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안아줘요/10cm



  우리도 빛나는 햇살 아래 모래알처럼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간지럽고 풋풋한 연애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내가 고3, 형은 이제 막 제대해서 짧은 머리 위에 스냅백 눌러쓰고 다니던 때였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공부 자체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이 생긴 민윤기란 사람을 내 과외 선생님으로 소개받았을 때는 미처 몰랐다. 엄마 친구 아들이란 게 얼마나 어이없게 위대한 존재인지를. 하고 다니는 건 물론이고 말투도 취한 사람처럼 껄렁껄렁해서 뭔가를 가르친다면 공부보다는 [욕 찰지게 하는 법]이라든지, [상대를 말로 조져놓기] 같은 카테고리의 것일 듯 한 윤기 형은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다. 그래,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라 타고난 머리가 좋은 타입. 그런 윤기 형을 보며 깨달았다. 노력의 비율보다 타고난 지능의 비율이 높은 사람은 누군가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걸.

  "야. 넌 어떻게 하루에 단어 30개를 못 외우냐? 멍청하긴."
  "하루에 30개면 한 달이면 900개예요 쌤."
  "그러니까. 너 하는 꼴 보니 수능치고 나면 공부 안 할 거 뻔하고. 니가 한 70살까지 산다고 치면 70년 동안 기껏해야 영어단어 10000개 정도인데. 그걸 머릿속에 못 넣어? 애초에 든 것도 없으면서?"

  왜 든 게 없어요. 쌤을 향한 제 마음이 이렇게 빈틈없이 꽉꽉 들어차서 손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사방에 흩어져버릴 것 같은데. 나를 향한 구박과 잔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랬다. 연애를 하기 가장 좋은 나이였던 19세의 나는 윤기 형을 좋아했다. 나와 성별이 같다는 걸 제외하면 과외 선생님이 첫사랑이라는 식의 아주 흔하디흔한 전개였다. 물론 전개는 그랬다. 윤기형의 성격으로 보나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로 보나 이 사람은 내게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단어 30개를 외우면 다음날엔 15개를 까먹고 마는 나를 한심해하고, 한 번씩은 질린다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내젓는 형을 보면서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 있을 거란 걸 기대했다면 그건 지나친 자의식 과잉이었다. 형은 나를 귀여운 엄마 친구 아들 정도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형이 이렇게 나를 귀여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우락부락하고 시커먼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음에 감사했다. 또래에 비해 작은 키와 중학생으로 보기도 하는 어린 얼굴 같은 건 19년 인생동안 늘 나를 따라다녔던 콤플렉스였지만 형을 좋아하면서 나는 나의 이런 부분들을 좋아하게 됐다. 야 박지민 손 봐 졸라 귀엽다. 같은 반 친구 놈들이 제 손과 맞대어 보면서 웃었던 내 작고 짧은 손가락을, 형 앞에서 일부러 꾸물거리며 꼼지락 거릴 때도 있었다. 형도 친구들처럼 니 손 귀엽다, 하고 말해주길 기다리면서. 하지만 형은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내 손을 보며 말했다. 야 왜 그렇게 가만히 못 있어. 산만해 가지고선. 집중 안 해?


  자려고 누우면 내 첫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나를 찾아왔다. 천장에서, 창문에서, 옆에 놓아둔 빈 베개에서, 괜히 다시 열어보곤 하는 카톡 대화 창에서. 어. 아니. 그래. 죽을래. 단어 외웠냐. 내일 시험. 하나에 한 대. 그렇게 단답형이었지만 형의 메시지는 어떤 소설의 문구보다도 더 달콤했다. 19세의 신체 건강한 남자 아이도 사랑에 빠지면 한없이 감성적인 소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손으로 더듬듯 읽어보고 시도 때도 없이 형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 하다가 나도 모르게 보이스톡을 눌러서 심장이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이걸 종료를 누른다고 눌렀는데 당황하는 바람에 다시 보이스톡 신청을 눌러서 미친 듯이 핸드폰 배터리를 빼버렸는데, '어떡하지..' 하고 혼자 고민하다 다시 배터리를 끼우고 핸드폰을 켰더니 무슨 일 있냐는 형의 메시지가 10통이 넘게 와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니네 집 앞인데 부모님 주무시냐]였다. 그걸 보고 놀라서 창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더니 형이 까만색 후드 집업을 눌러쓴 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오오라를 풍기고 있어서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 온 사람이라기 보단 무슨 짓 저지르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누워있던 상태라 부스스한 머리에 물을 묻혀 손으로 싹싹 빗은 다음 슬리퍼를 끌고 나갔더니 형은 어느 때보다도 나를 한심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형이 어느 때보다 좋았다. 내가 걱정 돼서 새벽에 우리 집 앞까지 달려와 줬으니까. 잠을 자지 않아도 꿈을 꾸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평생을 살아도 행복할 정도로 나는 형이 진짜 너무 좋았다.


