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김여주 
Written by 시민


남자의 첫사랑은 죽을 때까지 간다 이 말이야.

신입생 환영회에 웬 화석이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첫사랑은 화상이야. 안 없어져. 걔 얘기만 해도 눈빛이 아련해진다고. 지금 나처럼! 그 앞에서 나름 푸릇푸릇한 2학년 과대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마주친 적도 없는 화석인데 과 선배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 게다가 신입생들한테 대학생활 팁을 주겠다고 ―그러기엔 간극이 좀 큰데― 막무가내로 와버렸으니, 내가 과대였으면 눈 딱 감고 저 화석을 기절시킬 거라고 고기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선 잘 익어가는 고기를 구워 맞은편 앞접시에 얹어 주며 말했다.


“이름이 나재민이라고 했나.”

“응.”

“고기만 굽지 말고 너도 먹어.”


나재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는다. 예쁘게 생겨갖곤 웃는 게 시원했다. 그리고선 자기는 됐다며 고기를 우지현의 앞접시에 돌려줬다. 우지현은 한 번 거절하면 두 번은 안 물어본다. 지가 알아서 먹겠지, 하며 자신의 고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데 문득 시원한 입꼬리가 다시 떠올랐다. 불과 몇 분 전일 텐데. 다시 고개를 들어 고기를 굽는 나재민을 보고 생각했다. 입꼬리가 야무지게 올라가 입술은 선홍빛이었다. 인기 많겠네.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다들 수고 많았어요. 대학생활 즐겁게 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도 돼요. 야 뭔 2학년한테 연락을 해. 나한테 해. 나한테! 내가 다 알려 줄 테니까, 어? 선배 많이 취하셨, 니네 나 지금 화석이라고 무시해?!

신입생 환영회는 2학년들이 화석을 전담으로 맡아 처리해 줘서 어찌저찌 잘 끝났다. 과대 저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면서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려는데 누군가 우지현의 등을 톡톡 쳤다.


“나재민?”

“어디 쪽 살아? 같이 갈래?”


인기 많겠네, 라는 예상을 전혀 빗나가지 않고 나재민은 인기가 많았다. 제일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추운 입구 쪽에 나란히 같이 앉게 된 나재민과 우지현이었는데, 어느새 나재민은 이리저리 불려다녔다. 하하호호 잘 웃고 있길래 친구 많이 사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우지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나 지하철 타고 다섯 정거장만 가면 돼. 같이 가는 건 상관 없는데 왜?”

“오. 나도 그쯤 살아. 같이 가면 되겠다.”


나재민은 또 시원하게 웃으며 우지현의 등을 밀었다. 가자가자. 막차 시간이야. 우지현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갔다. 뭐지. 존나 말리는 기분. 막차라서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에서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면서도 느꼈다. 뭐지. 존나 말리는 기분. 말할 생각 없었는데 자기네 집 강아지 이름까지 말해버린 우지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 하는 놈이지. 딱히 붙임성이 좋거나 다가가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편한 구석이 있었다.


“지현이 너 이번 역에서 내린다고 했지.”

“어. 너는 좀 더 간다고 했지.”

“응. 조심히 가.”

“아니, 너 근데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이번 역은 뭐라뭐라 하면서 문이 열렸다. 우지현은 여태 나재민한테 말려서 못 물어봤던 걸 급하게 물었다. 나재민은 딱히 큰 이유 없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서 내 접시 챙겨 주는 애가 너밖에 없더라고. 누가 좀 생각났어.


“누구?”

“있어. 엄청 다정한 사람. 문 닫힌다. 조심히 가, 지현아.”


문이 닫히고 떠나는 지하철 안에서 나재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지현도 얼결에 손을 흔들었다. 지하철이 떠나 시야에서 없어질 즈음에 흔들긴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슬퍼지는 걔의 눈빛이. 그리고 그 순간 시끄럽다고만 여겼던 화석의 말이 떠올랐다. 첫사랑은 화상이야. 안 없어져. 걔 얘기만 해도 눈빛이 아련해진다고. 그 화석한테 질문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묻고 싶었다. 아련한 눈빛이 저런 거냐고.


웃는 게 예쁘고 인기 많을 것 같다, 까지만 생각하려 했다. 걔가 누굴 떠올렸기에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까진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그게 마음처럼 잘 됐냐 물으면, 아니. 야무지게 망했다.


