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피드백은 반영하기 전까지 그것이 옳은지 틀린지 알 수 없고, 심지어 반영한 뒤에도 숙고가 필요한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피드백이 정말로 옳은지 틀린지는 작품이 완성되고 공개 된 뒤에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목표가 조회수나 판매량이라면 비교적 명확하지만, 공모전 수상이나 특정 독자군의 호응이라면 불분명해진다.

엄밀히 따지자면 모든 피드백은 피드백을 적용하지 않은 대조군을 준비할 수 없으므로 옳음과 틀림이 명징하게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보는 피드백을 거르는 몇 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 

내게 좋은 피드백은 옳은 것이고, 나쁜 피드백은 틀린 것이다. 따라서 이 기준은 작가의 기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가 아니라 소설에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 것이다. 

(이를테면 항목 '2'에서 '재미를 따지는 건 나쁘다'고 했지만, 재미있다고 하면 어찌되었든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재밌다고 하면 기분이 좋다.)

이 기준을 자신있게 내세워도 될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기준대로 피드백을 받고, 거른다.


1. 명백한 것은 좋은 피드백이다.

맞춤법/띄어쓰기/오탈자/비문 등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명백한 오류는 좋은 피드백이다. 작가가 어차피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다. 실수와 무지를 흔쾌히 받아들여라.


2. 재미를 따지는 것은 나쁜 피드백이다.

재미는 언제나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하므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3. 하지만 일정 숫자 이상의 독자가 '재미있다'고 하면 좋은 피드백이다.

많은 사람이 재미있다고 하면 그 글은 재미있는 글이다. 한 명의 독자는 그 글이 재미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대중이라고 부를만큼 군집된 독자는 그 글이 재미있는지 없는지 안다. 일정 숫자 이상의 기준은 모호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없다'는 아니다. 재미없다는 작품을 공격하는데 가장 쉽게 쓰인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작품이 정말로 재미없어도 재미없다는 피드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말 없이 떠나버린다. 즉,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는 대칭적인 관계가 아니다. 재미있다 또한 건성으로 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경험상, 많은 사람들은 건성으로라도 재미있다는 말도 쉽게 하지 않는다.


4. 비작가의 구체적인 피드백은 나쁘다.

작가임을 밝히지 않은 경우 비작가라고 판단하고, 그 지적이 구체적이라면 무시하는 게 낫다. 단순히 아마추어의 의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작가가 구체적인 지적을 한다는 건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아주 높은 확률로 1)자신의 불만을 작가에게 설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과정이다. 이 의도가 명확하다면 더는 읽지 않아도 된다. 다른 하나는 2)작가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고 싶어서다. 보통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1)과 2)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특히나 그것이 모두 글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면 더 그렇다. 이 경우 1)의 해악이 너무 크므로 2)도 그냥 1)이라고 생각해라. 그 사람이 정말로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아마추어의 의견이므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5. 열정적인 피드백은 나쁘다.

한 사람에게서 온 피드백이 구체적인데다 숫자까지 많다면 의심해야한다. 작가가 이미 글로 수익을 내고 있다면, 글은 그렇게까지 나쁠리가 없다. 그러니까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란 만들어내고자하면 한도 끝도 없다. 헤밍웨이의 소설도 문체가 숨이 막힌다고 지적할 수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읽다가 숨을 못쉬겠다고 지적할 수 있다.

좋은 글은 문제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덮을만큼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또한 당장 글의 문제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작품의 다른 좋은 점을 이루고 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견해 없이 피상적인 지적으로 숫자만 채운 피드백은 나쁘다.


6. 고증에 대한 피드백은 나쁘다.

항목 '1'에서처럼 누구나 알 수 있을만큼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 관련 학과에서 평점 4.0 이상 성실히 공부한 학생이나 구글 첫 페이지나 나무위키가 아니라 논문을 뒤져서 알법한 지식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경우면, 그 고증에 대한 지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소설을 특별히 더 좋게 만들 확률은 낮다. 그 이상의 지식이면 아는 사람은 한줌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피드백을 받아들이긴 해야겠지만, 만약 글을 고치는데 불필요한 노고가 든다면 안 고쳐도 상관 없다.


7. 취향을 아는 사람의 피드백은 좋다.

작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 그 사람의 피드백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피드백은 좋은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은 그런 취향을 가진 독자군의 대표가 되어 작가의 글을 읽어줄테니까. 그리고 그 사람의 피드백이 어떤 것이든간에 그 사람의 취향을 반영해서 피드백을 가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만 읽는 독자에게 '이 트릭은 너무 단순하다'는 지적을 받는다면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8. 작가의 다른 글을 많이 본 사람의 피드백은 좋다.

작가가 쓴 다른 글과 비교하는 피드백을 준다면, 당장의 소설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소설쓰기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피드백은 작가의 연속되는 작업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 조언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작가에게 달렸다.


9. 많은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을수록 좋다.

소수에게 피드백을 받는 건 나쁘다. 그 피드백이 적을수록 편향된 의견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이 덕에 작가가 작품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많은 사람에게 받은 피드백은 작가의 현재 위치를 밝힌다. 많은 피드백은 작가 자신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위치를 확인할 거의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의미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그 자체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피드백들은 대체로 이 항목의 다른 기준에서 좋아야만 한다.


10. 작가의 피드백은 좋을수도 있고 나쁠수도 있다.

피드백 중 가장 요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작가의 피드백이다. 작가는 작가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피드백을 준다. 비작가는 생각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쓰고 있는 글과 장르가 겹치는 작가라면 단연 그보다 더 나은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남의 글을 피드백을 해주는 시간 동안 자기 글을 써서 이익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썼다는 건 어떤 선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작가가 그런 것도 아니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항상 좋은 피드백을 주는 것도 아니다. 피드백은 일종의 영향력 행사다. 그 사실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거나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을 판가름 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왜 자신의 피드백을 반영하지 않았는가' 따진다면, 멀리해라.


11. 대안이 없는 피드백은 나쁘다.

문제를 찾는 건 쉽다. 하지만 대안을 찾는 건 어렵다. 무언가가 빠지거나 없으면 더 좋겠다는 피드백에 대해서 언제나 '그럼 그 자리에 뭘 넣을까'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분량과 글의 리듬의 문제가 아닌 이상 다른 무언가가 들어가야 한다. 대안을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등장인물 A가 사라진다면 A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A에 대한 묘사, A를 지칭한 다른 대명사, A를 언급한 모든 문장과, A가 가지는 플롯에서의 역할이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사라진 소설의 부분들이 다시 소설에 미치는 파급력까지 감안해야 한다. 소설의 모든 부분은 유기적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피드백을 반영하면 전보다 못한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12. '다시 쓰라'는 피드백은 나쁘다.

다시 쓰기는 모든 글의 정답일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글은 다시 쓰면 더 좋아진다. 하지만 작가에겐 마감도 있고 내일 써야 하는 글도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쓰라는 피드백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피드백은 다시 쓸 각오가 되어 있을 때만 받아들여야 하며, 진정한 의미의 다시쓰기는 그 누구에게도 '다시 쓰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다시 쓰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쓰고 말고는 오롯이 작가 자신이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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