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가 두 개라고 칭얼대더니, 결국 하나는 있으나 마나 한 신세가 되었다. 옆으로 웅크린 채 누운 수해를 정운이 뒤에서 감싸 안았다. 보송하게 마른 수해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사락이며 매만지다 연신 수해의 머리에 입술을 누른다. 금방 잠이 오지 않는지 수해는 정운의 품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 불편해요?"

   "아니."

   정운의 손을 겹쳐 쥔 수해가 정운의 팔을 더욱 가깝게 자신에게 붙였다. 등 뒤로 두텁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이 온기를 벗게 되는 날이 오면 평생을 추위에 떨며 괴로워할 것만 같아, 수해는 몸을 웅크렸다.

   "...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게 그렇게 좋았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정운이 허탈하게 웃으며 수해의 목덜미에 얼굴을 잔뜩 문질렀다.

   "좋아.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니까."

   "난 그 말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울었는데."

   "알아. 나도 울었잖아."

   너가 무슨 그 말 하면서 울었어... 수해가 작게 꿍얼거리자 정운이 그 말을 꺼내려고 엄청나게 울었으니까 좀 봐달라고 말하며 수해의 머리에 입 맞췄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평생 모아왔던 눈물이 다 터져 나온 것 같다고. 

   "그날 내가 흘렸던 눈물, 다 당신 거라는 거, 알죠."

   정운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처음 정운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운은 늘 따스한 목소리로 수해의 말을 들어주고, 수해가 원하는 것들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또 수해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정운을 왜 사랑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아.

   정운의 품 안에서 부스럭거리던 수해가 몸을 돌려 정운을 마주 보았다. 한동안 정운과 마주하던 시선이 가볍게 내려앉으며, 수해도 그동안 어렵게 혼자 품어두었던 말을 속삭인다.

   "좋아해요, 정운 씨. 정말 많이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날들이 그랬어요. 정운 씨는 믿기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어줘요. 내가 자꾸 도망치고, 모른 척 해서 정운 씨는 몰랐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좋았어요. 정운 씨가 나한테 머플러를 주고 간 그날부터..."

   말을 하면서 품으로 파고드는 수해의 목소리가 점점 묻혀 웅얼거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있던 정운이 수해를 품에서 조금 떼어냈다.

   "처음부터 내가 좋았다구요? 지금껏 내내?"

   조금 부끄러워진 수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당황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여태껏 내가 수해 씨 더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 아냐."

   아... 권수해 정말. 정운이 수해를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으며 웃었다. 이러다 정말 터질 것 같아 수해가 으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때 같이 술 마시면서..."

   취해서 기억 못하는 줄 알았더니,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나 오늘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고, 떨려서 죽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정운의 등을 토닥였다. 어떤 식으로든 평생 잊지 못하겠지. 다만 이 기억이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숨이 가쁘도록 행복한 추억으로 남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미 떠나고 없는 것에 대한 미칠 듯한 고통이 아니라.


***


   돌아오는 비행기 안, 한창 영화를 보던 정운이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수해는 고개를 숙인 채 자고 있다. 많이 피곤했나. 어깨를 내어주려다, 도리어 잠에서 깰까 그냥 두었다. 여행을 마치고 잠시 미뤄두었던 삶으로 돌아간다. 짧았지만, 둘이서만 보냈던 이 시간들이 그 어떤 날들보다도 행복했다. 그래서 예전의 삶을 버리고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마냥 그럴 수도 없고, 그것이 올바른 해결 방법은 아니다. 알지 못하는 길로 떠나도, 목적지는 항상 곁에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방법을 잘 생각해 봐야지.

   비행기 좌석에 붙은 모니터가 한국까지의 도착 시간을 표시한다. 도망치듯 남겨두고 떠나온 문제들로 돌아가는 시간이 8시간 26분. 정운은 자신이 수해에게 고백하며 버리겠다고 약속한 것들을 다시 상기했다. 모든 것이 두번 다시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온통 새카맸다. 하늘에 있으면 하늘을 볼 수가 없네. 수해가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다. 구부정하게 서 있던 수해가 크게 하품을 했다. 주위는 이제 익숙한 소음으로 가득하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전부 알아들을 수 있고, 시야에 잡히는 간판과 표지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마저도 익숙하다. 

   돌아가기 전, 공항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했다. 정운은 순두부찌개, 수해는 우동을 앞에 놓았다. 벌건 국물을 한 입 떠먹은 정운이 반사적으로 아으 소리를 냈다. 해장되는 기분이라고 중얼거리자 수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매운 걸로 해장 못 하겠던데. 아랑곳하지 않고 국물을 몇 번 더 떠먹은 정운이 속이 확 풀린다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수해가 우동을 먹다 말고 킥킥 웃었다.

   "아저씨 티 내요?"

   "뭔 자기는 아저씨 아닌 것처럼 그러네.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두 살이라도 어린 게 어디야."

   "남들이 보기엔 비슷하거든요."

 

   정운이 사는 빌라로 진입하는 익숙한 골목길, 캐리어를 끌고 걷던 수해가 정운을 돌아본다. 

   "여행, 다녀오길 잘한 것 같아요."

   수해의 손목에 여행지의 소품 샵에서 산 매듭 팔찌가 걸려있다. 정운의 손목에도 비슷한 팔찌가 걸려있다. 수해가 골라준 디자인이다. 잠시 수해의 팔찌를 보던 정운이 씩 웃었다. 그렇죠? 다녀오길 잘했어. 

   창문을 열고 환기하며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세탁할 옷은 빨래 바구니에 넣어두고, 이것저것 사 온 기념품들을 꺼냈다. 수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고개를 천장으로 팍 젖혔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캐리어를 정리하다니. 정운 씨 사람 맞아? 분주하게 움직이던 정운이 빨래 하게 얼른 옷 꺼내라고 채근해도 도무지 손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정운이 수해의 캐리어를 파헤쳤다. 마지못해 일어난 수해가 겨우 자기 캐리어를 들여다보았다.

   기념품 봉지를 뒤적이던 수해가 앗, 하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정운을 닮았다며 사 온 강아지 장식품이다. 후다닥 달려가 현관문을 여는 수해의 뒷모습을 정운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계단으로 나간 수해가 화분에 꽂아둔 새 장식 옆에 강아지 장식을 놓아두었다. 이제 됐어. 쪼그려 앉아 한동안 화분을 보다가, 정운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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