-


때는 2014년 3월.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라는 곡이 캠퍼스 새내기들을 금사빠로 만들었다. 비단 새내기뿐만은 아니었다. 다들 봄에 미친 건지 사랑에 쉽게 빠졌다. 그런 시기였다. 우지현도 그 설렘에 발 한번쯤은 담가보고 싶었던지라, 개강 후 며칠 동안은 나름 새내기처럼 입었다. 요즘은 안 그러지만 이때는 전부 블라우스에 청바지와 스니키진 아니면 함수 언니들이 유행시킨 테니스 스커트, 좀 센 애들은 라이더 자켓을 입고 다녔다. 하필 개강을 해도 월요일에 해서, 일주일 내내 캠퍼스를 밟아야 했던 우지현은 얼마 안 가 편한 트레이닝 차림으로 학교를 다녔다. 한 사흘 정도 새내기처럼 입었나. 설렘은 개뿔. 유동성에 제한이 생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드디어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다. 나름 새내기룩이라고 나풀거리는 치마를 사두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눈에 걸리더라. 옷장 앞에서 한참 고민하던 우지현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집었다. 삼 일이면 새내기 기분 즐기기 충분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학교로 향했다.


“어, 안녕.”

“나재민?”

“지현이도 이 수업 듣는구나.”


우지현이 짧게 탄식했다. 같은 과 맞나 싶을 정도로 겹치는 수업이 없던 나재민이거늘, 하필 여기서 마주치냐. 우지현이 머쓱하게 뒷목을 쓸었다. 신입생 환영회 이후 나재민을 떠올린 적 있냐 물으면 이따금 떠올렸고, 심지어 의식했다. 사실 우지현이 한평생 쳐다도 안 보던 나풀거리는 치마를 사고, 삼 일 동안 새내기처럼 입고 다닌 데에는 새내기라는 기분보다,


“전엔 잘 들어갔어?”


나재민을 의식한 게 더 컸으니까.

우지현은 자연스럽게 제 옆에 앉아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나재민에 조금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나재민은 스몰 토크를 시도했다. 아침밥은 먹었냐, 밥이 제일 중요하다, 잠은 잘 잤냐 등등… 초등학생 때 엄마께서 등굣길에 해 주던 걱정들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픽 나왔다. 종알종알 자잘한 걱정을 쏟아내는 나재민에 우지현이 역으로 물었다. 나재민 너는?


“너는 밥 먹었어? 잠은 잘 잤어?”


나재민이 벙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닌데. 민망해진 우지현이 멋쩍게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너도 잘 챙겨먹고 잘 자라고… 걱정되니까.”


마지막 말은 괜히 덧붙였나. 민망해진 공기가 답답할 즈음 강의실 문이 열렸다. 딱 봐도 나 당신들에게 알려 줄 게 많고 열정 넘치는 젊은 교수예요, 라는 뉘앙스를 그득 풍기는 인물에 우지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이 오티 시작부터 학생들 곡소리 나오게 만드는 과제 얘기를 꺼냈다.


“자- 여러분은 저와 함께하는 한 학기 동안 여러분의 옆자리에 앉은 분과도 함께하게 될 겁니다.”


누군가는 좋아하겠고, 누군가는 좀 꺼려하겠다. 우지현은 제 옆에 있는 나재민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쟤는, 나재민은 지금 내가 짝이 돼서 좋을까.


“드로잉 수업이니 만큼, 여러분 짝꿍의 얼굴을 관찰하고 그려 볼 겁니다. 한 학기 동안 과제는 이거 하나예요. 간단하죠? 점수 배점이 크니 성심성의껏 하셔야 합니다. 잘 그린 작품은 종강 후 열리는 학교 전시회에 걸어 둘 거예요.”


하는 말씀마다 대학교 1학년이 감당하기엔 과한 것들이었다. 짝꿍의 얼굴을 그리는 것도 모자라 점수 배점이 크고 너무 잘 그리면 또 전시하겠다니, 적당히 잘 그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아직도 제게 눈을 거두지 않은 나재민과 눈을 맞췄다. 멀리서 봐도 긴 속눈썹에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 선홍빛 입술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서, 우지현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너 그리면 되게,”

“…….”

“황홀하겠다.”


