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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가르드의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원들 중에서도 로켓은 조금 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새로운 아스가르드가 탄생한 직후에 처음으로 맞이했던 왕의 손님이었기 때문일까. 이번에도 전에 머물렀던 곳과 같은 방에서 지내고 있던 너구리는 이미 그 안의 모든 것을 제가 원하는 구조로 갈아치운 지 오래였다. 그의 방에서 침대보다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은, 바로 각종 공구가 널려 있는 한켠의 작업 공간이었다. 이 작은 곳에서 그의 영민한 두뇌는 찬란한 빛을 발했다. 

로켓이 공구를 뚱땅거리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시간은 대체로 하얀 별들이 아스가르드의 밤하늘 위로 훤히 떠오르는 새벽 즈음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어제 새벽에 완성한 폭탄들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당장이라도 발키리의 협조를 얻어 제가 만든 것의 성능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건 물론… 서로에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 건네고 징징대는 멍청한 형제의 뒤치닥거리였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작 시간 이후, 두 발을 질질 끌며 억지로 방을 나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반 이상은 온 셈이다.


다리를 쫙 벌리고 폭신한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워 있던 로켓이 제 가랑이 사이로 솟아올라 있는 두툼한 꼬리로 시트를 탁탁 내리쳤다. 그의 앞발에 들려 있는 소형 폭탄들은 그 크기가 실로 앙증맞기 짝이 없었다. 우, 진짜로 언젠가 써 먹을 날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쓰고 싶은 대상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딱 하나였다. 그 재수 없는 금색 대사제 말이지. 건방진 그 누런 얼굴에, 언젠가는 이걸 꼭 정통으로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너구리가 음울하게 킬킬거렸다. 그것들과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꼬여버린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 얼굴에 총알 세례를 퍼부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을 포함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원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쓸데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쳐바른 것도 짜증났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우릴 무시해?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로켓이 손끝에서 빙글빙글 굴리던 폭탄들을 이내 제 허리춤의 가방 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언뜻 곁눈질로 본 창 밖의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햇빛이 따스했다. 시간이 가는 것에 별 큰 의미를 두진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늘 그렇듯 평온했던 이 땅의 해가 완전히 잠에 들 시간이 되면, 오늘 자신의 방에 손님이 한 명 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얘기가 좀 잘 되는 편이 덜 귀찮을 거 같은데… 정말로 꽤나 모시기 힘든 '거한' 손님이란 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제 앞발톱을 잘근잘근 씹던 로켓이 순간 앗차,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았다. 제 옷에 방금 전까지 씹고 있던 발톱을 문질러 닦는 그의 행동은 지극히 태연했다. 제 눈앞의 상대방이 자기 앞발톱을 씹고 손도 안 닦았다는 사실을 그 애송이가 알아챌 확률은 아마도 거의 제로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불상사가 생길 만한 변수를 굳이 만들고 싶진 않았다. 로키는 온갖 것에 세심하게 반응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는… 좋게 말하자면 제가 만든 회심의 역작이 폭발하게 되는 원리처럼 섬세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풍 나온 자리에 그 놈의 폭탄은 왜 가져온 거냐고 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피곤한 이였다.


그나저나 그 녀석이 정말 올까? 흥미롭다는 얼굴로 눈알을 굴리던 로켓이 부슬부슬 털이 자란 제 오른쪽 귀 뒤를 긁적거렸다. 기실 오늘의 약속을 잡는 일은 쉽다면 쉬웠고, 어려웠다면 또 어려웠다. 토르를 마주한 이후, 머리를 싸매고 며칠 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로켓이 무턱대고 아스가르드 왕제의 방을 찾아갔을 때, 방의 주인은 피골이 상접하다고밖에 표현되지 않을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이 때 그는 요즘 너무 잘 먹고 다녀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았던 퀼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탄식했다) 밖을 내다보았다. 분명 그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을 때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다. 


입에 발린 안부인사 따윈 진작에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이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좀 보자, 하고 본론부터 꺼냈을 때. 로키는 그를 향해 명확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더랬다.


'오, 이렇게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예의 없는 손님이 누군가 했더니 토끼로군. 그나저나 이거 어쩌나, 유능하신 왕제님께선 요즘 나랏일로 아주 바쁘셔서 그럴 만한 시간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서 빈둥대는 게 주업무인 토끼랑은 좀 다르거든.'