  윤기형의 스파르타식 교육방식 덕택인지 나는 수능을 제법 잘 쳤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의 교육방식보다는 그냥 민윤기란 사람 자체가 엄청난 동기부여를 했던 탓이 컸다. 나를 가르쳤으면서도 별로 나에 대한 기대는 없었던지 몇 점 이상이면 크리스마스에 함께 놀아주겠다고 형이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형이 그런 조건을 내걸었던 건 아니었고, 뭐 갖고 싶은 거 있냐는 물음에 형이요 라고 대답할 순 없으니 그럼 크리스마스에 같이 놀아달라고 했다. 형은 정말 싫다는 걸 온 얼굴로 표현하긴 했지만 알겠다고 했고, 그 날부터 나는 하루에 단어를 50개씩 외웠다.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그래서 나는 연인들의 날이라 불리는 크리스마스에 형과 함  께 하는 꿈같은 소원을 기어코 이뤘다. 온 세상이 들떠있고 여기저기에서 캐럴이 울려 퍼졌으며 모든 커플이 개떼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내 의지보다는 그 물결 같은 인파에 휩쓸려 우리는 무조건 앞으로만 걷고 있었다. 내 옆에 서서 터덜터덜 걷는 형은  안 그래도 없는 기를 그 사람들에게 다 빼앗긴 채 나무토막이 되어있었다.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면서 데이트 같은 걸 해보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 데이트란 것에 윤기 형의 동의는 없었을 뿐더러 이렇게 사람 많은 걸 딱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내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사람들 너무 많아서 싫죠. 그냥 집에 갈까요?" 하고 물었고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던 형은 "그럼 우리 집 갈래?" 하고 물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때를 위해 만들어 진 거겠지. 만세. 크리스마스 만세. 태어나주신 아기 예수님 만세.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 길거리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윤기형 질리게 만든 세상의 모든 커플들 만만세.  


  형의 자취방은 예상하던 대로 깔끔하고 심플했다. 형은 그냥 가르쳤던 꼬맹이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호의를 베푸는 정도였겠지만 나는 온 집에 가득한 형의 냄새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탕수육세트를 시켜먹었고 잠시 게임을 하다가 형이 다운받아놨던 영화를 연달아 두 편을 봤다. 하나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캔디 크러쉬 깨듯 도끼로 사람 머리를 깨는 영화였고, 하나는 전직 FBI였던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영화였다. 두 편의 영화에서 한 학급의 인원수가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형은 그걸 굉장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형의 얼굴을 훔쳐보며 시간이 지났다. 슬 날이 저물어가고 이제 형이 집에 가라 그럼 어쩌지 하고 혼자 초조해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형이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가져와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저 미자예요 쌤."
  "그러니까. 이제 며칠 후면 이거 당당히 마실 수 있어서 별 맛 없어. 미자일 때 마셔둬."

  그러면서 푸쉬쉬 하고 명쾌한 소리를 내며 캔을 따서 마시는 형의 목선을 쳐다보는 게 부끄러워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형은 이게 내 첫 음주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럴 리가 있는가. 양아치는 아니었지만 술은 물론이고 담배도 펴본 적은 있었다. 술은 중2때, 담배는 중2부터 중3 말까지. 모르고 교복바지 안에 넣어두었던 담뱃갑이 세탁기에서 분해되어 그날 세탁기 안에 들어있던 모든 옷에서 풀이 돋아나는 기적을 행한 후 아빠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담배를 끊었다. 솔직히 그게 막 맛있거나 그래서 피웠던 건 아니었고 그냥 같이 노는 친구들이 피우니까 나만 안 피우면 찐따 같을까봐 라는 이유였으니 금연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아무튼 형 앞에서 굳이 내숭을 떨고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구태여 "저 술 많이 마셔봤어요." 하며 허세를 떨 마음도 없었다. 손톱을 바짝 깎은 탓에 캔 뚜껑이 따지지 않아 검지로 자꾸 틱틱 소리를 내며 긁고 있으니 형이 "이리 줘봐." 하며 뚜껑을 따서 다시 내 손에 쥐어줬다. 하여튼 손도 애 같아가지고는, 하는 말도 덧붙였다.


  형은 세 캔, 나는 두 캔을 마신 채 다시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 영화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이제 이거 끝나면 진짜 형이 집에 가라 그럴 것 같아 풀이 죽어 있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남녀 주인공이 격정적인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창피하고 떨려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데 방안이 조용했던 탓인지 꿀꺽 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났고, 옆에서 작게 형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보니 형이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형의 얼굴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멍하게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형이 내 뒷목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더니 내 입술을 물어왔다. 좋다는 감정보다 내가 먼저 느낀 것은 놀라움과 감격이었다. 형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닿아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살짝 내 밑 입술을 물었다가 다시 떼어낸 형이 여전히 내 뒷목에 손을 얹은 채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을 부은 것 마냥 온 몸이 뜨끈뜨끈해졌다.