미친. 무슨 개변태 같은 소리야. 퍼뜩 정신이 든 우지현이 사과를 했다. 미안해. 이상한 뜻은 아니었어. 그런 우지현을 빤히 쳐다보던 나재민이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꿈뻑이더니 활짝 웃었다.


“왜 미안해. 나도 너 그리면 황홀할 것 같은데.”


활짝 웃는 나재민의 입꼬리에 매달리고 싶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다음 주 드로잉 수업 때는 새내기마냥 풋풋하게 차려입었다. 평소 추레한 트레이닝복만 입다가 나풀거리는 걸 입으려니 어색했다. 학교 계단을 오를 때는 그냥 욕을 씹었다. 아, 괜히 입고 왔어. 엄청 펄럭거리네. 하필 입어도 나풀나풀 긴 치마를 입어서 더 걸리적거렸다.


“어,”


결국 치마 끝자락을 밟고 무게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좆됐다. 좀 숭한 표현이지만 우지현은 그 짧은 생각에 좆됐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뒤통수 깨지겠지. 최대한 덜 깨졌으면 좋겠다.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고 이딴 옷을 입었는지 진짜….


“괜찮아?”


봄보다 진한 코튼 향이 끼쳤다.

 

“안 다쳤어?”


언뜻 섬유유연제 향기가 섞여 있던 것 같기도 했다. 나재민의 품에 안긴 우지현이 고개를 위로 올리자, 저를 바라보는 나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걸리적거리던 롱치마가 은인처럼 느껴졌다.


“지현아.”

“어… 어. 나 괜찮아. 고마워.”

“다행이다.”


나재민의 부름을 두 번 정도 놓친 우지현은 가까스로 정신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우지현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던 팔이 스르르 풀렸다. 우지현은 아직 현실감이 부족했다.


“지현이 너도 드로잉 수업 들으러 가?”

“응.”

“같이 가자. 내 팔 잡아.”

“팔은 왜?”

“넘어질까 봐. 경사가 높아. 위험해.”

“아… 고마워. 오늘 괜히 이런 옷을 입어서,”


민망한 듯 우지현은 괜히 옷을 탓했고, 그런 우지현에 나재민은 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런 옷 입으니까 색다르다.”

“어?”

“평소 스타일이랑 조금 다르게 시도한 것 같아서 색달라, 지현아.”

“…….”

“근데 둘 다 잘 어울려서 신기해. 예뻐.”


그니까 옷 너무 미워하지 마. 예뻐해 줘. 하필 이때 햇빛이 나재민의 속눈썹 사이로 들어차서, 갈색 눈동자에 맺혀서, 나재민의 선홍빛 입술이 환해서. 우지현은 나재민이 내민 팔을 꽉 쥐었다. 세상에 어떤 스물 된 남자애가 이런 표현을 쓰지. 우지현이 잔뜩 붉어진 귀와 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푸학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재민은 어리둥절한 듯 갸우뚱거렸다.


“그냥 네 표현이 너무 순수해서. 되게 아이 같다.”


들어가자. 늦겠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이끄는 우지현에 나재민은 반쯤 멍했다. 웃는 모습이 어쩜 저렇게 닮았지. 웃음 포인트도. 말투도. 행동도. 나재민은 아주 잠깐 동안 저를 이끄는 게 우지현인지 김여주인지 헷갈렸다. 나재민을 이끄는 우지현은 그냥 붉어진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랬을 뿐이었는데.


나재민 역시 금요일을 기다렸다. 우지현이랑 있는 게 좋았다. 우지현이랑 같이 수업 듣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 즐거운 시간이 ‘우지현’이랑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재민이는… 뭔가 지현이를 그리는 것 같지가 않네.”


다른 사람을 투영한 느낌이야. 좀 더 지현이를 바라 봐. 네가 보고 싶은 사람을 투영하지 말고. 교수님의 말씀에 나재민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과의 면담을 끝낸 나재민이 그림을 쓰레기통 깊숙이 처박고 사라졌다가 얼마 안 가 다시 쓰레기통 앞으로 뛰어왔다. 그리곤 그림을 빼내어 가방 속 깊숙이 넣었다. 차마 제 첫사랑을 투영해 그린 그림을 쓰레기통에 처박진 못 하겠더라.