'아니 이 삐딱한 사슴 새끼가 진짜!'


보자마자 지랄이야 왜. 로키의 빈정거림에 자신은 당장이라도 늘 상비하는 전기 충격기를 꺼내들 뻔했지만, 그러기 직전에 간신히 붙잡은 한 줌의 이성이 겨우 그를 진정시켰더랬다. 필사의 노력으로 겨우 성질을 죽이고, 여전히 마뜩찮아하는 눈빛의 로키를 그 이후로 한참이나 어르고 달랜 끝에, 너구리는 굳이 그의 방까지 찾아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명목상으론 오랜만에 둘이서 함께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얘기나 하자는, 정말 흔하디 흔한 이유였다. …진부하면 뭐 어때. 어쨌거나 성공했으면 된 거 아닌가? 


일단 저 예민한 사슴뿔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해적천사가 나아갈 길이 보일 테니… 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갑자기 울컥, 갑작스레 가슴 속의 울화가 치민 너구리가 바닥에 제 꼬리를 더 세게 내리치며 심기 불편함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 머저리들의 메신저 역할이나 하고 있는 거냐고! 사방에 죄 엉덩이를 닦아줘야 할 놈들뿐이잖아! 정말이지 사는 게 쉽지 않았다. 캬악, 하고 발톱을 세운 로켓이 이내 제 머리맡에 드리워져 있는 고급스런 문양의 하늘거리는 커튼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두 형제의 얼굴 대신 저거라도 다 북북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짜증이 났다. 웬만큼 귀한 물건을 망가뜨려도 책망 한 마디 없이 금방 채워 주는 곳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마음은 왜 이리 갑갑한 건지! 로켓의 입에서 에휴, 하고 한숨이 새어나온 그 때였다.


"…?"


순간 그의 뾰족한 귀가 움찔, 하고 짧은 움직임을 보였다. 쿵, 쿵. 어디선가 분명 둔중한 울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조금 있으면 애송이 올 시간인데! 본능적으로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너구리가 누워 있던 침대에서 급하게 제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그의 계획은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으으으으으. 짜증 섞인 투로 낮게 목을 울린 로켓이 미간을 꾸욱 눌러 좁힌 채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찰나. 쾅, 하는 거친 굉음과 함께 그의 방 방문이 활짝 열어젖혀졌다. 굉음을 내며 자신의 방에 침입한 당사자의 커다란 인영를 바라 본 로켓이 몹시도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토르? 네가 웬일이냐, 이 시간에?"


너구리를 찾아온 초저녁의 불청객은 다름 아닌 토르였다. 산발이 된 금발이 며칠 새 초췌해진 잘생긴 얼굴을 언뜻 가리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손에는 술병 두 개가 들려 있었는데, 그 중 한 병의 내용물이 거진 다 빈 걸로 봐서는 이미 벌써 어디선가 실컷 마시고 온 듯 했다. …아니, 사실은 저것만 마신 상태라고 단정하기도 좀 그랬다. 웬만해선 취하지 않는 왕의 얼굴에 이미 은은하게 붉은 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 이런 젠장. 술 먹자는 제안을 거절한 적은 없지만 지금은 하나도 안 반가운데! 여기 오기로 한 놈 대신 어디선가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가 왔군. 너구리가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웬일이냐고 질문한 지는 이미 한참인데, 그 물음에 두어 박자 늦게, 토르가 로켓을 향해 대답했다.


"오, 토끼! 하하하. 이 좋은 날에 혼자 방에서 뭐 하고 있는 거요? 한 잔 합시다!"

"아직 해도 다 안 떨어졌다, 인마! 꼴았으면 가서 잠이나 자지 왜 여기 와서 술주정이냐고! …그리고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냐? 응?"


아주 가관이다, 가관이야. 그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로켓이 타박을 했지만, 터벅터벅 걸어와 방 주인의 침대를 덥석 차지하고 앉은 토르는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새 술병은 침대 옆에 내려 둔 채,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웃던 토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 술이 당겨서 말이오. 우, 그래도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많이 마신 건 아니라오. 단지… 음… 그대도 알지 않소, 아스가르드산 술이 다른 곳의 술과는 달리 좀 독해서…"

"웃기고 있네! 넌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얼마나 퍼 부은 거야?"