  "아... 왜..."
  "그냥. 나도 모르게."
  "......"
  "왜. 싫어?"
  "...아뇨. 앞으로도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 힛."

  분명히 발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좀 창피하다는 듯 말하는 나를 보던 형이 한 번 더 웃더니 다시 목을 끌어당겼다. 코 끝, 그 다음으로 입술이 맞닿은 후 방금 전보다 더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뽀뽀랑 키스랑 차이가 뭐예여? 하는 질문을 할 만큼 순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혀와 혀가 닿는 것이 뭐가 기분이 좋다는 걸까 하고 생각해왔던 나를 걷어차고 싶을 만큼 형과의 키스는 좋았다. 내 입안에서 끈적하고 야하게 움직였다가 또 갑자기 뾰족하게 내 혀를 꾹하고 누르고 이내 다시 살살 간지럽히는 형의 혀끝을 느낄 때마다 배 밑에서 둥둥 거리고 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코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정신이 없었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키스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자꾸만 발가락이 움츠러들다가 어느 순간 발끝에서 엉덩이 꼬리뼈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오는 신호에 나도 모르게 형을 밀쳐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몸은 너무도 정직해서, 어찌할 수 없는 낭패감에 티셔츠를 붙잡고 무작정 밑으로 끌어내렸다. 내 바지 앞섶이 솟아있는 걸 형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형도 남자니까.

  "애냐? 이거 가지고 서게."
  "아, 저, 근데. 전 처음이란 말이에요. 왜, 왜 그렇게 야하게 해요 그러니까."
  "키스 안 야하게 하는 방법 있음 좀 알려줘 봐."
  "쌔, 쌤 변태."
  "쌤이라고 하지 마. 진짜 변태 같잖아. 나 이제 니 선생도 아니고."
  "...그럼 뭐라고 해여."
  "그냥. 뭐. 형이라 그러든지."
  "아... 혀엉..."

  약간은 늘어진 듯 한 발음으로 내가 혀엉 하고 부르자 형은 잠시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더니 다시 시선을 내 손 끝으로 가져갔다. 정확히는 내가 손으로 가리고 있는 내 소년중앙을 향해서였다. 형이 쳐다보는 걸 느끼자 등뼈가 저리고 배꼽 밑에서 자꾸만 두근두근 하고 심박이 느껴졌다.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고 혼자 하고 있을 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을 문 밖에 둔 채 남의 집 화장실에서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발 가라앉아라. 제발 가라앉아줘. 집에 가면 야동 백 개 보여줄 테니까 제발 좀!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데 내 손 위에 온기가 느껴져 눈을 뜨니 형이 자신의 손을 내 손 위에 얹고 있었다. 키 차이는 별로 안 나는데 내가 워낙 손이 작은 탓인지, 아니면 형이 키에 비해 손이 큰 탓인지 내 손이 거의 덮여 있었다. 설마, 하고 내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형을 쳐다보자 형이 티를 끄집어 내리고 있던 내 손을 슬며시 치우고는 불룩하게 솟은 바지 위로 손을 올렸다. 솔직히 형의 손이 내 그곳 위에 올려져 있는 걸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야동으로는 별별 플레이를 다 보긴 했지만 어쨌든 타인의 손이 이렇게 내 주요 부위 가까이에 온 적은 없었으니까. 하물며 그게 윤기 형 손이라니. 하얀데 힘줄만 굵게 불거진 형의 손이 천천히 내 바지 버클을 푸는 걸 보고 그제야 두 손으로 형의 팔목을 잡으며 저지했다.

  "아, 안돼요-."
  "왜."
  "창피해요 저."
  "확실히 해. 안 된다는 거야, 창피하다는 거야."
  "......"
  "안 된다면 안 해. 근데 창피한 거면 그냥 할 거야."
  "아... 저..."
  "확실히 해. 어느 쪽이야?"
  "...창피해요."

  내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또 형이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정수리에 쪽하고 뽀뽀를 했다. 야 너 좀 귀엽다, 하며 형은 볼에도 입을 맞췄다. 등뼈가 간지럽고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왜 이제서야 귀여워요. 귀여워 보이는 거 싫어하는 내가 형 앞에선 조금이라도 귀여워 보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고 콧잔등에 주름이 질만큼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데 형이 다시 입술을 맞대온다. 입술 위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맞닿은 입술이 두근두근 뛰었다. 형의 짙고 집요한 키스에 내가 힘이 빠져 풀썩 뒤로 넘어가자 형은 "어쭈, 첨이라면서 아예 드러눕냐." 하며 놀렸지만 형의 키스는, 그리고 손길은, 그리고 그날 밤은(물론 끝까지 하진 못했지만) 무척이나 부드럽고 다정했다. 


