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지난 몇달 동안 여러번 곱씹어보았다. 그것은 아마 최근에 나를 가장 괴롭히는 정병혐오 발언이 정신장애인 내부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정신병이라는 공통된 고통하에 연대하고 있지만 각자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병을 앓고 다른 가치관 하에서 살아간다는 자각을 다시금 한다. 누군가에게 "정병"은 "탈출"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완치"라는 탈출버튼을 누르는 것이 선택지에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종종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타인은 지옥이다. 우리의 많은 고통은 이런 타인의 몰이해와 폭력에서 오는 것이니까. 


"정신병은 나쁜 것이기에, 완치하고 탈출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이기에, 우리는 응당 병을 미워해야 한다" 같은 주장을 볼 때 마다 나는 나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신병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에 나쁘다. 나는 나에게 혐오발언을 퍼붓는 아주 못된 혐오주의자에게조차도 '너도 조울증에 걸려서 이게 어떤 건지 느껴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깊고 지긋지긋한 고통이며, 누구도 이런 아픔을 겪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병은 현 시점에는 불치이기에,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조울증을 거세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병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정체성의 일부이다. 


정신장애인으로 정체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정신장애인으로 정체화한 것은 20대 후반, 보다 분명히는 미국에 온 2013년이었다. 학교는 나를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해주지 않지만,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럽게 장애인으로 분류되고 비슷한 병을 앓는 학생들을 위한 편의를 제공해주며 나의 정체성은 단순한 "환자"에서 "장애인"으로 발전했다. 내가 장애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은 아마도 장애를 신체장애에만 국한하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장애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육체는 분명히 비장애인과 다르고, 나는 그것때문에 신체적, 사회적 제약을 받으며, 나 역시 비정상으로 마킹당하며 장애혐오의 대상이 되는데. 


조울증은 공식적으로 장애등급이 나오는 정신장애 (조현병, 양극성 장애, 반복성 우울장애)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정신장애인으로 정체화할 때 이것은 중요한 지표가 아니었다. "국가가 허락한 장애"가 무엇인가-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조울증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생리적이건, 사회적이건, 생활에 분명한 제약을 가져온다는 자각이 더 중요했다. 물론 긴 투병을 거친 나는 아주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환자이며, 주치의에게도 "비장애인과 거의 차이가 없이 기능할 것"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일정 이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병이 악화되어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하고, 환자임을 고백했을 때 그 사실로 공격받거나, 내 지적능력을 의심받거나,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또한, 나의 20대란 조울증이 무엇인지, 내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가고, 무수한 정병혐오자들과 싸우며 내 정체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차별과 싸워온 경험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듯, 조울증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여성이고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었듯, 조울증 환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병을 수용하되 굴복하지 않는 삶


이렇듯, 정신장애인으로 정체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병을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수용은 굴복이 아니며,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 뒤에는 장애는 나쁘고 열등한 것이며, 따라서 장애인이 다다라야 하는 정상적인 상태가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장애는 나쁘지도, 열등하지도, 비정상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비장애-장애의 관계가 정상-비정상이 아니란 명제에 동의한다면, 비정신장애인-조울증 환자의 관계 역시 정상-비정상의 틀에 끼워맞출 수는 없다. 그것은, 조울증이 설령 평생 나와 한 몸이라고 해도, 이것은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장애를 수용하고, 장애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병과 싸우기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치료 초기에 나는 조울증이 금새 완쾌되는 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날 괴롭혀 온 병을 떨쳐내겠다는 의지와 약이 몸에 잘 맞은 행운이 겹쳐, 나는 의사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렇게 꾸준한 치료를 하며 6개월을 보내고, 나는 원래 예정되어있던 대로 미국에 교환학생을 갔다. 한국의 의사와는 멀어졌지만, 다행히 외국에서도 나의 정신은 꽤 안정적이었다. 너무 안정적이라 나는 때때로 내가 조울증 환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날, '이만하면 충분히 완쾌되지 않았을까?'하고 나는 자의로 약을 끊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나의 정신은 약을 끊자 그대로 치료하기 전의 지옥으로 빨려들어갔다. 


