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역시 이런 거였구나.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니. 유치하기까지 한 작업 멘트를 들으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송주원도 결국 다른 놈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역시 술에 취해 나를 주물러대던 PD처럼 내가 싫어하든 말든 제 감정을 밀어붙이기 바쁜 놈 중 하나였다.


이런 일엔 이골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화가 났다. 멋대로 품은 기대가 배반당한 기분이다.


송주원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는 생각보다 순수해 보였고, 내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나를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 줄 줄 알았다.


완만한 거절 따위를 고민했던 내가 우스워진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의 영화를 보며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했던 나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는 뻔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존경하지 말아라.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이게 날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야.”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 그의 어깨를 후려갈겼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그 틈에 그를 밀어내며 벽과 그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주차장 바닥에 깔린 자갈이 신발 밑창을 찔렀다. 아주 작은 자극도 내 속을 뒤트는 촉매가 되었다. 신경질이 치솟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송주원을 한 대 치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성난 숨을 뱉었다.


숨을 씨근덕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송주원은 내게 얻어맞은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나를 퍽 의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설마 맞을 줄은 몰랐는지 꽤 당황한 모양이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뭐,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징그러운 새끼. 개수작 부리지 마. 너 같은 새끼 수십, 수백 명은 봤어.”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으로 그를 향해 자갈을 걷어찼다. 흙먼지에 섞인 자갈이 그의 발치로 튀었다.


“앞으로 나 아는 척하지도 마라. 알겠냐?”


나풀거리는 흙먼지가 그의 신발 위에 쌓였다. 싸구려처럼 보이지만 비싼 브랜드의 운동화가 더럽혀졌다. 꾀죄죄해진 신발을 보니 졸렬한 통쾌함마저 일었다. 그가 허탈한 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수작?”


송주원은 가라앉은 눈으로 제 발치에 굴러온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이 퍽 살벌했다. 나는 술기운에 힘입어 한껏 빈정거렸다.


“그래, 개수작. 난 너 같은 새끼가 제일 싫어. 사람 쉽게 보고 건드리는 놈들.”


간혹 그런 놈들이 있다. 제 유명세에 자부심이 넘쳐서 상대가 절대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 믿는 부류. 나는 그런 놈들이 싫었다.


힘 있는 사람의 관심을 바란 적은 없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한 영화를 빛나게 할 만한 음악이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원할 뿐이다. 이 조촐한 소망에 송주원이 끼어들 틈은 없다.


“너 사람 잘못 봤어. 나 함부로 건드리지 마. 경고했어.”


그래서 나는 그를 두고 돌아서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이대로 바로 식당을 빠져나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한 며칠은 휴대폰을 끄고 잠수나 타고 싶었다.


그러나 내 뒤에 따라붙는 발소리가 있었다. 역시나, 송주원이었다.


막 들이대다가 까였으면서 뻔뻔하기도 하지. 거슬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멈추면 지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송주원의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다리가 더 길어서 그런지 송주원은 딱히 서두르는 것 같지 않은데도 나를 곧잘 따라왔다. 그 모든 게 약이 올랐다. 그가 태연히 내게 말을 붙였다.


“잠깐만요. 저 아직 할 말 남았어요.”


참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무시하는 게 이기는 거야. 속으로 참을 인을 거듭 새겼다.


“저 강우주 씨한테 관심 있어요.”


순간 걸음이 멎었다. 전 세계적으로 얼굴 다 까발려진 놈이 동네방네 남자 좋아한다고 광고라도 하고 싶은가 보다. 보면 볼수록 여간한 새끼가 아니었다. 날 곤란하게 하는 것도, 이런 말을 아무 데서나 지껄여대는 무신경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송주원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우주 씨 음악에는 더 많이, 관심 있고요.”


‘더 많이’에 강세를 둔 어조가 도발적이다. 쳐낼 테면 쳐내 보라는 뜻일까. 그는 번번이 직구였다. 말을 섞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듯했다.


송주원은 미지의 존재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어리지만, 무명인 나와 달리 모든 작품이 상패에 박제된 남자. 그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거리낌 없이 고백하고, 나에게, 그리고 내 음악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자신을 싫어할 줄 알면서도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낯선 것은 위협적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


“따라오지 마. 난 너한테 아무 관심 없어.”