그 이후로 나재민은 교수님 말씀대로 우지현을 보려 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우지현이 그렇게 물으면, 나재민은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냥. 너 그리고 싶어서. 죄책감에 제대로 눈을 맞추질 못 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귀갓길에 말을 건 것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다가간 것도 우지현을 본 게 아니라, 김여주를 떠올리게 해서 다가간 거였으니까. 이제 와 김여주를 빼고 우지현을 보자니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재민은 우지현이랑 붙어다녔다.

‘박카스랑 약 좀 사왔어. 어제 네가 피곤하다길래.’

그녀가 다정해서.

‘얘 우유 못 먹어. 나 줘. 넌 내 거 먹고.’

그녀가 섬세해서.

‘별걸 다 고맙대. 그럼… 나중에 밥이라도 사던가.”

그녀가 단조로워서.
자꾸 김여주가 떠올랐다.


“야! 이번에도 너네 둘만 빠지냐?”


과 동기가 장난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우지현은 이미 몰래 바깥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고, 짐을 챙기던 나재민이 푸석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적당히 먹고 들어가, 얘들아. 나재민이 그렇게 한마디 하고 나가면 몰래든 대놓고든 짝사랑하던 애들은 호들갑을 떤다. 나재민 다정한 거 존나 유죄다. 거기에 찬물을 붓듯이 누군가 크게 말했다. 쟤네 곧 사귈 듯.


“넌 더 있어도 된다니까.”

“어차피 저기 있으면 계속 고기만 굽는데, 뭐. 지현이 너 가면 나 챙겨 주는 애도 없어.”


나재민은 그렇게 말하며 우지현의 가방을 들었다. 백팩을 메면 등이 굽는다고 들어 줬고, 크로스백을 메면 어깨가 한쪽만 기울어진다고 들어 줬으며, 클러치를 들고 오면 손으로 들기 무거울 것 같다며 들어 줬다. 그게 나재민이었다. 지독하게 다정한 나재민과 우지현의 짝사랑.


둘은 항상 지하철에서 헤어졌다. 원래 우지현이 먼저 내리고, 나재민은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렸는데, 이번엔 우지현이 내리자 아까부터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던 나재민이 다급하게 따라내렸다. 당황한 우지현이 물었다. 뭐야, 왜 벌써 내려.


“요새 이 일대에 흉흉한 일이 많대. 당분간 늦게 끝나거나 밤에 들어갈 때 나랑 같이 가.”

“아 뭐야. 너 진짜 우리 엄마 같아. 나 괜찮으니까 너 빨리 가. 차라리 전화해, 전화.”

“자자, 갑시다.”


지현아,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해?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등을 미는 나재민에 우지현은 당황하며 앞장섰다. 어, 1번 출구… 그럼 나재민이 호들갑을 떨며 대답한다. 와, 거기가 진짜 위험한 골목인 거 알지. 빨리 가자. 거기가 진짜 위험한 골목인지 아닌지 나재민도 모른다. 그냥 아무 말이지. 어어… 그래. 가자. 얼결에 나재민과 귀갓길을 동행하게 된 우지현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아, 엄마가 자취방은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말랬는데. 결국 집까지 두 블록 정도를 남기고 우지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게. 고마웠고, 너도 빨리 가.”

“왜 혼자 가. 위험한데. 이 일대에 진짜 위험한 사람이,”

“나 자취방은 아무한테도 안 알려 줘.”


나재민이 숨을 들이켰다. 이때부터 정말 우지현이 안 보이더라. 투영된 첫사랑만 남아 있었다.


“좀… 서운할 거 아는데 원래 아무한테도 안 알려 주는 거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마. 거리 두는 거 아니고….”


우지현이 미안한 듯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혀로 쓸었다.


“아니, 근데 나도 이상하게 네가 너무 편해. 너한테 말려서 결국 여기까지 와서 말하는 거야. 변명이긴 한데. 아, 모르겠다. 미안. 근데 이제 진짜 가. 위험해. 너라고 안 위험할 것 같냐. 너도 집 도착하면 전화해.”


나재민이 계속 멍해 있자, 우지현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진짜 가. 여기까지 바래다 준 것도 진짜 고맙다. 그리고선 뒤돌아가는 우지현을 보고,

‘아, 너 진짜 좀… 이상해. 나 원래 친한 친구한테도 집 절대 안 알려 주는데. 자꾸 너한테 말리는 기분이 드냐.’