괴로운 마음에 찾았던 조울증 그룹에서 나는 그룹 담당 의사에게 "조울증은 현 시점에서는 불치입니다. 치료가 가능하다는 주장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걸 실험해보려면 아주 오랫동안 약을 끊어야 하고, 그건 환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리스크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 병은 불치이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고작 스물 두살이었다. 내가 운좋게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다면, 앞으로 내게는 50년도 넘는 생이 남아있었다. 마침 그 조울증 그룹에는 예순에 가까운 수학과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조증 때문에 기분이 너무 들떠서 어머니 장례식에서조차 울지 못했다고 괴로워했다. 그 모습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이 절망감은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자살충동이 들 때 마다 이제 죽자고 속삭이는 병에게도 이건 아주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어차피 이걸 평생 겪을 바에야 지금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몇 번 그 말에 넘어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괴로운 현실과의 사투에서 살아남았고, 여전히 살아있다. 언젠가 이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은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평생 나을 수 없는 병을 안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쩔 수 없다. 그 사실을 직시하고, 치료에, 나의 삶의 태도에 그걸 녹여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단 한번도 치료를 포기한 적이 없다. 다만, 병과의 싸움이, 전력질주하면 언젠가 끝이 보이는 레이스에서 평생 달려야 하는 긴 마라톤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나는 매일 약을 먹고,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려고 노력하고, 매일 나의 감정을 체크한다. 그리고 내가 타의로 인한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나는 이런 일들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은 치료를 통해 비장애인만큼 안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삶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내가 치료를 소홀히하면, 내가 예상하지 못한 트리거를 만나면, 언제든 나를 집어삼킬 준비가 된 병이 언제나, 아마도 영원히, 도사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있다. 


비장애인은 이런 삶이 어떤 것인지 아마 모를 것이고 상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는 종종 이들에게 "평생 조절해야 하는 고혈압 환자나 심장병 환자" 같은 비유를 들어보기도 했다. 이건 꽤 괜찮은 비유지만, 역시 모두를 설득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혈압처럼 신체적인 요소는 의지로 조절이 불가능해도 정신병은 의지로 조절이 가능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조차 설득하지 못하곤 했다. 그런 환자들은 많은 경우에, 병이 완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병을 앓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완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환자들은 치료 의지를 버린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내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한 삶도, 거기에 다다르기까지의 나의 고민도, 내가 매일 발버둥치며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주 쉽게 "병든 상태에 안주하는 것" "암세포를 사랑하는 것" "치료의지를 버린 것"으로 치부된다. 이, 병을 "탈출"해 다다라야 하는 어떤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는 태도는 정신장애인으로서 내가 평생 싸워야 할,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정병혐오이다. 


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병을 혐오하는 것과 환자를 혐오하는 것이 절대로 간편하게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쉽게, 병을 인간에게서 말끔하게 도려낼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정신병을 암세포에 비유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병을, 예를 들면, 현 시점에서 불치병인 에이즈와 비교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에이즈에 대한 나쁜 편견들, 예를 들면, 그것이 동성애나 난잡한 성생활에 대한 징벌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에이즈 환자에 대한 차별을 이룬다는 이야기도 절대로 소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병은, 특히 만성 정신병은 암 보다는 에이즈에 더 가깝다. 그리고, 예를 들면, 정신병은 탈출해야 하는 나쁘고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생각은 당연히 병을 완치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혹은, 조울증은 사람을 변덕스럽고, 감정기복이 심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든다는 생각은, 당연히 환자를 변덕스럽고, 감정기복 심하고, 미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병과 환자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들은 "병과 환자는 분리가 안된다"라는 말을 "그러니 병을 미워하지 마라"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만은 절대로, 병을 미워하되 환자를 차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물론 우리는 병을 미워할 수 있다. 나도 내 병이 밉고 저주스럽다. 그리고,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병을 미워하되 환자를 차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병은 응당 탈출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않는 너는 의지박약이다"-같은 정병혐오 발언을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병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아주 다양한 처지에 놓인 환자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거부한 상태로 다다를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타인은 정말 지옥일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고, 꽤 많은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해냈다. 적어도 나는 내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받고 지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병을 숨긴 적이 없고, 그래서 아주 많은 정병혐오론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입은 상처는 딱지가 두터워 혐오발언을 만나도 생채기가 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정신병에 대해 쓸 때 마다 나는 항상 두려운 마음이 든다. 