  다음 날 아침 형은 실은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얘기해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바보냐?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몰라. 내가 니네 집 가기만 하면 니가 꼬리 흔들고 대문까지 나오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신을 너무 좋아라하니까 그냥 한번 선심 쓴 것 같아서. 물론 지금 생각하면 민윤기란 사람이 선심 쓴다 생각하고 누구랑 밤을 보낸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꺼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영역에 쉽게 누군가를 들이는 법도 없는 윤기 형이 불쌍하니까 한번 자줄까 라니. 그 정도로 동정심이 많고 착해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풀이 죽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내게 형은 사실 본인도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미친놈이 크리스마스에 남자 제자 데리고 그 복잡한 명동을 돌다가 집까지 데려오겠냐고. 내가 "그럼 우리 어제 데이트였어요?" 하고 묻자 형은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니, 생각만 해도 좋은 걸요.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가 반짝반짝 빛나던 때이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남녀의 연애 치고도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남자끼리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형은 대기업이 취업해 직장인이 되었고 나는 취업 준비를 하며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같은 건물 12층, 13층에 살고 있었지만 사실 원룸인 내 집은 거의 철지난 이불이나 옷 같은 것을 두는 창고처럼 쓰였고 투룸에 거실까지 있는 윤기형 집에서 동거하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나마도 형이랑 같은 건물이 아니었다면 집에서도 아직 벌이가 변변찮은 내가 독립을 하도록 놔둘 리 없었다. 우리 집에서 민윤기란 이름은 하이패스였으니까. 사근사근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말투가 공손한 것도 아니었지만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 심지어는 형을 일 년에 두어 번 볼까 말까한 할머니도 윤기 형을 좋아했다. 물론 윤기 형덕에 내가 수능도 잘치고 대학도 원래 지원하려던 곳보다 좀 더 높은 곳을 들어갔으니 그렇겠지만 형이 대기업에 취업한 후로는 진짜 무슨 사위 대하듯 하고 있었다. 우리 관계를 알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윤기 형과 친하게 지내며 형을 본받아 나도 그 찬란하고 화려한 길을 걷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 때문이지. 우리 지민이 좀 잘 부탁한다며 한 번씩 엄마가 윤기 형과 나를 집으로 불러들여 저녁을 해주실 때, "여러모로 잘 챙길게요." 하며 나를 향해 음흉하게 웃는 그 얼굴의 의미를 엄마도 알았어야 하는 건데. 어쨌든 고등학생이던 나는 20대 중반의 청년(백수)이 되었고, 예비역에 복학생이던 형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일류 대기업의 직장인이 되었다. 우리가 달라진 건 그저 신분만이 아니었다.

  [형. 제 노란 티 못 봤어요?]
  [형. 제 노란 티 못 봤냐구요.]
  [노란 티. 팔에 까만 줄무늬 있는 거.]
  [형]
  [회식 중이면 카톡도 못 봐요?]
  [아 진짜 민윤기]

  카톡-.

  [죽을래]
  [내 티 어딨냐구요.]
  [찾아봐]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그러게 왜 눈을 씻고 찾아. 그냥 뜨고 찾아봐.]

  원래도 카톡에 재깍재깍 답을 하는 편도 아니었던 양반이 입사하고부턴 씹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답 없는 핸드폰을 붙들고 안절부절못하는 쪽이냐 하면 나도 그렇진 않았다. 이 인간 오늘 또 술 엄청 마시고 오겠구만, 하며 나도 내 약속을 잡아서 밖으로 나가는 쪽이지. 굳이 기다리려는 게 아닌데도 어쨌든 형이 없는 형의 집에 혼자 있는 건 기다리고 있는 셈이 돼서 싫었다. 예전엔 내가 밤에 나간다고 하면 은근히 단속도 하고 살살 구슬려서 못 나가게 하던 형도 이젠 내가 밤에 나가든 밤에 들어오든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 이해하는 거라 생각하기엔 형이 그렇게까지 이해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 그냥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게 아닐까 하고 혼자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권태란 것이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는 똑똑 노크하고 "계십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후 찾아온 쪽이라면 형에게는 말없이 창문부터 와장창 깨고 들이닥친 느낌이랄까. 물론 형 입장에서도 고분고분하던 내가 이제 말만 하면 이기려 들려하고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못되게 굴 때도 있으니 그런 내게서 권태를 발견했겠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선 그랬다.