송주원은 나와 눈을 맞추며 선언하듯 고백했다.


“저랑 같이 영화 만들어요.”


그가 던진 한마디가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지금 틀림없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송주원과 같이 영화를 만든다. 한 문장 안에 든 모든 단어가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뭐?”

“저 영화 가지고 장난 안 쳐요. 진심입니다. 같이 영화 만들어요. 이 얘기하려고 영포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는 예상 밖의 정보로 이미 포화 상태였다. 머릿속에서 KO를 선언하는 종이 울렸다. 나는 이제 이 링 위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그만.”


속삭임에 가까운 말에 듣기 싫은 쇳소리가 섞였다. 까끌까끌하게 말라붙은 목이 따끔거렸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오늘, 이 자리는 없었던 거야.”

“들어 봐요.”


뜨거운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았다. 두꺼운 옷을 뚫고 그의 열기가 살갗까지 치밀었다. 피할 겨를도 없이 강렬한 의지가 서린 낯과 대면했다. 손에 잡힐 듯 뜨거운 것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파과를 보기 전에 당신 음악을 들은 적 있어요. 부산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저는 그때…….”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졌다. 열정적으로 설득하는 얼굴만이 망막에 새겨졌다. 생각이 요란하게 범람해 그의 목소리를 잠식했다.


부산, 좀처럼 갈 일이 없는 지명을 듣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친절한 감독의 초대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간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부산은 그때 처음 가 봤다. 나는 한가롭게 여행이나 다닐 처지가 못 됐다. 집 아니면 일. 끝나지 않는 노동의 굴레에 빠져 한숨 돌릴 여유도 없었다.


처음엔 부산까지 갈 생각도 없었다. 솔직히 시간과 돈이 아까웠다. 당일치기는 어려울 테니 최소 1박 2일을 해야 할 텐데, 생계를 과외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내게는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다. 쥐꼬리만 한 수입을 겨우 올리는 영화 음악을 위해 생계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나를 이끈 건 이은형이었다. 그는 하던 사업 준비도 내팽개치고 나를 무작정 조수석에 태웠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투자지. 그렇게 불안하면 그냥 나 믿고 따라와. 같이 가자.’

‘이러다 나 과외 다 잘리면 어떡해? 당장 다음 달 생활비부터 막힐 텐데.’


이은형은 끝내 걱정을 놓지 못하는 내 손을 슬쩍 잡으며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그럼 나랑 살자. 내가 너 책임질게.’

‘미친놈.’


누가 그렇게 말해 준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책임져주겠다는 호언장담에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이은형과 있으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걱정이 깨끗이 흩어졌다. 불안하다가도 행복해졌다.


은형은 2박 3일 내내 조금도 피곤한 기색 없이 내 기사 노릇을 자청했고, 맛있다는 음식점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걱정으로 밤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나를 안고 잠들 때까지 토닥여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오직 꿈만 꿀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부산까지 간 건 내게 좋은 기회였다. 나를 초대한 감독은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었고, 그들 중 몇 명은 내 포트폴리오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내게 작은 일을 맡겨 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은형이 없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뭐든 주고 싶었다. 가능하면 내게 남은 모든 시간을 바쳐서라도.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 밤, 나는 잠든 그 몰래 빠져나와 지인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짧은 곡을 만들었다.


가제는 청혼, 돌아가는 날 차 안에서 그에게 들려줄 작정이었다.


“그냥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냈는데 그 음악을 넣고 싶은 장면이 떠올랐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건 안 돼요. 그냥, 당신이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요.”


부산 스튜디오에서 그 음악을 들은 사람이 또 있었다. 이 기가 막힌 우연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죠. 근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꼭 누가 작정하고 훼방 놓는 것처럼.”


송주원은 첫사랑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처럼 씁쓸하게 웃었다.


“그 음악을 극장에서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고 했었나. 나는 송주원이 했던 말을 뒤늦게 속으로 반박했다.


아니,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엇갈려서 다시 만날 리 없으니까.


“알고 싶지 않아.”


송주원은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있던 내가 만든 음악에 반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는 예전 같은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가까스로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보지 않았으면 해.”


송주원의 당당한 얼굴에 희미하게 금이 갔다.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두고 돌아섰다. 과거의 기억이 나를 집요하게 쫓는 듯했다.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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