도저히 김여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재민은 더 이상 우지현과 함께 하는 드로잉 수업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투영해 놓고, 그래서 가까워진 거라고 하면 진짜 음침하고 소름 돋겠지. 죄책감에 짓눌려 우지현을 피했다. 수업 내내 눈도 잘 안 마주치고, 항상 끝나면 밥도 같이 먹었는데 선약이 있다질 않나, 드로잉 시간이 되면 우지현을 쳐다보기는커녕 도화지에 코 박고 그림만 그려대는 나재민에 우지현이 물었다. 나 너한테 뭐 잘못했어? 나재민이 연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에도 네가 김여주 같다는 생각을 하면 진짜 미친놈이겠지.


“네가 뭘 잘못해. 그런 일 없어.”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내가 오늘 속이 좀 안 좋은가 봐.”


되도 않는 변명. 그 되도 않는 말을 할 때도 저를 쳐다보지 않는 나재민에 우지현이 체념한 듯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지금은… 약 안 사다 줘도 되는 거지.


“괜찮아지면 말해 줘.”

“응.”

“기다릴게.”


그녀는 다정하고, 섬세하며, 배려심이 깊다.

다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주는 우지현을 나재민 역시 안다.


-


나재민은 드로잉 수업을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교수님께 피드백 이후 더 퇴화한 것 같다는 혹평을 들었다. 반면 우지현이 그린 나재민의 그림은 방학 동안 학교에 전시될 예정이다. 최선을 다해 그리긴 했는데 전시까지 할 정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뻘쭘하게 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였다.


“근데 처음 스케치랑 많이 다르네. 뭔 이유라도 있니?”


처음에는 웃는 재민이를 그리더니 왜 완성작은 눈을 내리깐 모양새냐는 물음에 그냥, 눈의 호선이 아름다워서, 그 위에 속눈썹이 조화로워서 그렇다고 답했다. 나재민이 저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 그렇다는 대답은 넣어 두었다.


드로잉 기말을 끝으로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우지현은 급한 마음에 나재민을 붙잡았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른다. 동기를 짝사랑하는 대학생에게 방학은 너무 기니까, 고등학생 때처럼 한 달이면 어떻게든 참아 보겠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삼 개월이나 못 보는 건 제법 괴로우니까.


“재민아.”

“지현아, 그….”

“방학 잘 보내.”


하고 싶은 말이 되게 많았는데 입이 안 떨어져 보잘 것 없는 인사를 했다. 저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나재민을 보는 건 생각보다 꽤 곤욕이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 인사를 전하는데도 손이 잘게 떨렸다. 당황한 나재민을 두고 강의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진짜 좆됐다고. 이렇게까지 깊어질 생각은 없었다고.


우지현은 조금 울었다. 나재민을 향한 마음을 너무 티 냈나. 과 애들이 우리 엮는 거 기분 나빴나. 그러다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거다. 같이 집 가자고 한 것도, 드로잉 수업에서 내 옆에 앉은 것도 넌데. 다른 사람이 우리 엮을 때 속도 없이 웃기만 한 게 누군데. 따지고 보면 시작은 네가 했는데. 그러다 우지현은 한 달 전에 대화가 끊긴 나재민의 카톡방을 보곤 억울함을 끊어냈다.

끝내지 못한 건 나뿐이구나. 애초에 쟤는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네가 많이 괘씸하다, 재민아. 어쩌다 마주치면 원망을 쏟아낼 만큼.


“안녕.”


근데 막상 그 괘씸한 나재민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 원망은커녕 몸이 굳어 인사를 받아치지도 못했다. 나재민이 왜 여기에. 당황한 우지현의 표정을 읽은 나재민이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서운하게.”


우리가 서운까지 할 사이였던가. 내가 서운해도 될 사이였나. 우리 빼고 나는, 나는 너한테 서운해도 되나. 그럼 네 앞에서 좀 많이 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 우지현이 입을 열었다. 뭘 놀라. 그냥 오랜만이라 그래.


“근데 재민이 넌 왜 여깄어.”

“나 주말마다 봉사하거든. 너는?”

“나는 국장 때문에 잠깐 방학 동안만 해. 아, 주말만. 4주 정도.”

“여기서?”

“응.”


그 후 지독히 이어진 정적에 숨이 막힐 차에 원장님이 부르셨다. 봉사 자원자 분들 여기로 모이실게요! 그 후 나재민이 느낀 건 지독한 기시감. 우지현이 느낀 건 지독한 나재민. 아이들이 유독 우지현을 좋아해 짖궂게 굴며 놀아달라 하는 것도, 아이들에 파묻혀 헤롱헤롱대는 우지현도, 분명 처음 보는 장면인데 미친 듯이 익숙했다.