  [제 노란 티요. 저번 주 형이 빨래 담당이었잖아요]
  [그럼 세탁기 봐.]
  [안 돌렸어요?]
  [계속 야근인데 그거 돌릴 시간이 어딨냐. 이 밤에 왜 노란 티 타령이야]

  메시지로만 보는데도 짜증이 묻어있었다. 이 밤에 왜 노란 티 타령이냐면 형이 그 옷 제일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왠지 그 옷 꼭 입고 싶었다구요. 벌써 일주일 째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온 형은 피곤에 찌들거나 술에 찌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우리가 언제 키스를 했었는지도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두 달? 아니 세 달 전이었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 됐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하는 일이 바쁘고 만날 사람이 많았다면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형의 일상을 못마땅해 하긴 할 지언정 내가 비참한 기분까지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형은 지나치게 바빠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었고, 그에 비해 나는 형이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민윤기, 너무 잘난 인간. 벌써부터 형 집에선 맞선얘길 꺼내고 있다는 얘기도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윤기 형 집에선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형의 메시지에 답을 보내지 않았고 그 후로 형도 별다른 답이 없었다. 회사 사람들과의 회식이니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순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형은 아마 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좋아했던 노란 티를 입으면 "야 너 병아리 같다." 하며 놀리듯 웃던 형은 이제 내가 그 옷을 입어도 그렇게 웃어주지 않겠지. 비관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 관계는 형이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 우리 이제 그만할까 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황하긴 해도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의 일이 더 바빠지고 퇴근이 늦어지고 내가 맡게 된 집안일의 비중이 더 커지고 내가 왜 이 집에 있는 걸까를 생각했던 올해 초부터 나는 이미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빨랫거리가 가득한 세탁기를 뒤지다가 형의 와이셔츠에서 향긋한 여자 향수 냄새를 맡은 지금은 결심을 했고.

  물론 형이 다른 여자와 썸씽이 있다거나 나 몰래 누군가를 만난다거나 하는 오해를 해서는 아니었다. 민윤기란 사람은 차라리 내게 헤어지자고 한 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거면 몰라도 구태여 나를 속이며 뒤로 바람을 피울 만큼 부지런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 향수냄새의 주인공과 형의 관계를 의심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 향수 냄새가 내가 맡기에도 제법 향긋하고 달콤했으며 그것이 윤기 형의 와이셔츠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해버렸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형의 미래를 위해 비켜줘야겠다 생각할 만큼 내가 착한 놈은 아니었으며, 이대로는 더 초라해질 것 같으니 미리 선수 쳐 도망가 버릴 만큼 겁쟁이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에게 그럴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래, 분명히 충동적이긴 했다. 제법 오랜 시간 각오를 했지만 결심을 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으니까. 뒷일 같은 걸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충동적이지 않다면, 헤어진 후의 일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절대 헤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막무가내인 편이 나았다. 형은 그런 나를 이해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을지도 모르지. 이해와 무관심은 하나의 원 같아서, 시작점이 끝점이 되고 또 거기서 다시 시작점이 생기기도 했다. 돌고 돌다보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 없게 되는 거겠지.


  약속을 취소하고 밀린 빨래를 돌렸다. 밤중이긴 했지만 어차피 밑층은 비어있는 내 집이니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형의 셔츠를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고 속옷이나 잠옷 같은 것도 건조대에 반듯하게 널었다. 개수대에 처박힌 형의 커피 잔도 깨끗하게 씻고 무릎을 꿇고 앉아 방도 말끔하게 닦았다. 그리고는 밑층으로 내려가 재작년 형과 일본에 가느라 샀었던 캐리어를 끌고 올라와 내가 지금 당장 입어야 할 옷 몇 개와 책, 스킨로션과 노트북 같은 것들을 챙겨 넣었다. 아예 방을 빼지 않고 다달이 월세를 낼 지언정 내 집을 그대로 둔 게 다행이었다. 캐리어를 구석에 세워두고 침대 위를 정리하는데 삑삑 하고 형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나란히 뒀던 베개 하나를 바닥으로 내려놓은 채 현관으로 가니 형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다가 나를 쳐다본다.

  "안 잤어?"
  "네. 늦었네요. 술 많이 마셨어요?"
  "어 좀."

  형의 좀이라는 말은 적어도 소주 두 병 이상은 마셨단 얘기였다. 형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것을 보고 부엌으로 가서 차가운 물 한잔을 떠와서 건넸더니 또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이런 내 모습이 나 스스로도 어색하고 형도 그렇다 느낄 만큼 형에게 친절하지는 않았으니, 형이 변했다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더 많이 변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물건들이 없어진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형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보고 미안하다 사과했다. 괜찮아요, 괜히 형 회식하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니 형은 더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다. 와 박지민. 그동안 대체 형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길래. 형은 내게 미안하다 했지만 형 얼굴을 보니 내가 더 미안해졌다. 집에 돌아오면 일단 무조건 욕실로 직행하는 형이 술에 제법 취했음에도 평소처럼 씻으러 욕실로 가려다가 이내 구석에 둔 캐리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린다. 눈짓으로 이게 뭐냐 물었다.

  "저 12층 내려가려구요."
  "뭐?"
  "형 거의 늦기도 하고. 쓰는 사람 없이 월세만 내는 것도 좀 아깝고. 그냥 이제 내려갈게요."