"으으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하루? 이틀…? 그도 아니면 더 오래… 읍!"

"야, 잠깐만. 입 좀 다물어!"


줄줄 변명을 늘어놓던 토르의 입을 순간 제 앞발로 턱, 하고 틀어막은 로켓의 귀가 다시금 쫑긋 섰다. 그의 본능이 자신의 방 밖, 정확히 말하자면 길고 긴 저 복도 끝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누군가의 인기척을 감지한 탓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산 넘어 산이잖아. 상대의 입을 막았던 발을 치운 로켓이 이내 낮게 탄식했다.


"오, 이런 빌어먹을. 사슴 새끼가 진짜 이 타이밍에 올 줄은… 니네 형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어?"

"그게 무슨 말이오, 토끼? 나도 좀 알아듣게…"

"좀 조용히 해 봐, 해적천사! 일단 닥치고 좀, 어디든 간에 네 그 산만한 몸 좀 숨겨. 난 니네 집에 숨을 곳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선 하나도 모른다고! 너 잠시 들어가 있을 만한 데 없어?!"

"아, 음… 그… 한 번 찾아보기는 하겠소. 이 방이 예전의 궁과 똑같은 구조라면, 아마 있을지도…"

"빨리 좀 찾아, 빨리! 젠장… 진짜 내 거시기를 걸고 맹세하는데, 나 앞으로 다시는 이딴 짓 안 해. 다시는!"

"…?"

 

영문을 모르는 토르가 결국은 로켓의 닦달에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다. 커다란 그의 손이 찬찬히 비어 있는 방 벽면을 더듬기 시작하자, 여전히 바깥의 상황에만 촉각을 곤두세운 너구리가 제 꼬리를 바짝 세웠다. 지금 그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더 빨리! 한껏 목소리를 죽인 너구리의 채근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텅 빈 벽의 어느 한 지점에 가 닿은 토르의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무언가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둥그런 문고리였다. 진짜 있을 줄은 몰랐거늘! 놀랍긴 했지만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토르가 지체 없이 그것을 쭉 당겨 열어젖히자, 위기의 순간에 기적처럼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단 하나의 가능성에 로켓이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진짜 급해서 한 소리였는데! 내 방에 진짜 그런 게 있었다고?! 또 다른 거 더 있는 거 아냐?"

"그렇소, 토끼. 역시 이건… 아스가르드 왕족에게 내려오는 마법의 힘이 없으면 찾아낼 수 없는…"

"알았어, 알았어! 마법이고 나발이고, 일단 알겠으니까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넌 안에 좀 처박혀 있어. 빨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앞발로 제 허벅지 부근을 철썩철썩 때리며 그를 몰아세우는 로켓의 손길 때문에,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매혹적인 외모를 가진 아스가르드의 주정뱅이는 이내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자신이 찾아낸 방에 들어서야만 했다. 로켓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그 이유를 들을 새도 없이 매정하게 쿵, 하고 문이 닫히자, 이내 칠흑 같은 암흑이 그를 찾아왔다. 쥐의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방 안에서는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뭐, 이건 문제될 게 없지. 잠시 허공에 들린 채 가만히 있던 토르의 손에서 이내 자그마한 황금색 빛덩이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이내 주인의 손을 떠나 작은 방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제서야 토르는 자신이 들어선 곳의 모습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제가 들어선 방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자신이 벌렁 누워 옆으로 한 네 바퀴 정도 구르고 나면 벽에 가로막힐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넓이였다. 작은 방 안에는 아스가르드 왕궁 특유의 호화스러운 장식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집기라고는 겨우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 한 개와 테이블뿐이었다. 대체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현재의 방 주인이 그리 하라니 그를 무시하고 이 문을 열고 나가기도 영 그랬다. 정말 잠깐일 수도 있겠지. 결국 로켓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토르가 테이블 밑에 들고 있던 빈 병을 내려 두었다. 그가 제 엉덩이를 철푸덕 내려놓자, 근육으로 꽉 짜여 있는 건장한 몸 밑에 깔린 의자가 고통스럽게 끼이이, 하고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내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 테이블 위로 엎어진 토르가 그 상태로 길고 긴 한숨을 내쉰다. 이제야 조금 술이 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상태로, 그는 조용히 바깥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기에서는 그것 빼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편, 초저녁의 불청객을 안 보일 만한 곳에 겨우 밀어넣고 난 후. 안도한 로켓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방 안에는 토르가 몰고 들어온 독한 술냄새가 약간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라면 크게 의심을 살 것 같지는 않았다. 녀석이 정 의심하면 기다리다 지쳐서 혼자 퍼마시고 있었다고 하지 뭐. 재빠르게 방 안 테이블에 토르가 가져온 새 술병과 술잔 두 개를 올려 둔 로켓이, 이내 병의 뚜껑을 따곤 그 내용물을 제 몫의 잔에 꼴꼴꼴 따라낸다. 투명한 잔 안의 액체는 그가 테라에서 본 적이 있었던 상큼한 과일 빛깔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름이… 뭐랬더라? …아, 오렌지랬지. 너구리가 오른쪽 눈가를 찌푸렸다. 색이 어떻든 뭐가 중요해? 마시고 취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반 모금 정도 삼킨 로켓이 제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에 저도 모르게 켁,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 술 맞어?"