“잘 가.”

“지현아.”


그리고 결국 그 기시감에 기권표를 던진 나재민이 우지현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같이 밥 먹자.”


우지현에게 나재민은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붙잡혔다. 그래. 오랜만에 같이 먹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좀 떨렸다. 이제부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할 자신이 그려졌다.


식당에 들어서서 아니, 식당까지 가는 길마저도 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늘 그랬듯이 나재민이 수저를 꺼내면 우지현은 물을 따랐고, 대화도 전과 같았다. 꿈, 가치관, 생활 방식, 아이들과 반려 동물들과 같은 일상적인 대화들.

비단 그날뿐은 아니다. 그 뒤로도 나재민은 똑같았다. 한 달 반 동안 마음 졸인 게 무색하게도, 지독하게 똑같았다. 전처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그런 일상적인 것들로 나재민은 나에게 언질 하나 없이 우리 사이를 되돌렸다. 우리가 같이 하지 못 했던 한 달 반이란 시간은 기억에서 사라진 듯이.


-


2학기 시작이다. 방학 내내 둘은 거의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둘 사이는 여전했다. 나재민은 다정하고, 우지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우지현의 2학기 다짐은 과탑이 아니라, 나재민 피해 다니기였다.


“아- 나재민 제에에에발 한 번만 와라.”


나재민은 달고 태어난 얼굴부터가 조용히 살 팔자가 못 됐다. 1학기 때보다 참여자 수가 족히 반절은 줄어든 2학기 개총 때도 역시 소매 끝자락이 붙잡혔다. 아- 나재민 제발 가자. 1학기 때도 학과 활동 참여 잘 안 했잖아.


“어차피 다들 가지도 않잖아. 거의 학생회 아니면 너네 친구들 아니야?”

“아, 아니야. 우지현도 와.”


나재민의 미간이 좁혀진다. 지현이가? 너 거짓말 치는 거 아니지? 우지현의 나재민 피해 다니기가 워낙 잘 이뤄지고 있는 터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재민도 우지현을 못 만난 지 일주일 정도 됐으니까. 간만에 마주칠 우지현을 생각하며 나재민이 말했다. 지현이는 언제 오는데?


“어, 어? 아, 이따 좀 늦게 온댔어.”


개구라. 뭐 어찌됐든 나재민 끌고 가기에 성공한 아무개는 급하게 우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지현아… 너 오늘 개총 제발 와주면 안대ㅠㅠ? 나재민도 온대!!! 그 아래 보이는 나재민의 연락. 진짜 개총 오는 거야? 우지현이 답이 없자 다시 한번 온 연락. 그럼 나 먼저 가 있을게. 너 오면 빠지자. 우지현은 둘 다 무시했다. 개총도 피하고 싶은데 나재민까지? 갈 리가 없지.

그러니까, 우지현은 원래 여기 올 생각이 없었다고.


> 과대: 야진짜 지현아 너 와야해 나재민 지금 개미침

> 과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동영상엔 인사불성이 돼서 지현이 어디 있냐고, 지현이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울부짖는 나재민이 있었다. 식겁한 우지현이 고민할 새도 없이 대답했다. 갈게. 어디야. 시곗바늘이 12시를 향할 때였다. 막차고 뭐고 우지현은 택시를 잡았다. 혹시라도 근처에 편의점이 없을까 봐 손에는 소화제와 숙취제를 든 채로.


“야, 나재민. 너 솔직히 우지현이랑 뭐 있지.”


술집 문고리를 잡은 우지현이 행동을 멈췄다. 뛰어오느라 뱉었던 밭은 숨도 숨겼다.


“너 우지현이랑 사귀어?”

“아니이~”

“근데 왜,”

“지현이 보기 싫어.”


바닥이 뜯겨져 설 자리가 없는 느낌. 우지현은 문고리 하나에 의지했다.


“여주 닮았어. 자꾸 생각날 정도로 짜증 나게 닮았어.”

“야야… 너 취했,”

“그래서 사과해야 해. 지현이 볼 때마다… 여주 생각하니까.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해야 해.”


우지현이 생명줄처럼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그러자 끝없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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