동양인은 세계의 60%다. 여성은 세계의 절반이다. 그러나 조울증 환자는 고작해야 인구의 2-3%밖에 되지 않는다. 내 눈앞에,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마도 평생 겪을 일이 없는, 세계의 97-8% 정도의 사람들이 있다. 이건 아찔한 숫자다. 이 숫자는, 내가 설득해내지 못하면, 날 이해하지 못하고, 내 정체성을 부정하고, 날 차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정신장애 이슈에서는 페미니즘 이슈에서처럼 설득이 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는 법도, 설득이 안되는 사람들을 적당히 입만 다물게 하는 법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이 싸움의 경험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막막함의 이유는 더 뿌리 깊은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이슈에서 나는 '널 설득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이 대화를 보고 설득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도태되더라도 여성이 모두 결집한다면 이긴다.' 같은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정신장애 이슈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조울증 환자들이 모두 결집해도 그것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는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사람들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많다. 


그래서 이 이슈에 관해 발언할 때 나는 언제나 진심이다. 페미니즘 이슈에서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방어하는 법도 아직은 잘 모른다. 그저, 같은 상처를 질리도록 받으면 언젠가 무뎌질 것이란걸 기대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약자가 아무리 설명을 잘 하더라도, 강자에게는 언제나 이해하지 않을 권력이 있다. 몇 달전, 이 이야기를 비장애인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병과 환자는 연결이 되어있기도 하다"라는 합의까지 도달했음에도, "나는 비장애인이라 네가 뭘 겪는지 이해 못하지만" "어쨌거나 병을 미워한다는 말은 계속하겠다"라고 답했다. 그 이야기를 상담사에게 하고, 아주 조금 울고, 그런 말에 동조한 내가 팔로우 하는 사람들을 조금 미워하고, 그 끝에 '이렇게 하면 더 잘 이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설명을 마음 속 작은 주머니 안에 넣어놓았다. 그래, 다음에는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래왔듯이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이 글은 사실 아주 오랫동안 임시저장함에 있었다. 그 글은 지금보다 조금 더 건조하고, 장애학 이론에 조금 더 의존하는 글이었다. 오래 전에 적어둔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끝난다. 

  • 여기까지 설명했는데, 여전히 중얼중얼 "하지만 병은 나쁜 거잖아 (병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며 그래서 나쁘다-라는 말 하지 말란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병이 원망스러운데 (원망하라.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래도 병이 나을 수 있다면 치료하는게 좋잖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대책을 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나이브하게 "만약에 이랬다면~"같은 하나마나한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정병 탈출할건데 (탈출할 수 있으면 해라.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탈출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몰지 말란 소리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적어도, 장애가 비정상이 아니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장애를 극복가능해야만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는 21세기의 장애인 인권운동의 흐름에 탑승하고 싶다면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은 다른 방식으로 끝맺고 싶다. 이 글은 어느날 문득 떠오른, '아 이렇게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작은 설명법이다. 이 긴 글이 얼마나 호소력 있는 설명이 될지는 사실 모르겠다. 어쩌면 타인은 여전히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 지옥의 면적은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정병혐오 이슈만이 아닌, 다른 약자의 투쟁도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걸음, 한걸음, 타인이란 지옥의 면적을 조금씩 줄여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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