이렇게 독한 걸 들고 왔을 줄이야…인상을 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로켓이 탁, 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숫제 액체 폭탄이라도 마시는 줄 알았다. 과거에 그루트와 함께 우주에서 가장 더럽고 치사한 곳들을 누비며 온갖 독주란 독주는 다 마셔봤던 그였지만, 이건 좀 심했다. 전에 아스가르드에 왔을 때 열렸던 작별 기념 연회에서 진탕 퍼마셨던 술보다도 훨씬 독한 술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잔을 한 번에 쭈욱 다 들이켰다간 꼼짝없이 로키 앞에서 추태를 부리게 될 판이다. …그건 안 되지, 안 돼.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얼굴로, 로켓은 조용히 제 잔에 물을 탔다. 


똑똑, 제 방문을 두드리는 아주 가벼운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에 로켓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그가 의자에서 엉거주춤 제 몸을 일으키려던 무렵,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 문이 벌컥 열린다. 이윽고 제 방 안으로 들어서는 키 크고 늘씬한 인영의 존재에, 얌전히 앉은 채 그를 바라보던 로켓이 이내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에 띄게 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네, 사슴뿔 애송이?"

"…"

"무지 귀-하신 왕제님이랑 술 한 잔 하기 오지게 힘들다? 네가 이 정도도 마시지 못할 몸상태는 아닐 거 아냐."

"이런, 안타까워서 어쩌나? 난 술꾼은 아니거든.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만한 시간도 없고. 굳이 힘들게 시간을 내서 온 것이니 감사해하도록 해, 토끼."

"와, 저건 진짜… 못 본 사이에 더 싸가지가 없어졌어! 설마 너도 사춘기냐?"


너구리의 툴툴거림에 아주 잠깐, 로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짜증을 내면서도 너구리는 군말 없이 제 앞발로 로키가 앉을 의자를 가리켰고, 표정을 지운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고 보니, 로키의 차림새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검게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은 어느덧 푸석푸석해진 채 헝클어져 있었고, 가뜩이나 평소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던 혈색은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토르가 언급했던 것만큼 심각한 수준의 몰골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구만. 한 놈이라도 멀쩡해서. 제 턱 끝을 긁적이던 로켓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넌 좀 낫네."

"토끼, 지금 뭐라고 했어?"

"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아하하하하. 저언혀 아무 것도 아니지. 그래."

"…지금 그거, 나 보라고 하는 짓이야?"

"망할. …나 또 반대로 했냐? 미치겠네."


무심코 튀어나온 제 속마음 때문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젠장, 저 눈치 빠른 애송이한테 들킬 뻔했잖아. 오늘도 제대로 된 윙크에 실패하고 부산하게 고개를 젓는 너구리의 모습을, 한 쌍의 녹색 눈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게 잠시 멈춰 있던 시선이 이내 자연스레 옆으로 옮겨 가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켓이 아무 것도 아닌 척 술병을 들어올렸다. 제 잔은 이미 가득 차 있었기에, 맞은편을 향해 너구리가 태연히 앞발을 기울였다. 그러자 꼴꼴꼴,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며 주홍빛 액체가 흘러 로키의 잔에 고인다. 잔이 다 차자마자, 우아하게 술잔을 들어올린 로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끝까지 들이켰다. 건배도 안 하냐? 로켓이 툴툴거렸지만 로키는 그것을 깔끔히 무시했다. 대체 저 놈은 왜 저렇게 잘 마시는 건데? 자존심 상하게. 속으로 잠시 투덜거린 로켓이 다시금 빈 잔을 채운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왕제가 무심하게 잠시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근데, 토끼. 함께 먹을 만한 건 없어?"

