근처로 잡아 겸사겸사 라는 핑계로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작전은 많았고 자신도 있다. 오키야는 답장을 하기 위해 그로부터 온 메시지를 터치했다. ‘안녕하세요, 오키야 씨. 아무로 토오루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장 아래로 몇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가는 눈 사이 비집고 드러난 짙은 녹색 눈동자가 짐승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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