  얇은 쌍꺼풀이 지도록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캐리어를 쳐다본 형은 아무런 말이 없더니 한참 후 그래, 라고 짧게 대답했다.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어쩐지 심장이 쿵 떨어졌다. 후 하고 깊게 내쉬는 한숨소리에 어쩐지 조금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청승은 진짜 딱 질색인데 왜 이래 이거.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 했다, 원래 내 자리로.

  "저 집만 나가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지 알잖아요 형."
  "헤어지잔 얘기야? 왜?"

  형이 그렇게 물어온 것이 오히려 놀라웠다. 무슨 소린지 알지 않느냐고 하면 아까처럼 잠시 뜸을 들이긴 할 지언정 또 그래, 하고 대답할 줄 알았다. 굳이 이게 지금 헤어짐의 전초전이냐 되물으며 확인하는 건 형답지 않았다. 또 왜 헤어지자는 거냐는 물음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워낙에 뭐든 결과부터 생각하는 사람이니 과정이나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저 그런 때가 된 거라 말하면 납득하지 않을까. 아니 사실은, 그런 것 따위 이제 형한텐 별 의미 없는 거 아닐까.

  "그럴 때 되지 않았어요?"
  "확실히 말 해. 그럴 때가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냥요. 말 그대로. 같이 사는 거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서."
  "집 나가겠다는 것도, 헤어지겠다는 것도. 그래 그게 니 결정이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이유가 별로 그럴듯하지 않네."
  "형 없는 집에 내가 개처럼 기다리고 있는 건 그럴 듯 해 보였어요?"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게 나갔다.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형이 질릴 만 했다. 최근 내 어법은 거의 이런 식이었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형은 이런 내가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형이 또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아 형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같이 했던 5년 동안 좋고 예쁜 기억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굳이 끝까지 이렇게 형편없이 뭉개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분명히 형이 한숨을 쉬거나 버릇처럼 혀를 차거나 할 거라 생각했는데 형이 지민아, 하고 내 이름을 불러왔다. 그게 정말로 내가 형을 좋아하는 만큼 형도 날 좋아하던 때의 목소리라 잘못 들은 줄 알고 대답하지 않았더니 형이 한 번 더 지민아 하고 불렀다. 겨우 고개를 들고 형을 쳐다봤더니 형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눈을 마주친 게 얼마만인지. 그렇게 오랜 시간 각오를 하고 오늘은 기어코 끝내고 말 거라 결심을 한 주제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방금 전의 말들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왜요,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 형이 좋은 건데요.

  "다른 사람 생겼냐?"
  "......"
  "아님 단순히 이젠 그냥 내가 싫다든지."
  "......"
  "헤어지는 이유란 건 그런 거야. 그런 때라는 말 난 납득 못하겠으니까."
  "...형 이제 나 안 좋아하잖아요."

  찌질이. 모지리. 천하의 병신.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놈. 맹세컨대 저렇게 말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때 되지 않았어요? 하고 물었을 때까지만 해도 어른들의 이별답게 담담하고 쿨할 수 있었는데. 지민아 하고 형이 내 이름을 불러온 순간 나는 다시 19살의 아이로 돌아가 버린다. 철없고 서툴고 그저 형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던 19살의 박지민으로. 내 안의 소년이 예고도 없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안 좋아하잖아요."
  "어째서?"
  "뭐가 어째서 예요. 형은 나한테 관심도 없고, 계속 나 보면 피곤해하고 귀찮아하고. 나도 자꾸 형한테 짜증만 내게 되고. 못되게 말 안하고 싶은데 나도 형 보면 자꾸 화가 나요. 갈수록 자꾸 더 심한 말 하고 싶어져요. 그러니까 진짜 더 큰 싸움해서 끝이 더러워지기 전에 헤어지자구요."
  "이래도 저래도 끝은 더러울 수밖에 없지. 끝이 어떻게 깨끗해?"
  "그러니까요. 더 더러워지기 전에 그만해요."
  "니가 진짜 더러운 끝이 뭔지 알긴 아냐?  진짜로 작정하고 더럽게 굴려고 들면 얼마나 더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줘?  "
  "...왜요. 형도 나랑 헤어지는 게 편하잖아요."
  "그렇겠지. 나도 혼자 오래 살았고 실제로 너 요즘 묘하게 짜증스럽게 굴고 성가시게도 하니까."
  "...거봐요."
  "근데 난 그렇다고 헤어져야겠단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이게 가만뒀더니 건방이 하늘을 찔러서 언제 한번 날 잡고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형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뚜우하고 나왔다.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게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는 나를 달래려고 저런 말을 해 줄만큼 착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헤어지자는 말은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인데 그 헤어짐에 형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비로소 안심이 되다니. 아까 내 결심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울지 않고 조용히 내 짐을 정리한다든지 형의 집에서 내 흔적을 지워내던 방금 전까지 나는 충분히 어른스러웠다. 스스로 그런 내 모습에 감동할 만큼. 나 진짜 졸라 어른 됐구나. 이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는 거였어. 형과의 헤어짐을 조용히 준비하는 내 모습에서 내 청춘이 비로소 무르익어 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형이 집에 돌아와 그걸 홀랑 따먹어 버렸다.