"귀찮게 그런 게 있겠냐? 거 참 누가 취향 더렵게 고급스러운 왕족 아니랄까봐 엄청 따지네. 없으니까 그냥 마셔."

"…흐음."


로켓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한 쪽 눈썹을 찡그린 로키가 자연스레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러자 마치 예리한 칼로 시공을 베어내기라도 한 듯, 텅 비어 있던 허공이 이내 양쪽으로 지퍼가 열린 듯 벌어진다. 엥? 이게 뭐람.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장면에, 너구리가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놀라거나 말거나, 로키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든다. 그것은 방금 만든 듯 신선한 샐러드 한 접시였다. 이내 테이블 위에 놓인 싱그러운 연둣빛 양상추 이파리를 바라보던 로켓이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애송이, 난 고기가 좋아. 내가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데… 풀은 별로야. 엄청나게 별로라고. 정말로."

"그럼 알아서 구해 오든지."

"…그냥 역시 지금 널 쏴 죽인 다음에 구워 먹는 게 빠르겠지? 안 그래?"


…하여간 번거롭군. 미간을 꾹 눌러 좁힌 로키가 차갑게 식은 로스트 비프 접시를 꺼내 들자,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 굶주려 있었던 한 마리 너구리가 오 예, 하고 환호했다.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술을 마시자더니 사실은 고기가 고팠던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디 말 못하는 동물이었던 이의 고기 절삭 작업 속도는 어마무시하게 빨랐다. 로키가 건넨 나이프도 그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물건인 듯 했다. 순식간에 제 앞에 놓인 고기의 3분의 2를 해치운 로켓의 경이로운 식사를 물끄러미 보던 로키가 이내 제 포트를 들어 샐러드 접시를 쿡, 하고 찌른다. 고기를 씹자 얼굴에 화색이 돈 너구리와는 달리, 그는 샐러드 접시를 앞에 두자 한층 더 우울해진 듯한 기색이었다. 로키의 취향에 맞게, 싱그러운 이파리들 위에는 달달한 향을 풍기는 드레싱이 가득 뿌려져 있었지만 역시나 식욕이 돌지 않았다. 결국은 접시를 쿡쿡 찌르던 포크를 내려 둔 로키가 다시금 제 몫의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자, 그제야 식사를 마친 로켓이 냅킨으로 제 앞발을 닦는다. 이미 고기 냄새가 진하게 배어버린 앞발톱을 꼼꼼히 닦던 로켓이 대뜸 그런다.


"야, 애송이.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네가 답 안 한대도 물어볼 거거든?"

"…"

"너 요즘 무슨 일 있지?"

"…글쎄. 그래 보이나?"

"어. 그 동안 뭔 일이 오지게 많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너구리의 무심한 대답에 로키가 애써 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을 보이려 애썼지만 금세 그만두었다. 이제는 딱히 제 기분을 숨기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는 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지금 스스로가 처해 있는 상황과, 토르. 토르. 토르.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제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너무나 힘겨웠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로키의 애매모호한 반응에, 로켓의 미간이 사정 없이 찌푸려진다. 오, 분명 이런 내 꼴이 웃겨 죽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로키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야, 대체… 와우, 믿기질 않는데. 그 머저리 같은 표정은 대체 뭐냐? 얼른 말해 봐, 애송이."

"…무엇을?"

"모르는 척하지 마라. 응? 나 없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네 형이랑."


이왕 기회를 잡은 거, 본론은 빠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로켓이 제 코끝을 쓱 비볐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나불거리고도 남았을 로키의 입은 육중한 돌문마냥 꾸욱 닫혀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는 날선 긴장감이 흘렀다. 그럼에도 로켓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몰아붙이다가 제대로 역효과가 나는 것을 그는 이미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살짝 벌어진 그의 빛 바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았다.


"…내가 지금 그 얘기를 너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왜냐고?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니까!"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게 이랬다면 난 진작에 그의 가슴팍에 단검을 박았을 거야. 내게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난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잔말 말고 앉아 봐, 애송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막 일어서려던 로키를 향해, 어느덧 척하니 팔짱을 낀 채 그를 올려다보던 너구리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그렇게 위악 떠는 거, 난 전혀 안 무섭거든? 차가운 두 시선이 서로를 마주했다. 무엇이라도 캐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로켓의 갈색 눈 너머에는 아무 것도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상대방을 쏘아보던 로키가 다시금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내내 손장난을 치던 그의 길고 얇은 손가락이 텅 비어 있는 술잔 근처에서 맴돌자, 눈치 빠른 너구리는 즉시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들이키고 나서도 로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 뭔가를 망설이고 았는 듯, 다시금 비어버린 제 잔의 입구를 만지작거리는 로키를 향해,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로켓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 사실은 네 형 안 싫어하잖아!"


그와 동시에 거진 내용물이 다 비어버린 술병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쳐진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로켓을 바라보는 로키의 얼굴은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핏기가 가신 채였다. 그래, 이게 목적이었군. 내내 감춰 두었던 제 안의 무언가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분에 찬 콧김을 뿜는 너구리를 향한 로키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장담해?"

"딱 봐도 보이거든, 멍청아?"

"오, 그래? 미안하지만 토끼. 그건 네 착각에 불과해.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해도, 그건 토끼 너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지. 네가 언급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야. 알아듣겠어?"

"개소리하고 있네. 아우 씨, 그럼 티를 내지 말든가!"


이 새끼가 진짜 나 돌게 만드네. 이성을 잃은 로켓이 있는 대로 언성을 높인다. 


"그러셔? 그럼 한 번 어디 한 번 말해 봐, 이 멍청한 거인아. 너 그럼 그 얼음 땅에서 토르랑 만나자마자 둘이 키스는 왜 했는데?"

"…!"


억지로 유들유들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던 로키의 표정이 순간 미세하게 굳어졌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장난이었어."

"뭐?"

"오랜만에 형을 만나서, 그래서… 잠깐 장난을 친 것뿐이야."

"와우, 그러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냥 도망치겠다 이거지? 피식 웃은 로켓이 대놓고 빈정거렸다.


"이왕 변명을 할 거라면 좀 성의 있게 할 생각은 없냐? 세상의 그 어떤 형제도,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장난이든 뭐든 그렇게 진하게 입술을 부비진 않거든? 심지어 한 놈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전적이 있더라도 말이야!"

"…"

"게다가 너도, 토르도! 둘 중 누구도 서로를 거부하지 않았잖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너희 주위에 누가 있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이더구만. 아주 끈적끈적해서 보는 내가 낯이 간지러울 지경이었지. 애한테 교육적인 환경은 전혀 아니었다고! …야. 서어어얼마, 이래놓고 설마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할 셈은 아니지?"

"…"

"그러니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변명을 좀 궁리해 봐, 이 머리 나쁜 사슴뿔 애송아. 대체! 그렇게 서로 좋아 죽던 놈들이 왜 자기네 동네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시들시들, 다 죽어가는 이파리처럼 구는 건지! 난 꼭 좀 알아야겠으니까… 빨리 말 해. 내가 없는 사이에, 너 대체 네 형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를 향한 너구리의 힐난이 거세지자, 다시 한 번 제 눈앞의 술잔을 들이킨 아스가르드의 왕제가 조금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기 전에는 도망을 칠 수도 없어 보였다. 대체 사방에서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걸까. 로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게 주어진 고통은 여기 오기 바로 직전까지 생생하게 자신을 옥죄고 있던 마음 속의 짐들로 이미 충분하다 여겼는데. 잠시 두통이 가라앉았던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지쳤다. 지금만큼은, 그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로키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목소리가 있었다. 


'아니, 생각해 봐,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네 고통에 대해 알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안 그래?'