  "야. 너 솔직히 까고 말해 봐. 진짜 헤어질 생각 아니었지."
  "...맞거든요? 저 짐도 다 싸놨잖아요. 설거지도 해놓고. 빨래도 하고."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애가 집안일은 왜 해 놓냐고. 신데렐라냐? 12시에 파티 있어?"
  "못돼 처먹은 민윤기. 양심에 찔려 죽으라고."
  "맞을래? 새파랗게 어린 게 건방지게."
  "새카맣게 늙은 형이 요즘 자꾸 저 열 받게 하잖아요. 카톡에 답을 제때 하나, 집을 제때 들어오나. 청소는 맨날 내가 해야 되고. 커피 마신 컵도 하나 자기 손으로 씻는 법이 없고. 내가 뭐 형 마누라예요? 형 없는 집에 혼자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진짜 그런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하고 싫다구요.  "

  여전히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데 어쩐 일로 가만히 듣고 있던 형이 또 어이없다는 듯 푸스스 웃어버리더니 너털거리며 다가와 나를 끌어안는다. 술 냄새, 아저씨 냄새.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형이 내 뒷목을 장난스럽게 살짝 꼬집었다. 분명히 헤어짐을 각오했었는데. 그리고 일생일대의 결심도 했었는데. 그 각오와 결심이 모래성처럼 포슬 거리며 무너져버린 것은 형이 평소처럼 그래, 라고 대답하지 않아서였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면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래 하며 헤어짐에 동의해줄 줄 알았다. 헤어지는 일 같은 거 형한텐 이미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고 오히려 잘됐다 생각할 것 같았으니까. 5년의 시간동안 우리가 어떻게 연애를 해왔고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얼마나 깊게 몸을 섞었는지 따위는 헤어짐 앞에 아무런 효력이 없었을 것이다. 과거는 너무 무르고 권태는 너무 질겼다. 그러니 내가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바쁘잖아 임마.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 너도 취직해봐."
  "백수 앞에서 직장 있다고 지금 자랑해요? 재수 없어."
  "또 까분다."
  "형 일찍 출근하니까. 난 해 뜰 때까지 자고 있고. 집에 오면 난 컴퓨터나 하고 있고. 물론 인강 듣는 거긴 하지만 형은 모르니까. 그럼 형이 나 한심해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구요. 안 그래도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집에 오면 맨날 잠만 자고."
  "그럼 자지 뭐해."
  "우리 키스한 게 언제인지나 알아요? 옛날엔 눈만 마주치면 어떻게 해보려고 밤마다 살살 나 꼬드기던 사람이. 이제 진짜 잠만 자잖아요. 나도 남자인데, 그리고 나 지금 한창 때인데."

  그 말에 품에서 나를 떼어낸 형이 묘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솔직히 키스할 줄 알았다. 형이 저런 얼굴을 한 후엔 늘 내 얼굴을 끌어당기고 키스를 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데 형이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큰 어른인 척 해도 나는 아직 형의 저런 한숨소리에도 가슴이 덜컹거렸다.

  "지민아."
  "......."
  "나 요새 진짜 바빠. 12시 전에 퇴근만 해도 감사할 정도로. 그것도 맨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래서요. 귀찮아요?"
  "너도 남자니까 알겠지만. 진짜 피곤하거나 아님 꽐라되거나 하면 그게. 그게 내 생각처럼 잘 안된다고."
  "...형 혹시 안서요?"
  "뭐 임마?"
  "그래서였어요? 형... 고자됐어요?"

  진지하게 묻는 나를 보고 형이 어이없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지만 나는 심각했다. 그러고 보니 생긴 것 답지 않게 자면서도 꼭 내 팔뚝이나 목덜미 같은 걸 만지며 자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너무 내외하는 느낌이긴 했다. 7시에 출근이라도 4시까진 할 수 있다며 큰소리치던 사람이 너무 일찍부터 곯아떨어지는 것도 이상했고. 요즘 현대 남성이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해 젊은 나이에도 발기부전을 겪는 일이 많다고는 했지만 설마 형이 그럴 줄이야. 내가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형이 하 참나, 하고 헛웃음을 웃는다. 그리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머니클립을 꺼내더니 5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서 내게 내민다.