저 짐승은 토르와 네 사이에 벌어진 장난에 대해 아무 것도, 정말 털끝만큼도 모르고 있잖아. 그러니 저렇게 네게 화를 낼 수 있는 거겠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자, 로키. 너도 한껏 기세가 올라 있는 너구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잖아? 그렇지 않아? 그의 마음 속 장난의 신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럴 때의 로키는 내면의 충동에 번번이 굴복해 장난의 신으로서의 제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하곤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 주지. 다시금 표정을 정돈한 로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까지 알고 싶다면… 토끼. 형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감당할 준비는 돼 있나?"

"물론이지! 젠장, 이렇게 쉽게 불 거면서 왜 이렇게 폼을 잡는 건데? 뭐든 좋으니까 말해 봐. 대체 뭐길ㄹ…"

"잤어."

"…뭐?"

"잤다고. 토르랑."

"…"


로켓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람? 지나치게 담백한 로키의 말투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망가지고 녹슨 기계처럼 굳어 있던 그의 머릿속이 이내 다시금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토르한테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잠깐만. 그럼 이미 둘이서 그… 짓을 했다고? 그럼 벽장 속 저 겁쟁이는 왜 저렇게 꼬리를 말고 낙담해 있는 건데? 토르의 성격 상, 애송이한테 강제로 뭔가를 하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저 놈이 저렇게 덤덤하게 말하지도 않았을 거고. …대체 뭐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잠시 난장판이 된 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로켓이 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 로켓을 바라보는 로키의 시선은 서늘했다. 혼란에 빠진 너구리의 모습은 제가 기대했던 것 그 자체였다.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함께 자라 온 형과 밤을 보낸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오, 아니,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토르도…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겠지. 누군가에게 경멸받는 토르를 떠올리자, 순간 누군가가 제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빈정대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 로키. 기분 좋지 않아? 넌 바로 이런 걸 보고 싶어했던 거잖아. 제 가슴 속에서 다시금 들려온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애써 꾸욱 누르며, 로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예상대로군, 토끼. 이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어."

"…"

"그래, 네가 떠나기 전에 난, 그… 빌어먹을 내 형이랑 잤어. 우린 아주 '뜨겁고 끝내주는' 밤을 보냈다고.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 잠깐, 잠깐만. …애송이,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필요까진 없어. 대충 상상이 가니까 말야."

"…?"


뭐지? 이번은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좀 달랐다. 격렬하게 손사래를 치는 너구리를 바라보는 로키의 녹색 눈이 이채를 띄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냉소를 되찾은 그의 녹색 눈은 평소와 같았다. 우아하게 한 쪽 눈썹을 찡그린 로키가 말했다.


"맞아. 형과 나 사이에 있었던 건 '그 빌어먹을 밤' 하나뿐이야. 아마 그럴 걸?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나?"

"…아마아아아아?"


분명히 그 뒤에 무언가 더 이어질 게 있지 않느냐는 무언의 압박을 담아 너구리가 반문했지만, 거만하게 턱을 쳐든 아스가르드의 왕제는 딱히 그의 뜻대로 따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 설마 그 뒤의 에필로그까지도 욕심이 나는 거야? 토끼, 말하면 이해할 수나 있겠어?"

"와우, 사슴뿔 애송이. 너… 진짜 밥맛 없다. 진짜로."

"알아. 그러니 이만 하는 게 어때?"

"아니, 난 아직 안 끝났는데? 네 그 꼬라지가 고작 그거 하나 때문일거란 생각은 안 들거든."

"뭐… 그래, 좋아. 한 번 관대해진 거, 조금만 더 아량을 베풀도록 하지. 이런 시간도 간만이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어디 한 번 실컷 물고 늘어져 봐."


네가 원하는 대답을 순순히 줄 생각은 없어. 여유롭게 다리를 꼰 채 제 몫의 술잔을 들이키는 로키의 옆선은 제가 봐도 꽤나 괜찮았다. 피도 안 섞인 주제에 둘 다 외모는 꽤 괜찮단 말이지. 투덜거리던 로켓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쩄거나 의외로 일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물론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는 꽤나 놀라웠지만, 그것이 로켓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좋아, 이왕 시작된 거 캐낼 수 있는 만큼 캐내 주지 뭐. 아오, 더듬이 달린 여자애 도움 받았으면 훨씬 더 쉬웠을 텐데! 로켓은 토르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굳게 마음을 먹은 너구리가 다시금 의자 위에 폴짝 올라앉았다. 그의 갈색 눈이 얼핏 예리하게 빛났다. 눈앞의 이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산더미였다. 나머지는 그렇다 치고, 얼마 전에 치른 전쟁의 시작부터 한 번 물어볼까. 의자를 끌어당긴 로켓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하나만 묻자, 애송이. 너… 그 얼음 땅에는 왜 갔냐?"

"…요툰헤임을 말하는 거야?"

"어."

"오, 처음부터 정곡을 찌르는군. …토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한, 가장 솔직한 답을 원하는 거겠지?"

"아이 씨, 당연한 거 아니냐?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너랑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겠어?"

"좋아, 그래. 음…"


근데 대답하기 전에 뜸은 좀 작작 들였으면 좋겠는데. 로켓이 그렇게 생각하던 무렵,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은 로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날… 때문이지."

"그 날? 언제? 너랑 토르랑 잔 날?"

"그래."

"엥? 왜?!"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뭐… 어차피 내가 형을 배신한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 정도의 장난도 치지 못할 이유가 뭐지?"

"아니, 야. 그래도… 장난이라기엔 규모가 너무 큰 거 아니냐? 타노스와의 전쟁에서 탈출한 지 얼마 안 된 니네 나라가 또 전쟁에 휘말릴 뻔했다고!"


얘 진짜 막 나가는구나. 어이없어하는 로켓의 반응을 지켜보던 로키가 말없이 제 두 손을 만지작거린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져 있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다시 한 번, 이 우주에 전쟁이 일어날 뻔하긴 했지. 그렇긴 했어."

"…나 지금 미사일 딱 한 대만 쏴도 되냐? 딱 한 대만."

"음… 아, 너와 네 친구들을 그 곳으로 불러들인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같은 걸 기대했다면 빨리 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토끼."

"아니다, 두 대만 쏠게. 어차피 애송이 넌 그거 맞아도 뒈지지도 않을 거잖아. 응?"


망할, 라바저스 함선에서 탈출하려는 계획 짰을 때의 욘두가 이런 심정이었나? 사납게 엄니를 드러낸 로켓이 제 총을 꺼내들려던 무렵,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한 말은 조금 의미심장했다.


"어차피 그 멍청이도… 내게 마음 따윈 없을 텐데. 고작 이 정도의 장난이 토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뭐? 잠깐, 애송이 너…"

"그런 게 아니었다면… 망할 폐하가, 그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날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팽개쳐 두진 않았을 테지. 안 그래?"

"야, 너… 그니까…"

"뭐, 이젠 다 상관없어. 토끼, 난 내 처지를 아주 끔찍하게 잘 알고 있거든. 왕의 동생은 이제, 명백한 아스가르드의 반역자야. 심지어 이미 한 번 무너졌던 나라를 재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버리고 몇천 년 간 앙숙 관계였던 서리 거인들에게로 간… 몹시도 배은망덕한 배신자일 뿐이지. 그러니 아마 토르는 이 지긋지긋한 동생을 과연 어떤 방법으로 처분해야 전 우주에 본보기가 될지 그걸 고민하느라 바쁠 테고… 당연히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선 개미 발톱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걸?"

"…음?"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잠잠하던 제 방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로켓이 눈을 껌뻑였다. 문제는 그 소리를 자신만 들은 게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토르, 이 멍청이가! 무언가 심상찮음을 감지한 듯 한 쪽 눈썹을 찡그린 로키가 다시금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로켓이 솜씨 좋게 아까 하던 대화로 그의 관심을 돌렸다.


"글쎄… 네 말을 들어봐도 역시 난 잘 모르겠어, 애송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지금 네가 토르를 피해다니고 있다는 거야? 말도 안 돼. 평소에 네가 하고 다녔다는 짓하고는 전혀 맞질 않잖아?"

"오, 물론 설마 내가 고작 내 처지 하나때문에 형을 피해다닐 리는 없지."

"그럼 뭐 때문인데?"


…젠장, 그냥 거짓말을 해야 했는데!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받자, 순간적으로 다시금 로키의 시선이 흔들렸다. 내내 부산한 그의 손가락은 도통 그 움직임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로키가, 이윽고 조심스레 다물려 있던 입술을 떼었다.


"음, 그러니까… 토르 얼굴을… 못 보겠어."

"왜?"

"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을… 하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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