  "뭐예요 이게. 형 안 서니까 나보고 지금 업소라도 갔다 오라는 거예요?"
  "미쳤냐? 너 요 앞 편의점 가서 헛개수랑 컨디션 하나랑 콘돔 사가지고 와. 2시간만 딱 기다려. 술 깨고 내가 서는지 안 서는지 보여줄 테니까."
  "...그럼 왜 그렇게 아무 것도 안 한 건데요. 아예 안서는 것도 아니라면서."
  "말했잖아. 체력 딸린다고. 하는 건 하는데, 기력 좋을 때처럼 잘 하는 게 힘드니까."
  "좀 안 잘하면 어때요."
  "그래도 할 땐 잘 하고 싶은 게 형 마음이야 임마. 니가 뭘 알겠냐?"
  "형. 난 그냥 형이랑 하는 게 좋은 거예요. 그리고 꼭 안 잘해도 괜찮아요. 이젠 내가 잘 하니까."

  내 말에 형이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다시 푸스스 웃어버린다. 키스만 해도 벌벌 떨던 게 언제 이렇게 발랑 까져서는, 하고 진짜 아저씨 같은 말도 했다. 나 이젠 다 잘해요. 키스도, 그 이상도. 빨래도 깨끗하게 잘하고 밥도 고슬고슬하게 잘하고 라면 물도 잘 맞춰요. 계란말이도 언제 뒤집어야 타지 않고 잘 익는지도 다 안다구요. 형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컨디션이 어떤지도 형 얼굴만 보면 나는 다 알아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이래요. 형이 한숨 쉬면 가슴이 내려앉고 형이 웃으면 이유도 모르면서 따라 웃어요. 헤어질 거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만할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각오는 했었는데 괜찮다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형이 그래, 하고 대답했으면 나는 아마. 아마 혼자 아주 많이 울었을 거예요.

  "형은 이제 나 별로 안 귀엽죠."
  "어. 옛날만큼 귀엽진 않지."
  "...와. 이럴 땐 그래도 그냥 아직도 귀여워 라고 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거짓말이 듣고 싶었냐?"
  "하여튼 진짜 성격 나쁜 사람이야."
  "너 요즘 살 쪘지. 배도 약간 나온 것 같은데. 운동 안 해?"
  "아, 뭐. 겨우 3킬로 정도 쪘어요. 이런 건 일주일이면 빠진다구요."
  "관리 해 임마. 나이 들면 살찌는 거 금방이다? 형 회사에 쭉쭉 빵빵한 여직원들 엄청 많아."
  "하. 저도 밖에 나가면 잘생기고 예쁜 애들 천지거든요?"
  "그러니까. 각자 관리도 하고 경각심도 좀 가지자고. 헤어지자는 말 들어도 왜? 내가 아직도 이렇게 멋진데 왜 헤어져? 니가 어디 가서 나 같은 사람 또 만날 줄 알고? 하고 콧방귀 뀔 수 있게."
  "뭐야. 그럼 형 아까 내가 그만하자 그랬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당연하지. 니가 어디 가서 나 같은 사람 만날 수나 있을 것 같냐?"
  "와. 어이없어. 형 회사가선 그러지 마요. 진짜 재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너 생각해서 못 헤어지는 거야. 니가 나 같은 사람 또 못 만날까봐."
  "......"
  "못 만나 넌. 앞으로 누굴 만나도 절대 나처럼 너 좋아해주는 사람 없을 걸? 그러니까 울지도 않고 정색하면서 헤어지잔 말해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지 말고 이제 불만 있음 그때그때 말로 해. 쪼그만 머리통에 대체 뭘 넣어놓고 사는 건지 나 원 참."

  하여튼 감동적인 말을 아주 못돼 처먹은 스타일로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보다 날 좋아한다고, 사실은 헤어지잔 말 들었을 때 심장이 철렁했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될 걸 왜 맨날 하는 말은 저딴 식이야. 진짜 5년이 지나도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저대로 늙어도 무슨 딸깍발이처럼 꼬장꼬장하고 자존심만 세고 말은 못되게 하는 심술쟁이 할아버지 될 게 뻔 하잖아. 그럼 나 말고 누가 그런 형 받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형이야말로 어디 가서 나 같이 바보처럼 형 그 성질머리까지 좋아해주는 앨 또 만날 줄 알고.

  내가 입을 삐죽대며 궁시렁대는 걸 보고 형이 장난스럽게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더니 씻고 나올 동안 편의점 가서 아까 말한 것들을 사오라고 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출근인데 사오긴 뭘 사오냐며 그냥 잠이나 자라고 했더니 얼마나 잘하는지 실력 좀 보자며 비웃었다. 나 잘해요 진짜. 형 잠도 못 자게 할 건데?? 막 내일 회사 가서도 정신 못 차리게 할 건데??? 가슴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더니 형이 그 가슴팍을 손으로 툭툭 치며 제발 정신 못 차리게 좀 해줘보라며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아무리 프롤로그라도 몇 달 만에 하는 건데 감질나게 이게 뭐냐며 내가 형 목에 팔을 감고 혀로 형 입술을 핥았더니 형은 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 허리에 손을 둘렀다. 키스도 잘하고 밤일도 잘하고 다 잘하지만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아무래도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아주 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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